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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74화 (74/298)

74화. 또 한 명, 역적의 자손

아니, 도적놈이라니? 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심양에 와서 내가 사고를 친 적이 있던가?

머리를 굴려봤지만 짚이는 것 또한 없었다.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사고뭉치를 향해 고개가 돌아갈 수밖에.

“사형, 또 무슨 사고라도 친 겁니까?”

“저런 고관 댁 여자는 나도 목숨이 아까워서 못 건드리지. 너한테 용건이 있지 싶은데?”

충신의 말대로 청나라 고관의 부리부리한 눈동자는 분명 나를 향해 있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얼굴 사이에서 날아오는, 꽤나 강렬한 적의가 담긴 눈길에 주눅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지.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혹시 어느 일로 찾아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시치미 떼지 마라! 네놈이 내가 받기로 했던 것들을 가로챘지 않느냐!”

얼굴까지 시뻘겋게 만들며 쏟아내는 고관의 말에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저는 살면서 남의 것을 가로채본 적이 없습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해라? 네놈이 받은 고려인들은 본디 내 몫이었다! 아직도 잡아뗄 셈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네놈이 새로 편성한 잘안에 노예 출신 고려인들을 받았을 텐데? 그자들은 원래 내 솔호 니루로 받기로 한 자들이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니루의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핫, 타스하 잘안은 무슨. 호랑이는커녕 고양이만도 못한 놈에게 카간께서 잘안 장긴 자리를 내려주시다니. 그 예친왕의 사람 보는 눈도 이제는 맛이 간 모양이군.”

“초면인 상황에 말씀이 심하시지 않습니까?”

“심하다니? 을축년부터 이 나라를 섬기기 시작해 정묘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이른 자리가 잘안 장긴이다! 그걸 웬 애송이 놈이 덥석 받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정묘년의 전쟁, 솔호 니루, 그리고 고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어색한 조선말.

이제야 내 앞에서 한껏 적의를 드러내는 자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역적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 압록강을 건너신 분이군요. 아직까지 이 땅에 살아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호오, 네놈. 정묘년에는 핏덩이에 불과했을 놈이 이 한윤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엽행을 나갔을 때, 홍타이지가 자신을 섬길 것을 제안하면서 언급했던 이름이 슬슬 기억이 났다. 이미 그의 팔기군 아래에는 조선인 부대가 존재한다고 했지.

허나 그 자리에서 카간이 분명 적당한 우두머리 감이 없어 나에게 부대를 맡긴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내가 그의 몫을 가로챈 것도, 내 잘못도 아니잖아?

“제 잘안에 관한 이야기는 카간께 직접 물으시지요.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같은 잘안 장긴이라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냐, 애송이? 너는 삼등 잘안 장긴, 나는 이등 잘안 장긴이다. 상급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라!”

갑자기 한껏 날아온 꼰대질에 이마에 힘줄이 솟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동안 배운 것들 덕분에 내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이미 내가 그의 것을 빼앗아 갔다 여기는 판에 대화를 더 나눠봐야 한윤을 자극만 할 뿐,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던 차였다.

“예의라……. 그 예의, 내 조부께도 지키시지 그랬소?”

따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나와 한윤 사이를 그림자 하나가 막아섰다. 충신이었다.

“어린놈이 말이 짧구나? 넌 또 누구냐?”

“나는 강충신이오. 우리 조부님에게 당신이 지은 죄가 있을 텐데?”

“뭐라?”

“당신이 세 치 혀를 놀린 탓에 만고의 역적이 되신 분을 기억하지 못한단 말이오?”

아, 분명 충신의 할아비인 강홍립이 후금의 길잡이가 된 것에는 한윤이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조선에서 강홍립의 일족을 전부 처형했다는 이야기를 꾸며내 전한 것이 한윤이었으니까.

그것에 속은 강홍립은 후금군의 선두에 서 정묘년에 압록강을 건넜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멀쩡히 살아있던 가족과 역적의 오명뿐이었다.

“아, 네가 도원수의 손자냐? 네 이야기는 그에게 몇 번 들은 기억이 있지.”

