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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92화 (92/298)

92화. 마패의 주인

“다짐이라고 하셨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일단은 하란타 상인과 만난 자리에서 미심쩍은 것이 있어 해명을 들으려 한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거라.”

하란타 상인? 아담 샬의 주선으로 만들어졌던 그 자리 이야기인가.

그날의 일에서 딱히 세자가 의문점을 가질 것은 없어 보였다. 독자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접촉한다는, 그런 중대한 일을 앞두고 세자와 아무 이야기 없이 들어갔을까.

주식(株式)의 개념을 세자의 머리에 때려박았던 일은 조금 고생이긴 했지만, 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왜?

“탕약망이 찾아온 그날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날 실수라도 저지른 것인지요?”

“차라리 네가 저지른 것이 실수였다면 그날 이후로 내 마음이라도 편했겠지. 그러나 실수는커녕 네 일처리가 지나치게 완벽했다. 그 일이 걸려 며칠을 잠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세자의 눈가가 거뭇거뭇해져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무엇이라도 잘못한 게 있던가.

“너무 그렇게 안절부절하지는 마라, 안 자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오나 저하, 짚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짚이는 것이 없겠지. 나도 그때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만 얼핏 들었을 뿐이니까.”

머릿속에서 그날의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떠올려봤다. 아담 샬에게 부탁한 물건을 건네받고, 피터르를 소개받고, 기선을 제압해 동인도회사로 보낼 친서를 건넸다.

문제될 것이 없는데?

“아직도 감을 잡지 못했구나. 네가 이러는 모습은 처음 본다. 조금 우습기도 하고.”

“저하, 속 시원히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 문제였단 말씀이십니까?”

“안 자의, 궁에서 나와 처음 대면했던 날을 기억하느냐. 나는 탕약망과 마주한 자리에서 그날 느꼈던 기분을 다시 느꼈느니라.”

아. 설마.

“그날도 너는 내가 한양으로 장계를 올리지 않은 일까지 알아맞췄었지. 그래도 그날은 유능한 수족을 얻게 되었다는 생각에 깊이 따져보지 않고 넘어갔었다.”

“예. 제게 도깨비냐고 여쭈셨던 기억이 방금 떠올랐습니다, 저하.”

“그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날 나를 몰아붙이던 안 양시와, 탕약망의 앞에서 하란타 상인을 몰아붙이던 안 자의, 완전히 같은 구도더구나.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느냐?”

“아…….”

“탕약망의 말로는 우리가 사는 땅은 구형으로 되어 있고, 하란타는 조선의 반대편에 있는 나라라 하더구나. 그런 나라의 사정에 안 자의 네가 어찌 그렇게 밝을 수 있단 말이냐.”

그날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밟은 급발진이 세자에게 의심을 산 모양이었다. 피터르를 어떻게 제압할까 신경을 집중하는 동안 아군의 동태를 살피지 못한 꼴이었다.

“박 초관의 핑계를 대려거든 그만 두거라. 그가 고향을 떠나온 지도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았느냐. 상대 또한 박 초관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박 초관이 알 만한 정보를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그자가 그리 놀라지도 않았겠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하.”

“그렇다면 너는 조선, 아니 이 중원에서도 아는 자가 없을 정보를 어찌 알아낸 것이냐. 그것이 궁금해 다짐을 받으려 부른 것이다. 이 의문에 대답할 수 있겠느냐.”

세자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낯가죽을 뚫기라도 할 듯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네가 하란타의 세작일 수도 있겠다는 잡념까지 들더구나. 하지만 심양에 오기까지 조선 땅을 떠나본 적이 없는 네가 그럴 일은 없을 것이고.”

“…….”

“내 의문을 풀어다오, 안 자의. 북경에 묻고 가기에는 사소하지 않은 일이다.”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이 옷자락을 펄럭이는 세자였다. 그의 의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가. 내 머릿속은 그저 복잡하기만 할 뿐이었다.

“저하. 진실이 그리 궁금하십니까.”

“그래.”

“혹여나 그 진실 탓에 저를 잃게 된다 하여도 궁금해 하실 것입니까.”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굳게 다물어졌던 세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안 자의, 나는 너를 한고조에게 찾아온 장자방과 같이 여기고 있었다. 어찌하여 진실 하나에 그 믿음이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장자방도 달밤 아래 황석공에게 받은 태공병법을 익혀 천하제일의 책사가 되었습니다. 제 경우도 그리 생각해주시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장자방은 한고조에게 그 기연(奇緣)을 숨기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사기(史記)에 그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것이겠지.”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과 그 책사 장량의 이야기. 세자의 비유를 인용해 의심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오히려 역으로 조여지고 말았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미래에서 왔다고 순순히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진퇴양난.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찌해야 세자의 의심을 풀 수 있을까.

“제가 혜성의 현신이든, 도깨비든 상관없이 품겠다고 하셨던 저하셨지 않습니까. 그날과 무엇이 달라지신 것입니까, 저하.”

“달라졌지. 그때는 네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허나 너는 내가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을 심양에서 이루어냈다. 조선 팔도 어디에 너 같은 자가 있겠느냐.”

