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04화 (104/298)

104화. 오랜만의 독대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조선에 온 이래로 처음 목숨의 위협을 느꼈던 날인데. 그것도 왕에게.

그리고 그 협박의 끝은 어처구니없게도 세자를 감시하라는 어명으로 마무리되었던 터였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은 그날 밤의 연장선에서 일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원래 능양군의 의도대로 절대 굴러가진 않았지만.

“심양에서 올렸던 서계들에 문제가 있어 부르신 것이나이까?”

“그럴 리가. 네가 그동안 올린 서계들은 잘 받아보았다. 세자를 다스리라던 명 이상으로 많은 일들을 수행한 것 같지만 말이다.”

“사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구른 바람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사옵니다.”

“알고 있다. 너 같은 말단이 그놈들 수괴의 눈에 들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겠느냐. 어쨌든 결과를 조선의 이득으로 돌려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일이다. 한 가지만 빼면 말이지.”

그 한 가지가 뭔지는 임금의 입으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원래는 양국 사이에 끼어 샌드백 역할을 했어야 정상이었을 세자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찡그려진 능양군의 미간은 아마 세자가 귀국한 날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민심이 세자를 향해있다는 것은 영구 귀국날 세자의 행차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세자에게 합류하기 전, 일시 귀국했던 시절에도 백성들은 오랑캐 땅에서 고생하는 세자를 눈물로 맞이했었다.

허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예전의 초라했던 모습과는 달리, 이번 세자의 행차 뒤에는 청으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한양 근방 출신의 속환인들만 세자를 따르고 있었음에도 그 꼬리는 행차 뒤로 길게 늘어졌다.

돌아오는 세자를 환영하러 길 양 옆에 도열한 백성들이 울부짖는 것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으나, 그들이 품은 감정은 일시 귀국 날과는 정반대였다. 행차를 따르던 속환인들은 친족과 지인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세자 저하의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옵니까.”

“실제로 그놈들의 성원을 받은 건 세자가 아니라 너니까. 조정에도 그리 알려져 있으니 다행이 아니냐. 그거면 됐다. 우매한 백성들이 어찌 여기는지는 상관이 없지.”

“하오나 전하…….”

“세자 녀석도 그걸 아는지 귀국 후에는 동궁에서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지 않느냐. 제 주제를 아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로구나, 핫핫.”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질투심을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이상, 임금의 눈에 세자를 띄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부자 사이에 벌어졌던 참극을 다시 반복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때문에 세자는 내 충고를 받아들여 볼모 생활로 지친 심신의 요양을 핑계 대고 동궁을 벗어나지 않는 상태였다. 실제로 귀국 직후에는 병치레가 잦은 임금의 일 일부를 덜어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자는 목소리가 일부에서 나왔으나 세자 스스로가 고사한 터였다.

“저하께 그러하도록 권하였나이다. 적어도 만인지상이신 전하의 권위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기에…….”

“잘하였다. 역시 너를 그 녀석에게 붙인 보람이 있구나. 계속 그렇게 세자를 누르고 있거라. 백성들 사이에서 퍼진 소문이 흩어질 때까지 말이지.”

“예, 전하.”

“하긴 세자도 헛된 생각을 품고 있지 않으니 심양에서 모아온 재물을 전부 호조에 희사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청에서 모아온 재물이랍시고 은 일만 냥 가량을 국고로 귀속시킨 일 말이군. 임금의 경계심을 내리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호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돌본답시고 여민휴식(與民休息)책을 시행하느라 중앙 재정은 심각하게 말라붙어있을 터였다. 조세 수입을 줄여 허리띠를 졸라맨 호조에는 은 일만 냥 정도도 가뭄에 단비처럼 느껴졌겠지.

‘허나 그것은 심양에서 농장과 공방, 그리고 무역으로 번 돈 중 일부에 불과하다.’

왕은 알고 있으려나, 나라에 바친 돈의 수십 배가 세자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세자의 비자금은 나와 충신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기에 들킬 염려는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조선 땅에 내 재산이랍시고 들여온 자금은 일부, 나머지 상당수는 청나라 땅에서 운용 중인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내 뒤통수를 후려친 사형이란 놈이 압록강을 넘어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언젠가 세자가 이 나라의 전면에 서게 되면 그 은덩이들이 칼날로 벼려져 세자의 손에 쥐어질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묻어놓은 재물들이다.

“예, 그 말씀이 맞사옵니다. 전하께 거스르지 않겠다는 뜻을 행동을 통해 보인 것이 아니겠나이까.”

“네가 세자의 옆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는 한, 녀석은 다른 생각조차 품지 못할 것이다. 녀석이 주제를 잊을 시간을 주지 말거라. 오랑캐 놈들의 호의가 세자가 아닌 너를 향해 있음을 늘 일깨워주도록.”

능양군은 완전히 나를 믿고 있는 듯했다. 이게 이중간첩의 기분인가.

