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뜻밖의 사태
다행히 내 밤나들이를 알아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내 빈 자리를 지키던 김 갑사조차도 영락없이 순찰을 다녀온 줄로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동편 벌판에 먼지가 크게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군막을 박차고 뛰어나간 김 갑사였다.
“호포대 전군 기상! 기상!”
뿌우우.
대원들의 단잠을 깨울 나팔소리가 주둔지에 길게 울려 퍼졌다. 잠에 취한 병사들을 깨우느라 악을 쓰는 내 눈에 북경성의 남쪽에서 불길이 크게 오른 것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나으리! 외성 방향에 불길이!”
“이자성의 본진이 위치한 방향일세. 산해관 방어병이 돌아온 모양이야.”
부대 규모가 작은 우리와는 달리, 이자성군의 덩치는 컸다. 성내에는 숙영할 공간이 없을 테니 자연스럽게 북경성 밖으로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병력을 철수한 상태였다.
그곳에서 불길이 일었다는 이야기는 곧 전투가 일어났다는 이야기. 숭정제는 혼란해질 북경성을 잘 빠져나가 오삼계에게 합류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걱정마저 곧 사치가 되었다. 북쪽에 위치한 거주구역에서도 차례로 불길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북쪽으로 난 두 문 중 하나, 안정문(安定門)과 가까운 위치였다.
“한수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우리의 후방에서도 불길이 오르고 있지 않냐!”
“일단 진정부터 하십시오. 사형의 니루는 수습이 끝났습니까?”
“그래,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 명을 내려다오!”
영문 모를 사태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충신이었다. 뒤이어 다른 니루의 장긴들 역시 속속 도착해 명령을 구했다.
나 역시 급변한 사태에 머리가 하얗게 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돌아가는 머리 한구석은 최선의 선택지를 제시해주고 있었다.
“저 불길이 누구의 소행이든 간에 일단 이 자리가 위험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리,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호포대 전원을 이끌고 안정문으로 간다. 마주칠 것이 적군일 경우를 대비해 전원 무장을 끝마친 후 이동해야 할 것이다. 혹여나 적군을 만나면 그대로 돌파해 팔기군 본대에 합류한다. 이상!”
소집은 빨랐다. 호포대 전원이 자리에 모였을 때는 나 역시 장전을 비롯한 무장을 겨우 마친 상태였으니.
그렇게 대열의 선두에 서서 말을 달렸다.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내 입안은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지금이 종군한 이래로 가장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니까. 고작 천오백의 병력을 이끌고 고립되었다고 생각하자, 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먼저 명군의 잔당이 배후를 끊으려 침투해 불을 질렀을 경우. 하지만 격멸 직전인 명군이 그런 작전을 수행할 역량이 있을까?
북편에 배치되어 마음껏 약탈하지 못했던 이자성군이 새벽 약탈을 시작했다?
황성의 남쪽과 달리 병력이 비교적 적고 전투가 치열했던 북쪽은 약탈을 벌일 틈이 없었을 것이다. 전리품에 눈이 돌아간 놈들이 지금와서 일을 벌였을 가능성은 분명 존재했다.
아니면, 대기 중이던 도르곤의 청나라 군세가 돌입했을 가능성?
하지만 도르곤은 분명 북경성의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약탈을 금해야 한다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때문에 호포대에도 약탈을 엄금하는 명을 미리 내린 상태였다.
좀처럼 생각에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저 멀리 안정문이 보이는 지점까지 와 있었다. 민가에서 오르는 불길 탓에 대문 근처는 대낮같이 밝아져 있었다.
“나리. 저놈들, 아군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요.”
“보아하니 정홍기(正紅旗)구만. 싸울 일은 없게 되어 다행일세. 헌데…….”
불빛 아래로 오가는 군사들의 차림새는 전형적인 팔기군의 차림새였다. 온통 붉은 갑주들이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팔기군 중 정홍기에 소속된 자들이지 싶었다.
낌새를 알아차린 도르곤이 대기 중이던 팔기군을 출격시킨 것인가.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약탈을 금한다는 군령이 내려온 것이 아니었습니까요?”
김 갑사가 당황한 나머지 큰 소리를 냈을 정도로 불길 아래 상황은 처참했다.
명청교체기, 청의 군대가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건 고작해야 글자 쪼가리일 뿐이었다. 불타는 안정문 인근은 말 그대로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캬하하하하!”
“사…… 사람 살려!”
“아가! 아가!”
“꺄아아아악!”
도망치다 등에 칼을 맞고 피보라를 뿌리며 넘어지는 사람.
말꼬리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는 어느 남자.
내팽개쳐져 울고 있는 아기를 향해 몸부림치며 끌려가는 어느 여자.
손자만은 살려달라며 무릎 꿇고 빌다 창날에 꿰뚫리는 어느 노인.
