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탐색전
해 뜨는 것을 보며 궐에서 물러나오자니 야근에 지친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다른 부서의 입번 신료들은 밤이 깊으면 잠시 뒷방에서 눈이라도 붙인다더니, 성 영감이 버티는 홍문관은 내게 그런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입번을 마치고 그대로 등청하고 싶지 않으면 업무에 한시라도 빨리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 것일세. 홍문관의 업무 조정을 누가 하는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으…… 으으…… 살려주십시오. 영감.’
‘이 사람 보게. 누가 보면 자네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줄로만 알겠네. 자, 어서 하던 일을 끝마치지 못하겠는가?’
남원에서처럼 성 영감이 손에 바늘을 들지는 않았지만, 근무 취침도 시키지 않겠다는 날카로운 협박은 바늘보다 뾰족했다. 덕분에 신참치고는 꽤나 업무에 익숙해진 것 같지만, 그 사실이 피로를 잊게 해 줄 정도로 기쁘진 않았다.
고작 하루 밤새는 일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업무 지식을 흡수하느라 집중력을 극한까지 올리자니 몰려드는 피로는 몇 배에 달했다.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집중을 흩뜨리면 옆에서 불벼락을 떨어뜨릴 악마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으니.
홍문관 앞에 걸려있는 옥당(玉堂)이란 글자가 너무나 공허해 보였다. 옥 같이 귀한 인재를 이렇게 굴리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아.
“당신, 정말로 괜찮으세요?”
“괜찮…… 습니다. 걱정은 그쯤 해도 될 겁니다, 부인.”
“눈은 새빨갛고, 지금 당신 입꼬리도 제대로 안 올라간다구요. 세상에.”
이런 일로 마누라 속을 썩이면 안 되는데.
옷수발을 들던 하연이 대놓고 염려를 표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생각 탓인지 마루에 나가 대야에 받아놓은 물로 간단히 몸을 씻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맑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궐에서 쌓인 먼지를 씻어내고 사랑방으로 다시 들어서는데,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벗긴 관복을 정리하던 하연의 손에 예상치 못한 것이 들려 있었다.
세자가 내린 책이었다. 그녀의 고운 눈매는 들고 있는 책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건 저하께서 내리신…….”
“저하께서요? 저하께서도 이런 아녀자들이나 읽을 만한 잡기를 읽으신답니까?”
“세자빈마마로부터 전해 받으신 물건이라 했습니다. 헌데 부인 말씀대로라면 그런 잡기를 제게 왜…….”
책장을 막 넘기다 내 반응을 살핀 하연이 살포시 웃음 지었다. 그 예쁜 미소에 잠기운이 확 달아났으나, 한편으론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몰려들었다. 내가 아는 하연은 심심풀이 이야기로 저렇게 밝은 웃음을 지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당신도 읽어보시렵니까? 왜 수모가 혼례를 올리던 날 담벼락에 구경꾼들이 달라붙었다 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겠습니다.”
“구경꾼이요? 아, 설마…….”
“아마 궁녀들이 돌려보던 물건을 압수한 것이 아니겠어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안 선비가 딱 당신과 빼닮아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활짝 피어난 하연이 책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어쩐지, 몇 안 되었지만 마주친 궁녀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더라.
‘열녀김씨전’이라 표지에 적힌 책에는 분명 익숙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초행길에 귓등으로 들었던 그 이야기들이었다.
“이건 대체…… 여기 나온 김 낭자도 그대를 빼다 박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이런 이야기가?”
“제가 서방님의 색시가 되지 않았더라면 온 한양바닥의 아녀자들이 들고일어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후.”
세상에…….
술에 취한 다음 날 친구의 동생을 만난 일부터, 남자가 청나라로 떠나게 되어 두 남녀가 잠시 이별하게 된 일까지 우리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결국 청나라에서 출세한 남자가 황녀도 마다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병에 걸려 몸져누운 여인을 구해 백년해로한다는 결말로 책은 마무리되었다.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의 전개긴 하나, 이건 완전히 나와 하연의 이야기지 않은가.
로열티를 뜯어내야 한다는 잡생각은 둘째치고, 어떻게 이 이야기가 시중에 나돌고 있는 것인지 소름이 돋았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일치하는 것이 많고 내용도 세세했으니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대와 혼례를 올리러 오는 길에 구경꾼들이 속닥거리던 이야기가 이 소설의 내용이었습니다.”
