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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85화 (85/298)

85화. 회광반조(回光返照)

2군 본진에 합류해 이번 일을 보고하러 군막에 들이닥치자마자 도르곤은 나를 끌고 남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산해관을 뚫은 홍타이지의 군세 역시 북경 근처에 도달해있다고 했다.

잠시 명령체계가 마비되었던 것은 급변한 정세 때문이었나. 도르곤이 받았다는 전령의 내용을 알 것도 같았다.

“그자가 결국 사고를 쳤는가. 다친 곳은 없느냐?”

“염려해주신 덕에 칼등에 맞은 어깨가 부어오른 것을 빼면 큰 이상은 없습니다. 예친왕 전하.”

“하…… 원래도 성정이 불같은 자였지만 하필 전장에서 폭주할 줄이야.”

하필이면 잠시 명령체계가 마비된 사이에 뛰쳐나가서 사고를 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도르곤 역시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허나 안 장긴, 잘 수습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군에 대한 북경성의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졌을 것이다.”

“병력 일부를 남겨놓고 현장을 통제시켰습니다. 후에 교대 병력을 보내주십시오. 다행히 아군이 저지른 약탈을 아군이 막아서 그런지 북경성의 민심은 겨우 수습된 듯합니다.”

“잘했다, 정말로 잘했다. 내 믿음에 그대로 보답해주는구나.”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하극상 정도는 눈감아주시겠지요?”

“당연한 소리, 카간의 명을 부정한 자를 벌한 일에 어찌 죄를 묻겠느냐. 허나, 문제는 그것이 다가 아니겠구나.”

도르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도 어느 정도는 한윤이 급발진한 이유를 짐작하고 있겠지. 그동안 홍타이지와 도르곤의 우산 아래에서 느껴지지 않았던 칼날들이, 근래 들어 슬슬 피부에 와닿고 있던 차였다.

분명 전례 없는 고속 출세를 누린 나를 고깝게 보는 자들이 심양에 한둘이 아닐 것이다. 카간의 명을 내 입으로 듣고도 믿지 않았을 정도로 그들의 나에 대한 질시와 묵은 감정의 뿌리는 깊은 모양이었다.

한윤은 잘안 장긴 하나 혼내준 일 정도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 뒤처리를 해줄 거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아군에게 칼을 들이밀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의 인식 이상으로 나와 홍타이지, 나와 도르곤의 관계는 긴밀하다. 아마 그들은 나와 마카타 황녀 사이에 오가는 혼담의 존재조차 모를 것이다.

성 영감이 튀어나온 못은 정을 맞기 마련이라고 말했었던가. 성균관이나 청나라나 사람 사는 동네는 다 비슷할지도.

“카간께 들었다. 북경을 점령하면 너와 고려 세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내시겠다더군.”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분의 생각이 옳았구나. 나는 카간과 달리 너를 끝까지 내 밑에 두고 쓰고 싶었으나, 오늘 일을 보면 상황이 여의치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다만…….”

투구에 달린 술을 휘날리며 고삐를 당기던 도르곤이 이를 악물었다. 고작 내가 공격받은 일 하나로 이렇게 표정을 망가뜨릴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것입니까.”

“다이칭 구룬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그렇다. 카간을 중심으로 철통같이 결속되어 있던 규율이 흔들리고 있어.”

“카간께서 내리신 명을 어긴 자가 발생한 것에 대한 염려십니까.”

“아니, 고작 그런 사소한 일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도르곤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잠시 망설이던 도르곤은, 결국 나 정도면 믿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카간의 용태가 심상치 않다. 이미 이번 원정의 시작부터 꽤나 무리를 하시고 계셨는데, 산해관에서 피를 한 되나 토하시고는 정신을 잃으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런……! 빨리 심양으로 돌려보내 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미 북경 정벌에 관련해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시는 상태다. 아버님께서 산해관을 앞에 두고 원통하게 눈을 감으셨는데, 산해관을 떨어뜨린 지금, 형님의 눈에 북경성만 보이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도르곤이 홍타이지를 내 앞에서 형님이라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위태로운 홍타이지의 건강은 그 철벽같던 도르곤마저 흔들리게 만들고 있었다.

“너에게 방금 일어난 일도 그와 관련이 없지 않다. 형님께선 이제 몸 상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시니까.”

