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금주 전역
적장이 쓰러지자 적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그대로 적의 후위는 무너져 달아났고, 전위는 날아드는 총탄에 목숨을 잃거나 목숨을 구걸하며 바닥에 엎드리는 자들로 가득했다.
역시 전근대의 전투에서는 장수 하나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사기가 꺾이고 지휘체계가 붕괴되면 웬만한 정예군이어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날아든 유시와 유탄에 스친 자만 몇 있었을 뿐, 아군의 피를 흘리지 않은 대승이었다. 인계받은 조선군 살수들은 호포수들의 신묘한 사격술에 대해 알아서 소문을 퍼뜨려 줄 것이다. 목표는 전부 달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길 내내 내가 느낀 감정은 기쁨과는 거리가 멀었다. 머릿속과 책상 앞에서만 생각하던 전쟁과 현실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내 총을 맞고 피를 뿜던 적의 모습이 눈동자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다른 전리품을 챙길 틈도 없이 딱 하나의 전리품만 챙겨들고 본대를 향해 박차를 가하는 내내, 그 모습이 나를 괴롭혔다. 흔들리는 말을 탔기 때문인지 속도 뒤집힐 것 같았고.
“잘 돌아왔다! 잘 돌아왔어! 참으로 다행이다!”
세자를 따라잡은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약속했던 집결지에 막 도착해 숙영 준비를 갖추고 있던 조선군 본대였다.
조선군 숙영지의 양옆으로 늘어선 청 팔기들의 깃발들은 멀리 보이는 유봉산을 감싸듯 배치되어 있었다. 누런색, 흰색, 남색, 색색으로 물든 깃발들에 시야가 순간 어지러워져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런 나를 붙잡아 준 것은 내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군막에서 달려 나온 세자였다.
“약속대로 무탈히 돌아왔사옵니다. 저하.”
“내 그렇게 너를 보내고도 가슴을 졸였던 터다. 일단 군막으로 들거라. 보고는 그 후에 받도록 하겠다.”
발을 땅에 붙이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덕분에 세자의 손에 이끌려 군막으로 들어가면서 겨우 뒤를 따르던 김 갑사에게 눈짓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전과를 보고받은 세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곧이어 도착할 살수들이 끌고 올 명군 포로가 스물 하나, 쏘아 쓰러뜨린 자는 세지 못했으나 붕괴되어 도주한 후위의 규모를 생각하면 수십 명은 족히 쓰러뜨렸을 것이다.
그런 전과를 올리고도 눈 먼 화살에 얕은 찰과상이나 자상을 입은 자를 제외하면 아군의 희생은 없다시피 했다.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 평안병사 유림의 눈빛도 보고가 끝나고 나서는 달라진 것이 보였으니까.
“저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옵니까?”
“평안병사는 모르겠지만 안 자의가 끌고 온 병력들은 정예 중의 정예다. 들고 있는 조총 역시 개량을 거친 물건이지. 나도 이렇게까지 뛰어난 활약을 보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세자의 말을 들은 유림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이제 문신이라고, 품계가 낮다고 무시당할 일은 없으려나?
“아니면 그저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쫓아내고 전과를 위조한 것일지도 모르옵니다.”
그럴 리가 없지. 명국에 대한 은혜라는 핑계로 전장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은 꼰대가 갑자기 개심할 리가 없었다.
내가 발끈하려는 찰나, 세자가 손을 들어 나를 막았다.
“평안병사. 세상에 어느 패잔병이 압도적인 군세의 적에게 이빨을 드러내겠는가? 안 자의의 공을 굳이 깎아내리지 마라. 어차피 군공의 판단은 청국에서 할 일이다.”
“저하, 하오나…….”
이래서 높은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인가. 세자 덕분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그때, 출입을 아뢰는 경계병의 목소리와 함께 천으로 가려져 있던 군막의 입구가 활짝 열렸다. 그곳을 향해 뚜벅뚜벅 들어온 자는 익숙한 덩치를 지닌 자였다.
“나으리, 분부하신대로 붙잡은 포로를 군막으로 대령했습니다요.”
“잘 했네. 김 갑사. 이제 그 자를 내려놓아도 좋네. 저하께서 잘 보실 수 있도록 내려놓게.”
어깨에 꽁꽁 묶은 포로를 짊어지고 있던 김 갑사는 세자가 앉은 자리 앞에 포로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곧이어 미동도 없던 포로의 입에서 외마디 중국어 욕설이 흘러나왔다. 방금까지 기절해 있던 자였는데, 김 갑사가 깨운 모양이었다.
