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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76화 (76/298)

76화. 점찍기

그렇게 나는 자갈을 씹는 심정으로 타락해버린 음식을 조금씩 씹어 삼켜야만 했다.

어느 놈이 내 신성한 피자에 과일을 얹은 것인지, 당장이라도 이 역적을 색출하고 싶었지만 황녀 앞이니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정말로 만족스러운 식사였어요.”

“황녀 자가께서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접시에 담겨있던 음식을 거의 홀로 해치웠던 탓인지, 볼록 나온 배를 가볍게 문지르는 황녀였다. 덕분에 눈을 둘 곳을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옆구리가 갈라진 청 초기의 치파오가 그녀의 몸 굴곡을 가볍게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옷을 바꿔 입은 시녀의 몸집은 황녀보다는 조금 작았나 보다.

현대에 내려오는 치파오에 비하면 소맷자락도 좁고, 아래에는 바지를 단단히 갖춰 입은 모양새였지만, 눈에 얼핏 들어왔던 굴곡들은 내 시선을 탁자 언저리에서만 맴돌게 만들고 있었다.

동행한 시녀도 없으니 덮을 걸 가져오라고 할 수도 없고, 일국의 황녀가 거리에서 저러는 걸 청나라 사람들은 알까 몰라.

“안 장긴, 어딜 보고 계신 건가요? 뭐 잘못된 것이라도?”

“아, 아닙니다. 자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이미 스물이 넘으셨다 들었는데 그보다 어린 저보다 순진하시군요. 후후.”

예? 어려요?

외모만 봤을 때는 나와 비슷한 나이인 이십대 초반인 줄만 알았는데?

“어리시다니요? 저는 틀림없이 저와 비슷한 연배라 생각했습니다만…….”

“나이에 비해 성숙하단 이야기는 자주 듣는답니다, 후후. 몽골의 초원에서 고생을 좀 하기도 했고요. 다섯 살 차이면 나쁘지 않은 궁합이 아닌가요.”

“다섯 살 차이라 하시면……. 올해로 열여섯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고려에는 이팔청춘이라는 말도 있다면서요? 혼인하기 딱 좋은 시기가 아닌가요?”

순간 굵디굵은 은팔찌 하나가 떠올랐으나 고개를 황급히 흔들어 지워냈다. 사슬이 철컹거리는 소리가 귀에 맴도는 듯했다.

그녀가 과부라는 사실까지 생각해보면 더 이른 나이에 시집을 간 것이 아닌가. 아무리 조혼이 만주족의 혼인 풍속이라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조선 기준으로도 노총각인 것은 둘째치고.

“저도 본국의 전하께 나이에 맞지 않는 외모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시험에 입격한 증서를 내려받는 자리였지요.”

“어머, 그러셨어요? 지금의 안 장긴은 제 나이로 보이는데요? 재밌는 이야기네요. 우리 사이에 공통점도 있었다니.”

화제를 바꾸려 꺼낸 이야기조차 자꾸만 남녀관계로 끌어가는 황녀였다. 이미 그녀의 눈에는 한 가지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왜 황녀가 나를 이토록 마음에 들어 하는지는 둘째치고, 이왕 단둘이 있게 된 김에 내 의사는 확실히 밝혀야 했다. 그녀가 차라리 청나라의 황녀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 황녀 자가. 혼인 이야기가 계속 나오니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받아들이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대단히 송구하오나 그 이야기는 거절할 생각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황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갈 곳을 잃은 채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도르곤과 깊게 엮이지만 않았어도 조금 더 고민했을지 모르는 문제였으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침몰하는 배에 황녀와의 혼약 때문에 묶여 남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왜죠?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가요? 아니면 무슨 문제라도?”

“저는 고려국의 정칠품 관리에 불과합니다. 번국의 참하관이 어찌 황녀님을 감히 배필로 삼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당신은 이미 한 잘안의 장긴이예요. 당신 위에 있는 무관은 오십 인도 되지 않죠. 나와 혼인한 후에도 아버님께서 당신을 그 자리에 내버려 둘 것이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잘안 장긴 자리는 카간께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한 자리입니다. 저는 언젠가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고, 그 먼 곳에 자가처럼 귀한 분을 모시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런……!”

가볍게 열린 황녀의 입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긴, 누가 감히 절대자의 딸을 받아 출세가 약속된 자리를 걷어차겠는가.

“어째서 고려 같은 약소국에 충성을 표하는 거죠? 다이칭에 남아 아버님의 신하가 되세요. 언니의 일로 힘들어하는 아버님을 도와주세요.”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자가의 말대로 몸과 마음을 다해 폐하를 도울 생각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요?”

