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62화 (62/298)

62화. 카간의 군막

“금주를 포위한지 일 년 하고도 반이 지났다! 진작 성을 떨어뜨렸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았느냐!”

다시 한번 신분을 증명하고 겨우 들어간 거대한 군막에는 고성이 감돌고 있었다. 들어가자 보인 장면은 황색 비단으로 덧댄 투구를 손에 든 자가 갑옷 두른 장군들을 마구 갈구는 모습이었다.

“조대수가 지키는 금주성 성벽은 견고하고 성안의 군량은 넉넉합니다! 홍이포로도 타격이 가지 않는 성벽이니 참호를 파고 포위하는 것 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카간! 오히려 물자가 부족한 것은 우리 쪽입니다! 포위를 풀고 단기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적의 거대한 병력이 강 너머 유봉산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너희들도 눈이 있으면 보일 것이 아니냐! 포위망을 풀고 협공당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카간이라 부르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이 바로 청 황제 홍타이지인 모양이지.

그가 쏘아붙여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서웠다. 험악한 무장들도 그의 말 한 마디에 맥을 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르갈랑! 네놈이 적에게 당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여기까지 행차할 일은 없었다! 아무리 적이 많다고 해도 대청의 친왕이라는 놈이 그토록 무력하게 당한단 말이냐!”

“카간, 잠시 노기를 거두시지요, 고려국 세자가 들었습니다.”

“세자? 옳거니, 마침 잘 왔다. 그자를 내 옆에 들라 하라!”

무슨 일이지? 영문도 모르고 군막의 한가운데로 세자와 함께 끌려들어 갔다.

그 와중에도 황제의 반쯤 감긴 것 같은 눈은 계속해서 세자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방금 들은 대화를 세자에게 통역하면서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병자년 이래로 너희는 우리의 신하국이 되기로 맹서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허나 수차례 카간으로서 한조(漢朝)를 정벌할 것을 도우라는 명을 내렸음에도 네놈들은 계속 핑계만 대 오던 참이다. 기억하느냐?”

“폐하, 그것은 아국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시끄럽다! 당장 임경업이라는 자가 병력을 끌고 왔을 때에도 무성의하게 싸우더니, 이번에 온 유림이라는 자는 또 어떠하냐? 병이 걸렸다는 핑계로 전장에 잘 나서지도 않을뿐더러 포수들에게 공포를 쏘라는 지시까지 내렸더구나!”

역시 그 문제였는가.

아직도 명나라를 마음으로 따르는 자들이 보낸 원군이니, 청나라를 위해 제대로 싸울 리가 없었다. 백성들의 속환을 당근으로 내걸었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일지도.

임경업은 심양으로 오는 길에 만난 적이 있었다. 세자의 행차가 안주에 다다랐을 때 평안병사로서 마중 나온 그를 보았던 것이다. 세자가 내리는 상비약을 받는 그의 눈빛에 비통함이 흘러넘치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청에 대한 원한이었던가.

“고려국 세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라! 고려병들을 내 지휘 아래 넣을 것인지, 세자가 직접 지휘하여 대청국이 베푼 은혜를 갚을 것인지!”

분노에 가득 찬 홍타이지의 전언을 듣고도 세자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울화 때문에 뭉개지고 빨라진 발음 탓에 세자는 황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저하, 아무래도 평안병사가 군 지휘에 소홀했던 것 같사옵니다. 황제께서 우리 병력을 넘기든가, 저하께서 직접 지휘하라는 명을 내리셨나이다. 어찌 하시겠나이까.”

“그것이 사실이냐?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조선군 지휘권을 저들에게 넘겨주면 그들은 험악한 전장에 몰아넣어져 파리 목숨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선 경험이 없는 세자가 갑자기 지휘관 역할을 할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세자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황제가 말한 것을 세자도 들었을 것이다. 너희의 포수는 쓸 만하니 중한 곳에 쓰겠다는 그 말을.

“고려 세자는 어서 폐하의 말에 대답하시오! 카간께서 기다리시고 있지 않소!”

심양관 생활 초반, 용골대와 함께 뻔질나게 심양관을 드나들며 삥을 뜯어가던 놈이 이 자리에도 있었다. 호가호위라 했던가, 조선 놈이 황제의 위세를 빌려 감히 세자를 독촉하다니. 근본 없는 놈 같으니라고.

역관 정명수.

쥐새끼를 닮은 놈의 면상이 역겹게 느껴졌다.

이제 만주어에 능통한 내가 있으니 역관을 둘 필요가 없었음에도 나와 세자 사이에 오가는 말을 감시하기 위해 둔 것이 분명했다.

“저하, 소인이 생각하기로는 지휘권을 넘기는 일만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옵니다. 이천오백 우리 군의 목숨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이 될 것이나이다,”

“알고 있다. 그렇다고 병법에 무지한 내가 지휘하게 되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아니겠느냐. 어찌 해야 할지…….”