토악질이 올라왔다.
붉은 갑주를 입은 청나라 병사들은 낄낄거리며 거침없이 가옥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약탈했다. 땅에 고여가는 핏물을 찰박거리는 그들에게는 약탈이 하나의 유희거리라도 되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따르는 대원들의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같은 광경을 바라보는 대원들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그들이 멀고 먼 오랑캐의 땅으로 끌려왔던 과정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PTSD라도 도진 것일까, 울분을 참지 못해 어금니를 깨무는 자도 여럿이었다.
“김 갑사, 당장 니루 장긴들에게 명령해 이 자들의 정확한 소속을 알아오게. 나보다 지위가 낮은 지휘관이 있으면 내게 당장 보내고!”
“알겠습니다요! 나리!”
김 갑사가 뛰쳐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각 니루에서 그림자 몇 개씩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잠시 후, 니루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기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아비규환을 참기에는 내 인내력이 너무나 모자랐다.
“대장!”
“대장! 어디로 가십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대원들의 목소리가 나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내 발은 이미 말의 옆구리를 걷어찬 후였다.
등에 짊어진 조총과 투창들이 계속해서 등짝을 후려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부터 막아야했다.
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 말고도 이 개짓거리를 막아야 할 커다란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니까.
이미 숭정제를 살려 보낸 마당이었다. 주인 잃은 북경을 이자성을 악역으로 만들어 청의 목구멍에 넣어주려는 계략은 이대로라면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다이칭은 구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황제에게 버려지고 반란군에게 능욕당한 북경을 품어줄 새로운 주인 말입니다.’
‘이제는 도적떼에 불과한 이자성이라는 자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야겠지요. 저의 뜻 역시 이 자의 뜻과 같습니다. 카간.’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북경성 내에서는 반항하지 않는 자들에게서의 약탈을 엄히 금한다.’
본대와 찢어지기 직전, 급하게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동안 약탈로 상당량의 물자를 충당하던 청나라 입장에서는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기도 했다.
결정이 늦어진 만큼 전군에 내려질 군령 또한 늦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르곤이 지휘하는 2군에서도 북경에 개입하기 직전에 일괄적으로 군령을 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서 명나라 백성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는 자들은 분명 팔기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뭐지? 대체 왜?
“멈춰라! 당장 약탈을 멈추지 못할까!”
한껏 고함을 지르며 약탈 현장의 한가운데를 내달렸으나 내 목소리는 미처 닿지 않는 듯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자는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니루 장긴 쯤 되는 자가 분명한 지휘관 하나가 말을 탄 채로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붉은 갑주 위로 검붉은 피가 얼룩져 있었다.
“적지(敵地) 한가운데니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양백기의 잘안 장긴이신 듯한데……. 약탈을 멈추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친왕 전하께서 내린 군령을 듣지 못했나? 분명 약탈을 금하라는 군령이 내려졌지 않느냐!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예?”
“약탈을 금하라는 군령이 내려졌다고 했다. 듣지 못한 것이냐?”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짓는 지휘관이었다. 설마 군령이 잘못 전달되기라도 한 건가?
그래도 내 명령이 먹힌다면 이쯤에서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 선 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저희 장긴께서 내린 명령과 다릅니다만……. 장긴께서 제대로 군령을 받으신 것이 맞으신지요?”
“무엇이? 나는 타스하 잘안의 장긴이다! 네놈들이 지금 움직이는 군략이 내 머리에서 나왔단 말이다!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타스하 잘안이라면 그 줄무늬 명포수들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다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둥지둥하는 니루 장긴의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그래,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겠지. 군령을 어기는 미친놈이 있을 리가.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낯익은 말은 그 안도감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보통은 여기서 들릴 일이 없는, 억양이 어설픈 조선말이었다.
“알아볼 필요 없다! 명령을 내린 것은 바로 나니까!”
따각. 따각.
말발굽소리와 함께 니루 장긴의 뒤에서 나타난 그림자는 그를 옆으로 밀어붙이고 내 앞에 똑바로 섰다. 그가 뽑아든 자루 짧은 월도(月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잘안 장긴 사이에도 등급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가르쳐줬을 텐데? 예친왕의 눈에 들었다고 이제 상급자를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건방진 자식. 마침 잘 만났다.”
그림자의 정체는 또 다른 조선인 집단을 지휘하는 잘안 장긴, 한윤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밧줄 끝에는 이미 명나라 백성 몇이 묶인 채 끌려오고 있었다.
“어찌하여 약탈을 계속하시는 것입니까? 군령을 받지 못하신 겁니까?”
“군령, 군령 하는데, 그런 것, 내려진 적 없다. 애송이.”