“그 입으로 할아버님을 언급하지 마시오! 당신만 아니었으면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고통받지 않으셨을 것이오!”

“하, 그 양반도 참으로 고지식한 양반이었지.”

한윤의 입가에 비웃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충신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아 어깨에 손을 얹었으나, 전해져 오는 것은 격한 부들거림뿐이었다.

“그리고, 조국을 배신해? 네놈이 뭘 안다고 떠드느냐? 어린놈이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거라.”

“방금 뭐라 하셨소?”

“목숨 바쳐 왜놈들 침략에서 나라를 건져 놨더니 천민 출신이라 따돌리고, 그것을 견디다 못해 북변으로 가 나라를 지키고 있었더니 역적의 누명을 씌운 나라도 조국이라 불러야 하느냐?”

한윤의 아비, 한명련의 이야기였다. 애초에 이괄의 난 자체가 김류와 이귀의 무고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가 아직까지 한을 품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그깟 나라, 엿이나 먹으라고 해라! 조선에 복수하기 위해서 꽉 막힌 늙은이 하나 속인 게 뭐가 대수겠느냐!”

“지금 할아버님을 꽉 막힌 늙은이라 말한 것이오?”

“카간께서 내린 은혜도 몰라보고 정묘년에 조선에 남은 행동이 꽉 막힌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아, 저기 예친왕 눈에 든 놈도 건방지게 카간께서 내린 은혜를 걷어찼다며? 역시 끼리끼리 어울리는군.”

빠드득. 충신의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평소의 충신이라면 벌써 주먹이 나갔을지도. 그의 인내심이 다하기 전에 앞을 막아서야 했다.

“그쯤 하시지요. 제게 용건이 있어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까.”

“너도 무엇 하러 조선처럼 쓰레기 같은 나라에 충성을 다하느냐? 내가 다이칭의 고관이랍시고 조선 조정도 이제 내게 끈을 대지 못해 안달이라는 사실을 아느냐? 핫핫.”

“안달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를 천출에 역적이라고 부르던 조선 놈들이 내게 잘 보이려 애를 쓴단 말이다! 천출에 역관이라 무시하던 정명수에게까지 끈을 대더군!”

문득 김자점의 집에서 발견했던 편지 하나가 생각이 났다. 그 편지의 발신인도 정명수였다.

세자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그제서야 뒤이어 떠올랐고.

“멍청한 놈들.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게로구나. 아직도 조선 같은 나라에 집착하는 안목을 보아하니 네놈 잘안도 오래 못 갈 것이 분명한데.”

“…….”

“인수가 늦어지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고려인들은 그때 받아 가도록 하겠다. 카간께서 정병 출신도 아니고 노예 출신인 자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품으신 걸 보면 건강이 안 좋으시긴 한가 보군. 핫핫.”

그렇게 한윤은 코웃음만을 남기고 등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멀어지려는 그의 발걸음을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말 한마디가 잡아챘다.

“한 장긴님.”

“하, 이제 와서 예의를 차리려는 것이냐?”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속담도 있지 않겠습니까. 장긴께서 뿌리를 잊으신 탓에 선조들의 지혜까지 잊으셨는지요?”

“뭐야?”

멀어지려던 한윤이 기수를 돌려 내 쪽을 향했다. 안장과 안장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말을 몰아온 그는 곧바로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말 다했느냐? 애송이?”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겠습니까? 같은 잘안 장긴끼리.”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한윤이었다. 삐죽삐죽한 그의 수염이 내 얼굴에 닿지 싶을 정도로, 그는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내 네놈을 지켜보고 있겠다. 다이칭 구룬의 권력을 쥔 자는 카간과 예친왕이 다가 아니란 걸 알게 해 주지.”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한윤은 콧김을 수차례 내뱉고는 다시 말머리를 돌려 어둠이 내린 심양의 거리로 사라져갔다.

시비를 걸던 자가 사라진 것은 다행이었으나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충신의 어깨를 점점 세게 잡아야 했던 탓에 손에 피가 돌지 않아 하얗게 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손을 잡아채 치운 것은 충신의 억센 손아귀였다.

