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한제한(以漢制漢)
대청문 앞 너른 마당,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황녀가 기둥 사이로 사라지고 조금 시간이 흐른 후였다.
사하보로 향해야 하나, 아니면 심양관으로 향해야 하나. 시간이 애매했다.
발걸음은 갈팡질팡했고, 걸음을 옮기는 내 머릿속 역시 온통 뒤죽박죽일 뿐이었다.
‘도대체 황녀는 무슨 생각인 거야. 그 뜻 모를 제스처는 또 뭐고, 시집까지 다녀온 아가씨가.’
입술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아니, 빼앗긴 것은 맞나.
‘쵸쵸’라는 말만 남기고는 자신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검지와 중지를 모아 천천히 원을 그리듯 쓰다듬던 황녀였다. 뜻 모를 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을 참다못해 머리를 들이밀었는데, 내려가던 입술에 와닿은 것은 뜻밖의 것이었다.
‘만주족 풍습이 원래 그런 건가? 아니면 더 다가오지 말라는 표현이었던 건가?’
황녀는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던 제 손가락을 내 입술에 지그시 눌렀다. 영문도 모르고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눈빛에서 마치 주술이라도 부리는 양 경건하고 비장한 감정이 비치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짓이냐고 쏘아붙이려던 말은 반대쪽 검지를 제 입술에 세워 함구할 것을 명하는 황녀에 의해 막혔다. 그리고 내 입술에 닿아있던 그녀의 손가락은 천천히 입술의 윤곽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눈 뜨고 코가 베이는 기분이었다. 주위에 인적이 없는 것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도망칠 생각 마. 난 당신을 가지고야 말 테니까.’
입술을 한 바퀴 돌고 인중까지 올라온 온기는 도발적인 전언만을 남기고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고운 손이 치워진 자리에는 묘한 미소를 짓는 황녀만 보일 뿐이었다.
마치 주술과도 같은 손짓에 혼이 뽑혀나간 것 같이 어질어질했다. 아니, 정말로 혼이 뽑힌 것이 맞나. 그 후로 그녀의 손짓을 따라 홀린 것처럼 황궁을 향하게 되었으니.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은 분명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 향에 취했다가 숨겨진 가시에 찔린다면, 그 가시가 품은 독이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될 것이다.
***
그렇게 겨울이 한 번 더 지나갔다.
나는 겨울 내내 사하보로 매일 같이 출퇴근을 반복해야 했다. 말을 타고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으나 어쩌겠는가, 내 몸이 하나인 것을.
시강원의 업무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 이상 청을 섬기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있었으나, 정식으로 잘안 장긴에 임명된 이후로는 잠만 심양관에서 잘 뿐 사실상 청의 신하처럼 일하고 있었다.
성문이 닫히기 직전 심양성에 도착해서 바로 황궁으로 불려가 밤늦게까지 계책을 논의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죽을 맛이었다.
주변의 토지를 흡수해 규모가 커진 사하보 농장은 이제 하나의 마을을 방불케 했다. 수천 명이 거주하는 규모가 되었으니 조금 과장해서 청나라 안의 코리안 타운이 되었다고나 할까.
비교적 상류에는 농지가, 하류에는 가죽 공방과 대장간, 그리고 창고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평안도에서 넘어온 농부들만 데리고 맨땅에서 농지를 일궈야 했던 작년에 비하면 눈을 씻고 봐야 할 정도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충신의 상단이 세자빈의 손발이 되어 들여오는 조선산 상품들 역시 날로 늘어났다. 강빈은 고위층에게 주문받은 사치품을 이문을 붙여 넘기는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금주에서 벌어진 큰 승리에서 비롯한 전쟁 특수가 심양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평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심양성 외성부에 고려점이라 이름 붙은 점포 하나가 열렸다. 사하보에서 수확한 곡물을 주로 거래하는 점포였지만, 조선에서 들어온 옷감이나 잡가죽으로 만든 향피 또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렇게 벌어들인 은자들은 그대로 사하보로 재투자되었다. 농지는 점점 넓어지고, 추가로 사들인 조선인들은 사하보에 정착해 넓어진 농지를 일궜다. 여름이 지나고 이 넓은 땅이 황금빛 물결로 일렁일 것을 상상만 해도 아찔할 지경이었다.
한편, 금주 전역의 전리품으로 하사받은 조선인들은 빈 벌판에서 이리저리 굴려졌다. 그들을 굴리는 것은 머리에 짐승 복면을 뒤집어쓴 악귀들이었다.
“그따위 속도로 장전하다간 겨울잠 자던 곰도 깨어날 때가 되어 니놈 대가리가 몸과 분리될걸?”
“이 모래가 화약이라 생각해도 흘릴 거냐? 화약 한 근 사려면 향피를 몇 장이나 만들어야 하는 줄 아냐?”
“나 때는 말이야, 어? 장긴 나리께서 외우는 총가 한 번 틀렸다가는 남원폭격한 채로 강가까지 다녀와야 했어. 훈련 편하게 받는 줄 알아!”
