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황제와 반란군
“폐하! 폐하!”
옥좌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주유검의 눈을 뜨게 만든 것은 내관 왕승은의 목소리였다. 그의 급박한 목소리는 황제에게 아련히 남아있던 잠기운마저 달아나게 만들었다.
“짐이 잠시 잠이 든 모양이구나. 그래, 무기를 들고 성벽에 올라갈 이들을 모아온 모양이지?”
황제의 삶은 고단했다. 적어도 주유검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애써 다스리며 잠기운을 마저 쫓았다.
살해위협을 겪던 황자 시절을 보내고, 열여섯의 나이에 제위에 올라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지도 어언 십오 년이 흘렀다. 그렇게 무너져가는 사직을 일으켜보고자 온갖 정책들을 펴가며 몸을 갈아왔다.
그러나 그의 손아귀에 남은 것은 텅 빈 금고와 만성피로뿐이었다. 앞에 선 왕승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은 반란군이 쳐들어온 탓에 며칠째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이라고 황제는 생각했다.
“현재 전황은 어떠하냐. 여전히 내성의 성벽은 잘 버티고 있느냐?”
사실 전황은 좋지 않았다.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에게서 은밀한 정보를 받았을 때라도 남경으로 천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육로로 수천 리는 떨어져 있는 두 세력이 결탁해 북경을 협공할 것이라는 허황된 정보를 믿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 정보는 사실이었다.
파죽지세로 거용관까지 뚫고 북경성 근방까지 진출한 반란군 수괴 놈은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분봉해 왕으로 임명해달라는 요구사항을 들이밀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왕작을 삼킨 놈은 곧 제위까지 삼키려 들 것이었다. 이자성이라는 놈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분명 그놈의 눈에는 탐욕스러운 기름기가 번들거리고 있으리라.
버티자. 조금만 버티면 요동 총병관 오삼계가 짐을 구원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성벽을 막고 있으면…….
“폐하! 신의 불찰이옵니다!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무슨 말이냐, 왕 태감. 죽을죄를 지었다니? 너와 짐이 죽어야 할 곳은 성벽 위라고 하지 않았느냐?”
잠시 눈을 붙이기 전, 분명 황제는 환관에게 마지막 결사항전을 위해 궁궐에 남은 인원을 모두 모아오라 명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죽여달라니.
이상했다. 휑하니 스산한 바람이 구르는 태화전은 평소보다 더 쌀쌀하게 느껴졌다. 늘 사람의 기척으로 가득 차 있던 공간이었다.
아…….
그제서야 황제는 깨달았다. 이 태화전, 대명제국의 정전으로 쓰이는 건물 안에는 이제 자신과 왕승은 단둘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넓디넓은 자금성 안에 황조의 최후를 함께할 자는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도.
그리고 아마 북경성의 높은 성벽 또한…….
“폐하!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왕승은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는 듯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내려앉고 있었다.
“……아무도, 아무도 없단 말이지……? 관병(官兵)도, 대신도? 짐을 위해 싸워줄 자가 이젠 이 넓은 자금성 어디에도 없단 말이지……?”
“폐하!”
늙은 환관은 허리를 꺾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낼 뿐이었다. 핏발 선 황제의 눈가에서도 물방울이 하나 굴러떨어졌다.
스르릉.
검집이 울었다. 잠시 넋을 잃고 있던 황제는 말없이 옥좌에 기대어 놓았던 보검을 뽑았다. 반쯤 실성한 것처럼 입술을 찌그러뜨린 채였다.
김이 빠지는 것 마냥 코웃음이 묻어나는 황제의 발걸음은 황족들이 거주하는 내조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왕승은 한 명뿐이었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부디 고정하여 주시옵소서!”
평소 수많은 인기척으로 가득 차 있던 복도에는 늙은 환관의 목소리만 메아리칠 뿐이었다. 뒤이어 축 처진 황제의 검 끝이 돌바닥을 긁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이자성군의 때 이른 북경 공성의 낌새를 알아차리자마자 나는 호포대를 이끌고 반대편을 향해 전력으로 말을 달렸다.
이 반란군 놈의 새끼들. 철기를 끌고 가 밀어버릴 수도 없고.
분명 성을 치기 전에 신호나 사절을 보내 미리 통보하기로 이자성군과 약조했던 터였다. 그래야 아군의 병력 일부가 따라붙어 상황을 관측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청군에서 북경성 공성전의 관측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내 호포대였다. 가장 위험하나 믿을 만하고, 유사시엔 버려져도 반향이 적을 자들에게 주어질 법한 임무였으니까.
청을 섬기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한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 생각 덕에, 말에 박차를 가해 이자성에게 향하는 동안 오히려 가벼운 안도감이 들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다들 그런 꼴을 하느냐? 불쾌하구나.”
첫인상부터 팍팍했다. 고집 세 보이는 굵은 눈썹이 인상적인 이자성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알아챌 정도로 탐욕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호포대의 짐승탈을 보고는 북방 유목민의 문화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본인들 외에는 모두를 낮춰보는 중화사상 특유의 오만함이 내 성질을 긁고 있었다. 그러니 맺은 약속 또한 지키지 않은 것이겠지.