“저희의 이야기가 만천하에 나도는 일이 그리도 마음에 걸리시는 것입니까?”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조금 불편하긴 하나, 아예 없었던 일을 꾸며낸 것도 아니고 숨기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일도 아니니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지은 자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신 것이로군요. 소첩은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하연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짚이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가.
“허나 지금 맡으신 나랏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프실 텐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시기는 조금 그렇겠지요.”
“부인…….”
“제가 범인을 잡아다 대령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잠깐 내려놓으시고 휴식부터 취하시지요. 서방님께서 쓰러지시기라도 할까 봐 소첩은 겁이 납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것은 어젯밤의 혹사 때문인가, 아니면 난감한 지금의 상황 때문인가. 하연은 그것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들고 있던 책을 살포시 밀어놓고는 포근하게 나를 끌어안아 줄 뿐이었다.
“그대는 정말 요부(妖婦)요, 부인. 내가 쓰러질까 겁이 나신다면서도 이러실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순진하던 저를 요부로 만드신 건 도리어 서방님이시지요. 안 그렇습니까?”
***
처음으로 조회에 참석하는 날이 다가왔다. 창덕궁 인정전의 내부는 임금을 기다리는 신하들로 바글거렸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몸이 슬슬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임금은 내가 심양으로 떠나기 전보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신하들이 임금을 배알하는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이따금씩 거친 기침 소리가 인정전을 채우곤 했다.
“전하, 신 최명길, 전하께 올릴 말씀이 있나이다. 직언을 허락해주시옵소서.”
“말하라.”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쪽문이 활짝 열렸다. 그와 함께 흘러들어온 것은 익숙한 냄새였다. 인정전을 가득 채우는 구수한 냄새에 몇몇 신료들이 코를 킁킁거렸다.
“영상, 이 냄새는 무엇인가? 상참(常參) 시간에 편전에 음식을 들인 것인가?”
“전하, 이것은 사소한 먹거리가 아니라, 조선의 미래를 책임질 물건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나이다.”
“무엇이?”
궁녀가 눈썹 높이로 받쳐 든 광주리에는 예상했던 물건이 들어 있었다. 방금 삶아 김이 오르는 감자와 고구마였다.
“이것은 마가 아니냐. 구황작물을 궁에 들였다는 것은 어느 지방에 가뭄이라도 들었단 말이냐?”
“아니옵나이다, 전하. 하늘이 보우하사 아직 천기가 불순하다는 보고는 없는 줄로 아옵나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들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이냐, 영상?”
뒤를 돌아본 최명길이 눈짓을 보내자 신하 하나가 대열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장인어른이었다.
“전하, 신 호조판서 김육 아뢰옵나이다. 이것은 신이 얼마 전 재배를 시도했던 새로운 작물이온데, 얼마 전 수확을 온전히 거두었다는 보고를 받았나이다. 그것을 고하고자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나이다.”
“고작해야 뿌리 몇 줄기를? 상참 시간에 이런 물건을 편전에 들인 자가 호판이 아니었다면 경을 쳤을 것이다. 이을 말이 있다면 더 말하라.”
“그것들은 단순한 뿌리가 아니옵나이다. 우리 백성들의 목숨을 이 땅에 붙들어놓을 수 있는 단단한 뿌리가 될 작물들이나이다.”
임금의 표정이 변했다. 뒤이은 김육의 권유를 받고 기미를 거친 감자와 고구마를 입에 넣는 능양군의 기분은 복잡해 보였다. 초라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일지도.
“구황작물치고는 맛은 그럭저럭 괜찮긴 하구나. 이 붉은 녀석은 밤 맛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함께 들여온 농경전서라는 서책에 따르면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다 하였나이다.”
“호오, 그것이 사실이냐, 호판?”
“청에서는 마령서(馬鈴薯)와 감저(甘藷)로 불리는 물건이옵나이다. 신이 속환인들을 정착시킨 지역에서 직접 재배해본 결과, 서책의 내용이 한 치도 틀리지 않았사옵나이다.”
흥미롭게 김육의 설명을 듣던 임금의 얼굴이 청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조금 구겨졌다. 조금 구미가 상하기라도 한 걸까.