확언하건대, 난 대원들을 저렇게 가르쳤던 기억이 없었다.
청출어람이란 단어가 쓸데없는 자리까지 발휘된 모양이었다.
곰, 표범, 늑대, 멧돼지, 산양. 별의별 탈을 뒤집어쓴 자들이 몽둥이를 흔들거리며 가르치는 판에, 그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을 장정 따윈 없을 텐데 말이지.
훈련받는 장정들도 필사적이었다. 사냥만 나가면 해수를 쓸어버리는 호포대의 명성은 근방을 뒤덮고 있었으며, 금주 전역에서 세운 전공까지 합하면 이 심양 바닥에서 그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전쟁 후 대원들에게 하사된 전리품이 있었고, 사냥이 끝나고 가죽을 쓸어올 때마다 경비를 제하고 지급된 인센티브도 꽤나 짭짤할 것이었다. 노예에서 해방된 이들에게는 파격적인 정도의 출세였다.
그들이 품는 아메리칸드림, 아니 만주몽은 꿈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정기적으로 나가는 사냥에 참여하는 인원수가 나날이 늘어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도리어 찍어내는 총이 모자라 대장장이를 더 들여야 할 정도였으니.
“이게 한 부대가 출동하는 모습이냐, 아니면 산군의 생일잔칫날 모습이냐? 나 참.”
여느 때처럼 사냥을 나가던 어느 날 충신이 꿍얼거리던 것처럼 짐승탈을 쓴 자들은 점점 수가 늘어났다. 호포대 안에서 자신이 쓸 짐승탈을 직접 잡아 만드는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가 된 모양이었다.
“축하한다! 너도 이제 어엿한 호포대의 일원이구나!”
“감사합니다! 이게 다 지도해주신 덕분입니다!”
후임이 총을 빌려 선임의 탈과 같은 종류의 짐승을 잡고, 탈이 완성되는 날 새로운 총을 함께 지급받는 것은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대원들은 쓴 탈의 종류에 따라 자연스럽게 동질감과 경쟁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후임이 선임이 되어 새로 들어온 장정들을 계속해서 훈련시켰고, 부대의 규모에 맞게 위계 역시 새롭게 재구성되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나서는 최초의 호포대 오십 인이 각각 이십 명씩을 통솔하게 되면서 잘안 하나의 편성이 완료된 것이다.
탕! 타탕!!
그렇게 홍타이지가 직접 호랑이 부대라고 이름 붙여준 타스하 잘안이 그에게 선을 보인 것은 여름이 다 되어서였다. 앓던 지병과 애첩의 죽음으로 몸이 축나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 카간이었다.
“아주 좋다! 아주 좋아! 전원이 이백 보 거리에서 일발필중이라니!”
“카간, 진정하십시오.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도르곤,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한수가 키워온 저 병사들을 봐라. 저자들의 총탄이 한군을 찢어발기는 상상을 해 보란 말이다!”
반년 만에 짐승탈과 줄무늬 옷을 착용한 정예 조총수 일천을 마주한 홍타이지는 초췌한 안색에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옆에서 보좌하던 도르곤이 오히려 말려야 할 지경이었다.
호포대가 고작 오십 명 규모였던 시절에도 명군의 지휘관 저격으로 엄청난 전과를 올렸던 터였다. 그런 정예병이 스무 배로 늘어났으니 기쁠 만도 했다. 그들의 앞에서 방패 역할을 해줄 쿠투러 오백 명의 훈련도 카간을 만족시킨 듯했다.
그러나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카간을 바라보는 내 콧구멍에 어디선가 전장의 화약 냄새가 다시 스멀스멀 흘러들고 있었다. 그동안 심양관에 요서에서 일어난 전황들이 계속해서 보고되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난 2월, 송산에 포위되어 있던 명나라 사령관 홍승주가 청에 투항함으로써 금주에서 일어났던 전역은 마무리되었다. 이제 명의 야전군은 전부 분쇄되었고, 요서에 남은 명의 세력은 오삼계가 이끄는 패잔병 일부에 불과했다.
그 병력 역시 산해관과 영원성만 겨우 지킬 수준일 뿐, 요서를 활개 칠 청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터였다. 명의 영향력이 증발한 요서에서 청군이 약탈해온 물자와 노예들이 불러온 전쟁 특수도 슬슬 가라앉고 있었으니,
호포대에게 홍타이지가 기뻐하며 내려준 은자를 들려서 돌려보내는 와중에도 코끝에 감돌던 전장의 화약내는 가시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한윤을 찾아가겠다며 주먹을 흔들거리는 충신을 진정시키는 내 귀에 웬 내관의 목소리가 닿은 것은 그때였다.
“카간께서 밀실로 들라 하셨다고?”
“예, 그렇습니다. 장긴.”
예상하던 게 결국 왔구나. 뒷목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금주가 함락된 이후로 줄곧 카간과 머리를 맞대온 결과물이 실행될 때가 온 것 같았다.
