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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63화 (63/298)

63화. 세자 저하의 연설

그렇게 갑작스러운 브리핑을 마치고 군막을 물러나온 것은 한참 후였다. 내 답변에 흥분한 탓인지 다시 코피를 흘려대던 홍타이지에게 뜻밖의 상까지 받아 나오는 길이었다.

그 자리에서 오갔던 대화를 다시 조선말로 전해들은 세자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덕분에 살았다, 안 자의. 어떻게 네게 감사를 표해야 한단 말이냐.”

“저하, 방금 소인이 주제넘었던 일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주제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자리에서 청주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었다가는 큰일이 났을 것이다.”

“청주가 제 답변을 그렇게 중히 들을 줄은 저도 미처 알지 못했나이다.”

거짓말이었다. 미래를 알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홍타이지 자신이 품은 뜻과 같은 의견을 폈기에 무탈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덤으로 받은 상은 꽤나 무거운 것이었다. 내가 군막에서 눈높이로 받쳐 들고 나온 물건을 보자마자 수문장이 바로 길을 열어줄 정도였으니.

“나오기 전에, 청주가 예친왕에게 너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짚이는 것이라도 있느냐?”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무장들 중 소인과 가장 많은 접촉을 가졌던 자가 예친왕이 아니겠나이까. 사소한 궁금증이라도 생긴 모양이옵니다.”

“그 자리에서 청주가 허리에 찼던 칼을 끌러 내주다니, 네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일까.”

“아마 저하께서 조선군을 뜻대로 지휘해보라는 뜻이 아니겠나이까.”

홍타이지에게 하사받은 물건은 칼코등이에 정교한 금동제 꽃문양이 조각된 요도였다. 황제는 내 답변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평안도에서 끌려온 병졸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냐.”

“아니되옵니다, 저하. 지금은 지켜야 할 때가 아니라 선봉에서 나아가 싸워야 할 때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안 자의. 우리 백성을 사지에서 끌어내기 위해 청주에게 대답했던 것이 아니란 말이냐?”

“험지로 들어가는 것이 도리어 백성을 살리는 일이 될 것이나이다.”

“어째서?”

세자는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오만 명 대 십삼만 명의 대결에서 열세인 측의 선봉을 굳이 맡는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긴 하겠지.

“저하, 이번 싸움은 열세로 보이는 청국이 오히려 대승을 거둘 것이나이다. 그걸 알기에 굳이 선봉을 맡아야한다 직언을 드리는 것이옵니다.”

“그래, 아까 청주와 나눈 이야기가 그대로 이뤄진다면 안 될 일도 아니다. 허나…… 아니다. 네 뜻대로 하자.”

“저하?”

세자의 납득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천천히 설득시킬 생각에 골몰해 있던 내가 잠시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심양에 온 이후로 네 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청국이 식량 보급을 부담스럽게 여길 것이라는 예측부터 사하보에 심어야 할 곡식까지 말이지. 거기다 내 건강까지 되찾아준 네가 아니냐.”

“…….”

“이번에도 마치 청주의 속을 들여다 본 것처럼 위기에서 나를 빼내 준 너다. 이번에도 믿는 것이 옳겠지.”

군막을 향해 앞서 걷다가 나를 흘긋 뒤돌아본 세자였다. 어느새 예리해져 있는 그의 눈빛이 내 얼굴에 꽂혔다.

“네 뜻대로 해 보거라. 평안병사 유림이 싸우지 않으려 하거든 내 직접 그의 뜻을 꺾겠다.”

“저하!”

“내 분명 네가 도깨비여도 품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토록 유능한 신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번에도 분명 네가 말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겠다.”

품에 든 마패가 두근거렸다. 이토록 중요한 일을 나에게 완전히 맡기다니. 윗사람이 전적으로 믿어준다는 게, 이렇게 가슴 떨리는 일인지 미처 몰랐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다시 등을 돌린 채 조선군 군막으로 향했다. 세자의 말에서 가벼운 웃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핫핫. 황제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뜻을 펼치는 자를 품으려면 내 얼마나 더 큰 그릇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저하.”

“허나 안 자의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 말과 함께 갑자기 세자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절대 네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너는 조선의 신하이고, 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저하, 혹시 소인을 청의 세작으로 의심하시는 것이나이까?”

“세작? 안 자의도 농담을 잘 하는구나. 지금까지 이렇게 말한 자를 세작으로 어찌 의심하겠느냐. 그러나…….”