“그래도 하셔야 하옵니다. 저 말은 곧 평안병사 유림이 힘껏 싸우도록 저하께서 명하라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저하께서 직접 지휘하신다면 병사들의 사기 또한 높아질 것이옵니다.”

“좋다. 너도 병서를 조금 읽은 걸로 아는데, 네 도움을 받는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세자는 군을 직접 지휘하겠다는 뜻을 홍타이지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코웃음을 치며 사태는 일견 진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황제가 내관들을 시켜 탁자에 펼쳐져있던 지도를 들게 하고는 세자를 향해 질문을 던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현 시간부로 지휘관이 된 고려국 세자는 의견을 답하라. 현재 금주를 포위하고 있는 우리 병력은 오만 가량, 적의 병력은 원군까지 합쳐 십삼만이 넘는 대군이다…….”

소릉하라는 강을 끼고 있는 금주를 청군이 세 겹 참호를 파고 포위한 상태였는데, 강 건너 유봉산에 명나라 병력이 진지를 세우고 속속들이 합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성 안의 병력과 원군을 합쳐 포위망을 부술 생각인 것이 뻔했다.

“적장 홍승주는 군을 다룰 줄 아는 자라고 들었다. 성을 끼고 정면으로 싸우면 승산이 없을 것이다. 고려국 지휘관은 어떻게 해야 이 전장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세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황제가 갑작스레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고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터였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지휘권을 박탈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나를 따라온 호포수들의 피 같은 목숨도 험지에 꼴아 박힐 것이었다. 아무 말도 잇지 못한 세자 대신 내 입에서 답이 나간 것은 잠시 후였다.

“폐하, 고려국 지휘관의 부관 자격으로 대신 답을 해도 되겠습니까.”

“뭐냐, 너는? 역관이 아니었느냐? 고려인 부관이 어찌 우리말이 이렇게 유창하단 말이냐?”

“고려국 시강원 자의 직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짧은 소견을 올려보아도 되겠습니까.”

“고려국 자의? 들은 기억이 있는데…… 아아, 도르곤에게 들었었다. 네놈이 도르곤이 말하던 그놈이냐?”

어딜 감히 나서느냐며 호통을 들을 것을 각오했는데, 다행히 유창한 만주어 실력 덕분에 황제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얼떨결에 잡았던 도르곤의 연줄은 금동앗줄이었다.

“좋다. 한 번 대답해 보거라. 하지만 벌을 면하려 아무 말이나 했다가는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식은땀이 흘렀다.

극형을 내리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심양에서 목숨을 잃은 재신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세자의 손이 내 옷자락을 잡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역관 정명수는 오히려 무슨 좋은 구경이라도 난 것인지 실실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놈의 비리를 고발했던 시강원의 전임자가 오히려 무고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것을 세자에게 들었던 터였다. 옷을 벗어서 그들의 시체를 감싸주던 이야기를 꺼내는 세자의 눈에는 핏발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앞에 선 홍타이지가 이 금주 땅에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나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다 이거야.

덕분에 혀는 더듬는 일 한 번 없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언제든지 내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자의 앞에 서 있었음에도 긴장 대신 묘한 열기가 몸을 타고 흘렀다.

“손자가 이르기를 약소한 군대가 적을 맞아 견고하게 싸우기만 하면 강대한 적에게 포로가 될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일은 하책 중의 하책입니다.”

“기본은 알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은 전투를 피할 명분일 뿐, 전투를 이길 계책이 아니다.”

“적은 강대해보이나 제가 적의 형세를 둘러보았을 때는 분명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공략하면 필히 이길 수 있습니다.”

반쯤 감겨있던 홍타이지의 눈이 조금씩 열리는 것이 보였다. 내 옷자락을 잡은 채 부들거리던 세자의 손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약점이라 했느냐? 흥미롭구나, 그 약점이 무엇이냐?”

“적군은 이 금주 땅에서 아군의 주력을 깨부수고 뿌리까지 파내기 위해 거의 전 병력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간과하게 되었습니다.”

“적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라?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

“보급입니다. 폐하.”

방금 분명 황제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호포수들과 사냥을 나갔을 때 봤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적군으로 하여금 전후방의 부대가 도울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금주성을 포위하고 있는 병력을 빼내서는 아니 됩니다.”

“즉, 내가 이끌고 온 정예 기병으로 적의 보급로를 끊자는 말이냐?”

“적 역시 급히 구원하러 나온 처지일 터. 적의 군량이 쌓여있는 금주성을 이대로 포위하고 후방 보급로만 차단하면 저절로 굶어 지칠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무엇이냐?”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적은 금주의 포위를 풀기 위해 유봉산에 거의 전 병력을 동원중입니다. 이는 금주성을 방어하는 병력과 협공할 의도인 듯하나, 대신 후방의 방비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져 있을 것입니다.”

