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꿩 대신 닭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
홍타이지가 언제부턴가 황녀의 언급을 멈췄던 때부터였나, 아니면 북경을 찾아온 최명길이 비슷한 예측을 꺼냈을 때부터였나. 그것도 아니면 도르곤이 황녀의 외출을 허하지 않는다는 서신을 궁을 나온 시녀가 전했을 때부터였나.
황녀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형님이 조금만 오래 살아계셨어도 그 아이를 너를 따라 고려로 보냈을 것이나, 상황이 달라졌다.”
“……새로운 카간은 아직 어리시니, 그분을 뒷받침할 세력을 연결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래. 뒷배가 되는 세력이라고 해봐야 카간의 외가와 나를 포함한 일부 황족뿐이다. 훗날을 위해서라도 혈연을 이용해 큰 세력을 붙들어놓을 필요가 생겼다.”
어디일까. 입관 전 항복한 명나라 세력일까. 북경에 잔존한 세력일까. 아니면 원래 시집보내려던 몽골일까.
여섯 살짜리에게 시집가기는 죽어도 싫다며 나를 붙들던 황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흩어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너희가 꽤나 정을 나누었던 사이인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굳이 명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너를 불러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섭정왕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도르곤에게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진심이 담겨 있었다. 딱히 황녀에게 마음을 준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사람됨까지 싫어했던 것은 아니니까.
떠나보낸 옛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에, 황녀답지 않은 발랄함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삭막하던 심양 생활에 몇 번의 데이트가 위안이 된 것은 사실이었고, 황녀가 내려준 갑옷이 아니었다면 한윤과의 단기접전에서 패배했을지도 몰랐다.
한양에서 기다리는 하연이 없었더라면 황녀에게 정말로 꽤 흔들렸을지도. 그랬다면 조선으로 돌아가기는커녕 홍타이지를 섬기며 청의 신하가 된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도 본국에 두고 온 정혼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주 없던 일로 치는 것도 어렵겠지만, 그래 주길 바란다.”
“황녀 자가와 혼인을 권하신 분도 선대 카간이시고, 그걸 거두어 가시는 분도 선대 카간의 의지를 이으신 분이니, 제가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그래. 아마 형님은 네가 남지 않더라도 너를 통해 고려에 영향력을 끼치려던 생각이셨겠지만, 상황이 달라졌으니 어쩔 수 없겠구나.”
도르곤 역시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 형의 명을 어기게 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본디 황실의 혼인이란 복잡한 사정이 끼어있기 마련이었다. 홍타이지는 내 앞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되어 황녀를 부탁했지만, 도르곤은 새로 즉위한 조카를 지탱해야하는 섭정왕의 위치에서 황녀를 빼앗아가야 한다.
그걸 알기에 홍타이지 역시 유조를 남기며, 자신과 도르곤의 뜻이 어긋나면 도르곤의 지시를 따르라 명했을지도.
그 유조는 아비의 감성과 카간의 이성이 다툰 결과인가.
이런 거대한 명분과 정략 앞에서 내가 저항할 도리는 없었다. 조용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녀 역시 자신이 황실의 일원임을 자각한다면 현실을 금방 받아들일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속이 쓰라렸다. 그녀의 처지에 대한 동정인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실망한 낯빛을 내비치지 말거라. 마카타를 대신할 것을 네게 내려줄 테니.”
“세상에 어떤 물건이 있어 사람의 마음을 대신하겠습니까. 전하의 마음만 받아가겠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도 바라는 것이 없다더니, 마지막까지 그러는 게냐? 이건 형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고려에서 너의 입지를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을 대신해 내릴 것이니 반드시 돌아가는 길에 받아가도록 해라.”
나를 돌려보내서 조선에 청의 영향력을 투사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복잡해진 내 머릿속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미 그동안 세운 전공을 감안해 세자의 귀국에 대규모의 조선인을 속환시켜 돌려보내기로 결정이 난 마당이었다. 만주에 남고 싶은 조선인들은 사하보 농장에 그대로 남고, 남는 땅은 청이 인수한다.
향피(香皮)의 제조법과 공방은 청에 넘겼다. 어차피 조선에서는 가죽제품을 잘 쓰지 않으니까.
그 대가로 심양관에서 그동안 벌어들인 재물을 그대로 가져가도 좋다 허락받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무엇을 더 받아야 할까.
아.
“……섭정왕 전하, 현재 양국 사이를 오가는 무역은 크게 제한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막혀있는 상행(商行)의 물꼬를 터 주실 수 있겠습니까?”
