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주위상계(走爲上計)
“……정말이십니까?”
“아직도 네놈의 충성을 받는 것은 탐나는 일이긴 하나, 마음을 고향에 두고 있는 자를 어찌 잡아두겠느냐.”
“황공합니다, 카간.”
말을 마치자마자 휘어져 웃고 있던 카간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평소의 냉철한 홍타이지의 모습이었다.
“너 정도라면 귀국해서도 고려 조정에서 중한 역할을 맡게 되겠지. 내가 너를 돌려보내겠다는 말을 지금 하는 이유를 알겠느냐?”
“……돌아가서도 카간께 입은 은혜를 잊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건방지게도 나를 섬기는 것을 거부하는 놈들이 아직 고려 조정에 우글거린다고 들었다. 내 그들의 기개 자체는 싫어하지 않으나, 다이칭 구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나 역시 복명척화파를 쓸어버릴 생각이었던 것은 홍타이지와 같았다. 그들 나름의 명분과 실리를 따진 파벌이라고는 하나, 분명 척화파라는 존재는 이후 조선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이 명령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역시 고려로 돌려보내긴 아깝단 말이지.”
“저 또한 그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응하려 들지 않은 심양관 파견에 자원했고요.”
“그 정도 야심이 있는 놈인 것은 알고 있었다, 안한수. 내 사람 보는 눈은 틀린 적이 없지. 그래서 마카타와의 혼인을 허락하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었어?
방금까지 나를 조선 땅으로 돌려보내겠다던 카간이었다. 황녀를 먼 곳으로 딸려보낼 리가 없으니 혼인 건은 영락없이 실없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네 핏줄에 아이신기오로의 피를 부어넣어라. 어차피 네가 없었으면 몽골의 코흘리개에게 시집보냈을 딸자식이다. 그 녀석에게 흐르는 다이칭 황실의 혈맥은 분명 네게 도움이 되겠지.”
“진심이십니까? 저는…… 그…….”
“어린 딸자식을 먼 땅으로 보내는 것이 조금 걸리긴 하나, 네놈 정도면 충분히 마카타에게 잘해줄 것이라 믿는다. 감히 일국의 황녀를 황궁 밖으로 빼돌릴 정도의 능력과 배짱이면 여자 하나 호강시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겠지.”
아뇨. 폐하, 그건 황녀 자가의 독단에 끌려다닌 것에 불과한뎁쇼?
하지만 감히 딸을 떨거지에게 내려주겠다는 카간 앞에서 이런 망언을 내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공허한 메아리만 입 안 가득 맴돌았다.
홍타이지는 내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듯했다. 껄껄 한참을 웃던 카간은 다시 거친 기침을 내뱉고 나서야 웃음을 멈췄다.
잠시 후, 소매로 기침의 흔적을 지운 후 드러난 카간의 얼굴은 낯설었다. 대청제국 황제의 얼굴이 아닌, 한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을 때 마카타에게 멀쩡한 짝을 찾아주고 가서 다행이구나. 내게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카간께서 다이칭 구룬을 통치하실 날은 사하의 모래처럼 많을 것입니다.”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 이미 도르곤에게 푸린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겨놓았지. 그 녀석이라면 잘 해낼 것이다.”
어린 자식의 이름을 언급하고는 다시 한참을 콜록거린 카간의 수염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방울지는 핏방울을 수습하는 홍타이지의 손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도르곤은 홍타이지가 죽은 후 그의 어린 아들, 푸린을 순치제로 즉위시키고 그에 버금가는 권력과 의전을 받으면서도 섭정왕의 자리에 만족했던 터였다.
‘당신, 그래도 일 년은 더 살아남을 거야. 엄살이 심하네.’
기억이 맞다면 홍타이지가 심양 황궁의 의자에 앉아 자는 듯이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는 기한이 조금 남아있었다. 청이 중원에 입성하는 일이 원래보다 이 년 정도 당겨졌긴 하나, 그것이 사람 목숨에 영향이 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헌데, 드디어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기쁨 사이로 작은 의구심 하나가 떠올랐다.
어째서 내 머리를 변발로 밀어버리지 못해 안달이던 홍타이지가 이토록 쉽게 나를 포기했을까?
***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군략을 논하느라 황궁에서 야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심양관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청주가 우리를 조선 땅으로 돌려보낸다 했다고?”
“예, 저하. 북경이 청국의 손에 들어가면 사실상 중원은 그들의 것과 다름이 없으니 볼모를 잡을 이유가 없는 것이옵니다.”
