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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71화 (71/298)

71화. 산군, 수와얀.

멀리서 말을 탄 채 사냥을 구경하는 카간의 발밑에는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혀를 빼문 채 누워있었다. 아까 가슴에 투창을 두 발이나 맞고서야 쓰러진 놈이었다. 물론 그 투창을 ‘쏜’ 것은 방금의 나였고.

‘후……. 호위병들 덕분에 죽을 걱정은 없으니 다행이지. 산중에서 나 혼자였으면 저런 놈한테는 절대 투창 못 던져.’

남원에서 호랑이에게는 어떻게 창을 던졌던 건지, 참.

탕!

곧이어 고요한 벌판을 날카로운 소리 하나가 찢어놓았다.

부싯돌에서 불꽃이 튀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결과는 명중이라는 것을.

“참으로 신묘한 재주가 아니냐, 도르곤.”

“저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왜 한군 놈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총열에 낀 화약 찌꺼기를 닦아내면서 과거의 내가 저지른 만용에 오스스 돋는 소름을 느끼던 찰나였다. 혹시나 해서 가져온 총을 여기서 쓸 줄은 몰랐다.

카간의 앞으로 왔을 때만 해도, 그가 나를 부른 이유는 오목도의 집에서 보여준 쇼의 연장인 줄만 알았다. 허나 그의 관심은 송산 전투에서 명군의 지휘관들을 저격한 사격술에 온통 쏠려있었다.

아, 그렇다고 아틀라틀을 쓴 것이 아주 헛수고였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투창에 관통된 늑대는 그래도 스스로의 시신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으니까.

“아버님, 저 총이라는 무기는 너무 무섭습니다. 맞았을 뿐인데 노루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어요.”

“사냥 나오는 것이 처음도 아니면서 갑자기? 하긴 사냥감의 상태가 조금 엉망이긴 하구나.”

말을 탄 팔기 하나가 달려가 집어 온 노루의 머리는 처참하게 깨져 있었다. 꽤 먼 거리에서 저격했으니 아마 죽는 순간까지도 눈치 채지 못했겠지.

사냥감의 처참한 모습에 황녀가 진저리를 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말을 타는 모습만 봐도 그녀가 사냥에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전장에서 피를 숱하게 본 나도 총을 맞고 깨진 노루의 머리는 익숙지 않았으니까.

“마카타, 그러게 무리해서 따라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막 장례를 끝마쳐서 정신도 없을 텐데 황궁에서 쉬고 있지 그랬어.”

“저보다 더 어린 동생들과 다른 부지들도 둘이나 따라와 있는 자리인걸요. 괜찮습니다. 바람을 쐬니 기분 전환도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러고 보니 어린 여자 아이 두엇이 노란 장막을 친 마차와 나란히 말을 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사냥에 따라온 황녀는 마카타 하나가 아닌 모양이었다. 남녀 가리지 않고 말을 타는 유목민 특유의 풍습은 청 황실에도 묻어나고 있었다.

이크, 그녀의 시선이 내게 와닿는 것이 느껴져 괜스레 총열을 닦는 손에 힘을 더 주고 말았다. 이제 총구로 쑤셔 넣은 천에 검은 찌꺼기가 묻어나오지 않는데도 내 손은 하릴없이 총열을 반복해서 닦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셨는지 알 것 같네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그건 네 결정에 맡기겠다. 아무튼 네 기분이 나아졌으니 다행이구나.”

“말씀드렸잖아요. 속이 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피로했던 것뿐이라고요.”

나란히 안장 위에 올라앉아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부녀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총의 손질을 마쳤다. 왜인지 모르게 이 자리가 매우 불편했다. 카간과 도르곤이 내게 눈빛을 쏘아대던 자리보다 더.

어쨌든 카간이 요청한 재주는 다 보여주고 쇼는 끝났으니 물러갈 명분은 충분했다. 허나 하직인사를 고하는 내 뒤통수를 홍타이지가 도로 잡아챘다.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고 했다.

“네 사격 솜씨는 잘 구경했다. 말미를 주면 누구든지 너 같은 명사수로 탈바꿈시킬 수 있겠느냐?”

