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95화 (95/298)

95화. 갑과제일인급제출신자(甲科第一人及第出身者)

임금의 눈앞에 시권(試券) 세 장이 펼쳐졌다.

시관(試官)들이 일차 채점을 마친 시험지였다.

상상(上上)이 적힌 답안이 하나, 이하(二下)가 적힌 답안이 하나, 삼상(三上)이 적힌 답안이 하나.

임금의 생각도 시관들의 평가와 같았다. 상상으로 평가받은 답안은 특히 뛰어났다.

현재 대륙의 복잡한 정세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대안을 물었을 때, 그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에도 없을 것이다.

시권에 붉은 점을 찍는 임금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과인은 이 시권을 장원으로 삼으려 한다. 반대하는 신료는 있는가?”

“전하의 뜻이 소신의 뜻과 같사옵니다.”

“소신 또한 그 시권이 장원에 합당하다 사료되옵나이다.”

장원 답안을 확정하자, 이후 일처리는 물이 흐르듯 처리되었다. 이번 증광시는 답안의 수준을 보아 갑과(甲科) 급제자를 두 명만 내기로 하고, 나머지 을과(乙科)과 병과(丙科) 급제자 역시 모두 정해졌다.

답안의 분류가 완료되었으니 이제는 주인을 찾을 차례. 서체를 가리기 위해 역서(易書)했던 것을 원상복구하고, 급제자의 신상을 가리기 위해 할봉(割封)했던 답안을 감합(勘合)하는 과정을 거쳐 토막 났던 시권은 제 모습을 찾았다.

“그럼 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번 증광시 장원급제자의 피봉(皮封)을 개봉하겠나이다.”

봉해진 채 감춰져 있던 장원급제자의 신상을 들은 임금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먼 땅에 꽂아 넣었던 끄나풀은 거물이 되어 돌아온 듯했다.

***

임금을 향해 무릎을 꿇은 벗을 본 좌명의 마음은 복잡했다. 아직도 그에게 얻어맞은 얼굴의 상처가 아려오는 듯했다.

“탐화(探花)랑! 무엇하느냐! 어서 어사화를 꽂지 않고!”

탐화, 전체 급제자 중 세 번째 자리.

이번 증광시에는 두 번째 자리인 방안이 뽑히지 않아 더욱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삼십삼인의 말석에 들어도 가문 대대로 영광이라는 대과 급제 자리에서 갑과에 들고 어사화를 내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좌명의 마음은 복잡했다.

둘도 없는 벗들과 함께 등과하여 평생 갈 동방이 되었음에도, 그 벗 중에 하나가 제일급제자가 되어 장원의 영광을 누리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방 밖 출입을 금한 채 잘 때도 벼루를 베개 삼아 공부에 몰두했다던 벗이었다. 좌명은 무리한 약속을 지키려 몸까지 상해가며 이 자리까지 올라온 벗이 기특하면서도 미안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벗은 아는지 모르는지, 어사화를 기다리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벗이 좌명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홍패에 적힌 열일곱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양시안한수문과갑과제일인급제출신자」

천천히 어사화를 벗의 복두(幞頭)에 꽂았다.

손이 떨렸다.

이 미친놈, 장원 급제가 어디 개인의 약속으로 걸 수 있는 일이던가.

그것도 그렇게 단기간에 말이지.

“어서 와라, 안한수. 호랑이 새끼를 내보냈더니 어엿한 호랑이가 되어 돌아왔구나. 내 너를 기다리고 있었느니.”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임금의 치사에 대답하는 벗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다홍, 보라, 노랑 색색의 어사화가 정말로 활짝 피어난 것처럼 착각이 일 정도로.

***

“후우…….”

붉은 곤룡포가 자리를 뜨면서 길고 긴 방방례가 끝났다. 분명 한 번 치렀던 행사였고, 거기에 얹힌 권위는 소과 입격 시절보다 훨씬 무거웠음에도 그 시절과는 달리, 별로 긴장되진 않는 자리었다.

‘그때에 비하면 나도 성장한 건가?’

백패를 내려 받던 날, 임금의 위엄에 눌려 사시나무 떨듯 긴장을 감추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고작해야 대과 응시 자격에 불과한 합격증인 것을.