“설마 카간께서 위중하시게 된 바람에 그동안 엎드렸던 자들이 고개를 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한윤의 일이 고작 단순한 사고일지,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꼬리를 흐린 도르곤의 시선은 저 멀리 어드메로 향해 있었다. 허나 그의 눈동자가 품은 힘은 굳셀 뿐이었다.

“형님의 뜻을 꺾으려는 자는 나부터 꺾고 가야 할 것이다. 나를 아껴주신 형님의 은혜를 갚는 법은 그것뿐이니까.”

“카간께서 예친왕께 후계에 관한 명을 내리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아버님이 남기신 전례에 따라 황족들이 회의를 열어 후계를 결정해야겠지만, 형님이 품으신 의중은 따로 있는 듯하구나.”

누르하치가 급사한 이후 의정왕대신회의를 소집해 홍타이지가 후계자로 결정되었던 것처럼, 홍타이지가 죽으면 그의 후계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선출될 것이다. 도르곤의 말은 그 이야기였다.

“그분이 바로…….”

“장자인 호오거는 성정도 문제가 있고 출신 또한 황위에 오르기 적합하지 않다. 나이는 어리지만 황금씨족의 피가 흐르고 카간의 자질을 가진 이가 따로 있지.”

홍타이지와 도르곤의 사람 보는 눈은 일치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지목한 푸린, 즉 순치제의 아들이 천고일제(千古一帝)라 불리는 강희제이니 정확한 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헌데 조금 이상했다. 내가 아는 도르곤은 본인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했을 텐데.

원 역사에서의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장남, 호오거와 황위를 놓고 대립하다 9남인 푸린을 옹립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고 알려져 있었다.

설마, 호오거의 뜻을 꺾고 푸린을 옹립하기 위해 본인이 악역을 자처하기라도 한 것인가. 그가 회의 자리에서 억지를 부렸던 탓에 푸린의 어미인 황후와 불륜 관계였다는 야사까지 돌았을 텐데.

분명 도르곤은 후에 섭정왕의 자리에서 황제와 다름없는 권력을 누리면서도 황위는 침범하지 않았다. 그가 집중시킨 권력은 도르곤 사후 순치제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그렇게 앞뒤 안 맞는 행동을 한 이유는 사정이 있어서였나. 조카 목을 날리고 왕이 된 인간도 있는 마당에 도르곤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긴 했었는데…….

그 추측을 증명하듯이 내 옆에서 말을 달리는 자의 표정은 복잡했다.

“제가 함부로 드릴 말씀이 맞나 싶지만…… 건강하셔야 합니다. 카간께서 내리신 명을 지키시려면 오래 사셔야 하니까요.”

“형님께서 네게도 후계를 푸린에게 맡길 것이라 하셨더냐? 너도 어지간히 형님의 신뢰를 산 모양이구나. 너를 점점 고려로 보내기 싫어지는데.”

“방금 카간의 뜻을 따르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카하하!

방금까지 비장하던 분위기는 간 데 없고 시원하게 웃어젖히는 도르곤이었다. 다시 나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시원스러울 뿐이었다.

“암, 따라야지. 따라야하고 말고. 허나, 그 일과 관련해서 네게 미안해질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차라리 네가 우리와 같은 피를 타고났다면 좋았을 것을.”

“미안해하실 일이라니,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

“나중에 닥치게 되면 말해주겠다. 그저……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내 너를 아끼는 마음은 진심이니까.”

양심이 조금 찔렸다.

이런 도르곤의 뒤통수를 까고 일찍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명의 황제를 살려 보낸 나였다. 차라리 도르곤이 지금 품은 마음과 달리 조카를 제치고 황위에 올랐다면, 그래서 그가 몰락할 일이 없었다면 그 옆에 남았을지도.

***

“드디어 내가 품었던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말과 달리 홍타이지의 얼굴에는 어둠이 서려있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거칠게 쿨럭거리며 기침을 삼켰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카간!”

“괜찮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 모습을 보고 하석에 앉아있던 도르곤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손을 들어 그것마저 제지하는 카간이었다.

“어서 심양으로 돌아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카간!”

“큰 소리 내지 마라. 내 몸 상태는 내가 더 잘 안다.”

“그렇지만……!”

“카간의 명을 어길 셈이냐, 도르곤.”