“선대 폐하의 은혜를 입은 조선 놈들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이 은혜도 모르는 버러지 같은 놈들!”
“명국의 장수는 욕설을 멈추시오. 조선국 세자 저하 앞이오.”
명의 말로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포로의 입이 곧 다물어졌다. 한양에서 외국어공부를 하느라 내내 구른 보람이 있었다. 아니면 그가 앞에 앉아있는 세자의 옷차림을 봐서일지도.
그는 충신의 편전(片箭)에 가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기절한 지휘관이었다. 운이 좋게도 화살을 맞은 부분이 가죽을 덧댄 부분이라 충격이 줄었는지, 놈의 숨은 붙어있었다.
세자에게 포로의 심문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얕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뒷목이 벌써부터 뻐근해져오는 것이 느껴졌다.
“귀관은 포로요. 귀관의 생사여탈권은 우리에게 있소. 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 당신도 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결사대가 시간을 끄는 동안, 홍승주 장군에게 보내는 장계를 품은 전령이 유봉산으로 들어갔으니까.”
포로로 잡은 명나라 장수의 태도는 거만했다. 아무래도 전역 초기에 청군을 연신 격파하고 유봉산까지 탈환했던 전과가 아직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듯했다.
역시, 백 명 남짓 되는 병력으로 조선군 본대를 들이받은 것은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나. 대화 내용을 전해들은 세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십삼만 대군이 유봉산에 주둔하고 있다더니,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구려.”
“나를 잘 대접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오랑캐들이 패하면 당신들의 목숨은 내 혀끝에 달리게 될 터이니.”
끝까지 오만한 태도를 꺾지 않는 명군의 장수였다.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는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군의 군세를 너무 과신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 오만이 내게 확신을 주고 말았다. 침묵이 웅변보다 낫다는 격언은 여기서도 유효했다.
“그렇소? 허나 그 말을 들으니 귀관의 혀끝에 우리 목숨이 결정될 일은 없어 보이는구려. 참으로 유용한 정보였소.”
“뭐요?”
실제로 명군이 유봉산 한 점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홍타이지의 군막에서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역사적 지식을 푼 것이라지만, 실제로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안감만 더해질 수밖에.
하지만 명군의 장수가 자존심이 상해 내뱉은 말이 내게 확신을 주었다. 막혀있던 속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굳이 결사대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적과 맞닿아있는 전방으로 전령을 보낸다? 내가 아는 병법에는 그런 수를 두는 법은 없었소이다.”
“그…… 그것은!”
“전령을 보낼 것이면 후방이 훨씬 용이할 것인데, 후방에 위치한 행산, 탑산, 영원에 구원을 요청하기는커녕 전방인 유봉산과 송산 방향으로 전령을 보냈다…….”
예상대로 명군은 후방에는 요새를 지키기 위한 병력만 배치하고 남은 병력을 전부 청군을 격멸하기 위해 전방으로 보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벌어질 일에도 차질은 없겠지.
현기증이 조금 가라앉자 시야가 명확해졌다. 투구가 벗겨진 장수의 결건(結巾) 아래로 땀방울이 하나 구르는 것이 보였다.
“귀관은 군막에 들어오기 전까지 정신을 잃었던 터라 상황 파악이 아직 되지 않는 모양이오? 전령을 보낸 장소는 이제 사지(死地)와 다름이 없을 것인데.”
“사지라니? 유봉산은 천혜의 요새다! 네놈들 군량과 마초가 떨어질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일이다!”
금주를 포위 중이던 청군이 포위를 풀고 남하한 줄로만 아는 모양이었다. 현실은 아직도 금주는 물 샐 틈 없이 포위되어 있고, 홍타이지가 따로 소집한 군대가 들이쳐 그들의 배후를 막은 것인데.
입이 근질거렸다. 어차피 포로로 잡힌 자이니 말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당신네 명국의 군대는 유봉산에 완전히 고립되었소. 아마도 귀관은 이곳에 주둔중인 군대가 금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병력인 줄 알고 있는 모양인데, 실은 그렇지 않소.”
“무슨 소리요, 그게?”
“귀관은 금주에서의 군량 지원을 기대했던 모양이나, 금주는 여전히 포위 중이라는 얘기요. 그리고 아군의 정예 철기에 의해 유봉산의 배후는 곧 차단될 것이오. 병력을 먹일 군량과 마초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란 소리지.”
그 말을 들은 장수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잠시 내 얼굴에 꽂혔던 그의 시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당황하여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더욱 더 확신이 서고 있었다.
이번 배팅은 성공이다. 아니, 성공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부족할지도.