“으음, 지금은 사신이 오갈 때만 무역이 시행되고 있던가. 그래도 심양에 있던 시절 이미 오가던 사신들의 물품 소지량과 물목의 제한을 크게 완화해주지 않았느냐?”
“북경으로 천도까지 한 상황이 아닙니까, 다이칭 구룬의 성장에 따라 심양에 머물던 시절보다 고려 물산의 수요 또한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복건 일대를 주름잡는 정지룡의 해적 집단이 해상 무역을 틀어쥐고 있는 탓에, 곧 해금령(海禁令)을 내리실 예정이 아닙니까. 부족한 물량은 고려에서 최선을 다해 공급해보겠습니다.”
흐음.
짧게 콧소리를 내고는 도르곤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 시선은 내게 여전히 박혀있는 채였다.
“너희 땅을 유학자들이 지배한 이래로 고려 땅의 물산은 점점 보잘것없어졌다고 들었다. 무역로만 열어준다고 하여 내다 팔 물건이 당장 생기겠느냐?”
“적어도 지금 거래되는 물목인 홍삼과 은은 최대한 공급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물목들은 제가 돌아가 하기 나름이라 생각합니다.”
“그래, 사하보의 그 황무지에도 농장과 공방을 흥성케 한 놈이니 네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특권을 원하느냐?”
내게 꽂히는 도르곤의 눈빛은 처음 만났던 그 날 그대로였다. 그래, 그날 오목도의 집에서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렇게 역사를 뒤흔들어놓지도 못했겠지.
시원섭섭한 기분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생각났다. 전역한 날 위병소를 빠져나오던 그 느낌인가.
“지금도 중강(中江), 회령(會寧), 경원(慶源) 일대에서 격년제로 시장을 열어 정해진 수량에 한해 무역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그 기간을 줄여주셨으면 합니다.”
“고작 그것으로 끝은 아닐 테지?”
“거기에 더해, 전하께서 승낙하신다면 심양과 북경에 상주하는 인원을 두고 상관(商館)을 운영해볼까 합니다. 저는 돌아가겠지만 다이칭 구룬과 고려의 교류는 더 깊어지겠지요.”
“좋다. 마음에 드는 제안이군.”
도르곤이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주머니를 내게 던졌다. 방금 내가 건넨, 잘안 장긴의 도장이 들어있는 그 주머니였다.
“……무슨 뜻이십니까? 고려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 나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단, 고려로 돌아가 우리에게 상단을 보낼 때, 그 인장을 찍은 허가서를 지참시켜라. 시장으로 가는 상단이든, 상관으로 가는 상단이든, 허가서가 없는 놈들은 국경을 통과시키지 않겠다.”
얼떨결에 날아온 주머니를 받고도 어안이 벙벙했다.
도르곤은 분명, 조선 조정이 아닌 안한수 개인에게 대청(對淸) 무역권을 일임한 것이다.
“네가 당황하는 표정은 오랜만에 보는구나. 머리가 도는 놈이면 그럴 만도 하지.”
“제가 오롯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권한입니다, 전하.”
“고려 조정에 그 권한을 주어봐야 썩히기밖에 더 하겠느냐? 편자는 말발굽에 다는 것이지, 어디 돼지 발굽에 다는 것이 아닌 법이다.”
“저를 말로 봐주신 것은 감사하오나, 아직 제 발굽에 편자를 달기에는 이르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덩치를 키우는 것도 너의 몫이다. 얼마나 빨리 성장할 것인지 이곳에서 지켜보고 있겠다. 안한수.”
조선의 권력, 그 중심까지 기어올라 특권을 제대로 사용하도록.
도르곤의 눈동자는 분명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명심해라. 너도 깨달았겠지만 고려에서 우리에게 보내는 물품에 관련된 것을 네게 전부 일임하겠다는 말과 같다. 네 일 처리가 기대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그 특권은 곧바로 회수될 것이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내려주신 특권, 곧바로 활용하기는 어렵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양국의 이득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당분간은 북경에 홍삼만 충분히 보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니 너무 서두르지는 말거라. 아, 그 건은 내가 직접 힘을 써야겠군.”
조선 조정은 믿을 수 없다며, 직접 붓을 들어 섭정왕 명의로 상단 하나의 허가장을 직접 작성하는 도르곤이었다. 내가 조선에서 실권을 휘두르기 전까지는 본인이 이전처럼 무역량을 제어할 생각인 듯했다.