“그렇다면 제게 의문을 품으실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대체 왜…….”

“잘 들어라, 안 자의.”

세자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양 무릎에 손을 올려놓은 채 나를 향해 몸을 기울인 그의 눈빛이 형형했다.

“나는 너를 이제 신하 이상의 존재로 여기려 한다. 한양에 돌아가서도, 보위에 오르고 나서도 너를 가까이 둘 생각이다.”

“…….”

“헌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네 생각도 나와 같다면 어찌 내게 숨기는 것이 있단 말이냐.”

아무리 세자라지만 왕위를 함부로 운운하는 것은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누가 엿들었다간 역모로 몰릴 수도 있는 일.

그만큼 세자는 진지했다. 그에게서 전해져오는 눈빛 역시도.

“네 안에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아다오. 부탁이다. 안 자의.”

이제야 세자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는 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자가 나를 장량에 빗대었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말년에 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던 장량처럼, 오히려 세자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때문에 나를 잃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저하. 단언컨대 제가 저하의 곁을 떠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염려를 거두시지요.”

“그렇다면…….”

“저하께서는 제게 물과 같은 존재셨습니다. 말도 기수를 고른다며, 건방진 말을 뱉은 물고기 한 마리가 제 뜻을 펼치도록 용인할 사람도 조선 팔도에 저하뿐이십니다.”

“…….”

“주상전하께서 모두를 품을 정도로 깊고 넓은 임금이 되라 휘(諱)를 지어주셨다 하셨었지요. 저하께서는 제게 깊고 넓은 용소(龍沼)가 되어주셨습니다. 어찌 제가 저하를 떠나겠습니까.”

청에서 내려준 임무에만 골몰해야 했을 때도 타박 한 번 없던 세자였다.

오히려 심양관에서 함께 볼모살이를 하던 다른 신하들이 나를 탓할 때, 세자가 조용히 자신의 권위로 불만을 수습했다는 이야기 또한 여러 번 전해 들었었다. 세자가 아니었다면 내가 심양에서 이토록 날뛸 수 있었을까.

세자의 이름, 이왕(李汪).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분명 이름값을 충분히 해주었다.

신하가 청의 조정에서 자신보다 중용되는 상황이면 속이 쓰릴 만도 하련만. 세자는 외려 내 뒷자리로 물러나 묵묵히 조력자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내 뜻이 곧 세자의 뜻이 되었고, 내 앞길에 거슬리는 걸림돌은 세자가 치워주었다. 심양관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첫 출진에서 평안병사 유림의 뜻을 꺾어준 것도 세자였으니까.

“한낱 물고기라. 나는 적어도 승천 직전의 이무기쯤은 된다 생각하고 너를 데려온 것인데.”

“물고기가 이무기가 되고, 등용문을 올라 용이 되려면 용소(龍沼)에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하는 제게 깊고 넓은, 그런 연못이 되어주셨습니다.”

살짝 긴장감마저 감돌던 세자의 얼굴이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니, 풀어지다 못해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세자였다.

세자는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내가 계속해서 정체를 감추는 데 급급했음에도, 세자는 고작 나와 세자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비유한 사실 하나만으로 저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졸렬했던 방금의 내 모습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런 사람이라면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비밀을 털어놓아도 좋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입술이 열렸다. 그렇게 막 내 정체를 폭로하려던 순간, 눈앞에 웬 손바닥 하나가 다가왔다. 내 입을 막아 세우는 세자의 손바닥이었다.

“……네 말이 맞다. 네가 우리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의 관계로 여긴다면, 나를 만나기 전의 네가 어떤 사람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마터면 남아가 되어 한 입으로 두 말을 뱉을 뻔했구나.”

“저하…….”

“됐다. 내가 앞서 한 말들은 잊도록 해라. 네가 나를 그런 존재로 여겨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네 지식의 출처가 어디인들 그것이 무엇이 중하단 말이냐.”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세자의 눈동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나를 향한 그 무한한 신뢰를 보며, 나는 또다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말았다.

“선비는 무릇 자신을 알아준 자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지, 내 서연(書筵)에서 배우기를 군자의 도(道)는 군주와 사대부를 가릴 것이 없다 들었다. 맞느냐.”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네가 나를 알아주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안 자의, 그것이면 되었다.”

코끝이 찡해져 왔다. 당장이라도 내가 현대인이라는 비밀을 말하고 싶어졌으나, 그것은 세자의 고귀한 뜻을 어기는 일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신…….

“저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뜻을 따르겠습니다. 허나 그 대신, 저하의 하해와 같은 마음씨에 보답할 수 있는 미미한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가슴팍에 손을 넣어 달려있던 주머니를 풀어헤쳤다.

한양을 떠난 이후로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던 주머니였다.

“이것은 마패가 아니냐? 어이하여 네가 조각난 마패를 들고 다니는 것이냐?”

언젠가 섬기게 될 자에게 건네기로 다짐했던 물건이었다. 세자는 분명 좋은 주군이었고, 나를 신하 이상으로 쓸 의지가 확고하다면 이쯤에서 마음을 정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한양에 계신 전하께서 이것으로 제 약점을 잡고 계셨었지요. 들어보시겠습니까?”