내 차림새가 전형적인 팔기군 장수 차림이었는지라, 이자성이 방금 뱉은 말은 역관을 통해 다시 한 번 만주어로 통역되고 있었다.
손바닥을 들어 통역을 막자 이자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나라 말은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너, 여진 무장 주제에 한어(漢語)를 할 줄 아느냐?”
“여진인이 아닙니다. 저는 조선인입니다.”
“호오…….”
조선인 부대가 팔기군에 소속되어 특별한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에 이자성은 꽤 흥미를 느낀 듯했다. 내가 만주족이 아닌 조선인이고,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이자성이 뽑았던 발톱을 거두는 것이 느껴졌다.
“조선에서 온 자들이라면 여진족 놈들보다는 말이 잘 통하겠지. 우리를 감시하러 온 것이겠지만, 약속했던 대로 북경성 안의 재물에는 손끝 하나 대지 말도록 해라. 그것은 나와 너희 족장 사이의 일이니까.”
“약조했던 그대로군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후에 약탈당한 북경성을 무난히 수습하려면 청의 깃발을 든 군사들이 성 안의 백성들을 약탈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었다. 악역은 이자성군이 모조리 맡아줘야 하니까. 그래서 받아들였던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 탐욕에 찌든 자는 청나라의 답변을 단순히 전리품을 독점해도 좋다는 양보로 여긴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았던 모양인지 으흣, 으흣. 이상한 소리를 내가며 웃는 이자성이었다.
“후…… 물론, 우리를 감시하는 일만 할 생각은 거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안전한 자리에서 관망만 하게 될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지.”
“전장까지 나온 마당에 어찌 싸움을 피하겠습니까.”
“좋아, 역시 조선 출신이라 그러는지 말이 통하는구만. 너희가 싸우게 될 곳은 북경성의 북벽이다.”
북경은 기존 성벽인 내성과 황궁인 자금성을 보호하는 황성, 두 겹의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거기에 내성의 남측은 외성이라 불리는 성벽이 한 겹 더 보강되어 있는 구조였다.
이자성군의 주력은 노출된 부분이 큰 외성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호포대를 북벽에 배치한 이유는 그쪽에서 명군의 시선을 더 끌어달라는 이야기였다.
“대열 교대! 격발!”
“격발!”
호포대 대원들은 그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해 주었다. 식사시간도 거르고 쪄낸 낟알을 씹어가며 성벽 위의 명군을 끊임없이 저격하는 모습은 주위에 배치된 이자성군의 경탄을 이끌어내는데 충분했다.
가끔 그 총탄을 맞은 명군 병졸이 성벽 아래로 떨어져 곤죽이 되곤 했는데, 나에겐 그 모습이 마치 삼백 년을 이어온 명 황조의 말로와 겹쳐 보였다.
“여진족 놈들이 갖기엔 아까운 정예가 아닌가. 끌끌.”
전투가 재개된 후, 전장을 둘러보러 온 이자성이 혀를 찰 정도로 호포대의 전과는 눈부셨다. 공성에 가장 방해가 되는 시설은 성루에 올라앉아있는 홍이포였는데, 호포대가 배치된 구역만 계속해서 포수가 저격당해 포격이 멈췄던 것이다.
“명군도 어지간히 군령이 서지 않는 모양입니다요. 나으리.”
“대원들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걸로 좋지 않은가.”
부관을 맡고 있는 김 갑사의 말대로였다. 성벽 위를 지키던 명군은 우왕좌왕한 나머지 저격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포대를 공성에 투입하며 대원 일부의 희생까지 각오한 것이 거짓말 같았다. 아무리 포수를 잘 쏘아 맞힌다 해도 다른 성루에서 지원 포격이 날아올 수 있었으니까.
허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성을 지키는 장수들 사이에서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듯했다. 이 단적인 사례만 보아도 얼마나 명군의 상태가 엉망인지 알 수 있었다.
“백기다! 백기가 올라왔다!”
남쪽의 외성을 지키던 대태감(大太監) 조화순(曹化淳)이 올린 항복 선언이 북쪽까지 전달된 것은 공성을 시작한 지 만 하루가 조금 지난 후였다.
외성이 무너지자 내성 역시 그에 화답했다. 곧 내성의 명나라 병력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백기를 내걸며 항복하기 시작했다.
내성의 정문인 천안문이 불타며 피어오른 것이 분명한 연기가 하늘을 덮어갔다. 아마 그 앞은 먼 미래를 예견하듯 온통 붉은 피로 물들어있겠지.
“북경의 세 성벽 중 이제 남은 건 이제 황성 하나뿐이군. 자금성의 옥좌가 내 눈앞에 있다!”
그러나 이자성의 기대와는 다르게 북경의 황성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힘없이 항복한 내외성과는 달랐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이자성의 병력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해자로 점점이 떨어졌다.
명나라 최후의 병사들은 황금빛 옷을 걸친 군사들을 위시하여 무기가 없으면 돌덩이를 던져가며 처절하게 성벽을 방어해냈다. 아마 황제의 친위대인 금의위(錦衣衛)까지 방어에 동원된 모양이었다.