“한수야. 저 새끼, 어디 사는지 아냐?”

“그때처럼 복면 쓰고 담장 넘을 상황이 아닙니다, 사형.”

“할아버님을 저리 모욕한 자를 어찌 가만두란 말이냐!”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저자는 어쨌건 이 땅에서는 우리의 상급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아무리 도르곤이 나를 잘 봐주고 있다 하나 이런 사소한 일로 사고를 쳤을 때까지 커버해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고작 시비를 걸렸다고 하극상을 일으킨 자를 어떻게 보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강홍립의 일로 한윤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을 충신이 그의 말에 대꾸조차 못 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충신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부들거리던 그의 어깨가 천천히 잦아드는 것이 보였다. 체념의 표시였다. 열린 입술 사이에서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말 역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 한심하구나. 오히려 내가 끼어든 탓에 할아버님께서 모욕을 당한 것 같아.”

“사형…….”

“저놈이 하는 말에 대해 한 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역적으로 몰리는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다. 역적으로 몰려 온 가족을 잃고 압록강을 넘어야만 했던 자가 품은 한이 오죽할까.”

“그렇다고 저자가 입을 함부로 놀린 일이 사형의 잘못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책할 필요도 없고요.”

말에서 내려 심양관 대문을 지나 숙소로 향하는 내내 충신은 말이 없었다. 피가 날 정도로 꽉 앙다문 아랫입술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혼자 놔두었다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지 싶었다. 방에 혼자 있고 싶다는 충신을 담장 아래로 질질 끌고 간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담에 기댄 채 땅바닥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던 충신의 입이 열린 것은 잠시 후였다.

“이 자식, 이럴 거면 술병이라도 하나 들고 올 것이지.”

“내일도 사하보로 나가야 하는데 무슨 술입니까. 속은 좀 풀리셨습니까?”

“풀렸을 리가 있냐. 아직도 속이 절절 끓는데.”

구부정하게 허리를 담장에 대고 있던 충신의 고개가 이쪽을 향해 획 돌아왔다.

“헌데 결론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한윤이란 놈을 엿 먹일 방법이 말이다.”

“아직도 그 생각이셨습니까?”

“그래. 그놈이 원하는 것을 못 얻도록 만드는 게 최고의 복수 아니겠냐.”

“갑자기 철이라도 드셨습니까? 그 말이라 함은…….”

“솔직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하보에서 병사들 훈련시키는 일, 농땡이 칠 생각만 가득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반쯤은 억지로 시킨 일이었으니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나.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충신의 표정은 진지했다.

“절대 저 자식한테 조선 사람들은 못 넘겨준다. 장정들을 훈련시켜서 전공을 팍팍 세운 다음에 너를 더 높은 자리로 올리고, 그때 한윤이란 놈을 밟아주는 거지. 어떠냐?”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나도 알아, 인마. 그만큼 진지하게 임할 거라는 얘기다.”

충신은 씁쓸하게 웃더니 가슴팍 앞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한양을 떠나는 길에 좌명과 나눈 인사라도 본 것인지, 동작이 묘하게 익숙했다.

그와 주먹을 맞댔다. 피부에 전해져 오는 그의 체온은 초저녁 겨울 날씨 탓인지 차갑게 식어있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일단 저렇게 나이를 핑계 삼아 우리를 깔보는 자에게 지기는 죽어도 싫습니다.”

“네 말대로라면 본래 쓸 만한 우두머리가 없어 편성을 미루고 있던 병력이 아니냐. 청주에게 선택받지 못한 화풀이를 너에게 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겠지요. 게다가 우리 호포대 대원들, 잡혀 온 노예 출신이라고 함부로 무시 받을 자들이 아닙니다. 아마 사형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제가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인 부대는 항병(降兵) 출신이라 이건가. 여러모로 권위를 따지는 영감탱이로구만.”

호포대의 출신을 무시하는 것을 보면 그의 부대, 솔호 니루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동안 청에 항복한 병사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내가 무시당한 것보다 내 부대원들이 무시당한 것이 더 화를 돋구었다. 푸짐한 밥과 따뜻한 방만 준비해주면 불만 없이 험한 곳을 누벼주던 부하들이었다.

