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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87화 (87/298)

87화. 대륙의 패자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을 무렵 시작된 전투는, 그 해가 서쪽 하늘을 가로질러 자취를 감추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넓게 펼쳐진 대지는 노을로 붉게 물든 것인가, 아니면 시신의 핏물로 붉게 물든 것인가.

내가 발사한 총탄으로부터 개시된 전투였다.

호포대는 적의 좌익과 직접 격돌한 오삼계군의 측면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것을 훌륭히 수행해냈다. 이번에는 내 부대가 삼백 보 앞에서 쏘아대는 망치를 맡은 셈인가.

이자성군에도 머리가 돌아가는 장수는 있었는지, 일부 병력을 빼 아군을 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모루 역할을 해 주는 오삼계군에게 대부분이 저지당했다.

일부 운 좋게 방어벽을 돌파한 놈들도 있긴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일제사격과 집중사격이 가능한, 훈련이 잘 된 조총대를 건드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총탄을 피해 접근한 병력도 보조병들이 달려 나가 시간을 끄는 사이 목숨을 잃었다.

적은 화포를 이용한 지원포격으로 어떻게든 그 기세를 꺾을 생각이었던 것 같으나 마침 불어닥친 모래바람이 그 시도마저 무력화했다. 천운이었다.

그렇게 아군 우익은 오삼계군을 중심으로 분전해 적 좌익을 밀어냈다. 황사가 일어 시야가 불량해진 시기를 틈타 적의 옆구리를 들이친 시도가 결정적이었다.

“전군, 착검(着劍)!”

사격을 할 여건이 되지 않으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사격이 가능한 시야가 확보될 때까지 접근하는 수밖에. 착검은 만약의 사태를 위한 대비였다.

적 역시 가려진 시야에 당황하고 있을 것이란 계산 하에 내린 명령이었다. 하지만 황사가 일으킨 걸림돌은 시야의 제한뿐만이 아니었다.

“좋아, 이제야 피아가 조금 구분이 되는군. 일열, 격발하라!”

“어어? 장긴 나으리, 총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뭐야?”

부품과 화약 사이로 스며들어간 거친 먼지가 기능고장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결국 발사가 불가능해진 일부 병력들은 쿠투러들 사이에서 방패를 들려 전열을 방비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직접 지휘하는 병력들 이야기고, 이 난장판 속에 지휘력이 닿지 않는 병력은 상황이 다른 모양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

한 무리의 병력들이 함성과 함께 전열에서 뛰쳐나와 방패를 든 쿠투러들과 함께 돌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충신의 니루 방향이었다.

“저게 뭐하는 짓거리야! 김 갑사, 당장 가서 저 짓거리를 막게!”

“옛!”

허나 김 갑사가 달려가 사태를 수습하기엔 이미 늦은 듯했다. 충신의 착검돌격을 본 다른 니루에서도 기능고장이 일어난 병력들이 덩어리를 지어 뛰쳐나가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이 미친 새끼들아, 그 총이 얼마짜린데 착검돌격에 써먹어? 적의 단단한 갑주에 쑤셔 박은 총열이 휘기라도 했다가는 전원을 가죽 무두장에 처박아버려도 속이 시원치 않을 것이다.

헌데, 효과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규모로 일어났다.

“으아아악! 저놈들은 뭐냐?”

“짐승 떼들이 무리지어 방패와 창을 들고 돌격한다!”

“황사에, 짐승까지…… 오랑캐놈 들이 요술이라도 부린 것이냐? 으아악!”

“저놈들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이냐! 이놈들! 정신 차려라!”

착검돌격을 행한 인원들이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짐승탈을 착용하고 뛰쳐나간 것이 오히려 상대방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미 지휘관을 잃어 지휘체계가 붕괴 직전인 적군이었다.

대패닉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상황에 당황한 이자성군이 뒷걸음치는 것이 여기서도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이자성군은 모래바람 때문에 사격이 중지되자 호포대 방향으로는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그때 그 방향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괴수들이 창질을 해대니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을 리가.

