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참교육
“타핫!”
잠시 후 괴상한 기합과 함께 한윤이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 전이었다.
‘X됐다. 어느새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거지?’
그가 호를 그리며 내 주위를 맴돌던 이유는 은근슬쩍 거리를 줄이기 위함인 듯했다. 민가를 불태우는 불길을 반사해 번쩍이는 월도가 곧 쏜살같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받아라! 애송이!”
엉겁결에 들고 있던 투창을 들어 방어했지만 한윤의 칼날이 더 위력적이었다. 비스듬히 떨어진 칼날은 투창의 자루를 박살 내고 궤적이 휘어져 내 어깨가리개를 강타했다. 충격이 그대로 온몸에 퍼졌다.
“크흑!”
창자루가 베이지 않고 박살 난 것을 보니 칼등으로 후려친 건가. 황녀가 내려준 갑주가 아니었다면 어깨뼈가 가볍게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다.
“호오, 네놈, 단순히 예친왕에게 잘 보여서 잘안 장긴 자리까지 오른 건 아닌가보구나? 제법 날랜데?”
“지금이라도 병력을 물린다면 지금의 상황을 문제 삼지 않겠소! 칼을 거두시오!”
“이제 와서 후회가 되느냐? 그렇다면 진작에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지 말았어야지!”
한윤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고통으로 얼굴을 구기는 나를 보며 괴상한 웃음을 짓는 그였다.
나를 낙하산 탄 문관 정도로 알고 있으니 이렇게 나오는 것인가.
하지만 일시휴전은 금방 끝나고 말았다. 갑옷에 달린 철편들이 차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윤이 다시 한번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랴!”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 고삐를 잽싸게 당기자 내 말이 잽싸게 옆걸음을 밟더니 한윤과 거리를 벌렸다. 도르곤이 준 명마가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
“이번 일격도 피해? 말을 하루 이틀 탄 솜씨가 아니로구나?”
오랜만에 성 영감의 숙제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양에서는 말 탈 일이 별로 없었으니 심양에 가서 단련해오라며 신신당부를 남기던 스파르타 영감님이 아니었다면…….
“고향을 저주하며 산 탓에 근본조차 잊은 모양인데, 선비의 육례(六禮) 중에 승마술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오?”
“핫, 입만 산 놈 같으니라고. 그래서 네놈의 고향과 선비의 덕목이 얼마나 버티나 보자. 이럇!”
불쾌한 듯이 코웃음을 치고는 칼끝을 눕힌 한윤이 또다시 나를 향해 말을 달려왔다. 이번에는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챙!
“읏? 뭐야, 투창이었느냐? 등패수(籐牌手) 놀음이라도 조금 배운 모양이지?”
“시끄럽소!”
“하하! 도망가지 마라! 맞서 싸워라!”
역시, 김 갑사의 말이 옳았다. 어느 정도 무예의 경지에 이른 자라면 날아오는 화살이나 투창 정도는 쳐낼 수 있다더니 사실이었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투창기에 꿰지도 못하고 맨손으로 던진 녀석이었다. 위력과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았을뿐더러 어깨 역시 달궈지지 않은 상태였다.
깡!
챙!
“하핫! 투창 솜씨는 꽤 쓸 만하지만, 고작 그것으로 날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헉…… 헉…….”
“네놈의 날붙이는 내게 요만큼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애송이!”
말을 달리며 몸을 뒤로 돌려서 몇 번이고 투창을 던져댔지만 시간을 조금 버는 데 그쳤다. 그런 내 움직임 때문에 말의 속도도 느려져 조금씩 한윤의 말에게 꽁무니를 따라 잡히고 있었다.
“받아라!”
“으윽!”
번쩍 치켜 올려진 한윤의 칼이 얼굴 옆을 스치고 내리꽂혔다.
아, 이렇게 죽는 건가.
치명타를 넣은 한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눈앞에 주마등이 여럿 스쳐지나갔다.
“하하! 이제 네놈의 혓바닥도 힘을 잃은 게냐?”
“크흑……, 젠장!”
다행히 베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번에도 칼등인가. 무심코 왼어깨를 짚은 손에 피가 묻어나지 않는 것을 보니 일부러 칼등으로 후려친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목덜미 옆, 승모근 쪽에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좀 더 아래를 맞았다가는 쇄골이 부러져 왼팔을 쓰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저 X발 새끼가…….
“다음번은 정말로 벤다! 오늘은 팔 하나 정도로 하극상을 참아주지! 카간을 팔아 나를 우롱하려 한 죄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핫!”
“으윽……. 꾸며낸 말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아군을 공격한 죄는 묻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멈추시오!”
“시끄럽다! 네놈의 투창이 다 떨어질 때까지는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부디 내가 더 오래 즐기게 해 다오, 애송아!”