“왜, 왜! 저깟 성벽을 뚫지 못하는 것이냐! 에잇! 더 제대로 싸우지 못할까!”
이자성이 말 그대로 길길이 뛰며 분노할 정도로 황성의 벽은 여전히 견고했고 해자는 깊었다. 그러나 황성의 성벽 위에 동원되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내 눈에는 천천히 잦아들어 가는 제국의 마지막 고동이 느껴질 뿐이었다.
병사들이 쓰러지면 일반 장정으로 보이는 자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장정들이 쓰러지면 노약자인 것이 분명한 자들이 올라와 그 자리를 메웠다. 환관 복장을 한 자들은 허공에 채찍을 갈겨가며 그들을 독려했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삼백여 년간 중원을 지배한 명의 숨은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세를 바꾸기에는 한없이 덧없는 몸부림은 황성의 방어까지 대신해줄 수는 없었다.
결국 해가 지기 직전, 황성의 성문은 돌파당했다. 어둠이 내린 탓에 아군은 황성 내부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그쳤지만, 근시일 안에 자금성을 비롯한 북경은 곧 함락될 것이 분명했다.
“김 갑사, 잠시 홀로 다녀올 곳이 있네. 유사시 지휘를 대신 맡아주게.”
“알겠습니다요. 나으리.”
돌파한 황성의 내부에는 산 하나가 있었다. 마지막 방어선인 자금성의 해자 건너에 위치한 작은 산, 수도에 솟은 산이라 해서 경산(京山)이라 불리는 산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쌓은 것이니만큼 이름과는 다르게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까웠다.
아직 어둠이 짙게 내린 그 언덕을 나는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 홍타이지와 계획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내 발길을 막지 못했다.
황성이 위태롭다는 보고를 들은 황제가 탈출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절망해 목을 매단 자리가 이 경산이었다. 아마 황제를 구원하러 달려올 오삼계가 동쪽에서 일으킬 흙먼지라도 관측하려고 했을까.
그러나 북경성 동편에 펼쳐진 벌판은 여전히 고요할 뿐이었다.
오삼계 역시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럼 명나라 최후의 황제에게 남은 선택지는…… 자결뿐이겠지.
경산의 꼭대기에는 화려한 황도(皇都)를 굽어보기 위해 설치된 정자가 하나 올라앉아 있었다.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수황정(壽皇亭)의 이름을 지은 이는 이 자리에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밤하늘에 얼핏 비치기 시작한 지붕 그림자를 눈으로 좇으며 연신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버릴지 몰랐다.
“폐하! 아직 기회는 남아있나이다! 부디 뜻을 고쳐주시옵소서!”
“사직 이백칠십오 년의 천하가 하루아침에 버려졌다. 내 어찌 낯을 들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 왕 태감, 그 자리에서 비키지 못할까!”
“폐하!”
다행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물러가는 어둠과 찾아오는 새벽에 천천히 익숙해지기 시작한 내 시야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잡혔다.
익선관에 누런 용포를 입은 자는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 피가 엉겨 붙은 것이 분명한 칼을 빼든 채였다. 복두 쓴 왜소한 늙은이가 큰 나무와 그 사이에 서서 황제를 만류하고 있었다.
“대명국 황제 폐하, 거기 계시오?”
“누구냐!”
사람의 힘으로 쌓은 것이니만큼 이름과는 다르게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까웠다.
아직 어둠이 짙게 내린 그 언덕을 나는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 홍타이지와 계획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내 발길을 막지 못했다.
황성이 위태롭다는 보고를 들은 황제가 탈출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절망해 목을 매단 자리가 이 경산이었다. 아마 황제를 구원하러 달려올 오삼계가 동쪽에서 일으킬 흙먼지라도 관측하려고 했을까.
그러나 북경성 동편에 펼쳐진 벌판은 여전히 고요할 뿐이었다.
오삼계 역시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럼 명나라 최후의 황제에게 남은 선택지는…… 자결뿐이겠지.
경산의 꼭대기에는 화려한 황도(皇都)를 굽어보기 위해 설치된 정자가 하나 올라앉아 있었다.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수황정(壽皇亭)의 이름을 지은 이는 이 자리에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밤하늘에 얼핏 비치기 시작한 지붕 그림자를 눈으로 좇으며 연신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버릴지 몰랐다.
“폐하! 아직 기회는 남아있나이다! 부디 뜻을 고쳐주시옵소서!”
“사직 이백칠십오 년의 천하가 하루아침에 버려졌다. 내 어찌 낯을 들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 왕 태감, 그 자리에서 비키지 못할까!”
“폐하!”
다행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물러가는 어둠과 찾아오는 새벽에 천천히 익숙해지기 시작한 내 시야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잡혔다.
익선관에 누런 용포를 입은 자는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 피가 엉겨 붙은 것이 분명한 칼을 빼든 채였다. 복두 쓴 왜소한 늙은이가 큰 나무와 그 사이에 서서 황제를 만류하고 있었다.
“대명국 황제 폐하, 거기 계시오?”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