“저는 이미 본국에 훗날을 약속한 여인을 두고 떠나온 몸입니다. 사내 된 몸으로 차마 그 언약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들었어요. 그 사람을 심양으로 불러올려 측실로 두면 되잖아요? 그것은 일국의 황녀인 나와의 혼인을 거절할 명분이 되지 않아요!”

황녀는 아마 내가 조선에 남겨두고 온 정혼자 때문에 혼사를 거절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맞다. 하연이 가슴팍에 달아준 나비 수가 덜컹거리는 내 가슴을 쿡쿡 찔러 가라앉히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또 다른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발설하지 못하는 내 입은 바싹바싹 타들어 갈 뿐이었다.

어떻게 곧 홍타이지가 죽고 섭정에 등극한 도르곤이 사후 역적으로 몰린다는 미래의 이야기를 황녀 앞에서 할 수 있겠는가.

“저 말고도 황녀 자가께 어울리는 사내는 많을 것입니다. 저같이 하잘것없는 번국의 신하는 없던 사람으로 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황녀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설핏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안 장긴, 당신 말고 내 배필로 논의되던 자가 누군지는 알아요? 죽은 남편의 여섯 살 난 막냇동생이라구요!”

“여섯 살짜리 사내를 어찌 황녀 자가의 배필로 논한단 말입니까?”

“아버님이 몽골의 황금씨족을 혈맥을 통해 묶어두려는 사실은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이미 한 번 시집보냈던 거, 두 번은 못 하겠어요?”

황녀의 말을 들으니 문득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홍타이지의 아내 중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모두 보르지기트 씨였고, 계승권 역시 황금씨족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에 한했다. 그래서 나중에 어린 순치제가 즉위하고 도르곤이 섭정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 위로 언니 하나가 있지만, 그 언니는 황금씨족의 피를 타고나지 못해서 제가 억지로 에제이 칸에게 시집가게 된 것이었다구요. 아시겠어요?”

“황녀 자가, 설마 자가께서 원하시는 것은…….”

“나는 다이칭의 장공주(長公主)가 아니라 아이신기오로 마카타로 살고 싶어요. 여섯 살짜리 코흘리개에게 시집가 생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구요.”

붉어진 황녀의 볼로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굴러내렸다.

거리를 동경하고 자유를 좋아하는 황녀였다. 그런 사람이 억지로 반송장에게 시집갔다가 이번에는 웬 꼬마의 신부가 될 운명이라니. 어린 나이지만 기구한 일생이었다.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갈 수 없었다.

“처음엔 그저 나이 차 적고 멀쩡하게 생긴 사내라 당신을 남편으로 원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감히 나를 거부하고 있는데, 그 사실이 왜 나를 흔드는 걸까요.”

“…….”

“당신과 혼인하면, 난 행복해질 수 있겠죠? 당신은 그 유혹에도 불구하고 고려처럼 하잘것없는 나라조차 배신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니까, 내 얼토당토않은 부탁까지도 흔쾌히 들어주려 노력한 사람이니까.”

“저는 황녀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럴 리 없어. 감히 황녀인 내 앞에서 멀리 고려 땅에 있는 정혼자를 버릴 수 없다고 고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겠어. 수와얀 같은 고양이마저 함부로 다루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겠어.”

황녀, 아니 마카타는 말끝이 짧아진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마다 묻어나는 감정이 점점 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 장긴, 그거 알아? 고양이는 영물이라는 이야기. 수와얀은 영물이야. 그 아이가 적의를 보이는 자치고 속이 검지 않은 자를 보지 못했어. 그런 아이가 당신을 주인 대하듯 했다고.”

“황녀 자가…….”

“나도 어머님 앞에서나 응석 부리며 하던 이야기를 당신 앞에서 자연스럽게 하고 있잖아. 당신은 그걸 알아야 해.”

“황녀 자가, 제발 고정해주십시오.”

“난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당신같이 빼어난 사내를 출세시켜 하고 싶은 일도 있단 말야. 측실을 질투할 그런 여자도 아냐. 그러니까 고려에 대한 충심일랑 잊어버리고 제발 날 선택해.”

갑자기 손목을 덥석 잡혀 화들짝 놀랐지만 애써 담담한 척을 해야만 했다. 황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듯이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황녀에게 나는 꼬인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탈출구 같은 존재인가.

황녀의 사고방식은 이 시대 사람의 것과 분명 거리가 있었다. 거기에 옛 사랑과 닮은 황녀의 외모가 더해져, 그녀가 나처럼 17세기에 환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생각에 불과할 것이다. 적어도 그랬다면 피자를 처음 접할 때 반응이라도 있었겠지. 혼란스러운 생각을 이성으로 겨우 눌러냈다.

“일단 남들이 있는 자리에서 하실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가. 일단 자리를 옮기시지요.”