이미 호포대의 사격이 적 좌익의 옆구리에 큰 상처를 낸 상태였다. 이번의 돌격은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적의 좌익은 붕괴했다. 전의를 잃어 대열마저 무너진 적은 주력인 오삼계군의 칼날에 무수히 쓰러져갔다. 모래바람이 걷힌 후, 그나마 버티고 있는 적군의 규모가 절반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무두장으로 보내는 건 좀 심했고, 남원폭격 여덟 시간 정도로 봐 줄까.

“나으리! 나팔 소리가 들립니다!”

“더 몰아붙여라! 아군 철기가 적의 중앙을 돌파할 것이다! 도망치는 놈들을 쫓아 격멸하라!”

그 순간, 적의 중군을 향해 찔러 들어간 홍타이지의 창끝이 이자성의 방패를 뚫어냈다. 나와 호포대는 이제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한 적의 좌익을 추격해 계속해서 적들을 쏘아 쓰러뜨렸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적의 군세는 걷잡을 수 없었다. 뒤이어 돌격을 개시한 청군의 기세에 후방에 위치한 적병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정황기, 양황기, 정람기 등 중앙을 돌파한 카간의 직속 철기와 아군 우익은 힘이 빠진 적의 좌군을 그야말로 찢어놓았다. 적은 엉뚱한 곳에 화포를 쏘아대며 반항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이자성은 결국 그나마 잘 버티고 있는 우군이나마 건져 철수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 후 전장에 남은 적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방적인 살육뿐이었다.

***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숙영지를 정리하던 내게 전령 하나가 날아들었다.

속히 본군에 합류하라는 영이었다.

“만세! 만세!”

“대청국 황제 폐하! 만세!”

뭐지? 내가 지금 심양이 아니라 북경의 성문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명의 관복을 차려입은 자들과 백성들이 성 밖 5리 거리까지 나와서 청군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무리 위기에 처한 북경을 구한 세력이 청나라라고 해도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그들이 얼마 전까지 오랑캐라고 부르던 자들에게 이런 환영의식을 베풀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굴 풀어라, 안 장긴. 이 자들은 약간의 착각을 한 것에 불과하니.”

나중에 도르곤에게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북경 성내에는 이자성군을 물리친 군세가 오롯이 오삼계의 군세인 것인 것처럼 전해진 모양이었다. 그 오삼계를 산해관에서 끌고 온 자가 미리 북경을 탈출한 태자라는 소문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는 반란군을 물리친 태자를 맞으러 나온 자들이 청군을 보고 그대로 태세를 전환했다 이거지? 어쩐지 만세를 부르는 인파들 사이에서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는 자들이 많다 했다.

“우와! 완전 별천지인디요!”

“여가 천자님이 산다던 북경성이구마. 화아…….”

“시끄럽다. 이놈들! 체통을 지켜라!”

그 충신이 부하들을 다잡을 정도로 부대의 분위기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호포대는 카간의 직속 팔기와 더불어 북경에 진입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령지에서 자신들을 환영하는 인파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들뜨는 일이었다.

아마 최초로 북경성에 진입한 부대이면서 백성들에게 가해지던 약탈까지 저지한 이미지가 있어 내려진 결정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대원들에게 날아오는 명나라 사람들의 시선에는 절반의 경악과 절반의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아마 군대의 창칼이 빛나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저 짐승탈 쓴 오랑캐 놈들에 대한 당황스러운 반응이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그래도 저자들은 반란군과는 다르다며 변호하는 이도 있었을 것이고.

카간을 앞세운 청군의 행렬은 북경성의 동문인 조양문을 지나 천천히 자금성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데 말을 탄 채 내 반 보 앞을 걷는 도르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엇을 그리 염려하시는 것입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있다. 좋지 않구나.”

도르곤의 시선은 행렬 맨 앞을 나아가는 홍타이지를 향해 있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이자성군과의 일전을 치르기 이전보다 훨씬 짙어져 있었다.

행렬이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에 도착했을 때, 도르곤의 염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마중 나온 명의 내감(內監)이 카간에게 황제의 가마로 갈아탈 것을 권했을 때였다.