“낭보로다, 참으로 낭보로다! 안 자의, 네가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한 덕이다!”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세자는 잔뜩 들뜬 듯했다. 내 소매를 붙잡고 연신 감사를 표하는 세자의 기분이 전염될 뻔했으나 간신히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앞으로 할 일은 여전히 많았으니까.
“저하,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이르옵니다. 저희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야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
“옳은 말이다. 이제 무엇을 해야 좋겠느냐?”
“일단 임 장군을 자리로 부르소서. 저하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나이다.”
“네가 심양에서 내 힘을 빌릴 일도 있더냐? 핫핫.”
세자의 웃음에는 뼈가 숨어 있었다. 잘안 장긴에 임명된 후로는 세자의 아랫사람으로 행동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청에서 내린 업무로도 하루가 벅찼다.
뭐, 그래도 세자의 말이 날카롭지 않은 이유는, 결국 청을 섬기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절개를 지킨 사실을 세자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자와 나 사이를 벌리기 위해 도르곤이 부린 온갖 술수는 수포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웬 승려 복장을 한 남자가 들어왔다. 봉두난발이 마구잡이로 자란 중년이었다. 잠시 불타는 눈길을 내게 보낸 그는 얌전히 세자에게 엎드려 예를 표했다.
“임 장군. 제가 아침에 부탁드렸던 서찰은 완성이 되었습니까?”
“청의 앞잡이가 청을 위해 시킨 일을 어찌 할 수 있겠느냐! 분명 차라리 내 목을 치라 전했을 텐데?”
“장군, 저하 앞입니다. 무례는 그쯤 하시지요.”
사실은 이미 구면인 인물이었다. 심양으로 처음 향할 때 그는 평안병사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당시 비통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눈빛은 이제 적개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호란 때 끝까지 백마산성을 사수한 장수, 임경업이었다.
그 후에도 청에 복수할 일념으로 명과 내통하던 사실이 명의 사령관 홍승주가 포로로 잡히면서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천조의 은혜를 어찌 잊었단 말이냐! 네놈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대명에 합류해 오랑캐를 벌했을 텐데. 한스럽구나! 한스러워!”
“저하, 잠시 실례를 저질러도 되겠나이까?”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지 알겠으나, 적당히 하도록 해라, 안 자의.”
“예, 저하.”
임경업은 그 꼴을 하고도 세자 앞에서 여전히 한탄을 멈추지 않았다.
하긴 저 정도로 꽉 막힌 인간이니 내통한 사실이 들통나자 바다를 건너 탈출까지 해 가며 명나라로 넘어갔을 것이다. 상투 없는 봉두난발과 승려 복장은 그 변장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임경업의 머릿속을 훤히 알고 있었다. 스님으로 변장해 양주의 한 사찰에 은거했다는 사실을 말이지. 원래는 조선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임경업이 심양에 잡혀 와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장군. 아니지, 중추부사 영감. 저보고 은혜를 잊은 자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은혜를 잊은 자는 중추부사 영감이 아닙니까?”
“그것이 무슨 뜻 모를 말이냐, 이 애송이 놈아!”
“영감은 조선의 신하가 아닙니까? 대명이 내려준 은혜가 이 조선과, 세자저하께서 내려준 은혜보다 먼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놈의 명나라에 대한 의리. 아무리 고려천자 만력제가 왜란 때 내려준 은혜가 어마어마하다고는 하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의리도 호란 두 번으로 지켰으면 된 것이지. 무능한 황제가 몇 대나 거듭되면서 썩어 문드러져 붕괴 직전인 나라에 대한 의리는 챙겨서 무엇 한단 말인가.
고구마를 몇 개는 삼킨 듯한 기분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그 때문인지 혀는 쉴 새 없이 임경업을 향해 말을 쏘아대고 있었다.
“제가 영감께 오 총관에게 전할 서찰을 부탁드린 이유는 저하를 조선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을 터. 영감은 고작 대명에 대한 의리를 저하께 바쳐야 할 충성보다 중하게 여기시는 겁니까?”
“그…… 그것은! 고작 칠품관에 불과한 네놈 말을 어찌 믿으란 말이냐?”
“안 자의의 말이 옳다. 북경을 점령하면 나를 조선으로 돌려보내주겠노라고 청주가 약속한 것이 사실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세자가 끼어들어와 임경업의 입을 딱 다물게 만들어주었다. 눈에 서린 적개심은 여전했지만 그의 입이 닫힌 것만으로도 고구마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영감께서는 중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모르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직도 대명이 천조의 품격을 잃지 않고 튼튼히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엇이?”