“확답은 드릴 수 없사오나, 훈련받는 자의 동기가 확실하고 장비만 제대로 주어진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폐하.”

“은과 대장장이를 더 내려주겠다. 무장을 확실히 갖추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라.”

카간은 정말로 그날 보여준 화력에 제대로 꽂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딸과 머리 식히러 사냥을 나온 자리에서까지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네게 내릴 잘안의 구성이 거의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도르곤에게서 받았다. 그러니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지.”

아니, 벌써?

카간이 이렇게 몸이 달아있는 이유가 있었다.

전장에서 귀환한지 한 달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새로운 부대의 구성이 완료단계에 들어서다니. 진행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른데?

“고려인 중에 쓸 만한 자를 고르는 작업이 그리 빨리 끝났단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 설마 내가 즉흥적으로 그런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하긴 아무리 기분파라 해도 정예 부대를 갑자기 뚝딱 만들어내라 명령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중국의 패권을 명으로부터 빼앗아오지도 못했겠지.

그때였다. 홍타이지의 눈빛이 불길하게 반짝하고 빛난 것은.

“이미 팔기 아래에 니루 단위로 움직이던 고려인 부대가 몇 있다. 알고 있느냐?”

“전장에서 조총을 쓰던 다른 부대를 본 적이 있긴 합니다. 분명 항복한 한인으로 구성된 한군팔기(漢軍八旗)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정홍기에 소속된 솔호 니루 놈들이다. 내가 고려인 부대를 쓰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생각해보면 정묘년과 병자년에 조선에서 포로로 잡아간 병사가 한둘이 아닐 것인데, 그 자들을 청이 써먹지 않을 리가 없었다. 카간,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놈들도 지금까지 적당한 군공을 세워왔지. 하여 더 큰 규모로 고려인 포수 부대를 운용하려는 계획은 예전부터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적당한 우두머리감이 없어서 구상만 하고 있던 참이었지.”

“그래서 저를…….”

“착각하지 마라. 고작해야 천오백 명을 다스리는 잘안 장긴이다. 만약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네놈이 더 볼품없는 자라면 가차 없이 쳐낼 것이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자신을 섬기라 명하던 카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 출세하니 좋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가는 조선이라는 보험도 잃을 뻔했다.

“그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뭐, 내 눈이 틀릴 일은 없겠지만 말이지. 다만, 잘안 장긴이란 자리가 쉬이 여길 정도로 작은 자리도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고려를 징벌할 때 공을 세운 고려인이라 해도 그 이상 가는 자리로 올린 자는 단 하나뿐이다. 한윤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한윤,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찬찬히 머릿속의 역사 지식을 뒤져보니 연관되는 이름 하나가 함께 떠올랐다. 한명련의 아들 한윤.

“왜와 고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의 아비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들었다. 허나 고려는 그를 천한 출신이라 해서 핍박하고 역적의 누명까지 씌웠다지.”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한윤에게도 나는 잘안 하나를 맡겼다. 아주 일부만 고려인 출신이지만 방금 이야기 한 솔호 니루도 거기 소속이지. 너는 무엇이 그리 중하다고 고려에 대한 절개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냐?”

조선에서 역적으로 취급받는 자도 중용한다는 사실을 대놓고 어필하는 카간이었다. 정묘호란 때 길잡이를 한 공까지 있는 자와 같은 계급을 수여한다는 것은 나를 그만큼 중히 여긴다는 뜻인가.

“아버님, 기분 전환을 하러 나온 자리에서 그렇게 열을 올릴 필요는 없으세요.”

“안다, 마카타. 나도 즐기는 자리에서 흥을 깰 생각까진 아니었다.”

아니기는, 방금까지 핏대 올리기 직전이었던 양반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정신까지 잃었던 사람이 맞아?

그러나 적절한 타이밍에 황녀가 끼어들어 준 것이 내 숨통을 틔워준 것은 분명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감사를 표할 정도로.

그나저나, 한윤이라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충신과 그를 마주치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로 알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겠지.

“송산에 포위되어있는 한군이 전멸하고 금주성이 떨어지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인원과 물자는 아낌없이 지원할 테니 그 전까지 정예 포수를 양성해 두도록.”