“여기서 대답하란 말이야. 지금 도망치는 거야?”

도망치는 게 맞다. 황녀니 다이칭이니 충심이니 하는 이야기가 주위에 들렸다가는 좋을 일이 없었다. 안 그래도 감정이 격해진 황녀 때문에 주위의 시선이 슬슬 모여들 것 같았다.

“어……? 대장?”

갑자기 주방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본 자리에는, 익숙한 얼굴의 호포대원 하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신병들을 굴리면서 유난히 충신과 죽이 잘 맞던 대원이었다.

X됐다.

“실례하겠습니다! 자가!”

“뭐, 뭐야? 당신?”

결국 나는 황녀의 손목을 붙잡고 인적이 드문 자리를 찾아 냅다 뛸 수밖에 없었다. 음식값은 접시 위에 내던진 은편으로 갈음이 될 터였다.

그렇게 얼마 동안을 뛰었을까, 겨우 적당한 자리를 찾아내고서야 뜀박질을 멈출 수 있었다. 식사 후 갑작스러운 운동에 놀랐는지 마카타 황녀의 숨은 턱끝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헉…… 헉……. 당신, 방금까지만 보면 공자 왈 맹자 왈만 하는 그런 부류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범한 구석도 있네?”

“제가 그런 백면서생이었다면 어찌 카간께서 제 군재를 칭찬하셨겠습니까.”

“감히 황녀인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댄 것에 대한 이야기야. 몸을 사릴 줄만 알았는데 제법이잖아?”

“주변에 오늘의 밀회가 들킬까 급박한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진작에 자가께서 목소리를 낮추셨어야지요.”

정신없이 뛰어 도착한 곳은 웬 담벼락 아래였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지만 최대한 담장에 몸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심양 땅에서 내 도포와 갓은 너무나 눈에 띄었으니까.

“밀회라……. 헌데, 당신이 감히 나를 거절할 거라는 생각을 어떻게 했겠어. 그런 상황에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게 이상한 거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 내 몸에 손을 댄 건 승낙의 의미로 봐도 되는 거지? 당신이 아닌 다른 자였다가는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러려고 한 일은 아닙니다. 일단 숨부터 고르시고 감정도 가라앉히시지요.”

꽤 먼 거리를 뛰었는데도 황녀가 잘도 따라온 것이 대단하긴 했다. 그래도 유목민 왕조의 황녀랍시고 평소에 운동은 좀 하는 건가.

달아오른 얼굴로 가슴에 손을 대고 숨을 고르는 황녀를 바라보는 기분이 조금 묘했다.

“자, 그럼 이야기해 봐. 여기까지 날 끌고 온 진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방금 드린 말씀이 전부입니다. 다만 황녀 자가를 남들의 시선에서 숨기고 싶었을 뿐입니다.”

“뭐? 그게 다라고?”

기대와는 달랐는지, 어이가 없었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지막이 새어 나온 것은 잠시 뒤였다.

‘쵸쵸’?

“좀 더 크게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원래 청국어를 쓰던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황녀의 입은 조그맣게 오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에 저절로 무릎은 굽혀지고 머리는 그녀를 향해 가까이 내려갔다.

그때였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술에 웬 따스함이 스치고 지나간 것은.

***

“기대되네, 당신이 내게 존대를 하지 않을 날이.”

황궁의 정문인 대청문 앞에서 헤어지기 전, 황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한참을 얼어붙어있던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것도 그녀였다.

마치 몸 어딘가에 도장이라도 찍힌 기분이었다.

※ 작가의 말

1. 마카타 황녀에 대해

마카타 황녀의 나이가 어린 것은 홍타이지가 아들에 비해 딸들을 늦게 낳았기 때문입니다. 첫째아들은 열일곱에 낳은 주제에, 첫 딸은 스물아홉이 되어야 낳았더군요. 첫째 황녀는 이미 시집간 지 오래고, 마카타 황녀는 홍타이지가 서른셋, 1625년에 얻은 둘째딸입니다.

원 역사에서 첫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의 막냇동생에게 시집간 사연은 고증입니다. 그녀의 다음 남편이 되는 보르지기트 아부나이는 1635년생이거든요. 아부나이의 작위를 이어받은 에제이 칸의 조카가 말년에 반란을 일으킨 탓에 마카타 황녀의 인생은 꼬이고 말지만, 이번 생에는 그런 일이 없길 빌어줍시다.

2. 쵸쵸

<만문노당>에 기록된 만주어 욕설입니다.

풀버전은 ‘아마이 쵸쵸’, ‘애비 X같은’이라는 뜻입니다.

‘쵸쵸’만 떼어놓으면 무슨 뜻일지는 독자 분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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