“홍 총독이 이끌던 대명의 정예군은 금주에서 청군에 의해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중원을 휩쓸고 있지요. 곧 그들의 칼끝은 북경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럴 리가! 내가 들은 것과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영감께서는 고작해야 조선 땅에서 홍 총독에게 받은 서찰에 들은 정보만 접하셨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쪽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드릴 리가 없지요. 아니면 심양에 계신 홍 총독과 삼자대면이라도 시켜드리리까?”
아군을 일부러 속일 정도로 홍승주가 글러먹은 장수라는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다만, 임경업의 신뢰를 흔들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허장성세는 필요했을 것이다.
내 말을 듣고 점점 사태를 깨달아가는 임경업의 얼굴은 혈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 충격으로 끝나는 것이 그에게는 다행인 일이겠지만 말이다.
‘아저씨, 원 역사대로라면 당신은 김자점 손에 죽었어.’
명이 멸망한 후에 청에 저항한 죄를 사면받았음에도 조선을 돌아온 임경업에게 남은 운명은 죽음뿐이었다. 그가 명으로 탈출하는 것을 도와준 사람이 희대의 간신, 김자점이었으니까.
임경업은 겨우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 탈출을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던 김자점의 지시에 의해 장살(杖殺)당한 것이다.
허나, 지금의 조정에는 임경업의 탈출을 도울 김자점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캐낸 녹봉 비리로 이미 돌아오지 못할 귀양길을 떠난 지 오래였다. 아마 그래서 이렇게 심양까지 잡혀온 것이겠지.
“잘 들으십시오. 영감.”
몸을 일으켜 혼이 빠진 것 같은 임경업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천천히 무릎을 굽혀 그에 귓가에 또렷하게 내 의사를 박아 넣어주자, 얹힌 속이 풀리는 듯했다.
“세자 저하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대명에게 입은 은혜도 갚는 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 무슨?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이냐?”
“그래서 서찰을 한 통 써 달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제 머리가 좀 식으셨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임경업이었다. 눈동자를 불태우던 적개심도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분명 홍타이지는 북경을 점령하면 세자를 돌려보낸다고 이미 확약했다. 명의 수도인 북경을 청이 점령한다면 분명 대륙의 패자는 정해지는 것이나 다름없을 일이지만, 홍타이지가 한 가지 계산밖에 둔 것이 있었다.
“산해관을 지키는 요동총병관 오삼계에게 서찰을 한 통 써주십시오. 그에게 들어간 정보는 분명 대명의 조정까지 올라가겠지요? 맞습니까?”
“그렇다. 오 총관에게 정보를 보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윗선에도 보고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럼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그대로 서찰에 적어 보내십시오. 오랑캐의 대군이 산해관과 북경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으로 곧 쳐들어갈 것이라는 정보를 들은 임경업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본디 훌륭한 장수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다.
곧 북경이 처할 운명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되었겠지.
“그렇다면 황제께서 위급한 상황이 아니냐? 대명의 정예군이 전멸한 것이 사실이라면 북경 주위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까 영감께서 그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황제는 귀담아듣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그에 대비할 수 있겠지요.”
“그게 오 총관이란 말이냐? 그래서 나름대로 대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신장(神將)이라도 내려오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군사를 다루는 병법은 영감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위상계(走爲上計)라든지……,”
임경업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제야 내가 짠 계획을 조금이나마 알아챈 것인가.
능양군이 선조처럼 저 계책만 제대로 쓸 줄 알았어도 내가 심양까지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은 임경업이 더 잘 알고 있겠지.
경산에서 목을 매달았던 황제를 살려 보내면 역사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핏발 선 임경업의 흰자위를 바라보면서 내 가슴도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 작가의 말
1. 임경업
이미 일전에 한번 홍타이지의 입에서 언급되었었죠. 주인공이 참전하기 전, 이전의 금주 전투에서 파견대장으로 조선군을 이끌었던 장수가 임경업입니다.
그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 않은 이유가 있었죠. 임경업은 이미 그때부터 명과 내통 중이었습니다. 원역사에서는 그 일이 드러난 후 체포령이 내려지지만, 김자점과 심기원의 도움으로 탈출해 명으로 가 평로 장군으로 임명받고 명의 장수로 활동하게 됩니다.
뒤에 이어지는 임경업의 운명은 작중 언급과 같습니다. 청군에 포로로 잡혀 북경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사면령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더니, 심기원의 역모에 연루되어 국문 중 맞아 죽고 말죠.
2. 주위상계
삼십육계(三十六計) 패전계(敗戰計) 주위상계(走爲上計).
전사피적(全師避敵), 좌차무구(左次無咎), 미실상야(未失常也).
자기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강적을 피했다가 적절한 시기로 변화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물러난다고 해서 싸워서 이기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