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대동법(大同法)
인정전 안, 곧 임금이 옥좌에 올라앉아 조회를 시작할 시간이었지만 내 생각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대동법 확대와 관련해 논쟁을 벌여야 할 일이 염려되어서가 아니었다.
방금 마친 김육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그와 나눈 대화 몇 구절이 계속해서 마음속을 울리는 듯했다.
‘뜻을 펼치게 해줄 주군은 자네가 이미 만났지 싶고, 백성들이 자네를 따를 계기를 굳혀 주는 정도가 내가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라네.’
‘유산이라니,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청풍 김씨 가문은 일정이나 그의 아우가 이을 예정이 아닙니까? 왜 사위에 불과한 제게?’
‘내가 키워낸 아들이니 내가 제일 잘 알지 않겠는가? 녀석은 우두머리 자리에 설 그릇이 아니라네. 높이 올라가 봐야 판서 정도가 한계겠지. 나랏일에만 몰두해 몸이나 상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야.’
‘그런…….’
‘자네도 아들놈과 겪은 세월이 조금 되었으니 그놈 성격 정도는 파악했을 텐데? 자기 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적에게는 한 톨의 관용도 없는 아이일세.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그런 성격이라면 그 집단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지.’
문득 성균관에서 좌명과 처음 만났던 날 동장의 김식과 갈등을 빚었던 일이 머리에 선했다. 말을 처음 튼 자리부터 망설임 없이 비꼼을 곁들여 대립각을 세우던 좌명의 모습이 떠오르자 김육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허나 자네는 어떤가? 뒤로 음모를 꾸민 적은 있어도 적에게까지 뻣뻣하게 구는 성격은 아니지 않은가. 청국에서 인정받고 살아 돌아온 것을 보아도 그렇고, 언젠가 적이 될지도 모르는 전하를 대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뿐입니다, 장인어른.’
‘마침 말 잘했네. 폭풍이 불면 줄기가 단단한 나무는 뿌리가 뽑히지만 낭창거리는 나무는 살아남는 법이라네. 영상 대감도 병자년에 항복문서를 찢어버린 자와 통교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병자호란 당시에 최명길이 김상헌과 큰 갈등을 빚었음에도, 끌려갔던 심양 감옥에서 흉금을 풀고 관계를 회복한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최명길이 지금 올라앉은 영의정이란 자리는 실권은 적지만 당파 간 이견을 조정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김육은 후대의 조정에서 내가 그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나 과분하고 먼 말씀입니다. 저는 이제 신료로 첫 발짝을 뗀 풋내기에 불과합니다.’
‘그 풋내기 덕분에 죽기 전에 필생의 과업을 이룰지도 모르게 된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동전 건만 해도 자네를 만나기 전에는 석주 녀석의 대에나 이뤄질 줄만 알았었지. 지금은 한 줄기 빛이라도 비추고 있지 않은가.’
혼례를 올리던 날 본 좌명의 아들, 열 살짜리 꼬맹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실제로 조선에 제대로 유통된 첫 화폐인 상평통보가 도입된 것은 김육의 손자인 김석주가 벼슬살이를 하던 시절쯤이라고 했다.
‘허나 장인어른…….’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다면 실무를 중히 여기는 관료치고 자네에게 반기를 들 사람은 없을 걸세. 그게 싫었다면 마령서 건으로 조회 자리에서 튀어나오지 말았어야 했네. 허허.’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영의정과 호조판서가 고작 정오품관의 발언을 제지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 자리는 일종의 시험 무대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와 영상 대감은 의견이 일치했네. 자네만 한 그릇을 가진 사람은 조선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걸세. 사위 자네가 이 파벌의 차세대 영수(領袖)가 될 것이야.’
‘……제겐 너무나 무거운 자리입니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것이네. 몸가짐 또한 주의하게. 나는 계속해서 서책을 통해 자네에게 온 백성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생각인데, 그들을 실망시킬 일을 해서는 안 되겠지.’
아무래도 우리 장인어른께서는 ‘프로파간다’라는 개념을 수백 년은 빨리 도입하실 생각인 것 같았다. 미래에는 괴벨스가 나치 독일의 김육이라 불릴지도.
이야기를 통한 선전 선동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어깨에 묵직한 무게 하나가 더해졌다는 것은 확실했다.
옥좌를 향해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임금을 보며 양어깨가 내리눌리는 것이 느껴졌다.
