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귀환
“오랜만이야, 안 장긴. 아, 이제 장긴이 아닌가?”
“황녀 자가, 여기 계시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서 내조로 돌아가셔야…….”
“마지막이잖아. 생각보다 째째한 남자였네, 당신.”
“누가 보기라도 하면…….”
마치 그 대답을 예상하기라도 하듯, 천천히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리더니 조용히 내게 손짓하는 황녀였다.
늘 이런 식이었다.
당신은 날 끌고 가려 애쓰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숙부님께 조른 결과야. 당신이 혹여나 입궁하면 마지막 인사라도 하게 해 달라고 했어.”
“자가께서는 이제 저와 엮이면 안 되는 몸이십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으시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나를 걱정해주는 거야? 내가 그렇게 걱정되면 나를 잃지 못 하겠다 숙부님께 우기기라도 했어야지.”
황녀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물들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가에는 웃음이 젖어들지 않았다.
그런 그녀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반응만 보면 여자를 접해본 적이 없는 쑥맥처럼 보이길래, 금방 유혹할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말야. 이렇게 굳센 사내일 줄은.”
“…….”
“당신은 내가 카간의 딸이라 어울려준 것이었구나. 당신도 내게 어느 정도 마음은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봐.”
“……제가 고려 사람이 아니었거나, 자가께서 다이칭 구룬의 황녀가 아니셨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잔인한 말은 그만해 줄래? 겨우 마음을 정리해서 나왔는데, 소용이 없어지려 하잖아.”
인적이 드문 장소까지 왔는데도 황녀는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땋은 머리에서 삐져나온 잔머리가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소생의 나라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억세게 운 좋은 나무꾼도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는 결코 이어질 수 없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
“송구합니다, 자가. 다만 소생은 황녀 자가의 마음이 상하지 않으셨길 바랄 뿐입니다.”
“……고려에서는 선녀 이야기가 그렇게 끝나는구나, 여기선 그렇지도 않은데. 당신이 고려 사람이 아니었다면 마음을 달리 먹었을까?”
뒤돌아선 황녀의 어깨가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젠 전처럼 가슴조차 빌려줄 수 없는 처지다.
“어울리는 짝이 곧 정해지길 빌겠습니다. 황녀 자가. 저는 그저, 잠시 스쳐갔던 바람쯤으로 생각하시옵소서.”
“고마웠어, 안 장긴. 그동안 당신 덕분에 좋은 꿈을 꾼 것 같아.”
“저 역시 자가께서 내려주신 갑옷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멀쩡히 서 있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궁을 빠져나와 어울렸던 시간 역시, 나쁘지 않았습니다.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요.”
“……당신은 역시 좋은 사내야. 고려에서 당신을 기다릴 정혼자가 부러워지네.”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해졌건만 황녀의 말이 중간에 끊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등만 보인 채, 넘치는 감정을 꾹꾹 누르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그녀를 향한 연민이었을까. 나 역시 목젖을 무언가가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애써 참아내는 중인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쩔 수 없네, 정말. 마음을 먼저 준 사람이 지는 법이랬나. 하필 정략혼을 피하려 고른 남자가 당신 같은 사내였을 줄이야.”
“황녀 자가…….”
“됐어. 당신이 날 저버린 게 아냐. 내가 당신을 보내주는 거야. 당신이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당신이 태어난 나라를 위해 일하는 거잖아?”
뚝. 뚝. 황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흙바닥이, 점점이 젖어드는 것이 보였다. 내 눈가에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도리’라는 거였나…….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말씀만 하십시오.”
“그런 경어(敬語) 전부 집어치우고, 잠시만이라도, 마지막으로라도 날 다이칭 구룬의 황녀가 아닌, 마카타로 대해줄래?”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물기로 온통 번진 눈가를 하고 돌아선 황녀가, 조용히 나를 보며 서글픈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마지막에는 웃으며 보내준다는 건가. 여전히 쉴 새 없이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는 그녀의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먼저 잡아 올렸다. 그리고 내 손으로 받쳐 든 그 고운 손등을, 슬며시 몸을 기울여 내 이마에 닿게 했다. 그 이마에 와닿는 황녀의 체온이 차가웠다.
