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중국은 많을수록 좋다
‘중국은 많을수록 좋다’
이 격언은 이 시대에도 유효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중원이 분열되어 있어야 그 틈바구니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거란과 남송이 남북을 양분하던 시절 이후로 한반도에 세워졌던 국가들은 통일된 강력한 중원 세력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했다.
물론 숭정제 하나를 살려 보내 남명의 구심점으로 삼는다 해도, 일이 뜻대로 풀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중원의 분열이 고착화되기는커녕 호흡기만 달아준 채 버티는 시간만 늘려주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잃을 게 없는 도박임은 분명하다.’
숭정제가 불타는 북경성과 함께 장렬히 산화한다면 원 역사대로 이자성군을 섬멸하고 북경에 입성 후 조선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명의 마지막 황제가 장강 너머 남경으로 도피하는 데 성공한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과정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은 조선에 해가 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명의 심장부를 삼키고 대세를 굳힌 홍타이지가 숭정제 하나가 살아나갔다는 이유로 약속을 깨진 않을 것이니까.
홍타이지는 산해관과 북경을 피해 없이 삼킬 수 있다면 그 정도는 백 번도 승인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권위 외엔 아무것도 없는 숭정제를 살려 오삼계를 산해관에서 치울 미끼로 만들자는 계략에 카간의 찬동을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건 적의 우두머리를 살려 보내는 것에 약간의 난색을 표하던 도르곤도 결국 찬성으로 돌아섰다.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청 입장에서는 금싸라기 땅이나 다름없는 화북을 삼키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으니까.
‘분명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내가 심양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등을 밀어준 것은 카간과 예친왕이었으니까.
원 역사에서 청이 운 좋게 대륙을 삼킨 것에 비하면, 나 때문에 걸림돌이 몇 개는 더 생기는 셈이었다. 카간과 예친왕 본인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하지만 결국 조선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그 찜찜함을 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슬슬 카간에게 받은 총애의 대가가 피부로 느껴지고 있는 판국이기도 했고.
어찌 잘안 장긴에 불과한 한윤이 카간이 총애하는 자를 찾아와 대놓고 깽판을 칠 수 있겠는가. 그날의 돌출 행동은 아마 나를 고깝게 보는 세력의 총의가 드러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
박힌 돌은 늘 굴러들어온 돌을 경계하는 법. 카간이 아쉬워하면서도 나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뭐, 어쨌건 결국은 서로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겠어.
나는 세자시강원의 떨거지에서 꽤나 큰 출세를 해 힘을 쥐었고, 홍타이지는 생전에 북경을 점령하고 아비의 한을 풀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도면 신세는 충분히 갚은 셈이지.
한편, 장기말로 쓸 임경업을 굴복시키는 데 세자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에게도 이 구상은 미리 공유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내 발상을 들은 세자는 조선의 국익보다는 다른 것에서 기쁨을 얻은 듯했다.
‘저하의 얼굴이 이토록 풀린 것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사옵니다. 무엇이 그리도 기분이 좋으시나이까?’
‘안 자의, 나는 네가 청주의 눈에 띈 이래로 마음 졸이지 아니했던 날이 없다. 내 신하를 청국에 뺏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제가 어찌 세자저하를 버리고 타국을 섬기겠나이까. 괜한 걱정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하는데,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허나 이 이야기를 들으니 너는 그동안 조선을 위해 겉으로 청주를 섬기려 했다는 것이 확실하구나.’
‘저하…….’
‘이 일은 내가 죽어서도 뼈에 새겨 잊지 않을 것이다. 고맙다.’
내 손을 붙잡고 연신 고개를 숙이던 세자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청의 볼모로 심양에서 사는 내내 청과 조선 사이에 끼어 마음고생이 심했을 세자였다. 그러나 내가 온 이후로 조선으로부터 공물과 원군을 요구하는 청의 압박에서 벗어나면서 스트레스가 많이 줄어든 듯했다.
어느 날은 캐치볼 도중 세자에게서 극존대를 폐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기도 했을 정도였다. 형제지간처럼 자신을 편하게 대하라는 세자였으나 아직은 주위의 시선이 염려되어 둘만 있는 자리에서만 충신을 대하듯 세자를 대하곤 했다.
“경업은 안 자의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할까? 서찰을 쓰겠느냐, 쓰지 않겠느냐?”
“신이 저하의 명을 어찌 거역하겠나이까. 성심을 다해 따르겠나이다.”