“곧 한윤 그자가 무시하던 이들의 힘을 보여줄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전까지 시간을 헛되이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무술은 김 갑사에게 미치지 못하겠지만, 내겐 사람 여럿을 통솔해본 경험과 재주가 있다. 네게 도움이 될 거다.”

“잘 부탁합니다. 사형.”

“그래. 조선에 돌아가 할아버님 묘소에 당당히 낯을 들고 가려면 저놈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어야겠지.”

충신이 가진 능력은 분명 내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뺀질거릴 것이 분명한 인간을 잡아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여기던 참이었다. 한윤의 등장은 의외로 내게 큰 도움이 되었을지도.

그때였다. 다시 한번 맞대진 나와 충신의 주먹에 노란 그림자 하나가 날아와 매달렸다. 덜컹거리는 기와 소리를 보니 담장 위에서 뛰어내린 것 같았다.

“냥!”

“뭐야! 이놈이 여긴 왜 있는 거냐?”

“산군? 이 자식, 배신 때릴 때는 언제고?”

발톱을 넣은 채 뱃거죽으로 충신과 내 손등에 몸을 비비적대는 고양이는 분명 배신자 산군이었다. 황녀 품에 안겨서 이쪽은 아는 체도 안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아는 척인지.

“한수야, 이 녀석. 또 황궁을 탈출한 모양인데?”

“이를 어쩝니까. 이미 그런 일도 있었던 마당에 다시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고.”

방금까지 진지함으로 한껏 굳어있던 충신의 얼굴에 장난기가 좍 퍼졌다. 한쪽만 비틀린 그의 입술을 보니 또 나를 놀리려고 하는 것이 뻔했다.

“그럼 돌려주러 가야지. 네가 직접.”

“내일도 사하보에 가야하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단 둘이 있을 때 산군이 하악거리지 않는 사람은 심양관에 셋뿐인데, 그럼 나처럼 하잘 것 없고 청 황족과 면식도 없는 사람이 황궁에 고양이를 돌려주러 가란 말이냐?”

“그것은…….”

“그렇다고 주군인 세자저하께 감히 고양이 따위를 가져다주라고 입궁을 부탁할 생각은 아닐 테고.”

곧 충신의 입에서 황녀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황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읍읍거리며 숙소로 끌려가는 충신의 기분이 풀린 것은 다행이었으나 내일 무슨 얼굴로 황녀를 마주해야할지 머릿속은 한껏 복잡할 뿐이었다.

어느새 어깨에 올라앉은 산군 녀석은 그런 내 속도 모르는지 가볍게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내 목덜미에 여느 때처럼 얼굴을 묻었다. 이 배신자. 눈치 없는 자식. 일을 꼬아 놓기만 하고.

※ 작가의 말

한명련과 한윤 부자(父子), 그리고 고려팔기

비천한 신분으로 난세에 능력을 발휘해 높은 자리에 오르지만, 정치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비운의 장수, 한명련.

그리고 아비를 억울하게 잃고 역적으로 몰린 한이 사무쳐, 적국의 수하로 들어가 조국을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운 자, 한윤.

이 둘의 이야기는 이 시기 역사에 관심 있으신 독자분들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은 자세히 모르고 있지만 한윤은 단순히 길잡이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정묘호란 때 상당한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명군과 조선군 총합 3만이 주둔 중인 의주성에 침투해 사다리를 놓아 그들을 전멸시켰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그 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금주 전역에서도 공을 세우고, 추후 입관에도 공을 세워 자손 대대로 관직과 작위를 이어받으며 살았다고 <만문노당>과 <팔기만주씨족통보>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청에 항복해 공을 세워 대대로 팔기군으로 살아간 조선인은 한윤 외에도 꽤 있습니다. 한윤의 사촌 동생인 한택도 3등 잘안 장긴으로 임명받았으며, 김씨 성을 가진 평민으로 추정되는 자는 니루 장긴으로 임명받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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