그녀의 요청대로 무릎 따윈 굽히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였다. 허나 나는, 마카타가 보여준 마음에 대한 보답을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못난 사내였다.
그녀의 입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마카타는 일국의 황녀답게 그 슬픔의 표식을 곧 허공으로 흩어 보냈다.
“고마워, 안 장긴.”
“미안해, ……마카타.”
그녀가 무슨 표정을 하고 내 이마에서 손을 빼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바로 세워보니, 다시 황녀는 내게 등을 돌린 채였다.
“이제 가 봐, 숙부님은 시간을 많이 줄 수 없다고 하셨으니까. 그리고…… 숙부님께 그 코흘리개 말고 제대로 된 혼처를 찾아달라 부탁해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고향으로 조심히 돌아가도록 해. 그리고 돌아가서는 반드시 승승장구해야 돼. 내가 당신을 보낸 일을 후회하지 않도록 말야.”
“자가께서도 제게 보여주셨던 그대로 밝고 꿋꿋하게 지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그 편이 자가께 어울리니까요.”
눈물방울이 아닌 핏방울이, 황녀의 말투에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발걸음이 천근 같이 무거웠다.
“그럼 물러가보겠습니다. 늘 강녕하시옵소서. 황녀 자가.”
“잘 가, 안 장긴. 당신도 건강하길 빌게.”
고개를 깊이 숙여 절하고 건청문을 향해 뒤돌아 걸었다.
갓을 엮은 말총 사이로 무너지는 실루엣 하나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걸어야만 했다.
***
그날 밤, 나는 낯익은 장소에서 눈을 떴다. 익숙한 말안장에 올라앉은 채였다.
짐을 정리하면서, 황녀와 심양에서 어울리던 시절 그녀가 내게 보냈던 서신들을 화로에 불태운 후, 왠지 모를 착잡한 마음에 계속해서 술을 들이켰었다.
「是生命最好的事情」
한인 시녀에게 대필이라도 시켰던 것일까. 어느 날 날아왔던, 백화문(白話文)으로 적힌 저 여덟 글자가 머릿속에 눌러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그때는 아무런 의미 없는 문장이었는데, 이제 와서 저 글자들이 무겁게 느껴진 것은.
그렇게 한 글자를 술 한 병에 녹일 기세로 술을 들이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째서 나는 말에 탄 채 북경의 밤거리를 걷고 있었을까.
눈앞에 익숙한 건물이 떠올랐다. 자금성의 정문, 오문(午門)이었다.
왜 말이 나를 이 자리로 데려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놈의 청나라는 고양이부터 말까지 짐승들도 나를 괴롭히는가.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나는 애먼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곧바로 숙소인 회동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차마 김유신처럼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떠나버릴 순 없었으니까. 말이 지은 죄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모든 게 내 탓이었다.
***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안 자의.”
아직 날씨가 마저 풀리지 않은 초봄이었다. 마지막으로 자금성에 하직 인사를 올리러 들어갔던 세자가 북경성의 동문, 조양문 밖에서 대기하던 귀국 일행에 합류한 모양이었다.
세자가 하직 인사를 올리러 간 사이, 호포대원들과 북경에서 치르는 마지막 작업 또한 막 끝난 참이었다.
이곳은 북경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전사한 자들을 모신 임시 매장지. 이 땅에서 스러진 대원의 마지막 뼈가, 방금 막 상자에 담겨 뚜껑이 닫혔다.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하.”
“심양에 두고 온 이들도 조선으로 데리고 돌아갈 셈이냐.”
“예. 누구보다 고향땅을 그리며 적과 맞서 싸워준 대원들입니다. 어찌 남의 땅에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호랑이 탈을 쓴 대원 하나가 경건하게 납골함을 들고 옆을 스쳐지나갔다. 니루 장긴 중 유일하게 귀국을 결정한 자였다.
망자에게 예를 다한다며, 이장 작업을 하는 호포대 전원은 전투복과 짐승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여기 있는 전원이 귀국하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모두의 마음은 같으리라.
청에서 고려팔기의 타스하 잘안으로 남길 결정한 대원들의 시선도, 나를 따라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한 절반이 조금 넘는 대원들의 시선도 모두 같은 곳을 향해 있었다.