승리를 예감했는지 꽤나 먼 거리까지 떨어져 나를 조롱하는 한윤이었다.
이대로 피하기만 하다간 완전히 당할지도. 달리는 말에서 뒤돌아 던지는 투창으로는 치명상을 주기 어렵다. 그렇다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 탓에 흔들리는 안장 위에서 총을 장전하고 명중시킬 시간 역시 없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이 자들이 북경성을 유린하도록 놔뒀다가는 계획 역시 크게 틀어져 버릴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을 약탈 또한 최대한 빨리 막아야 했다.
답은 하나인가. 문득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다행히 투창기는 아직 허리춤에 온전히 매달려 있었다. 천천히 허리춤에 손을 뻗어 그것을 뽑아들었다. 오늘따라 묵직하게 느껴지는 투창기 끝에 창을 재며 어깨의 고통을 잊으려 노력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정신없이 투창을 던져댄 탓에 오른쪽 어깨는 완전히 풀려있다.
적은 완연한 실력 차 때문에 방심하고 있다.
10미터 이내의 단거리라면 노리는 부위를 정확히 맞출 가능성이 꽤 높다.
상대를 흥분하게 만들면 승산은 올라갈 것이다. 무엇을 건드리면 피가 거꾸로 솟을까.
아.
“하하! 애송이! 오줌이라도 지린 것이냐? 망부석처럼 박혀 움직이질 않는구나!”
“조롱은 그쯤 해 두시오. 당신의 아비가 그리 가르쳤소?”
“……뭐라 했느냐? 이 새끼가 갑자기 정신이 나갔나?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활용해라. 눈을 뒤집히게 만들고 판단력을 흐리게 해라.
“피를 좋아하고 살육을 즐기는 것으로 보아 성정(性情)이 간악하기 이를 데 없으니, 역적의 씨가 어디 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고 했소. 그렇지 않소?”
“이 미친 새끼가…… 문관 주제에 내 앞에서 헛소리를 찍찍 내뱉는 것을 보니 골로 갈 때가 된 모양이로구나?”
“골로 간 것은 역모를 꾸몄다가 목이 날아간 당신의 아비겠지. 원한만 가득 쌓여 사람 목숨 여기기를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당신을 보고 한명련이 무어라 생각할까?”
“……장난은 끝이다. 애송이 놈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구나.”
내렸던 칼끝을 공중에 두어 번 휘두르더니 한윤은 내게 살기를 내쏘아왔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압도적인 살기였다.
“이번엔 칼날로 간다. 내 네놈의 혓바닥을 베고 부은 간을 꺼내 씹겠다!”
칼을 치켜든 상대가 폭풍처럼 돌격해왔다. 분노 때문인지 아까와는 다르게 자세가 꽤나 커진 것이 명백히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가 커졌다는 것은 빈틈 또한 생겼다는 것.
나를 으깨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달려오는 내내 연신 휘둘러대는 칼날 탓에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약점 하나가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였다.
계획대로다.
“이럇!”
“이 미친 새끼가!”
말발굽이 대지를 박찼다. 한윤은 내가 맞받아 돌격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고작 문관이 던지는 투창은 언제든지 쳐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겠지.
그런데 말야. 한윤 당신. 시속 160킬로미터짜리 공도 숨 쉬듯 쳐내는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왜 느린 변화구에 삼진을 먹는 줄 알아?
눈에 익숙해졌던 속도와 다른 속도로 공이 날아오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감각이라고. 빠른 공 뒤 느린 공, 느린 공 뒤 빠른 공 전부 마찬가지지.
당신은 어떤지 볼까? 고교야구 일류 타자보다 더 반응이 빠른지?
칼을 치켜든 목표가 거리 안으로 진입했다. 지금이다.
“하앗!”
활시위를 당기듯 귀 뒤로 투창을 올려 팽팽함을 더했다. 힘을 뺀 어깨는 부드럽게 팔이 반원을 그리도록 밀어주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익숙한 감각은 정확히 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투창기에 실려 힘이 더해지고 말이 달리는 속도가 추가되어 방금의 두 배는 빨라 보일 창이었다. 그 창끝이 일직선을 그리며 목표지점을 향해 허공을 찢었다.
“어어?”
칼이 허공을 맥없이 가른 후 한윤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배터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칼날이 미처 궤적을 그리기 전, 투창은 이미 번개같이 한윤의 팔꿈치 위를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주인 잃은 말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안장 위에 올라앉아있어야 할 주인은 땅으로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투창을 맞은 탓에 역시 주인의 손에서 벗어난 월도는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더니 뒹구는 주인의 근처에 거꾸로 떨어져 꽂혔다.