말에서 내리는 카간의 동작이 얼핏 어색했다. 나나 도르곤처럼 홍타이지와 마주할 일이 많은 자들만 알아챌 정도로 미세한 차이였지만, 그 사실이 도르곤의 수심을 더 깊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카간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전장에서도 상태를 유지하신 분입니다. 이제 전투가 승리로 끝나고 염원하던 북경에까지 입성해 휴식만 남기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네 말도 일리가 있으나…… 모르겠다. 어찌하여 이렇게 가슴이 내려앉는단 말이냐.”

도르곤의 염려는 기우에 불과할 것이다. 역사가 바뀌었긴 하나, 원 역사대로라면 홍타이지의 수명은 아직 남아있었으니까.

그러나 냉철하게 돌아가는 머리와는 다르게 내 가슴 한구석에는 불길함이 밀려들고 있었다.

도르곤의 기분이 전염이라도 된 건가.

가마를 탄 채 천안문을 통과해 늘어놓은 의장을 마주하는 카간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이윽고 단문(單門)과 오문(午門)을 지나 카간의 가마가 자금성 내로 진입했다.

천천히 가마에서 내린 후, 울리는 음악에 맞추어 하늘과 궁궐을 향해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하는 홍타이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도르곤이 괜한 걱정을 한 것이 분명했다. 불타지 않은 무영전(武英殿)으로 들어가 어좌를 차지하고 앉은 홍타이지의 표정은 평소 그대로였으니까.

“……하여 나는 너희를 다스리고 천하를 안정시킬 것이다.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은 내가 오늘 한 말을 새겨 잊지 않도록 하라.”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그래도 카간을 새로운 지배자로 인정하고 맞으러 나온 명나라 관원들은 일반 백성들보다는 사태를 빠르게 파악한 듯했다. 아니면 반발할 자들은 이미 모두 북경성을 빠져나갔기 때문일 수도.

엎드려 절하며 만세를 계속해 외쳐대는 장수와 관원들을 본 홍타이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는 어두운 안색과 대비되어 묘한 이질감을 주고 있었다.

***

“후……. 드디어 일단락이 되었구나. 참으로 오래도 걸린 일이었다.”

“카간!”

“왜 이리 호들갑이냐, 도르곤. 너답지 않다.”

첫 조회를 마친 후 나와 도르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남긴 홍타이지였다. 내감의 인도를 받아 침소로 향하는 내내 자금성의 화려한 장식에 눈이 돌아갈 것 같았지만 겨우 견뎌냈다.

도착한 장소는 황제의 침소인 건청궁 동난각(乾淸宮 東暖閣)이었다. 이층으로 이루어진 전각에는 침대가 스물일곱 개나 위치해 있었는데, 카간은 그중 하나를 고른 후 털썩 주저앉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구나. 세상이 이토록 맑게 보이는 것이 얼마 만인가 싶다.”

“정말이십니까? 몸은 괜찮으신 것이지요?”

“멀쩡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 앞으로 악화될 일은 없지 싶다. 아버님이 그토록 염원하며 말씀하시던 북경의 옥좌에 앉고 나니 앓고 있던 병들이 날아간 것만 같구나.”

누르하치가 어린 홍타이지를 어르며 해준 이야기 중에는 자금성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았다. 거무죽죽한 안색을 하고도 눈빛을 빛내는 카간은 잠시 어린 시절의 동심을 되찾은 듯했다.

“암살을 막기 위해 침전에는 침대가 여럿이고, 황제가 된 자는 자리를 매일 바꿔가며 잠을 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실제로 와서 확인해 보다니, 재미있는 일이 아니냐.”

“카간께서 이토록 즐거워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격식을 차릴 필요 없다. 도르곤. 단둘이 있을 때처럼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하지만 카간…….”

“안 장긴이 거슬리는 것이냐. 허나 그럴 것이라면 이 자리까지 데려오지도 않았다. 어서.”