도착한 밀실에는 홍타이지와 도르곤이 이미 앉아 있었다. 그밖에 낯선 이가 하나 더 말석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옷차림이 주는 위화감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지금까지 청의 공복을 입고 있는 이 중 변발하지 않은 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낯선 남자의 머리에는 있어야할 변발 대신 명나라식 결건(結巾)이 올라앉아 있었다.
“왔느냐, 안한수.”
“늦어서 송구하옵니다. 폐하.”
“네놈이 명을 받고 시간을 허투루 허비할 자도 아니고, 뭐 좋다. 앉거라.”
말을 마치자마자 쿨럭거리며 마른기침을 뱉어내다가 소매에서 수건을 내어 입가를 닦아내는 홍타이지였다. 정말로 명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지금부터는 한조의 말을 쓴다. 여기 앞에 앉아있는 홍 총독은 아직 우리말을 하지 못하니까.”
“알겠습니다. 헌데 홍 총독이라 하시면…….”
“금주에서 적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자다.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
송산에서 투항했다던 명군의 사령관, 홍승주였다. 그가 금주로 떠날 때, 명에서 계료총독 직책을 주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기에 카간도 총독이라 부르는 듯했다.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는 그에게서 묘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이 자가 금주에서의 대전략을 고안해냈다던 자입니까?”
“그렇다. 생각보다 젊은 모습에 놀랐는가? 총독.”
“제 병력을 박살낸 자가 이토록 어리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폐하.”
홍승주에게서 전해지던 경계심은 이윽고 경탄의 감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곧이어 너털웃음을 짓는 전직 사령관이었다.
“이런 전략가가 폐하의 아래 있었으니 제가 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천명이 다이칭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이제 이 자리에 한 명을 더 부른 이유를 알았는가?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카간의 눈짓을 받은 도르곤이 소매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펼쳤다. 익숙한 요서 지방의 지도였다.
“적의 주력을 소멸시키고 금주 일대가 우리 손아귀에 들어오면서 전황은 역전되었다. 오삼계는 산해관에 남은 병력을 끌어 모아 최후의 일전을 펼치려 하겠지만, 그 의도는 우리 장긴의 계책에 의해 곧 분쇄될 것이다.”
이번에 홍타이지의 소매에서 나온 것은 웬 서찰 한 장이었다. 그것을 보고 직감할 수 있었다. 카간과 반 년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깔아온 밑밥이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폐하, 계책이라니, 그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안 장긴, 제안을 한 것은 너이니 직접 설명하도록 해라.”
청이 산해관 일대 요서 지방에서 명군과 일전을 벌이는 사이, 명나라의 후방은 곪다 못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정묘호란이 일어났던 시절부터 반란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중에 세력이 가장 강성한 것은 이자성이었다. 이미 내가 금주에서 사투를 벌이던 시절에 낙양을 점령하고 횡포를 부리던 명의 친왕을 주살해 인심을 얻고 세력을 불려가고 있었다.
“제가 정축년에 동관에서 전멸시켰던 자의 세력이 다시 부활했단 말씀이십니까?”
“총독, 정축년이면 사 년 전의 일이다. 이미 자네가 진압했던 자들이 낙양과 개봉, 양양까지 함락시켰지. 그곳에서 북경까진 멀지 않다.”
원 역사의 이자성은 북경과 산해관에 남아있는 명나라 세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그의 말머리를 서쪽의 서안으로 돌렸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정보가 차단되어있던 원역사와는 달리 정보를 얻을 창구가 생겼으니까.
그래, 홍타이지가 소매에서 꺼낸 서찰은 이자성에게서 온 물건이었다.
“……이자성에게 끈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지만, 금주에서 우리 군이 한군을 격멸했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받은 서찰의 내용은…….”
“그자가 세력을 끌어 모아 북경을 향해 북상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북경을 쳐 떨어뜨리고 함께 산해관의 오삼계 병력을 멸한 다음, 천하를 나누자고 하더군.”
병세가 올라왔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마른기침을 연이어 뱉는 홍타이지였다. 그러나 침을 닦아내고 다시 드러난 그의 입가는 기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놈 같으니. 안 장긴이 제안했던 이한제한(以漢制漢)의 방식으로 오랜 숙원이던 산해관과 북경을 떨어뜨린다.”
쿨럭, 쿨럭. 이번 기침은 조금 거칠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간의 입가를 훔친 수건에는 시뻘건 기운이 퍼져 있었다.
“……내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말이지.”
※ 작가의 말
독자분께서 그려주신 호포대의 팬아트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상상을 뛰어넘은 얼룩무늬와 모피의 디테일, 그리고 플린트락 머스킷과 탄약을 담은 무장까지 세세하게 그려주신 것을 보니 제 글을 꼼꼼하게, 즐겁게 읽어주신 것 같아 저 역시 매우 기뻤습니다.
팬아트로 일러스트 그려주시고 사용까지 허락해 주신 구피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