황제의 군막에서 벗어나 인적이 꽤 드물어져 있었는데도 세자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도대체 왜?

“혹여나 청인들이 너를 포섭하더라도 절대 넘어가서는 아니 될 일이다. 그것을 이 자리에서 나와 약조하거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하. 청인들이 소인을 포섭하다니요.”

순간 떠오른 것은 군막 안에서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나를 노려보던 칸이었다. 설마 칸씩이나 되는 사람이 고작 소국의 하급 관리를 포섭하겠어.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나도 그것이 기우이길 바란다. 허나 너를 바라보던 청주의 눈빛을 보고 너 역시 느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하오나 저하, 청주가 잠시 품었던 눈빛일 뿐입니다. 지나친 걱정이 아닐지…….”

“너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몰랐겠지만, 그동안 청주와 예친왕의 시선은 계속해서 너를 향하고 있었느니라. 부디 더는 그들의 눈에 띄지 말거라.”

그저 이 자리에서 더 이상은 나대지 말란 부탁인가. 하긴, 이 이상의 사태가 벌어지면 수습이 곤란할 참이었다.

세자의 말은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임시로 만든 연단에 발을 딛고 올랐다. 그동안 삽질에 한껏 단련된 호포수들인지라 가마니에 흙을 담아 쌓는 것 역시 번개 같았다. 내 앞에는 이천오백 조선 장졸들이 도열해 있었다.

“나는 세자 저하의 명을 받들어 이 자리에 올랐다! 용맹한 조선의 병사들은 듣거라!”

세자라는 단어가 나오자 군졸들 사이에서 작게 웅성임이 일었다.

결국 세자가 내린 명에 뜻을 꺾은 평안병사 유림이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세자가 전장까지 왔으니 싸우지 않을 수 없겠지. 어제는 세자와 대군이 머무는 군막 옆에 금주성에서 쏜 포탄이 떨어지기도 한 마당이었다.

‘X발…… 눈에 띄지 말라면서 이런 건 또 시키네.’

눈에 띄지 말라는 세자의 지시는 청나라 사람에 한정되었던 것인가.

내가 남의 나라에서 이런 짓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한양에 있는 대사간 영감 귀에 들어가면 뒷수습이 어려울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심양에 온 내내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지시를 어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제발 평안병사가 올릴 장계에 내 이야기가 없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희가 오랑캐에게 품고 있는 마음은 나 역시 뼈저리게 알고 있다! 병자년에 있었던 치욕을 잊은 자, 이 자리에 있느냐!”

“없습니다!”

수천의 목소리가 벌판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렇다면 임진년과 정유년에 대명국에 입은 은혜를 잊은 자, 이 자리에 있느냐!”

“없습니다!”

그래도 나름 조선군 중 정예병을 끌고 온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조금 더 쉽게 풀려갈 것이다.

“……분하지만 오늘은 임진년의 것도, 정유년의 것도, 병자년의 것도 잠시 잊어야 할 것이다!”

반응이 없었다. 치욕과 은혜를 갑자기 잊으라니 당황스러울 법도 하겠지.

“이 자리에 세자 저하께서 직접 와 계시다! 너희는 그 이유를 아는가!”

그제서야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웅성거림을 뚫고 손을 든 것은 웬 하급 군관의 차림새를 한 자였다.

“묘동권관 김성일입니다. 세자 저하께서 이 금주 땅에 오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이다. 나는 저하를 시강원에서 보위하는 자의 안한수다. 질문이 있는가?”

홍타이지가 급하게 원군을 이끌고 나왔던 탓에 세자가 종군 중이라는 사실은 아직 금주에 주둔한 조선군에게까지 알려지지 않은 듯했다.

군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다. 그 목소리 탓인지 찬물을 뿌린 것처럼 웅성거림이 잦아든 이 자리에는 나와 군관의 목소리만 울렸다.

“심양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이 전장에 오신 것입니까? 천군의 군세가 심상치 않아 위태로운 땅입니다!”

“바로 맞췄다. 이 금주 땅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녹색 두정갑을 차려입은 권관의 눈이 흔들렸다.

“청주는 청병과 몽고병중 십오 세 이상인 자를 모두 동원해 전장으로 달려왔다! 우리 백성 중에서 심양에서 사냥꾼 노릇을 하던 자들까지 모두 끌고 온 것이다!”

“…….”

“너희가 지난날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온 힘을 다해 싸우지 않은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하냐! 심양에서 볼모로 고생하시던 저하까지 이 사지(死地)로 끌려 나오신 것이다!”