세자의 물음이 날카롭게 우물쭈물하던 임경업의 옆구리를 찔렀다. 마치 나와 한 몸이 된 것마냥 적절한 타이밍에 가해온 찌르기였다. 그 탓인지, 왕이 된 그의 밑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국 임경업은 내가 불러주는 대로 서찰을 작성해야 했다. 서찰의 마지막 부분에 수결을 남기는 늙은 장수의 손길이 부들거리고 있었다.
***
“보고! 태원을 함락시키고 북상한 이자성군이 거용관을 돌파했습니다!”
도르곤의 군세를 따라 몽골 초원을 우회해 장성을 넘자마자 들려온 보고였다. 산해관과 거용관 사이, 고북구(古北口)라 불리는 작은 관문을 거의 무인지경으로 통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선두를 맡은 팔기군 기병들은 먼저 나아가 백오십 리 전방 북경 주위를 정탐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감시망에 이자성의 군세가 잡힌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진군하는 속도가 꽤 빨랐다.
“이 전쟁만 마치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거지? 돌아간 후에 수향이에게 해줄 이야기가 많구만. 기대가 된다.”
“불길한 소리는 그쯤 하십시오. 사형.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죽으려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려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충무공의 명언을 빌려왔지만 딱히 충신의 전의를 고취시키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꼭 저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지 않던가.
어느 때고 눈먼 화살이나 총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 전장이었다. 불길한 일은 사소한 것이라도 분쇄하는 것이 옳았다.
“인마, 심양과 한양에 내 무사 귀환을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옥황상제께서 내 목숨을 거둬 가시겠냐?”
“가족을 제외하면 전부 사형이 건드린 여인들이 아닙니까? 천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그 여인네들이 나 대신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있으니 아무렴 어떠냐. 출진하는 길에 요상한 액땜도 받았으니 죽는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는다.”
심양에서 건드린 여자가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한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충신의 몸짓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입술을 쓰다듬은 손가락으로 상대의 입술을 만지고는 인중까지 훑어 올라가는 손동작은 분명 황녀가 내게 했던 동작이었다.
“사형, 그건 웬 해괴한 몸짓입니까?”
“여기 무당 말로는 인중이 사람의 혼과 연결된 곳이라 하데? 상대방의 혼과 내 혼을 묶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라 하더라.”
나를 가지고야 말겠다던 황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것은 왜일까. 그제서야 황궁 앞에서 그녀가 했던 몸짓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런 거룩한 의식을 사통하던 여자한테서 받아도 됩니까?”
“뭐, 인마? 한수 너도 좌명이놈 누이 놔두고 황녀님이랑 놀아나지 않았냐. 황녀님은 이런 거 해주지 않더냐?”
“그건…….”
“부뚜막에 같이 올라간 고양이 주제에 날 비난하려고? 넌 그럴 자격 없다, 자식아. 지금 입은 갑주도 누구에게 하사받은 것인지 다 아는데 말이야.”
아니, 댁처럼 심양 와서도 여자를 양손을 동원해야 겨우 셀 정도로 갈아치운 사람이랑 내가 같나? 더구나 내가 먼저 황녀를 노린 것도 아니고, 마음 같아서는 발목 안 잡히고 조선으로 튀고 싶은 심정인데.
하지만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팔기군 양백기(鑲白旗) 특유의 붉은 테를 두른 흰 두정갑을 입은 탓에 온통 얼룩무늬인 부대 한가운데에서 나만 튀고 있었으니까. 황녀가 출진하는 길까지 따라 나와 전해준 갑옷을 어찌 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사히 돌아와야 해. 꼭이야.’
다시 한번 내 입술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훑던 황녀의 눈은 물기로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 자리에서 머리끈까지 풀어 내 갑옷에 묶어주기까지 한 마당이었다. 황녀의 생각보다 두꺼웠던 내 체구 탓에 갑옷을 고정할 끈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그 장면을 출진하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봤을 터였다. 그렇게까지 황녀가 공개적으로 나선 것을 보면 그녀 역시 카간에게 언질을 받기라도 한 건가.
그 일 때문에라도 충신의 언변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이미 호포대 내에서도 대장이 곧 황족이 된다며 놀리는 소리가 돌던 터였다. 번져가는 불길을 막으려면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이러다가는 올 때는 혼자였는데 돌아갈 때는 둘이 되게 생겼다. 처를 여럿 둘 수도, 양반의 여식을 첩으로 들일 수도 없는데 한양에 두고 온 하연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 일로 머리가 계속 복잡한 상태였으나, 충신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괜히 몸에 익지 않아 불편한 갑옷만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왜, 대청국의 부마가 되면 나 같은 하찮은 니루 장긴 정도는 손끝으로 눌러 죽이겠다는 표정이다?”