“마치 적의 형세를 직접 보고 온 것처럼 말하는구나.”

엄포를 놓던 황제의 말투는 이미 반쯤 풀어져 있었다. 나도 덩달아 긴장이 풀릴 뻔했으나 겨우 긴장의 끈을 조였다. 후, 큰일 날 뻔했다.

“적도 간자를 풀었을 터, 그들 역시 아군의 열악한 보급 상황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아군이 단기전에 목숨을 걸 것이라고 판단하고 상대적으로 보급을 소홀하게 여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군의 보급 상황이 열악한 것은 네가 어찌 알고 있느냐?”

“군막에 들어서면서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심양관이 스스로 식량을 조달한다고 나섰을 때 도르곤이 반겼던 이유가 있었다. 이 자들이 조선을 무릎 꿇린 이유도 조선을 후방 조달기지로 쓰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매번 큰 규모로 물품들을 뜯어갔겠지.

거기에 덧붙여, 당시 명의 상황 역시 내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명 황제 숭정제가 적의 사령관 홍승주에게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청군을 격멸하라 몰아붙인 탓에, 그는 세세한 준비도 못한 채 포위된 금주를 구원하러 출동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고려에 요구하는 물품들에서 오히려 상황을 추론했다……. 너희 고려놈들은 옳다 생각하는 말을 하는 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구나.”

“대청국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아국에서는 듣기 좋은 말보다 군주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자를 충신이라고 여깁니다.”

“저번에 병자년의 일로 끌려온 김상헌이라는 자도 그랬었지. 너 부관, 이름이 무엇이냐.”

“안한수라 합니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황제였다. 그러나 그의 매서운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해 꽂혀 있었다.

올해 초 심양으로 끌려왔던 전 예조판서 김상헌을 국문하던 자리에는 나도 있었다. 죄를 묻는 말에도 태연자약하던 그였다. 오히려 곧 죽을 사람이 애걸한다고 살 수 있겠냐며 냉소하는 모습에 청인들마저 감탄을 마지않을 정도였으니.

그는 척화파의 거두였으나 그 선비다운 모습에는 나도 감동을 받았었다. 아마 이 자리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은 그런 그의 모습을 미리 봤기 때문일지도.

“좋다. 안한수. 거기까지는 짐의 생각과 같았다. 그렇다면 이 세 줄기의 보급로 중 어디를 끊겠느냐?”

홍타이지는 추가 설명 없이 대뜸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보급로를 파악하는 것마저 시험의 일종인 것인가.

세 줄기라.

지도를 살펴보니 유봉산에 위치한 적 병력이 보급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세 종류가 맞았다.

금주에서 보급받는 법, 배로 소릉하를 거슬러 올라 지원받는 법, 그리고 영원성부터 줄줄이 위치한 후방 요새들로부터 지원받는 법.

“두 곳은 끊기 쉬워 보이고, 한 곳은 끊기 어려워 보입니다. 맞습니까?”

“역시 군략을 보는 눈이 있는 모양이군. 그래, 소릉하 하구는 아군이 차단하고 있고, 금주 또한 포위를 풀지 않을 것이다.”

“적이 그것을 알아챘다면 두 길로 보급을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 하나는…….”

유봉산에 주둔 중인 적의 배후 보급로를 끊자는 이야기였다.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한 등산은 언제나 망하기 마련이었다. 명나라가 망한 이유가 다 있었다.

생각해보면 사르후 전투 때도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패해 충신의 조부를 역적으로 만들었던 놈들이었다. 이상할 것도 없나.

“적군이 모여 있는 유봉산은 분명 금주를 포위하고 있는 아군을 내려다보기 좋고 소릉하를 끼고 있어 방비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이나, 거꾸로 말하면 후방이 막히면 그대로 사지(死地)로 변할 것입니다.”

“그렇다.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 같은 말이었다. 그렇다면 너희 고려군은 무엇을 하겠느냐?”

이 전장에서 곧 벌어질 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전투가 리스크는 낮고 리턴은 엄청나게 큰 전투가 될 것이라는 것 역시. 그렇다면 배팅은 최대로 땡기는 것이 순리렷다.

“폐하께서 저희 포수들을 높게 평가하시니, 그들을 써서 계책 하나를 써볼까 합니다.”

※ 작가의 말

실제로 조선군이 청군을 따라 종군했던 금주·송산 전투에서 조선군이 탄을 넣지 않은 포를 쏘고, 명군쪽으로 공격을 소홀히 한 것을 청측에 들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포수와 군관 몇의 목이 날아가고 지휘관 교체를 요구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홍타이지가 이끈 청군의 진격로와 글에서 언급된 지역의 위치를 간략하게 백지도에 표시해보았습니다. 글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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