지금 내 손과 머리에는 대과 급제자의 상징인 홍패와 어사화가 위치해 있다. 능양군에게 성균관 입관을 명받던 날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장원이라니, 장원이라니!”

어느새 다가온 관리 하나가 나를 푹 끌어안았다. 성 영감이었다.

“홍문관의 인수인계로 바쁘실 텐데, 어이하여 나오셨습니까?”

“이 사람, 내 아무리 바쁘다 해도 어찌 자네가 대과 급제하는 자리에 불참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입격할 것이라 생각했던 소과와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얼마 전 정삼품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받고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짬을 내 방방례 자리까지 나온 성 영감의 마음이 고마웠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급제자들 모두가 구름같이 몰려든 친족들에게 둘러싸인 자리였다. 그만큼 영광이고 축하받아 마땅한 자리. 그러나 나를 축하해줄 사람은 성 영감뿐이었다.

가뜩이나 희귀한 본관과 성씨를 가졌는데, 가족조차 없는 내 처지 탓이었다.

“이번에 급제하지 못하면 김 갑사 말대로 특기를 살려 무과에나 응시하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어허! 그것이 내 본심이었다면 귀국길 내내 자네를 붙들고 밤새 경전을 가르쳤겠는가?”

“이 홍패의 절반은 나리께서 만들어주신 것과 다름이 없긴 하지요. 하하.”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눈가를 글썽이는 성 영감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내 손목과 팔꿈치를 갈아버릴 기세로 공부를 닦달하던 악마의 모습을 이젠 그에게서 찾기 어려웠으니까.

다만 이번에는 스스로 택한 고행길이었다. 불기운 하나 없는 방에 틀어박혀 침식도 잊은 채 공부에만 몰두하는 나를 성 영감이 뜯어말릴 정도였으니.

하긴, 장원에 걸린 판돈이 좀 컸어야지.

“자네를 남원에서 데려오길 정말 잘 했네. 세자 저하를 무사히 조선으로 모셔온 것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일인데, 이제 장원의 자리에까지 오르다니. 자네는 분명 이 조선의 동량(棟梁)이 될 것이야.”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본격적인 관료 생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첫 등청(登廳, 출근) 날을 기대하라고.”

“등청이오? 혹시 성균관 시절처럼 가혹한 신래침학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신래침학? 허허. 세자 저하의 최측근이자 청국 섭정왕과 연결된 자네를 굴릴 담 큰 선진은 없을 텐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니 기대하고 있게나.”

성 영감은 끝내 표정에서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깨를 두드리는 그의 손길에서 대견함과 기특함이 넘쳐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결국 갈 셈인가?”

“예. 가야지요. 나머지 홍패 절반의 출처를 따지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댁도 갑과 급제자를 냈으니 잔치판일 터, 자네가 등장하면 집안이 뒤집어지겠구만. 하물며 신부를 내놓으라 장원급제자가 들이닥친다니, 허허.”

“잘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제 얼굴도 보지 않으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거야 자네 앞길을…… 아닐세. 본인 입에서 듣는 것이 맞겠지. 나 또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 되었으니, 자네 뜻이 굳다면 바로 가보도록 하게.”

마치 듣고 있기라도 했는지, 멀리 친척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받던 좌명이 성 영감의 어깨 너머로 아련한 눈빛을 보내왔다. 저놈만 아니었어도 내 마음고생은 덜했을 것이다.

곧이어 어사화를 꽂고 홍패를 든 급제자들이 하나둘씩 궐문을 나섰다. 급제자들이 거리에서 풍악을 울리며 행진해 친족을 방문하는 유가(遊街) 행진의 시작이었다.

헌데 친척이고 뭐고 혈혈단신인 내게 장원급제를 알리러 찾아갈 곳이 한양 땅에 따로 있을 리가. 갈 곳이라고는 성 영감의 집을 제외하면 딱 한 군데뿐이었다.

광대와 무동들을 앞세우고 그 사람의 집을 찾아가는 길, 나는 홍패를 내려받던 순간만큼이나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예상대로 장원급제자의 행차가 들이닥친 집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약조를 지켜주시지요, 대감.”

“자네가 틀림없이 장원급제한 것은 방방례 자리에서 이미 확인했네만…… 자네의 마음, 그토록 굳은 겐가? 약조 또한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건넨 약조가 아니었는가.”