달칵. 마지막 납골함이 마침내 수레 위에 놓였다. 그 위에 고운 천이 덮어지자, 그제서야 모든 출발 준비가 끝이 났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드디어 그리운 조선 땅으로 돌아가는 날이 아니냐.”
사실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명을 다한 대원들을 마주해야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세자가 그리 생각해주는 것을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그럴 여유가 없기도 했고.
“먼 길을 말을 타고 가야 하는데, 괜찮은 것이냐. 요새 네 스승이 거의 잠을 재우지 않는 모양이던데?”
“최근 눈만 겨우 붙이는 생활이 지속되고 있긴 하나, 괜찮습니다, 저하. 심양에 있던 시절에는 사하보를 왕복하느라 매일 몇 시간은 말을 달리지 않았습니까. 체력엔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정 견디기 피로하면 수레에 타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사은사로 북경까지 넘어온 사신단이 세자의 귀국 준비를 돕느라 눌러앉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조선을 떠났을 때 잠시 떨어뜨려놓았던 마수가 다시 나를 덮쳐온 것이다. 대원들의 죽음을 슬퍼할 틈이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자네, 조선에 있을 적보다 학문 수양이 더 쇠퇴하지 않았나! 심양에서 이 년 동안 놀기만 한 것인가?’
‘들려 보낸 책은 한 번 읽기라도 한 것인가? 내 분명 부원군 대감과 들이닥칠 일이 있을 것이라 했을 텐데?’
‘김 갑사와 유 서리에게 전부 들었네! 본분을 잊고 무예를 닦는 데 세월을 보냈다고? 선비의 육례를 닦았다는 변명은 듣지 않을 걸세!’
아니, 본인이 더 신나서 무예 닦는 일을 도왔던 김 갑사가 배신을 때린 것은 그렇다 치고, 성 영감이 몸이 달아있는 이유가 있긴 했다.
분명 세자가 귀국하면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증광시(增廣試)가 열릴 텐데, 귀국 전까지 급제할 정도로 수준을 맞춰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귀국하는 길에서는 말안장 위에서 책을 읽어야 할지도.
소과를 준비할 때는 공부만 할 수 있는 환경이기라도 했지, 죽을 맛이었다. 세자가 막아주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으나, 급제는 빠를수록 좋다며 내 주군 역시 뒷짐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경덕진(景德鎭)까지 수천 리를 왕복해야 했던 강 진사보다는 덜 고되지 않았느냐. 힘을 내거라, 안 자의.”
“경덕진이 아무리 먼 곳이라고는 하나 그 제안은 본인 스스로가 먼저 꺼낸 이야기가 아닙니까. 저와는 경우가 다릅니다,”
충신은 도르곤에게 독점무역권을 받은 이야기와 네덜란드와 거래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를 듣자마자 돈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유럽으로 수출되는 물건 중에 도자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충신은 바로 세자에게 여행 허가를 얻으러 갔다. 경덕진은 도자기의 메카나 다름없는 지방이니 분명 옳은 판단이긴 했다.
“하하, 아직도 강 진사에게 화가 나 있느냐.”
“제 수면이 부족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니 화를 내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조선의 이익을 위한 제안이지 않았느냐. 장인 역시 확실히 확보해 왔고 말이다.”
충신이 호위 핑계를 대고 김 갑사와 유 서리까지 끌고 가 버린 덕분에 일이 두 배로 늘었다.
북경과 심양에서 벌어들인 재산을 정리하고, 호포대부터 시작해 조선으로 돌아갈 자와 남아 정착할 자를 구분하는 일이 쉬울 리가.
그들이 잠시 동안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니었다. 충신의 경덕진 행은 거의 반년에 가까운 여정이었다.
뭐, 충신이 경덕진에 가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온 건 인정을 하겠다. 허나 나는 그렇게 개고생을 해가며 뼈를 갈았는데, 정작 북경으로 돌아온 충신의 얼굴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지 않았던가.
