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카간의 엽행(獵行)
“송구하옵니다, 저하.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사옵니다.”
“널 만난 이후로 네가 이렇게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처음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저하, 그것이…….”
“황녀의 미색이 보통 이상이긴 하나, 네가 그 정도 위아래를 구분 못할 자는 아니지 않느냐?”
하긴, 만주족 여인을 내려주겠다던 홍타이지 앞에서 정혼자 핑계를 대 거절한 놈이 이제 와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세자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자가 은연중 드러내던 불쾌감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나를 향하고 있던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왜 황녀가 네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냐? 아무리 아끼는 딸이라 한들, 청주가 국사를 한낱 황녀와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짚이는 것이 하나 있긴 했다. 설마 정말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크게 들고 있지는 않았지만.
세자 역시 같은 짐작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내 추측을 숨길 필요는 없으리라.
“만주족 안에서 여인을 내려주겠다던 청주의 말이 계속해서 걸리는구나. 설마 그런 짓까지 하겠냐마는…….”
“아무리 과부가 된 딸이라 하나 황녀를 고작 번국의 참하관에게 내려주겠나이까. 크게 마음 쓰지 마소서.”
그러나 세자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승전한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홍타이지의 나를 향한 인재욕은 보통 것이 아니긴 했다. 나를 갖기 위해서 어떤 수단이든 동원하리라는 것은 어린 아이도 할 만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망국의 우두머리라고는 해도 몽골의 왕에게 시집보냈던 딸이다. 고작 나 같은 하급 관리에게 보낼 리가 없지.
선녀와 나무꾼처럼 신분이 다른 자가 맺어지는 일은 동화 속에서나 일어날 일이다.
하지만 장례가 끝나고 심양의 아담한 황궁을 빠져나오면서도 황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눌러 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닮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조선시대로 떨어진 것처럼 혹시?
심양관으로 돌아와 오후 일과를 진행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콩밭에 가 있었다. 결국 그날, 세자에게서 오늘 만주어 과외는 쉬라는 일갈까지 듣고 말았다.
***
보르지기트 씨의 장례가 끝나고 나와 세자는 또다시 심양성을 나서야 했다.
애첩의 죽음을 슬퍼하느라 건강을 더 해친 카간의 심신을 맑게 만들기 위한 출성이었다.
삼백 명쯤 되는 기병 중 몇몇은 팔에 매를 얹은 채 말을 달렸다.
엽행(獵行), 긴 사냥의 시작이었다.
“강 진사는 아주 신이 났구나. 저렇게 함박웃음을 짓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성균관 시절부터 망나니로 유명했던 사람이옵니다. 심양성에 갇혀 장사만 하고 있으려니 오죽 좀이 쑤셨겠사옵니까.”
“핫핫. 아무리 네 벗이라지만 말이 조금 심하지 않느냐, 안 자의.”
“거꾸로 말하면 벗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겠사옵니까, 저하.”
안 그래도 답답하다며 호포대를 따라 사냥도 자주 나가던 충신이었다. 세자 앞에서는 평범한 선비인 양 위장을 했었지만, 난봉질 건을 들킨 이후로는 심양관에서 죽상만 하고 다녔던 터라 세자에게는 그의 본모습이 신선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안 자의도 강 진사처럼 사냥을 해 보는 것은 어떠냐. 심양으로 오는 길에도 노루를 잡은 적이 있지 않았더냐.”
“제 벗처럼 마상궁술에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그저 이렇게 말을 달리고 있기만 해도 속이 시원하나이다, 저하.”
“그러하냐. 사실 나도 새 말을 타는 것에 만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사냥에 나설 기분은 들지 않는구나.”
세자는 도르곤이 보내준 새 말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승차감부터 시작해서 고삐로 내리는 명령을 듣는 것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을 터였다.
뭐, 심양에 처음 왔을 때 말도 제대로 못 타던 세자를 생각하면 이 또한 괄목상대려나.
“한수야! 이것 봐라! 내가 또 꿩을 잡지 않았더냐! 이번엔 두 마리다!”
말을 달려 이쪽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충신이었다. 한 쪽 손에 덜렁거리는 사냥감을 쥔 채였다.
“사형! 또 그러시는 것입니까? 예의를 갖추십시오, 저하 앞입니다!”
“괜찮다. 강 진사가 사냥 나와서 이러는 것이 처음도 아니고. 그의 활솜씨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 그거면 되었다.”
충신의 손에 들린 사냥감은 그의 활솜씨를 증명하고 있었다. 길쭉한 화살 한 대가 꿩 두 마리를 한 번에 관통한 모습이었으니.