“너희 조정에서 친왕과 군왕들에게 선물을 빙자해 바치던 뇌물을 이제 엄금할 생각이다. 형님이 살아계실 때는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위에서 누르던 권위가 사라져 다른 왕들이 폭주하는 상황을 염려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그렇다. 형님이 계시지 않으니 놈들이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할지도 모르는 것이고. 또한 이제는 고려에서 받을 공물 또한 나라에서 전담해야 하지 않겠느냐.”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허나…….”
하긴, 김자점 같은 신하들도 정명수같은 역관들에게까지 잘 보이려 뇌물을 뿌려댔는데, 청나라 황족들에게 흘러들어간 뇌물은 오죽 많겠는가.
도르곤은 조선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일원화해 통제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조선과의 무역에서 나오는 이득은 국고로 넣고, 권력을 쥔 황족들의 수입 중 하나를 차단할 생각인가.
“분명 황족들의 반발이 심하겠지. 그러나 이 또한 현 카간을 위해서라면 해야 하는 일이다. 아랫놈들의 힘이 비대해지면 카간께 좋을 일이 없는 법이니까.”
“이번 일이 끝이 아니라면, 앞으로 고된 길이 될 것입니다, 섭정왕 전하.”
“한조(漢朝)는 곧 무너지고 대륙을 일통하는 것은 우리 다이칭 구룬이 될 것이다. 그 영광이 천대만대 이어지려면 제국의 초창기에 기반을 튼튼히 다져야 함이 당연하지 않느냐.”
“그 말씀이 옳습니다.”
“섭정왕으로서 카간의 직무를 대리하다보니 형님께서 내게 후계를 맡긴 이유를 알 것 같더구나. 하, 과중한 임무를 주고 가셨어…….”
잠시 이마를 짚으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도르곤이었다. 금세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정신을 차렸지만, 그가 처음 보인 약한 모습이 인상에 깊게 남았다.
무언가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계속해서 홍타이지를 떠올리게 할 이야기를 했다가는 안 그래도 과중한 업무로 흔들거리는 도르곤의 멘탈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뇌물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난 것인데, 마지막으로 전하께 드릴 사소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볼일을 보고 뒤를 안 닦은 것 같은 찝찝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참이었다. 방금 도르곤이 꺼낸 뇌물 이야기 덕분에 그 찝찝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문제 될 것은 없지. 나도 형님 옆에서 이름값처럼 약은 짓거리를 하는 그놈이 눈꼴시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잉굴다이의 뒷배를 믿고 그랬단 말이지?”
도르곤 역시 굴마훈(토끼)이라 불리던 그자에게 좋은 인상은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선에서 청으로 보낸 세폐를 횡령한 자가 그 사실을 고발한 사람들을 역으로 무고죄로 몰아 죽인 이야기를 꺼내자, 일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조선으로 떠날 날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늦은 저녁, 이사와 관련한 잡일로 등을 켜고 야근 중이던 나를 불러낸 사람이 있었다.
세자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하? 혹여나 따로 지시하실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아니다. 네가 한창 바쁜 것을 알고 있는데, 어찌 사소한 일로 너를 부르겠느냐.”
기대어 있던 보료에서 세자가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꼿꼿이 편 세자에게서 강한 의지가 전해져왔다.
“얼마 전 섭정왕의 수하가 찾아와 세폐에 관한 이야기를 묻더구나. 심양관에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라 대답했다만, 마지막으로 무슨 일을 꾸미기라도 하는 것이냐.”
“조선 땅으로 돌아가시기 전, 이 땅에서 맺혔던 한은 풀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이라니?”
“저하께서 충신들의 시신에 웃옷을 덮어주시던 이야기를 하시며 분을 참지 못하시던 모습,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르곤은 내가 조선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선물을 안겨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영문을 몰라 하던 세자는 그제서야 돌아가는 사태에 대해 감을 잡은 듯했다.
“그 쥐새끼 같은 자에게 복수의 철퇴를 내려칠 시간이 된 모양이구나. 고맙다, 안 자의. 너는 늘 나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구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하. 오히려 더 일찍 그자를 몰락시킬 수 있었음에도 이제야 떠올린 것이 송구할 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아니었다면 어찌 정의를 바로세울 수 있었겠느냐. 그런 소리는 하지 말거라.”
방금까지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있던 세자의 표정에 살짝 숨통이 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뒤이어 세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방금의 표정처럼 한없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어찌 보면 오늘이 내가 볼모로 있던 시간 중 가장 중요한 날일지도 모르겠구나.”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밤이 흘러가기 전, 네게 다짐을 하나 받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