이 자를 언젠가 옥좌에서 끌어내리고 세자를 대신 올리기로 마음먹은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그래도 이토록 신뢰를 보내는 자의 뒤통수를 후려쳐야 할 생각을 하니 양심이 조금 찔리긴 하다.

“세자 이야기는 그럼 이쯤 하도록 하고, 홍문관 생활은 어떠하냐. 버틸 만하더냐?”

“예, 전하께서 염려해주신 덕에 국사(國事)에도 금방 익숙해진 듯하나이다.”

임금이 갑자기 관직 생활을 물어본 것은 그때였다. 나라 밖으로 보내놓고 걱정하는 편지 한 번 보내지 않은 인간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내 부제학에게 너를 맡겨놓고도 걱정이 태산 같았느니라. 알고 있느냐, 네 전시 답안지를 장원으로 꼽으려 하지 않았던 자들이 있었던 것을?”

“처음 듣는 이야기나이다, 전하.”

“당분간 이분(二分)될 대륙의 정세에 어찌 대처해야하는지가 시제였지. 오랑캐와 명, 두 세력 사이에서 실리적인 이득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네 답안의 논지였을 것이야, 맞느냐?”

“그렇사옵니다.”

“헌데 감히 대명의 은혜를 잊고 도리를 저버려야 한다는 자의 답안을 장원으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시관이 일부 있었다. 그 자들이 누군지 짐작이 가느냐?”

명분에 집착하는 꼰대들이라면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송시열과 그 스승인 김집으로 대표되는 산당(山黨) 세력들.

구 척화파 일부와도 손잡은 것이 분명한 그들을 지목하자 임금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답이었다.

“내 너를 당장이라도 홍문관 교리 따위보단 중히 쓰고 싶으나, 오랑캐의 입김이 닿아 있는 자를 중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반대가 만만치 않도다.”

“그 말씀은…….”

“네가 영상이나 호판, 부제학의 뒤를 잇고 싶거든 그들을 꺾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번 마령서 건도 그렇지 않느냐. 백성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간언한 너를 사사건건 반대하려 나서는 것이.”

무언가 이상했다. 아무리 나를 믿는다지만 당장 청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입장을 보여?

말만 들으면 반대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최명길과 김육, 그리고 나를 밀어주지 못한다는 말이 아닌가.

게다가 송시열이 내게 분명 적의를 보이긴 했으나, 정책 집행 과정에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의문점을 들고 나온 것은 분명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 수준까진 아니었다.

무언가 꺼림칙했다.

임금이 갑자기 끌어낸 대립의 구도는 어딘가 설명되지 않은 어색함이 있었다.

‘내가 아버님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세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 것은 그때였다.

신하들을 대립시켜 그 사이에서 왕권을 강화하려 할 것이라는 세자의 예측.

그러자 내 앞에 용포를 입고 앉아있는 자의 머릿속이 환하게 보이는 듯했다. 왜 임금이 조회 자리에서 고작 정오품관 둘이 붙은 말싸움을 방치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를 사냥개로 쓰려 하는가.’

사냥개를 한 마리를 풀든 두 마리를 풀든 사냥꾼이 보는 손해는 없다. 그것들이 물어온 사냥감만 득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사냥감을 물어오지 못하는 사냥개는 솥에 넣고 삶아도 무방하고.

“내 너를 믿고 있노라. 이 조정에서 살아남아, 후대의 동량이 되도록 하라.”

“말씀 받들겠나이다. 전하.”

입가에 웃음을 띠며 너그러움을 위장하고 있으나 여전히 임금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가느다랗게 뜬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욕망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

의견을 물으러 성 영감을 찾아갔더니, 익숙한 마당쇠에게서 이미 외출 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의 행선지는 내 처갓집 사랑방이었다. 김육과 성이성이 머리를 맞대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손님이 더 있었다.

“전하께서 그런 뜻을 내비치셨다고?”

“허어, 안 그래도 숙도(叔度)의 좌의정 복귀를 이야기하려 모인 자리였는데, 문제가 하나 더 늘었지 않은가.”

김상헌의 조정 복귀는 커다란 지각변동이라 보아도 무방한 일이 분명했다. 늦은 밤, 영의정, 호조판서, 홍문관 부제학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보니 더욱 그랬다.

“산림들에게 대로(大老)라고 불리던 사람이니 곧 조정에 복귀할 것이라 예측하긴 했으나, 전하께서 신하들을 본격적으로 갈라놓으실 생각이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최명길의 얼굴이 호롱불에 비춰졌다. 그의 얼굴에서 이마에 새겨진 굵은 주름살이 선명하게 강조되고 있었는데, 아마 그의 찡그린 표정 탓이리라.

“언로(言路)나 장악하고 있던 산림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되었습니다. 비변사에 그들의 대표가 들어온 이상 삼사의 견제가 더 심해지지 않겠습니까? 사사건건 간섭이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 것이오. 허나 전하께서 당신의 저의를 노골적으로 내보이신 이상, 이 사태를 본격적인 당쟁으로 이끌어가는 안은 선택하기 어렵겠군.”