그제서야 도르곤의 입에서 형님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자 홍타이지는 크게 만족한 듯했다. 가볍게 미소 짓는 카간의 입술이 거칠거칠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 너희를 부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너희의 공을 따로 치하하기 위함이지.”

“이미 형님께서 내리신 격려는 그동안 차고 넘치게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다. 너희가 없었으면 이 자금성에 들어올 일이 있었겠느냐. 정말로 수고가 많았다.”

손짓으로 도르곤을 부른 카간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상상도 못한 행동이었는지 도르곤의 목울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내 너의 어미를 아버님과 함께 순장한 일을 막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아직도 그 일을 원망하느냐.”

“이십 년이 되어가는 일입니다. 이제 와 감정 한 조각이나마 남아있겠습니까, 형님.”

“거짓말 하지 마라. 어린 나이에 어미를 빼앗겼는데 어찌 한이 남지 않았겠느냐. 미안하다, 아우야. 지금의 나였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형님도 고작 일개 도로이 버이러 중 한 명이시던 시절이 아닙니까. 카간의 자리에 오르신 이후로 저희 형제를 중용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 말이라도 그렇게 해 줘서 고맙다, 도르곤.”

아우의 어깨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카간의 눈동자는 붉었다. 아마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는 도르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아버님의 뒤를 이은 이후로 너만큼 공을 세운 신하도, 아우도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를 알겠느냐.”

“형님…… 푸린을 부탁한다는 말씀은 이제 그만 하십시오. 다이칭 구룬을 위한다면 형님께서 더 오래 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께서 각혈한 것만으로도 군의 기강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알고 있다. 그러나……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 같구나.”

바닥을 향해 있던 도르곤의 고개가 올라왔다. 그의 눈동자는 커진 채, 가볍게 진동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시간이 없다니요!”

“어젯밤 군막에서 꿈 하나를 꾸었다. 그리운 사람이 나오더구나.”

“형님, 설마…….”

“먼저 간 하르졸을 오랜만에 꿈에서나마 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웠지.”

금주 전투 도중 먼저 하늘로 떠난 그의 애첩 이야기였다. 홍타이지의 건강이 이토록 상하기 시작한 시점은 그녀의 죽음부터였다.

“하르졸이 내게 손을 뻗어오기에, 무심코 뻗은 손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군막의 천장이 보이더구나.”

“그저 꿈일 뿐입니다, 형님! 그런 일로 마음을 약하게 드시면 안 됩니다!”

“날 마중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사랑한 여자라면 그쯤은 되어야지.”

“형님!”

쿨럭. 카간이 입에서 시뻘건 선지를 기침과 함께 토한 것은 그때였다. 묵직한 핏덩이가 침전의 바닥을 굴렀다.

“이번 싸움 내내 가슴을 틀어막고 있던 녀석이 이것이었구나. 세상이 맑아진 이유가 있었다.”

“아닙니다, 형님. 병원(病原)이 제거되었으니 이제 곧 쾌차하실 겁니다.”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 내가 남긴 뜻을 잊지 마라. 도르곤. 의정왕대신회의가 소집되면 푸린으로 하여금 내 뒤를 잇게 하여야 한다. 호오거는 한낱 장수면 몰라도 제국의 우두머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놈이야.”

“하지만 형님, 푸린이 장성하실 때까지 형님께서 버텨주셔야지요…….”

“내 몫까지 네가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이 자리에 부른 것이다. 섭정왕의 자리에 올라 푸린을 보좌해라.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르곤의 고개가 다시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떨리는 그의 등을 카간은 천천히 쓰다듬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뒤에서 듣고 있는 놈, 너도 앞으로 와라.”

명을 받아 가까이 다가간 내 어깨에도 카간의 손이 얹혀졌다. 마른 나무토막이 와 닿는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소름이 돋았다.

“유조(遺詔) 아닌 유조를 내리는 자리에 너를 부른 이유를 알겠느냐.”

“후계 승계 과정에서 예친왕을 도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내가 시키지 않아도 너 정도라면 알아서 하겠지. 그때는 도르곤의 지시가 이전의 내 명령과 어긋나더라도 녀석의 지시를 우선시하도록 해라. 녀석의 판단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카간은 그리도 도르곤을 신뢰하는 것인가.