병사들 사이가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한양에서 보았던 대로 타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세자에 대한 백성들의 감정은 각별할 것이었다.

그런 세자가 자신들 때문에 위험한 전장으로 끌려 나왔다니.

이윽고 앞에 서 있던 권관이 다시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에 실렸던 힘이 다소 잦아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저희를 힘써 싸우게 하려고 오랑캐들이 저하를 전장으로 끌어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이 칼이 청주가 저하께 내린 칼이다! 너희를 직접 지휘하고 싸움을 독려하라 내린 보도인 것이다!”

허리춤의 고리에 매달려있던 홍타이지의 보도를 뽑아 들었다. 칼의 날카로운 한쪽 날이 저물녘 노을을 받아 반짝 빛났다.

“세자 저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너희가 물러나면 저하께서 상처 입으실 것이고, 너희가 패배하면 저하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 정도면 됐다. 내가 이어서 하지.”

그때, 내 어깨에 와 닿는 손길이 있었다. 그 손길은 칼을 쥔 내 손아귀로 옮아가 홍타이지의 보도를 넘겨받았다.

약속했던 대로였다.

“저하!”

“세자 저하!”

세자의 상징인 검은 곤룡포를 알아본 군관들이 먼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조금 늦게 사태를 알아챈 병졸들은 파도가 일렁이듯 차례대로 무릎을 꿇었다.

“나는 조선국 왕세자 이왕이다. 용맹한 조선의 병사들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노라.”

“저하! 어찌 이런 자리에!”

“저하!”

방금 세자가 전장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허탈해하던 군관 중에는 울먹이며 등을 떠는 자도 있었다.

그것을 보니 군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던 세자를 설득한 보람이 있었다. 자꾸 빼기만 하던 주제에 정작 훌륭하게 임무를 해내는 세자가 조금 얄밉긴 했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안 자의가 한 말들은 전부 사실이다. 나는 청주의 명을 받고 너희를 지휘하러 이 전장에 왔다.”

“저하! 안전한 심양으로 귀환해주시옵소서!”

“저하께서 다치신다면 저희가 무슨 낯을 들고 조선으로 돌아가겠나이까!”

군관들이 울먹이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세자는 잠시 감정이 북받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열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여전히 유려했다.

“너희의 마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타국에서 볼모로 살아가더라도 세자로서 짊어져야 할 짐은 있기 마련이다.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전장에 나왔다.”

“저하!”

“청국에서는 너희를 힘써 싸우게 하지 못하겠거든 너희의 지휘권을 빼앗아 가겠다고 했다. 내 백성들의 귀한 목숨을 어찌 타국의 손에 맡기겠느냐.”

세자의 목울대가 침을 삼키고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내 백성을 청국의 손아귀에 맡기면 분명 그들은 너희를 사지로 몰 것이다. 그런 꼴을 보느니 너희와 함께 싸워 이기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저하! 하오나!”

“또한, 청국은 내가 지휘를 맡는 대가로 상을 약속했다. 너희가 올리는 전과대로 병자년에 잡혀간 우리 백성들을 풀어준다 하였다. 이것은 예친왕 도르곤이 굳게 약조한 바다.”

통곡하던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분명 호란 때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은 지금 이 군사들 중 대다수가 끌려온 평안도였다. 가족이나 친지 중 청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많을 것이다.

“일국의 세자로서 약속한다. 지금까지 내가 너희에게 고한 말 중 한 치도 거짓은 없다. 적의 수는 많다고 하나, 약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명을 받아 힘껏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

“저하!”

“내가 직접 전장에서 너희의 용맹을 지켜볼 것이다. 나를 위해, 조선을 위해, 잡혀간 동포들을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워라. 내 너희들 하나, 하나를 전부 기억할 것이니.”

세자의 칼끝이 앞으로 나와 있던 권관에게로 향했다.

“권관 김성일. 너는 이 전장에서 나를 위해 싸우겠느냐?”

“저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강계부사 김진이옵니다! 저도 저하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이동권관 남궁즙이옵니다! 목숨을 다해 힘껏 싸우겠습니다!”

그렇게 권관 김성일의 옆으로 수십 명의 군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건투를 다짐했다. 이천오백의 병사들이 세자를 부르짖는 소리에 천지가 흔들리는 듯했다.

그 모습에 세자는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좋다. 다들 내게 목숨을 빌려다오. 그리고, 무사히 돌아오라. 이 자리에서 빠짐없이 너희들을 다시 보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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