“이……이 개자식이!”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한윤은 땅바닥에 꽂힌 칼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가려 했다. 그걸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아악!”
곧이어 그의 반대쪽 팔뚝에 창 하나가 더 날아가 꽂혔다. 꼬치처럼 한윤의 팔뚝과 땅을 한꺼번에 꿰뚫어버린 창은 그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하고 있었다.
“죽여버리겠다! 이 개 같은 새끼! 죽여버릴 것이다!”
“방금 던진 투창이 마지막 한 발인 것에 감사하시오. 당신의 입을 막을 여분이 남아있지 않으니.”
“이 개새끼가! 어디 노비 출신들이나 부리는 자식이 감히 나를! 으아아아!”
처음 마주쳤던 자리부터 이어졌던 그놈의 노비 타령이었다. 아비의 출신에서 비롯된 콤플렉스인가. 그렇다 해도 감히 죄 없는 내 부하들을 모욕하다니.
투창기를 다시 허리춤에 쑤셔 박고는 재빨리 총을 장전했다. 한윤의 부하들이 혹여나 덤벼올까 우려되어 나온 행동이었으나 이 장면을 지켜본 어느 누구도 몸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거기 니루 장긴, 이 자를 결박하라.”
“예?”
“예친왕 전하의, 아니 카간께서 내리실 군령을 들었음에도 거부한 자다. 게다가 내게 먼저 칼까지 들이밀었지. 군령을 어긴 자의 처분은 어떠해야 옳은가?”
“장긴이시여, 아니…… 그래도…….”
우물쭈물하던 솔호 니루의 장긴은 이윽고 말에서 뛰어내려 뒤처리를 시작했다. 부하의 손에 결박당하고 간단한 지혈까지 받은 한윤의 아가리는 계속해서 욕설을 뱉어내고 있었으나 내 귀엔 와 닿지 않았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개자식아! 내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약탈과 원한에 눈이 멀어 카간의 뜻을 받든 자에게 칼을 들이민 죄, 달게 받으시오. 양팔을 가볍게 뚫은 정도로는 한참 모자랄 터이니.”
“카간께서 그러셨을 리 없다! 약탈을 금하셨을 리가 없어! 애송이 네놈이 날 속이는 게 분명하다! 에잇! 무엇하는 것이냐!”
한윤을 결박하며 잠시 망설이기도 했던 니루 장긴이었지만 곧 내 명령을 곧 순순히 따랐다. 내 뒤를 쫓아오던 호포대원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어리둥절하던 대원들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말 탄 그림자가 나타나 명을 내리자, 내 병사들은 대열을 이루고 약탈 현장에 있는 한윤의 병력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기 시작했다.
“한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단기결전(單騎決戰) 한 번 했습니다. 사형.”
“아군끼리 단기결전이라니, 이 무슨?”
제일 먼저 달려온 지휘관의 정체는 충신이었다. 함께 달려온 김 갑사는 뒤따라 도착하는 병력들을 수습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두뇌 회전이 빠른 충신답게 상황을 금방 파악한 모양이었다. 밧줄에 묶인 채 여전히 몸부림을 치는 한윤과 잠시 약탈이 중지된 현장을 보고 금방 감이 왔을 것이다.
다른 부대의 병력들이 보고 있어서인지, 일이 중대하다는 것을 알아채서 그런 것인지. 충신의 입에서 뒤이어 흘러나온 말은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존대였다.
“약탈은 분명 금지되었을 텐데, 이 자가 위에서 내려온 명을 어긴 것입니까?”
“뭐, 그렇습니다. 사형은 다른 니루 장긴들과 함께 이 자가 지휘하던 병력들을 수습해주십시오. 거부하는 놈들은 무장을 해제시키고 군령에 의해 처벌해도 좋습니다. 잘안 장긴으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약탈을 중지시키고 지휘권을 인수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명을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충신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수습하려면 아랫사람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근방에 있는 자들에게 내 목소리가 전부 전해져야 했다.
“약탈을 속히 중지하라! 카간께서 내리신 명을 타스하 잘안의 장긴이 전한다! 약탈을 속히 중지하라!”
그렇게 주변에서 진동하던 비명소리는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만주어와 중국어로 같은 내용을 크게 외쳐야 했던 탓에 내 목소리는 금방 쉬고 말았지만, 그만한 보람은 분명 있었다.
웬 전령 하나가 안정문을 뛰어 들어온 것은 어느 정도 날이 밝고 상황이 수습된 후였다. 사라진 한윤의 잘안과 이자성군에 파견되어 있던 호포대를 찾는 전령이었다.
“예친왕께서 본진을 옮기셨다고?”
“속히 전갈에 적힌 위치로 합류하라는 명이십니다! 한시가 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