“청, 속환인. 세자가 들여온 물건이냐.”
“전하, 가련한 백성들의 배를 채워줄 물건이옵나이다. 이것을 들여온 자가 누구인지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사옵나이까?”
“호판, 나는 세자가 들여온 물건이냐 물었다. 그런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닌 것은 호판이 더 잘 알 텐데?”
왕의 목소리에서 찬 바람이 불었다. 저놈의 세자 콤플렉스가 여기서 또 도지는가. 원 역사에서 귀국 선물로 청의 문물을 들고 온 소현세자에게 역정을 냈다던 모습이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세자더러 대신들의 힘을 빌리자고 하길 잘했다. 아마 세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임시귀국 첫날처럼 능양군의 눈이 뒤집어지는 꼴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분위기를 수습해야 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신하들의 대열을 벗어나 한 발 앞으로 나서자 편전 내부의 시선이 온통 이쪽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전하, 신 홍문관 교리 안한수 아뢰나이다. 황공하오나 마령서와 감저는 북경에서 소신이 들여온 것으로, 세자 저하의 허락만을 득한 물건이나이다. 의문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이렇게 되면 세자에게 돌아갈 공을 다소 줄이더라도 내가 어그로를 끌고 가는 것이 맞다. 저렇게 예민한 임금의 칼날이 다시 세자를 향하기라도 한다면 일은 분명 더 꼬일 것이다.
“안 교리, 네 짓이었단 말이냐? 조회에 참석하는 것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은데, 첫날부터 이런 중대한 일을 저지르다니?”
“갓 입직한 신이 어찌 조회의 중심에 서겠사옵니까? 게다가 영상은 북경에 사은사로 왔던 시절부터 도움을 주었으며, 신의 장인인 호판은 이 작물들의 재배를 도맡다시피 했사옵니다.”
“호오…….”
“신의 공은 고작 그것들을 발견한 것에 불과하니, 없느니만 못한 것이나이다. 다만 저 작물들은 반드시 굶주린 백성들의 몸을 살찌울 물건임이 분명하니, 전하께서 그것을 굽어 살펴주시길 바랄 뿐이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제서야 제대로 된 표정을 보여주는 능양군이었다. 왕의 신임이 세자가 아니라 나를 향해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사실 조정에서 눈에 띄게 되는 일은 바라지 않았다.
허나 어쩌겠는가. 내가 원하는 바를 밀어붙이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지 싶은데.
호랑이 입에 들어간 형국이지만, 정신을 차려 봐야지.
그렇게 다시 한번 모두의 앞에서 감자와 고구마의 브리핑을 마쳤다. 대신들과 임금의 눈빛이 집중된 탓에 속곳이 축축했으나 그럴 만한 보람이 있었다.
특히 큰 노동력을 들이지 않고도 수확량이 보장된다는 대목에서 임금의 눈이 빛난 점이 고무적이었다. 역사 속에서 온갖 삽질을 해댄 인조였지만, 그나마 민생에는 관심이 있었다는 점이 행운이었다.
“내 안 교리를 처음 보았을 때는 소과에서 양시 쌍장원을 달았을 때였지, 그 소년이 어느새 대과 장원급제의 값을 제대로 하는 인재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상?”
“소신의 생각도 전하와 같사옵나이다. 게다가 안 교리가 청에 머물던 시절, 시강원의 업무와 청주가 준 임무를 다해내면서도 저런 발견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나이다.”
“성균관 유생이던 안 교리를 시강원 자의로 임명해 심양으로 보낸 것이 과인이다. 자찬이긴 하나 실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구나. 이런 성과를 거두어 오다니.”
“호판의 말에 의하면 파주와 남도 일대에서 분명 성과가 있었다 하니, 전국에 보급을 서두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나이다, 전하.”
인조의 얼굴에 흐뭇함이 올라앉아 있었다.
이대로 감자와 고구마의 보급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가.
헌데 마음을 놓은 것도 잠시였다. 뒤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날아온 굳은 목소리가 훈훈하던 편전의 분위기를 흩어놓고 말았다.
“전하,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며, 따라서 국가의 대사를 이토록 쉽게 결정하는 일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예조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던 얼굴이었다.
처진 눈망울 사이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신 사간원 헌납 송시열 아뢰옵나이다. 영상의 제안을 거두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