당황스러웠다. 늘 철두철미하던 도르곤이 약탈을 금한다는 명을 내리지 않고 군대를 움직일 리는 없었다. 본대와 떨어져 연락이 닿지 않은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독자적인 행동이란 말씀이십니까?”
“적지에 들어왔으면 전리품을 수급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역시 병아리다운 발상이로군.”
“예친왕께서 출진 전에 내리실 군령이 있었습니다! 당장 약탈을 멈추고 본대로 돌아가십시오!”
“이 건방진 새끼, 이제 하급자 주제에 내게 명령질이냐? 노비들과 어울려 다니다보니 아래 위를 잊은 게로구나?”
한윤의 칼끝이 나를 향했다. 분명 그 칼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살기였다.
“하, 애송이, 한 수 가르쳐줄 테니 잘 봐라. 전쟁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뭐요?”
말을 마치자마자 한윤은 손에 쥐고 있던 밧줄을 힘차게 끌어당겼다. 뒤이어 그의 칼끝이 빛나더니 끌려오던 명나라 백성 하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이 간단한 논리 앞에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지. 네 나라 또한 그러지 않았느냐?”
“당신 미쳤소? 당신도 조선의 강산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오!”
“전번에 이야기 하지 않았나, 그 조선이란 나라가 내게 한 짓거리를 말이다. 애송이.”
“다시 한 번 말하겠소. 예친왕께서 죄를 묻기 전에 어서 군사를 물리시오!”
피를 뿜으며 움찔거리는 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한윤의 시선이 내게 건너왔다. 그의 눈이 냉혹하게 변해 있었다.
“그 예친왕이 지금 산해관에서 날아온 전령을 받고 대책을 논의한답시고 군막에 틀어박혔단 사실은 아느냐? 북경성 방향에서 불이 오르는데, 군대를 이끄는 자로서 어찌 이 기회를 놓친단 말이냐?”
“출진 전 약탈을 금한다는 군령을 내리기로 했소! 장긴을 염려해서 말씀드리는 것이니 어서 군을 물리시오!”
“군사를 물리라고? 아하, 이제 알겠다. 이 새끼, 내 군사가 될 자들을 가로채더니 이제 전리품까지 가로채려 드는 것이로구나?”
도르곤이 군막에 틀어박혀있다고? 도대체 어떤 소식이 날아왔기에 이런 상황에서 명령체계가 마비되었단 이야기인가.
하지만 그쪽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한윤에게서 날아오는 적의는 점점 더 크고, 구체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번은 다르오! 카간의 의도는 북경을 점령…….”
“다 아는 것처럼 떠들지 마라. 북경 정벌은 곧 약탈이고 약탈 없이 돌아간 적도 없었다. 그 정벌이 이번으로 네 번째지. 카간의 회동에 몇 번 발을 담가봤다고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애송이?”
“북경성의 민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상황이란 말이오! 다시 한번 말하겠소! 어서 약탈을 멈추시오!”
“하, 됐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장 내 앞에서 썩 꺼지거라. 네놈 얼굴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는군.”
또다시 한윤이 칼로 나를 겨누었다. 그의 칼은 방금보다 더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알고 있다. 그 전에도 산해관을 우회해 북경을 약탈하고 돌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만주족의 경제가 명나라 약탈로 굴러간다는 사실도 피부로 이미 체감했다.
장성을 넘은 출진이 곧 약탈로 인식되는 마당이니 이렇게 날뛰는 자도 나오는 것인가. 하필 이 자리에서 날뛰는 미친놈이 나를 고깝게 보던 한윤이라 내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은 최악 중 최악이었다.
힘을 빌릴 자들은 멀리 있고, 지금 상황은 어떻게든 내 힘으로 수습해야 한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지막 경고요. 카간의 뜻을 따르시오. 그렇지 않으면…….”
“핫, 그놈의 카간 팔이, 적당히 하지 못 할까? 아니면, 한 번 해보자는 거냐? 하극상의 대가는 각오하고 있겠지?”
등에서 투창 하나를 뽑아 왼손에 쥐었다. 반대편 손은 허리춤에 달려있던 투창기를 언제든지 뽑아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상(馬上)에서는 조총을 쓰기 어렵겠지. 조총이나 쏘고 다니는 놈답게 검 한 자루도 다룰 줄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깟 짧은 창자루 하나로 무엇을 하겠다고?”
“한 발로 당신을 쓰러뜨릴 자신은 있으나 당신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비싼 화약을 낭비하기도 아깝고.”
“건방진 새끼, 번국의 문관 주제에 감히 여유를 부려? 가볍게 혼이나 좀 내줄까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한윤의 칼이 허공을 한 번 가르고는 묻어있던 핏물을 전부 떨어냈다. 정말로 한판 붙어볼 생각인 것 같았다.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천천히 호를 그리며 내 주위를 맴도는 한윤의 눈빛이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빛나는 칼날이 송곳니를 연상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