강남 공기가 몸에 맞았던 건지, 아니면 경덕진까지 긴 여행 동안 무슨 즐거운 짓거리를 하고 다닌 건지. 아무튼 매일같이 갈리던 내 입장에서는 매우 배알이 꼴리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성 부사(副使)가 귀국하는 길에 강 진사 역시 너와 함께 공부시킬 계획이라 하더구나. 그의 앞길도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저하, 제 앞길을 순탄하게 만들어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남의 불행을 보고 위안을 받으라니, 벌써부터 약조를 어기시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 아니냐. 잠시 고통스러울지는 모르나, 너희가 급제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 성 부사에게 감사할 날이 오겠지.”
같이 갈리게 된 사람이 있다는 말에 기분이 나아지는 내가 싫다, 하.
그러나 세자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 또한 짐작이 갔다.
처음에는 성 영감에게 사정을 봐주라고 명하겠다던 세자였으나, 동석한 최명길에게서 지금 조정의 상황을 전해 듣고는 뜻을 꺾었기 때문이었다.
“저하께서도 마음이 급하신 모양입니다.”
“급하고말고. 내 뜻에 반기를 들 자들이 아직도 조정을 장악하고 있지 않느냐. 조정이 청국에 대해 느끼는 경계심은 옅어졌을지라도, 우리가 청국에서 도입하려는 것을 막아설 자들은 여전할 것이다. 그것이 염려되는구나.”
“대과 급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하. 그리고 그렇게 관직을 받았다 해도 곧바로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위에 올랐을 때는, 너 역시 그에 걸맞은 자리에 올라있어야 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한시도 낭비할 시간이 없는 것이야.”
세자의 시야는 벌써부터 먼 미래까지 닿아있는 모양이었다. 이해는 갔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안달 낼 일은 아닐 텐데.
“마음을 편하게 드시지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안 자의, 내가 지금 공연한 걱정을 하고 있느냐.”
“저하께서는 이미 심양에서 많은 것을 이루셨습니다. 심양에서 실려 올 저하의 수레에는 이미 수십만 냥이 넘는 은과 수천 냥이 넘는 금이 실려 있지 않습니까. 또 그동안 속환시킨 조선의 백성은 몇만입니까?”
“으음…….”
“이제 조정에서 저하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섭정왕에게 끈이 이어져 있는 저 역시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니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릴 것입니다.”
그 말 덕분인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세자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네 말도 옳을뿐더러, 지금 미리 염려한다 해도 바뀌는 것은 없겠지. 좋은 지적이었다, 안 자의.”
“당연히 드려야 하는 고언이었습니다.”
“허나, 그렇다 하여도 과거 준비에는 차질이 없도록 해라. 부원군과 성 부사가 네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학문뿐만이 아닌 듯하니.”
쳇. 편해지려고 뱉은 말이었는데, 알아차린 건가.
그동안 야근으로 피폐해진 몸을 추스를 틈은 주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 밤 묵을 숙소에서도 일타강사 성 영감의 대과 초시 특강은 계속되겠구만. 하아.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세자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말을 끊지 않고 있었다.
“물론 대과 급제가 쉬운 일은 아니니만큼 급제를 하면 마땅한 상을 내려주겠다. 그것이면 만족하겠느냐?”
“상이 나올 저하의 내탕금을 벌어다드린 것이 저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어찌 불만이 있겠습니까.”
“어허, 지금 내게 반기를 드는 것이냐, 안 자의?”
세자와 마패를 나눠 가진 후부터인가. 이렇게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가 된 것은.
그 와중에도 세자는 내 불만을 빠르게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네가 귀국해도 돌아갈 집이 없다고 들었다. 지금까지는 성 부사의 집에 얹혀살았다 들었는데.”
“별채에 있는 손님방 중 하나에 머물렀었습니다. 문제 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안 자의, 내 알기로 네 나이가 올해로 스물셋일 텐데. 장가를 들 생각은 아주 잊어버린 것이냐? 양반의 체면에 남의 집에 아내를 데리고 얹혀살 것은 아닐 테고.”
아. 잊고 있었는데, 나는 이제 빼도 박도 못 하는 완벽한 노총각이었다. 물론 조선시대 기준으로.
세자의 표정이 묘하게 바뀐 것은 그때였다.
“대과에 급제하면 북촌에 집을 한 채 마련해주겠다. 그 정도면 충분한 상이 되지 않겠느냐.”