항상 냉철함을 잃지 않던 도르곤이었다. 그런 그가 평정을 잃을 정도로 홍타이지의 병세는 심각해보였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어가는 홍타이지였다. 정신이 육체를 능가하는 상황이 있다던. 홍타이지에겐 지금이 바로 그 상황임이 분명했다.

“보고대로라면 지금까지는 의도한 대로 상황이 굴러가고 있다. 북경은 사실상 주인 잃은 성이 되었고, 산해관은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왔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로구나.”

“그 오삼계가 정말로 순순히 산해관을 열어준 것입니까?”

“안 장긴의 말이 옳았지. 그의 주군이 위험하고 북경이 떨어질 위기라 하는데 어찌 내 제안을 거부할 수 있었겠느냐. 쿨럭.”

원역사에서는 북경이 함락당하고 숭정제가 자결한 후에야 소식을 들은 오삼계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마 내 도움을 받아 탈출한 숭정제는 오삼계의 군세에 합류해 있겠지. 계획대로였다.

“고작해야 곧 쓰러질 나라의 황제 하나와 화북을 바꾸다니, 내 인생 최고의 거래였다.”

“계획대로 장강 이남으로 군세를 물리게 해주는 조건으로 오삼계가 산해관을 넘긴 것입니까?”

“그렇다. 덕분에 이자성의 반란군 놈들이 북경을 완전히 떨어뜨리기 전에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지. 북경이 놈들에게 약탈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오삼계의 얼굴이 볼 만하더구나.”

요동총병관의 자리에 올라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였으나 그의 가족은 북경에 살고 있었다. 그가 산해관에서 지켜야만 하는 황제와 가족들이 전부 위험에 처했는데, 어찌 위치를 고수했겠는가.

“이제 저 주제 모르는 한인 반란군 놈들만 격멸하면 북경과 화북 일대는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다. 선대 카간께서 그토록 염원하시던 입관(入關)의 완성이지.”

“북경성 남쪽에서 전투가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아군과 이자성의 군대가 격돌한 것입니까?”

“도르곤. 오삼계가 마음을 바꿔 성내로 진입하면 어쩌려고 우리가 방패 역할을 해준단 말이냐? 황제를 살려주었으니 그 정도 잡일은 그쪽이 해 주어야 도리가 아니겠느냐?”

오삼계군과 이자성군의 본대가 맞붙은 사이 홍타이지는 부대를 나누어 북경성에 남아있던 이자성군을 토벌하고 내부를 장악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약탈하던 자들의 피로 북경 성내가 뒤덮였다 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도르곤 역시 호포대가 제어 중이던 구역을 중심으로 내성의 북부 구역에 병력을 돌입시켰을 터. 그 말을 전해 듣자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기던 홍타이지의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좋다. 아주 좋다. 예정대로 약탈을 엄금하는 군령은 내렸겠지, 도르곤?”

“사소한 사고가 있긴 했으나, 여기 있는 안 장긴이 뿌리를 끊어냈습니다.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역시 저 녀석을 중하게 쓴 것이 정답이었군. 그럼 이제 정말로 한 걸음만 남았다.”

카간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곧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군막 전체를 울렸다. 대화에 집중하던 모든 좌중이 움찔할 정도였다.

피를 토하고 기절했던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다들 오래 기다렸다. 선대 카간께서 부족원 일백과 갑옷 열셋으로 시작한 천명(天命)이 새로이 매듭지어질 날이 다가오는구나.”

목이 메는 것인지, 다시 한번 피가 넘어온 것인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홍타이지였다. 곧이어 그의 매서운 시선이 좌중에 앉아있는 이들 하나하나를 훑기 시작했다.

카간의 눈길이 향한 이들은 작은 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좌중은 한 사람에게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본거지 심양을 마음속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앞으로 열릴 새로운 시대에 있어 다이칭 구룬의 주 무대는 이 북경이 될 것이다.”

“…….”

“가라. 가서 마음껏 찌르고 베고 넘어뜨려라. 우리의 자손이 대대손손 지배할 자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어라.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 카간은 잠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잠시 후, 어둠이 내려앉은 홍타이지의 얼굴 한가운데 번쩍 뜬 눈동자가 횃불처럼 빛났다.

“대륙의 패자가 이제 누구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어라. 나의 전사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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