***
어찌 보면 이번에 가장 큰 도박수를 던진 것은 내가 아니라 세자였을 것이다.
홍타이지의 군막에서 있었던 일은 그렇다 쳐도, 아무리 내가 쌓아온 실적이 좋았다고는 해도, 일개 참하관의 의견에 따라 아끼는 정예병들을 배치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짓이 못 되었다.
때문에 심문 결과를 전해 받은 세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세운 군략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을 것이다. 별것 아니어 보이던 패잔병과의 전초전에서 대어가 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그 정보는 세자만 기쁘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곧바로 심문내용을 기록해 홍타이지에게 파발을 띄우고 포로를 압송시켰는데, 돌아온 전령은 웬 예상치 못한 선물과 함께 돌아왔던 것이다.
“안 자의, 청주가 서찰에 무엇이라고 적어 보낸 것이냐?”
“청군이 이 필가산(筆架山)과 주변 해안에 있는 명군의 군량고를 쳐 떨어뜨렸다고 적혀있사옵니다, 저하.”
“그것참 낭보로구나. 네 예상이 그대로 맞아 들어갔어.”
청군의 병력이 필가산을 점령했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었다.
필가산은 적이 주둔하는 유봉산과 그 배후지인 행산의 요새 사이를 가로지르는 언덕이었다. 아마 거의 유일한 퇴로이자 보급로일 장소. 해안을 우회하는 루트가 존재하긴 했으나 높은 지형에서 적의 이동을 관찰하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즉, 명군 주력이 주둔하고 있는 일대의 숨통을 막 청이 손아귀에 틀어쥐게 된 것이다.
거기에 군량고까지 함락당했다는 것은, 전방에 나가 있는 명군이 이제 속수무책으로 굶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아마 명군 주둔지에 인접한 송산에 위치한 요새에는 얼마간의 군량이 있긴 할 것이나, 그것은 원래 요새에 주둔하던 병력들을 위한 것. 그것으로 갑자기 들이닥친 십이만의 병력을 먹일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안 자의의 예상대로 흘러가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청주가 서찰과 함께 보낸 물품은 또 무엇이냐?”
“저하께서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잡숫는다는 보고를 청주가 주의 깊게 여긴 모양이나이다.”
급하게 전장을 옮기느라 심양관에서 꾸려 보냈던 짐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덕분에 시종신들과 세자 본인까지 유림이 이끌던 조선군의 군량에 의존해야 했다.
평안병사 유림이 자신이 먹으려 가져왔던 반찬들을 세자에게 올렸으나 혼자만 먹을 순 없다며 전부 물린 세자였다. 이게 전부 심양관 인원들을 갑작스레 전장으로 끌어낸 홍타이지의 탓이었으니, 보고를 올리면서 살짝 질척여봤던 것인데.
군량과 찬으로 쓸 생선 정도나 조금 보내줄 줄 알았다. 그러나 칸의 하사품은 생각보다 통이 훨씬 큰 물건이었다.
“일단 청주가 보낸 양과 소는 잡아 그 고기를 전군에 돌려라. 곧 힘써 싸울 일이 있을 것이니 우리 군사들에게 다소 위로가 될 것이다.”
“저하께서도 드셔야 하옵니다. 식사를 마음껏 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아니다. 염려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입맛이 돌지 않는구나.”
좋은 음식을 먹던 세자의 입에는 거칠 수밖에 없는 음식이라, 세자는 식사시간마다 깨작거리면서 겨우 그릇을 비우던 터였다.
그런데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던 고기가 들어왔음에도, 세자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하, 어디 마음이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시나이까.”
“이 하사품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본래 청주는 이런 것들을 호탕하게 내려주는 성정이 아니거늘.”
“소인이 서계에 아군의 군량 상황을 적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 않나이까. 그것에 대한 대답일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아무리 적의 군량고를 떨어뜨렸다고는 하나, 고작 내 반찬투정 때문에 저 많은 고기를 내리겠느냐. 청주의 군막 밖에서 한 약조를 부디 잊지 않길 바란다. 안 자의.”
세자는 그때 홍타이지가 보여주었던 눈빛에 아직도 꽂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홍타이지가 내려준 가축의 의미는 별 것 아니었다.
내일부터 조선군이 본격적으로 중요한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파발을 통해 받은 서찰에도 바로 시작될 작전지시가 빼곡하게 적혀있던 터였다. 내가 홍타이지에게 제안했던 내용 거의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도 세자의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양과 소를 잡은 고기가 저녁으로 올라왔는데도 손을 잘 대지 않을 정도였다.
소심한 양반 같으니라고. 나중에 쌈장이라도 만들어 줘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