성균관에서 활쏘기 연습하던 시절부터 충신의 활솜씨가 기가 막히긴 했지. 사실 충신이 전장에서 애기살로 적장을 저격해 전황을 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세자가 활솜씨를 보여줄 것을 요청해 데리고 나온 자리였기도 했다.
이제 와서 느끼는 거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세자는 꽤나 열린 사람이었다. 하긴 시강원의 말단을 심복으로 데리고 다니고, 고작 일개 진사에게 심양관 재정을 맡기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가.
“야, 산군! 나와 봐라. 네 간식 가져왔다!”
“핫핫핫. 강 진사, 그 녀석이 먹기에는 너무 크지 않느냐?”
“이 녀석, 낮에는 매번 한수 품에서 잠들고는 밤에만 움직이지 않습니까. 고기를 좋아하니 혹시나 깰까 해서 가져와 본 것인데 허탕인 모양입니다, 하하.”
도대체 뭐 하는 고양이인지.
사냥을 나가려 방을 나오는 내 다리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녀석이었다. 심양관의 하인들에게 산군이 내가 금주로 나가있는 동안 내내 구슬프게 울어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떼어놓을 수도 없었다.
“고양이는 영물이라더니 영특한 녀석이 아니냐. 말 타는 걸 좋아하는 고양이는 책에서도 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산군의 동행을 허락하신 것도 저하시니 녀석도 신기한 것을 보여드려 은혜를 갚으려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그것이 그렇게 되느냐? 저번 엽행 때는 분위기가 삭막했던 터라 무심코 허락했던 것이었는데, 다음에 나올 때도 이 녀석을 꼭 데리고 나와야겠구나.”
고작 시월 중순에 접어드는 무렵이었음에도 만주의 날씨는 X랄 맞게 추웠다. 특히 밤에는 그 추위가 더했는데, 카간이 새로 내려준 튼튼한 천막에 화로까지 피워놨는데도 냉기가 스멀스멀 파고드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산군 녀석이 밤에 천막 안에서 피워대는 재롱은 추위와 강행군에서 오는 시름을 잊게 하는 힘이 있었다. 밤마다 열리는 산군 쇼의 일등석에는 늘 세자가 앉아 헤벌쭉한 웃음을 날릴 정도였으니. 숙종도 고양이 덕후였다더니 누가 같은 핏줄 아니랄까봐.
“하온데 저하, 이 녀석, 조금 이상하지 않나이까?”
“강 진사, 무엇이 말이냐?”
“아무리 이 북변과 조선의 식생이 다르다고는 하나, 사냥 나오는 것에 익숙한 고양이는 처음 보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원래 너희가 키우던 고양이가 아니라 했으니, 아마 전 주인이 사냥을 자주 나가던 자가 아니었겠느냐?”
승마 중 흔들림을 자장가 삼아 내 품에서 잠들던 녀석이 가끔씩 기어 나와 안장에 발톱을 박고 바람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 분명 평범한 고양이는 아니었다.
뭐, 사실 별 문제는 아니지만.
고양이가 말 잘 듣고 잃어버릴 일 없고 사고만 안 치면 장땡 아니겠는가.
그렇게 품속에서 가볍게 코를 고롱거리며 자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다가 낯익은 그림자의 접근을 놓치고 말았다.
또 ‘그 사람’이었다.
“눈에 띄는 자가 있어서 와 봤더니, 또 너와 관련 있는 사람이로구나.”
“예친왕 전하?”
“꿩을 맞추는 활솜씨가 놀라 뒤를 밟았는데 또 안한수 네놈이 나오다니. 핫핫.”
말고삐를 잡은 세자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홍타이지와 도르곤이 대놓고 내게 관심을 표한 이후로, 세자는 도르곤이 내게 접근할 때마다 거의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세자의 반응과는 달리, 도르곤은 장례식 자리처럼 세자의 신경을 긁으러 온 목적은 아닌 듯했다. 그의 눈빛에 평소의 음흉함이 아닌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것을 증명하듯 도르곤은 세자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마자 충신이 들고 있던 강궁에 손을 뻗었다. 그리곤 시위를 당겨보고 활을 쏘는데 드는 힘을 재보면서 연신 감탄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이런 강궁을 쉽게도 당기다니, 고려 땅에는 탐나는 인재가 많지 않습니까? 고려 세자.”
“……안 자의도, 강 진사도 제 사람입니다. 예친왕 전하.”
“진사라, 고려 문관들 중에는 썩어가는 재목이 많은가 봅니다?”