그 말을 들은 도르곤은 숫제 끄윽 소리를 내 가며 통곡을 삼키고 있었다. 도르곤이 어째서 홍타이지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홍타이지의 입술이 심술궂게 비틀렸다. 그 조소에는 아쉬움이 듬뿍 묻어나는 듯했다.

“뭐, 고려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내리는 과제라 생각해도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만 더 오래 살 수 있었더라도 네놈은 고려로 돌아가지 못했을 거다. 감사히 여기도록 해라. 죽을 때가 된 모양인지 지난날에 대한 감회만 새로워지는구나, 젠장.”

입안이 껄끄러운지 침을 그러모아 타구(唾具)에 뱉는 카간이었다. 타구 역시 시뻘건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네놈을 심복 아닌 심복으로 삼고 참으로 즐거웠다.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 같은 발상들도 그렇고, 이번 입관도 네가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내가 살아생전 자금성을 밟을 일이 있었겠느냐.”

“카간…….”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너를 급하게 총애한 것인데, 그것이 평범한 놈들의 질시를 사 너를 다이칭 구룬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 줄이야. 이것도 하늘이 인도하신 것인가.”

어깨에 얹힌 손에 힘이 들어왔다. 홍타이지의 의지였다.

“……아르가투.”

카간의 분위기에 압도된 와중에 갑자기 단어 하나가 내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문맥과 맞지 않는 ‘책략’이라는 만주어 단어 탓에, 바닥을 향하고 있던 내 시선은 카간의 얼굴을 향하고 말았다.

“내가 내리는 만주족 이름이다. 감사히 받도록.”

“카간!”

“왜인지 네놈을 처음 금주의 군막에서 마주쳤던 날이 떠오르는구나. 그때는 나를 폐하라 부르던 놈이, 이제는 다른 만주족들처럼 나를 카간이라 부르고 있다니.”

순간 눈시울이 울컥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홍타이지의 거친 손길이 나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가 어디에 있던 너는 나의 장긴이다. 네가 나 대신 고려의 왕을 택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너는 나의 장긴이다.”

“…….”

“고려에 가 있더라도 푸린과 섭정왕이 될 도르곤을 잊지 말고 도와라. 도르곤은 신세 진 것을 잊을 녀석이 아니니, 네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의 아르가투 투먼 바투루여.”

나는 청나라 대신 조선을 택했는데, 홍타이지는 여전히 마음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를 그의 전사라 칭하며 전해지는 진심에 조용히 고개를 숙여 따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열흘 후, 정무를 보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던 홍타이지는 옥좌에 앉은 채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대륙 지배의 기틀을 닦은 명군의 붕어(崩御)였다.

※ 작가의 말

작중 묘사된 북경 점령 후 명나라 백성들의 반응은 고증입니다.

성문 밖 5리까지 나와 청군을 맞이하고 카간이(원 역사에서는 순치제 대신 정벌에 나섰던 도르곤이) 하늘을 향해 삼궤구고두례를 올리는 장면은, 청사 도르곤 열전과 청세조실록, 인조실록에 적힌 그대로를 묘사했습니다.

2017년 3차 군사사 연구논문 발표회에서 박민수 박사님이 발표한 견해에 따르면, 당시 명나라 백성들이 청군을 환영한 일은, 도망쳤던 황태자가 오삼계의 군세를 이끌고 입성한다는 소문이 당시 북경 성내에 퍼진 결과 그 오해가 쌓여 일어난 일종의 해프닝이라 볼 수 있다더군요. 하긴 저 상황에서 맞아들일 손님이 바뀌었다고 누가 오랑캐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었겠습니까만, 그 설을 채택했습니다.

홍타이지가 주인공을 부른 ‘아르가투 투먼 바투루’는 만주어로 지략이 뛰어난 용사를 뜻합니다. 그의 아비 누르하치가 맏이인 추엥에게 내린 칭호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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