“기와집 한 채 마련할 재물은 제게도 있습니다만……. 북촌의 집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군요.”
꽤나 맛있어 보이는 미끼였다. 북촌에서 집을 구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창덕궁에서 가까운 위치 덕분에 구하는 자는 많고, 팔려는 자는 적은 탓이었다.
북촌에서 제일 외진 곳에 위치한 박연의 작은 집도 임금의 명으로 겨우 하사받은 것이었다. 세자가 나서서 신혼집을 구해주겠단 소리는 꽤나 구미가 당겼다.
“혼인할 마음은 있어 보이니 다행이로구나. 나는 네가 청의 황녀를 잊지 못해 평생 수절하는 일을 염려했건만,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저하, 제가 그분을 잊지 못할 정도로 사모했으면 지금 저하 옆에 있는 대신 자금성에 들어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농이 심하십니다.”
“상투대신 그들의 민머리를 하고 말이냐. 하하.”
세자가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다행히 내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새겨진 것은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처음 세자를 만났던 날, 기죽어 있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검게 물들었던 눈 아래와 푹 패었던 볼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아, 그건 나한테 옮겨왔구나.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출발 준비가 완료됐다는 내관의 보고에 세자는 말궁둥이에 채찍질을 가해 행차의 선두로 나섰다. 나 역시 세자를 따라 고삐를 틀어쥐어야 했다.
눈앞에 길고 긴 길이 펼쳐져 있었다. 통주, 난주, 산해관, 영원성, 금주, 심양, 요양, 봉황성…… 그리고 그 끝에는 그리운 한양이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걷고 있는 길은 한양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길이 어디까지인지는 옆에 있는 세자와 끝까지 걸어봐야 알겠지.
***
같은 시각, 한양 북촌.
으리으리한 기와집 사이에 끼어 있는 유독 초라한 규모의 집.
마루에 걸터앉은 통통한 종아리 한 쌍이 허공을 번갈아 휘젓고 있었다. 말괄량이다운 몸짓이었다.
이제 아이의 흔적이 아주 조금 남아있는 푸른 눈동자가 손에 든 편지의 내용을 훑었다. 그리 길지 않은 편지를 몇 번이고 되새겨 읽는지, 그 숙독이 끝나기 까지는 조금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나, 참. 선생님은 여전히 나를 어린 애로 아신다니까? 나도 이제 다 컸는데.”
입술이 댓발 나온 채 무언가를 중얼거린 소녀가 마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녀의 손은 재빨리 동봉된 꾸러미에서 과자 몇 개를 꺼내고 있었다.
오도독.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청나라 과자를 씹는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면서도 소녀의 시선은 다시 편지에 박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런데, 어쩌지? 선생님, 언니 일을 모르실 텐데…….”
편지를 읽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소녀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무언가 결심을 마친 듯, 작은 콧김을 뿜는 소녀의 표정은 결의로 단단히 다져져 있었다.
※ 작가의 말
1. 선녀 설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한국의 선녀 설화와 달리, 만주에서 전해지는 비슷한 설화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만주원류고>에 적혀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선녀가 목욕을 하러 땅에 내려오고 날개옷을 벗어두는 부분까지는 같지만, 벗어놓은 날개옷 위에 까치가 물어다 준 붉은 열매를 선녀 스스로 삼키고 아이를 배게 되죠. 그 아이가 영웅이 되어 부족을 건립하는데, 그가 만주족과 건주여진의 시조, 아이신기오로 부쿠리용숀입니다.
어쩌면 황녀는 주인공과 만주족 시조설화 같은 영웅적 결말을 맞이하길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네요.
2. 是生命最好的事情
황녀가 보낸 편지에 적힌 문구는 대만 영화 ‘我的少女時代’의 OST ‘小幸运’의 가사 한 부분을 따왔습니다. 한국에는 ‘나의 소녀시대’로 번안되어 들어온 영화입니다.
그 뜻은 ‘내 삶에서 제일 즐거운 순간이었어.’라 옮길 수 있겠네요.
구어체인 것은 동일하나, 제 능력이 부족해 17세기 당시의 백화문을 그대로 구현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