“제가 사형처럼 속이 좁은 사람도 아니고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럴 것이었으면 직속상관의 지위를 이용해서 괴롭혔겠지요.”
“예. 예. 알겠습니다. 잘안 장긴 나리. 명령만 내리시지요.”
“입을 다물라는 명령을 내린다고 사형이 들을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쓰게 웃음 짓는 충신이었다. 그가 방금 뱉은 말은 비꼬는 투였으나 화가 나진 않았다. 몇 년을 부대껴오면서 이 인간이 이러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말들을 연신 뱉어내는 와중에도 충신의 목울대는 계속해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마른침을 계속해서 삼키는 것이 분명했다. 본인도 긴장이 되니 내 긴장 역시 풀어주려는 것이겠지.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사형. 이번 전장에서는 그 한씨 성을 가진 노친네에게 갚아줘야 할 빚이 있지 않습니까.”
“크흠. 누가 긴장했다고 그러는 거냐? 그 영감탱이 이야기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긴 한다만.”
애써 헛기침을 하며 바람이 차갑단 핑계를 대고 등 뒤에 매달아놨던 짐승 복면을 푹 뒤집어쓰는 충신이었다. 사람 몸에 범 대가리를 한 자가 말을 타고 옆을 내달리는 모습은 꽤나 기괴했다. 저러니 김식이 오줌을 지린 것일까.
호포대의 니루 장긴, 전원은 나처럼 호랑이 복면을 사용하고 있었다. 충신이 개나 소나 쓰는 멧돼지 복면이 마음에 안 든다며 니루 장긴 취임 기념으로 호랑이를 잡아 머리 가죽을 뒤집어 쓴 것이 전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부대원들의 지지를 받은 자가 직접 사냥한 범 대가리를 떼어내 쓰고 우두머리 자리에 오른다.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만들어진 전통이라 간섭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호랑이를 잡을 무력이 있고, 부대원들의 지지를 받는데다, 대가리를 떼내 가치가 떨어진 호피의 차액을 지불할 수 있는 자만이 지휘관 자리에 오른다. 합리적인 선별이었다.
그들의 관리 덕분인지, 독한 훈련 덕분인지. 꽤나 무리가 될 것이라 예상한 행군이었음에도 목적지까지 오는 길에 낙오된 대원은 없었다.
대원들이 걸어온 길은 심양과 금주 사이 거리의 세 배는 족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군에 낙오자가 없었다며 보고를 마친 김 갑사는 뿌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본진에 합류해 야영지를 꾸리고 나서도 나는 쉴 틈이 없었다. 이자성군이 거용관을 돌파했다는 보고가 사실이라면 사령관인 도르곤과 의논해야 될 일이 산더미였다.
한시가 급했다.
도르곤의 군막 안은 장수들로 바글바글했다. 북경 방면을 담당하고 있는 2군의 지휘관들은 전부 모인 듯했다. 한윤의 얼굴 역시 그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무시하고 상석에 앉아있는 도르곤을 향해 직진했다.
“역시, 안한수 너라면 부르지 않아도 올 줄 알았다. 전령을 받고 온 것이겠지?”
낮고 묵직한 도르곤의 목소리는 잡장들이 군략을 나누던 소음들을 단숨에 잠재웠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장수들의 시선이 나와 도르곤에게 쏠렸다. 이번 북경 전역을 설계한 자 중 하나가 나라는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거용관이 그렇게 쉽게 뚫릴 줄 몰랐습니다. 산해관 방비에 비하면 종잇장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역시 한조 놈들은 우리를 상대하는 산해관 쪽에 마지막 여력을 집중시킨 것이 맞았다. 반란군의 힘을 빌어 뒤를 치자는 네 계책이 정확히 맞아떨어졌군.”
북경의 북서쪽 일백이십 리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거용관(居庸關)은 말 그대로 평범한(庸) 사람이 머물더라도(居) 요새(關)가 된다는 이름값처럼 이민족을 방어하는 천혜의 요새였다.
아무리 이자성의 군대가 강성하다고는 하나 그런 요새가 생각보다 너무나 빨리 함락당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유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그쪽에도 훌륭한 책사가 있는 모양이다. 태원을 점령한 후에 굳이 장성 너머로 우회해 한조 놈들의 뒤통수를 치다니, 탐나는 군략이야.”