“저쪽에도 전하의 속내를 눈치챈 자가 있어야 할 텐데. 계속해서 싸움을 걸어온다면 언젠가 피할 수 없는 날도 오고 말 것이네.”

“전하께서 이 정도나마 뜻을 내비치실 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오늘 불려갔던 자가 안 교리가 아니었다면 받은 명 그대로 전하의 손아귀에서 놀아났겠지요.”

“게다가 전하의 뜻대로 당쟁이 심화된다 하여도 산림들은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오. 앞으로 추진할 개혁들이 암초를 만난다면 우리만 손해를 볼 것이 자명하니까.”

세 대신의 불꽃 튀는 격론이 어둑어둑한 사랑방을 밝히고 있었다.

능양군이 나를 믿고 떠본 이야기 덕에 대비할 시간이 생긴 것은 다행이었으나, 그렇다고 근본적인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들 알다시피 마령서와 감저의 보급은 개혁의 신호탄에 불과하네. 그런 사소한 일에도 갈등을 유도하는 것이 전하의 뜻이시라면, 앞으로 다들 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걸세.”

이미 내가 조선에 떨어지기 전에도 개혁의 씨앗은 어느 정도 뿌려져 있었다. 여기 눈빛을 불태우고 있는 내 장인어른, 김육의 손에 의해서 말이지.

광해군 시절 싹만 보였던 대동법의 전국 확대를 주장하고, 물류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한 번 엎어졌던 동전의 도입을 주장한 것도 김육이었다. 그가 노구를 이끌고 먼 파주 땅을 몇 번이고 오간 이유가 있었다.

“마령서가 전국에 퍼진다면 배를 곯는 백성이 줄어드는 것도 좋지만, 먹고 남은 곡식들이 생긴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잉여 곡물을 공납 대신 낼 수 있다면 백성들의 부담은 한결 줄어들 것이고, 동전의 도입은 그 곡식을 옮기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할 테니까요.”

“백후 자네는 정말로 하늘에 감사해야 할 것일세. 자네의 개혁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 줄 발견을 한 자가 자네 사위라니. 앞뒤가 맞아떨어져도 지나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늦은 나이까지 시집 안 간다고 버티던 딸이 이런 거물을 물어올 줄은 몰랐지.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 아닌가. 안 그런가, 사위?”

김육이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을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뭐, 인쇄업까지 치면 내가 그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은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들 잡담은 그쯤 하게. 그래서 안 교리. 저하의 복안은 그 이후 어디까지 뻗쳐 계신 건가?”

“예, 영상 대감. 농(農)이 안정되면 그 이후는 공(工)과 상(商)의 차례가 아니겠습니까. 저하께서는 심양과 북경에서 대륙의 물류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느끼신 것이 많으시다 하셨습니다.”

“역시 차기 보위에 오르실 분답게 더 먼 곳을 보고 계신가……. 자네의 의견 역시 저하와 같겠지?”

“그렇습니다. 마침 대륙의 정세가 혼란하고 이웃한 일본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이때가 적기라 사료됩니다. 그 둘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기도 좋은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과거에는 명에서 내린 해금령(海禁令) 덕에 동래와 의주의 상인들이 호황을 누리던 때가 있긴 했지. 허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해금령, 명나라가 창궐하던 왜구를 제어하지 못하자 민간무역을 금하고 조공무역으로 그것을 대체한 정책. 그동안 조선은 양국에 필요한 물건을 중개하며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물론 명 이전부터 성행했던 해상무역이 명령 하나로 막아질 리가 없었다. 밀무역이 성행했고, 실크로드가 막힌 이후로 중국 대륙에 바닷길로 찾아온 서양 세력까지 더해지면서 해금령은 점점 의미를 잃어 대륙의 남부에 한해 철폐된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대륙 남부에서 국제무역을 주도하는 정성공의 세력이 명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면서 청이 근시일 내에 다시 해금령을 선포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품고 있는 잘안 장긴의 도장.

섭정왕의 권한으로 내려진 이 무제한 무역 거래증이 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조선에 어떤 이득을 가져올 수 있으리란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찾아올 네덜란드 세력도 있었다. 지금 내딛는 걸음은 해상무역강국 조선을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 분명했다.

“대륙의 정세를 고려하면 해금령은 곧 다시 내려질 것입니다. 영상 대감.”

“무엇이? 그것을 어떻게……. 자네, 청의 섭정왕과 얼마만큼 속내를 교환하고 온 것인가?”

“영상 대감,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청의 앞잡이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 전에, 세자 저하와 제가 공유하고 있는 큰 그림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당장 코앞에 닥친 산당과의 정쟁도 중요했다. 그러나 단순히 백성을 위한다는 목적보다는 더 명확하고 커다란 목적을 제시하는 것이 당파싸움의 수라장을 겪어야 할 이들에게 더 큰 동기부여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세자가 왕위에 오른 조선을 어떤 방향으로 바꿔나갈 것인가.

내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중신 셋의 감정이 물결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면서 김육의 사랑방에는 가끔씩 탄식과 감탄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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