소란이 정리되고 사랑방에 안내되어 집주인을 맞았다. 앞에 앉은 중년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막 유가행진을 나간 좌명을 마중 나가고 돌아왔을 아비, 김육이었다.

천연두를 앓은 자국이 콧잔등에 가득한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경악이 가득 차 있었다.

“마음이 변했다면 바로 이 자리까지 달려왔겠습니까. 제 짐작이 틀리지 않았겠지요, 대감.”

“그래, 딸아이가 꾸민 짓을 전부 간파한 모양이구만. 자네 말대로 딸아이는 살아 있다네. 허나…… 자네가 우리 딸아이에게 너무나 과분한 사람이 된 것 또한 사실이네. 자네를 속인 일도 있고 했는데, 정말로 괜찮겠는가?”

“대답을 듣지 않고선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어차피 유가로 방문할 친족도 한양 땅에는 없으니까요.”

“허어…… 어차피 정식으로 정혼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나야 자네 같은 사내가 내 사위가 되어준다면야 업고라도 다니고 싶은 마음이네만, 딸아이의 마음이 그렇지 않으니 원.”

“약조하셨던 대로 그 사람과 독대할 기회를 주십시오, 대감. 그걸 얻기 위해서 꽤나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았습니까.”

장원이 적힌 홍패를 김육의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었다. 그 약조의 내용을 알고 있는 김육은 방바닥이 꺼질 듯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하…… 누굴 닮아 저리 고집불통인지. 이런 사내가 제 낭군이 되겠다고 하는데 절하고 받아도 모자랄 것을…….”

“그 사람이 고집불통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저와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진작 다른 사내에게 시집가 있었겠지요. 오히려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자네도 우리 딸아이 같은 흠 있는 노처녀가 무엇이 그리 좋다고 청국의 황녀까지 거절해가면서 돌아왔단 말인가. 우리 청풍 김씨 집안에서 해줄 수 있는 것도 얼마 없을 터인데.”

김육은 상석에 앉은 채 연신 소매로 식은땀을 훔쳐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던 동안 자기 일처럼 내 부탁을 들어준 김육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파주목 교하(交河) 일대에 청나라에서 돌아온 속환인들을 정착시키는 일은 시작도 못 했을 것이다.

“해주신 것이 없다니요. 청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제가 드렸던 수많은 부탁들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네만…….”

“게다가 그 사람이 없었으면 저는 멀고 먼 심양 땅에서 충(忠)과 절(節) 모두를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지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육의 표정은 묘했다. 기쁜 것인지, 난감한 것인지. 아마 둘 다겠지.

나 역시 자타공인 조선 제일의 신랑감이 되었는데도 신부에게 까인 탓인지 한창 기분이 묘한 와중이었다.

“일단 약조는 지켜야겠지. 딸아이를 불러오겠네. 참, 아들놈과 있었던 일은 다 푼 것인가?”

“심양에 있던 동안 그 사람과 짜고 일정이 저를 속이려 한 일은 괘씸하긴 하나, 이젠 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처남이 될 사람이기도 하고요.”

“고맙네. 안 자의. 아, 이제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교지를 정식으로 내려 받는 것은 차후 있을 입궁 후이니 상관은 없지 않겠습니까. 어서 약조부터 지켜주시지요.”

“알겠네. 그러면 딸아이와 이야기를 마치걸랑 그 후에 다시 보기로 합세. 부탁했던 마령서(馬鈴薯) 일로 할 말이 있다네.”

닦달을 한 보람이 있었다. 김육은 내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내게 최우선인 일은 그와의 대화가 아니었으니까.

몇 년을 기다려온 대면이었다.

김육이 자리를 비켜준 방에 혼자가 되었다. 입이 바짝 말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몇 년 만에 그녀를 다시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귀국 직후 찾아왔을 때는 살아있는 기색조차 비추지 않던 하연이었다.

드르륵.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으나 그 방향을 돌아보지 않았다. 소리 없이 옮기는 그녀의 발걸음마다 심장이 고동치고 있었다.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나리.”

낯익었으나 낯선 말투가 나를 덮쳤다.

심양으로 떠나기 전과 달리, 힘 빠진 고운 목소리 위에는 얼음장이 얹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