이야기는 길었다.

장수 산골에서 어사를 만난 이야기, 몸이 상한 어사를 대리해 남원에 출두한 이야기, 능양군에게 약점을 잡혀 그의 시험에 들었던 이야기, 김자점의 저택 담을 넘어 그를 징벌한 이야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이마다 몇 번이고 타들어간 등잔불의 심지를 돋워야 할 정도였다. 그 긴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동안, 그것을 듣는 세자는 눈 한 번 깜작이지 않았다.

“……한양을 뒤흔들었던 산군복면이 너였느냐.”

“예, 저하. 그렇습니다.”

“호랑이 어사 이야기도 얼마 전 들은 기억이 있다. 빈궁이 저번에 조선에서 들여온 소설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며 재잘거렸었지. 그것 또한…….”

“예. 그것 또한 저였습니다.”

“내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짐승 복면을 쓰고 괴상한 몽둥이를 든 자가 바로 내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구나.”

연신 손바닥을 무릎에 내리치며 감탄을 내뱉는 세자였다. 남원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세자빈에게까지 흘러들어간 것이 조금 이상했으나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너를 의심한 내가 아둔했구나.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참형마저 불사하고, 핍박받는 관원들을 위해 간신을 징벌한 자를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의심했단 말이냐.”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저하.”

“대단한 일이 아니라니? 내가 거느린 자 중 누가 너처럼 행동할 수 있겠느냐?”

하긴 시강원의 영감탱이들이 세자를 위해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꼴을 나 역시 본 적이 없었다. 본국과 청의 눈치만 볼 줄 알았지 도움이 안 되는 족속들이었다.

“헌데, 상을 내려도 모자랄 일을, 아버님께서는 너를 겁박하는데 쓰셨구나. 네가 나와 처음 마주한 날 보였던 태도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세자저하를 대하는 태도치고는 꽤나 무례했던 것이 사실이지요. 송구할 따름입니다.”

“됐다. 지나간 일을 따져 무엇하겠느냐. 네가 이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은 것이 기쁠 뿐이다. 안 자의.”

세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일어나더니, 무릎을 꿇고 있는 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곧이어 묵직한 목소리가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의 가슴 속에 담긴 것이 그대로 나를 향해 들이치는 듯했다.

“나는 아버님 같은 임금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분으로 외세의 침략에 자멸하고, 권신들에게 휘둘리고, 그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잇속을 채우는 것마저 방관하는 임금이 되기는 싫다.”

“저하,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이러시는 것입니까. 역도로 몰릴 수 있는 발언입니다!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나는 나라의 흔들리는 근간을 바로잡고, 고통받는 백성을 위로하는 임금이 되려 할 뿐이다. 이것에 어찌 역적의 혐의를 뒤집어씌운단 말이냐.”

“저하, 허나…….”

“그것을 심양에서 보낸 지난 세월동안 보여준 자가 안 자의, 바로 네가 아니냐. 이제 내가 생각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네가 없으면 안 된다.”

소리 없이 세자의 옷소매가 들어올려졌다. 그 끝에서 뻗어나온 손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내 손을 잡아라. 안한수.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심으로 나를 섬겨라.”

“저하…….”

“네 앞을 막아 세우는 자들은 내게 맡겨라. 그리고 말 그대로 어사(御使), 임금의 수하가 되어 네 뜻을 펼쳐라. 네가 원하던 것이 이것이 아니었느냐.”

걸핏하면 떨리기 일쑤였던 세자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의 의지는 그 모습처럼 단단하고 굳었다.

“말처럼 쉬운 일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들과 야합해 편해지는 길을 놔두고 가시밭길을 걸으시겠습니까.”

“해 봐야지. 볼모로 잡혀온 땅에서 맨주먹으로도 이렇게 이룬 것이 많은데, 내 신하와 내 백성이 있는 땅에서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많이 변하셨습니다. 저하.”

천천히 세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이어 내 손에 들려있던 어사의 증표 반 조각을 세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마패를 쥔 세자의 손을 내 양손으로 덮었다.

“이 마패를 들여다보시며 오늘 말씀하신 일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렇다면 신(臣)의 충심은 저하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臣)……! 신이라 하였느냐?”

“성심을 다해 섬기겠나이다. 세자 저하. 부디 조선의 명군이 되어주시옵소서.”

진심을 담아 세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에 화답하듯 세자는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고, 잡혀있던 그의 손에서는 열기가 올라왔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내 정체를 당신에게 똑똑히 밝힐 날이 올 것이다. 당신이 진정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명군의 자질을 스스로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마치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었으나, 그 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세자의 처소에서 사람을 물리고 나가있던 내관의 목소리 탓이었다.

“저하, 이 시간에 송구하오나 급한 손님이 세자 저하를 뵙길 청하옵나이다.”

“누가 이런 시각에 회동관을 찾았단 말이냐?”

“역관 정명수라는 자이옵니다. 어찌하시겠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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