“그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내 기억에 금주에 갇힌 명군이 전멸하려면 해가 바뀌고 한참이 지나야 할 것이었다. 조교 역할을 해줄 병력도 있고, 카간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면 해볼 만한 일임이 분명했다.

그런 계산 아래 내린 결정을 카간에게 전하자 굳어져 있던 그의 얼굴은 쉽게도 녹아내렸다. 어쨌거나 목적은 달성했다 이건가.

“좋다. 그럼 딱딱한 이야기는 그만 집어치우고 해가 지기 전에 마저 사냥을 마치도록 하자. 아, 고려인 중에 강궁을 솜씨 좋게 다루는 자가 있다던데, 그 솜씨를 구경하는 것은 어떠하냐? 마카타.”

“이번엔 재주 좋은 고려인들이 많이 따라왔네요. 저도 보고 싶어요, 아버님.”

도르곤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던 탓에 충신도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터였다. 전령에게 명을 전해 받은 충신이 카간의 어전으로 말을 달려온 것은 잠시 후였다.

헌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충신의 품이 이상하게 불룩했다. 설마…….

아니, 이 미친 사람아. 카간 앞에 나서면서 고양이는 왜 데리고 온 건데?

어느 정도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도르곤과는 달리, 홍타이지에게 불경이라도 저질렀다가는 산군의 목이 아니라 충신의 목도 같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제발 사고만 치지 마라. 산군.’

하지만 그 기도의 효력은 찰나도 가지 않았다. 황금빛 털뭉치 하나가 충신의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이다.

“냥!”

“어엇!”

X됐다.

차라리 평소처럼 튀어나와서 말안장에 얌전히 앉아있기라도 할 것이지. 무엇을 본 것인지 충신의 가슴팍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온 산군 녀석이었다.

“사형!”

“산군! 돌아와!”

말발굽에 밟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튀어나간 녀석은 정확히 카간이 말을 타고 서 있는 자리를 향하고 있었다. X발…… 설마 고양이 때문에 심양 생활이 꼬인다고?

노란색 고양이가 짧은 거리를 질주하는 동안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녀석은 말 주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서있는 말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기까지 했다.

산군 녀석에게는 그 일이 꽤 익숙해보였으나, 내 눈엔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올라간 말의 주인이 황녀였으니까.

불경죄 확정이다.

“미쳤습니까? 이런 자리에 왜 산군 녀석을 데려왔습니까?”

“아니…… 방금까지만 해도 자고 있었고…… 맡아줄 사람이…….”

이미 충신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는지 얼굴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가슴이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다시 카간과 황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생각도 못했던 장면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수와얀!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익숙하다는 듯이 황녀의 품으로 뛰어들어서 그녀의 볼에 제 얼굴을 부비적거리고 있는 산군이었다. 나한테는 무릎 위에 올라오는 것이 고작이었던 놈이 저런 짓을?

아니, 잠깐. 황녀도 도르곤처럼 산군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마카타, 얼마 전에 잃어버렸다던 그 녀석이 아니냐?”

“맞아요. 창문을 열어둔 사이에 나가서 돌아오질 않아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일단 카간의 반응을 보니 충신의 목이 날아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뭔가 일이 다른 쪽으로 꼬인 것이 분명했다.

재회의 기쁨으로 반짝거리고 있는 황녀의 눈이 연신 내 쪽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도르곤이 일이 이렇게 풀린다고 이야기한 이유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 작가의 말

심양일기에는 세자가 카간을 따라 장기간 사냥을 나갔던 기록이 몇 차례 적혀있습니다. 기록이라면 세계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 우리 선조분들은 그날의 기록까지도 상세히 적어놓으셨죠. 그때 세자를 호위하려 동행한 인원의 명단과 데려간 말과 낙타, 소지품까지 전부 적어놓았을 정도입니다.

그것을 기록한 엽행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언급이, 카간이 사냥을 나갈 때 카간의 후궁들과 공주들, 사위들이 동행했다는 언급입니다. 이날을 묘사한 기록에도 10살 남짓한 카간의 딸 두 명이 담비 갖옷을 입고 말을 몰았다는 내용과, 카간의 후궁 두 사람이 수레를 타고 동행했으며, 그녀들의 시녀가 말을 타고 주인을 따라왔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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