이제 나뿐만 아니라 충신도 탐내는 것인가.
신경전이 오가는 둘 사이에 있기란 실로 불편한 일이었다.
웃으며 혀의 칼날을 맞대는 둘을 남겨두고 잠시 물러나는데, 충신이 말을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두 분이서 뭐라 말씀하시는 거냐? 한수야.”
“예친왕 전하가 사형의 활솜씨를 탐내시는 것 같습니다.”
“뭐? 너보고 청의 신하가 되라고 하셨던 분 아니냐? 나도 청나라에서 출세나 해 볼까?”
“세자 저하 앞에서 무슨 망발입니까. 사형.”
“농담이지, 인마.”
청국어도 배우기 귀찮다고, 역관을 고용하면 된다는 핑계를 대고 일 년 넘게 안 배우는 양반이 청나라에서 출세는 무슨. 그러면서도 심양 현지인 상대로 난봉질은 어떻게 하는 건지.
그러나 도르곤이 선을 넘은 것은 아까 그 말이 마지막인 듯했다. 세자의 손짓을 보고 다시 두 사람에게 다가갔을 때, 둘 사이의 분위기는 그렇게 냉랭하지 않았으니까.
“카간께서도 네 재주를 구경하고 싶어 하신다. 사냥 나오면서 그 물건은 당연히 챙겨왔겠지?”
“투창기 말씀이십니까? 혹시나 해서 가져오긴 했습니다만…….”
“좋아. 카간의 행렬에 합류해 몰이꾼들이 짐승들을 몰아오면 네 재주를 보여주도록 해라. 세자와 강 진사라 불린 자도 함께 오도록.”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사냥 따라와서 산군 쇼만 구경하고 있었는데 이젠 안한수 쇼를 할 시간인가.
오목도의 집에서 보여준 재주를 도르곤이 카간에게 고한 모양이었다. 뭐, 어차피 큰 품 드는 일도 아니고 처음 해봤던 일도 아니니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화끈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또 상이 떨어질지도 모르지.
헌데, 그렇게 합류할 시간과 장소를 조율하던 사이, 미동도 없던 내 품이 갑자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도르곤의 굵은 목소리 때문에 잠에서 깬 건가.
“냐앙!”
“산군!”
반쯤 감긴 눈으로 얼굴만 옷깃 사이로 내민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의 행동이 평소와는 달랐다. 평소처럼 안장으로 내려와 바람을 느끼기는커녕 털을 세우고 하악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 하악질의 방향은 명백히 도르곤을 향하고 있었다. 대군이 가끔 귀찮게 굴 때 적대감을 드러낸 적은 있어도 처음 보는 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던 터였다.
“안 자의, 산군이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모르겠사옵니다, 저하. 산군! 진정하지 못할까?”
아무리 친해졌다지만 도르곤은 친왕의 자리에 올라있는 사람이었다. 계속 이렇게 굴다가는 고작 고양이 하나의 목숨쯤은 금방 날아갈지도 몰랐다.
그런 염려 탓에 어떻게든 하악거리는 녀석을 달래려 애를 쓰고 있는데, 걱정과는 달리 도르곤에게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지?
“뭐야, 수와얀 이 녀석. 왜 네가 데리고 있는 것이냐?”
“수와얀이라뇨? 이 녀석은 산군입니다.”
“나한테 이빨을 세울 수 있는 고양이는 수와얀뿐이다. 황궁에서 얼마 전 사라졌다 했더니 심양관으로 기어들어가 있었나? 핫핫.”
무슨 소리지? 도르곤이 전에 키우던 녀석인가?
그러나 도르곤이 고양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예측은 틀린 것 같았다. 키우는 사람에게 송곳니를 드러내는 고양이는 아마 없을 것일뿐더러, 만주어로 ‘노랑이’라는 네이밍 센스는 도르곤 답지 않은 명명이었다.
“일이 이렇게 풀리는가? 아무튼 이따가 정한 시간에 다시 보도록 하지. 고려국에서 시간을 어길 리는 없지만 말이다. 핫핫.”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남기고 등을 돌려 멀어져간 도르곤이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는데 세자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주어를 모르는 충신은 당연했고.
“수와얀이라니? 도르곤이 산군을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평범한 고양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일단 청주가 불렀으니 제 시간에 가는 것이 먼저겠나이다. 산군 일은 나중에 생각하시옵소서.”
세자에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도르곤이 마지막 순간에 지은 의미심장한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그 표정의 의미는 곧 카간을 마주한 자리에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