“태원에서 나는 석탄이 북경과 그 인근의 땔감을 책임지고 있지 않습니까. 곧 북경성이 마비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마 거용관이 떨어진 것도 같은 이유겠지요.”
“아무리 한군이 허수아비라지만 그래도 공성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태원을 점령해서 적의 힘을 빼 놓고, 거용관에서는 또 적절한 군략을 사용했겠지. 훌륭하다.”
북경이 위치한 화북지역의 삼림은 이미 오래전에 고갈된 관계로 땔감으로 쓰이는 자원은 석탄이 유일할 터였다. 그 공급이 끊어지면 당장 병장기의 유지는 물론이고 입에 들어갈 밥부터 구하기 힘들어진다.
그리고 이자성군이 장성 너머로 우회해 북경의 북쪽 관문인 거용관을 들이친 덕에, 남쪽만을 주시하며 반란군의 움직임을 경계하던 명군 입장에서는 대비할 틈도 없이 적이 목젖까지 들이닥친 격이 되고 말았다.
아마 나나 홍타이지가 이자성군의 입장에서 군략을 짜도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이자성은 함부로 얕봐서는 안 될 자가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북경성 역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습니다. 예친왕 전하의 판단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난날 몇 차례에 걸쳐 북경 주위를 약탈할 때도 털끝 하나 보이지 않던 놈들이다. 그런 오합지졸들이 북경성을 지키고 있다면 함락은 기정사실이겠지.”
“그렇다면…….”
“일단 카간과 약조한 대로 우리는 산해관이 우선이다. 가까운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다 상황이 급변하는 즉시 개입한다.”
수염을 쓰다듬던 도르곤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으로 변했다. 그의 눈은 장막 너머, 멀리 북경성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태원으로 파견한 간자에게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들어왔지. 네가 도착하기 직전에.”
“아무 말씀이 없으신 것을 보니 예상대로인 모양이군요.”
“그래, 근거지에서 멀어지다 보니 본디 도적놈이던 근본이 새어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말을 마친 도르곤은 방금까지 읽던 것이 분명한 문서 하나를 건넸다. 화북 전역에 공급하는 석탄 덕분에 은자를 쌓아오던 태원이 약탈로 잿더미가 되었다는 보고였다.
도르곤의 말대로 도적의 본성이 깨어난 것인지,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나머지 보급을 약탈에 의존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건 중요한 것은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이었다.
“홍승주 총독의 입맛이 꽤나 쓰겠군요.”
“혹시 모르지 않느냐. 오삼계가 지금이라도 산해관을 비우고 달려오고 있다면 북경성이 불타는 일은 막을 수 있을지도.”
“그랬다면 카간께서 먼저 전령을 보내시지 않았겠습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팔기군 복장을 한 전령이 군막의 입구를 헤치고 뛰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웬 전령이냐? 어디서 온 자냐?”
“급보! 북경성 서북쪽에서 나타난 군세가 공성을 시작했습니다!”
“뭣이?”
앉아있던 도르곤은 전령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도르곤의 뒤를 따라 나서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북경의 성벽 위에서 오른 것이 분명한 연기 몇 줄기가 저 멀리 하늘을 가르는 모습이었다.
※ 작가의 말
또다시 전쟁 파트에 접어들어 낯선 지명들이 연달아 나오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를 첨부합니다.
전편들에서 언급 드렸다시피, 당시 만리장성은 산해관만이 최후의 방어선으로 기능하고 있었을 뿐, 장성 사이의 빈틈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청은 입관 이전까지 대략 4차례에 걸쳐 북경 인근을 약탈하는데, 그 약탈은 산동 지방의 제남, 지금으로 따지면 산둥성 지남시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북경과 제남의 거리는 압록강에서 수원까지의 거리와 맞먹습니다.
원역사에서 이자성군은 북경 남쪽에 숱하게 설치된 성을 모두 치는 대신, 북경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남서쪽의 태원만을 함락시킨 후 장성 너머를 돌아 북경의 관문인 거용관을 함락시키고 북경에 다다릅니다.
작중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거용관 앞에는 팔달령이라는 요충지가 있는데, 이자성은 그곳에 주둔하는 명군의 발을 기만 작전으로 묶어놓고 석협관이라는 요로를 통해 팔달령을 포위, 격멸한 후 거용관까지 함락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명나라의 명줄은 끝에 다다르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