***
대동법의 확대는 이미 예고되었던 안건이었던 만큼, 오늘의 조회 자리는 대신들의 치열한 논쟁으로 뻘건 불꽃이 튈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나와 송시열이 감자 건으로 다투었던 일은 그저 풋내기들의 정치놀음으로 보일 정도였다.
“대동법은 율곡 선생께서 주창하신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의 연장선에 놓인 제도요. 어찌하여 산림에서 반대할 수 있단 말이오?”
“우리도 대동법이 근본적으로 좋은 제도며 아름다운 취지를 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허나 그것을 현실에서 시행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요!”
정치판에는 영원한 명분론자도 현실론자도 없다고 하던가. 명분을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산림의 거두 김집이 현실론을 들어 대동법을 반대하고, 실무파의 우두머리인 김육이 이이의 학맥을 들어 그를 반박하는 묘한 상황이었다.
“이미 우리는 십수 년 전 양호(兩湖, 충청·전라)에 대동법을 시행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난 경험을 가지고 있소. 그나마 수운(水運)이 제대로 통하는 경기와 관서에서나 대동법이 가능하단 교훈을 왜 잊으신 게요?”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오. 그 때문에 내가 충청감사로 나가 태안군에 운하를 건설했던 것이오. 천수만에 판 운하 덕분에 이제 안흥량에서 세곡선이 침몰하는 일은 없어졌단 말이오.”
“그래도 공납품에 비하면 운송해야 하는 양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소! 이전까지 배 몇 척이면 가능했던 일이 수십 척 수백 척을 동원해도 모자를 지도 모르오! 그 부담 또한 고스란히 백성에게 전가될 것이오!”
“그것은 대동미가 대동전으로 전환되면 차차 해결될 일이오. 게다가 이미 고향에 전답을 가진 신료들도 소작료로 받은 쌀을 한양으로 올려 보내는 판에, 나라 차원에서 못 할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이오?”
결국 양측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는 이유는, 대동법을 시행하는 데 투입되는 비용에 비해, 산출되는 효과가 어떠할지 김육과 김집의 예측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원 역사에서도 광해군부터 현종까지 네 임금에 걸쳐 내려간 논쟁이었다. 그만큼 대동법은 실제 인식과는 달리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 까다로운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훨씬 이르게 전국에 퍼져나가기 시작한 감자와 고구마는 대동법의 한계를 해결해 줄 수 있겠지. 허나 지금은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의 논쟁에서 감자와 고구마가 얼른 언급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묵묵히 판서 두 사람의 다툼을 지켜보던 영의정 최명길이 논쟁에 끼어든 것은.
“잠깐, 전하께서 지켜보시는 자리일세. 둘 다 감정이 너무 격해진 것이 아닌가? 실패했던 정책이라고 송(宋)대의 재상, 왕안석의 사례까지 꺼내와 비꼬는 것은 조금 심하지 싶은데.”
대동법 확대와 동전 도입 자체가 인조 초기에 추진되었다가 한 번 엎어진 일이었던 만큼, 김집의 공세가 점점 강해지던 차였다. 송나라의 실패한 개혁가 왕안석의 사례를 들고나올 정도로 공격에 날이 서 있었다.
선을 넘은 김집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곧바로 김육에게 사과를 전했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 사과를 받아들이는 장인어른이었으나 속은 분명 부글부글 끓고 있으리라.
긴 시간 동안 진행된 열띤 토론 탓일까, 묘하게 염소를 닮은 김집의 얼굴과 마마자국이 그득한 김육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최명길은 둘의 열을 식히려고 끼어든 것 같았다.
“전하, 중신 간의 논쟁이 지나치게 달아오른 모양이니 조금 식힐 필요가 있어 보이옵니다. 조금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논하게 함은 어떨는지요?”
“근본적인 이야기라, 어떤 것을 가리킴인가, 영상?”
“전하께서 늘 강조하시는 여민휴식(與民休息)에 관하여 논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결국 이판과 호판도 대동법이 백성들에게 끼칠 영향에 대해서 논했사온데, 현재 백성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부터 짚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옵니다.”
“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임금이 허락을 내린 것은 잠시 후였다. 마치 방금까지 논쟁 중이던 두 대신에게 숨을 돌릴 시간이라도 주는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나 상참에 참여한 신료들 중 누구에게 물어야 한단 말이냐. 외관직 경험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제 고을의 사정밖에 모를 텐데, 방납의 폐단에 대해 전반적으로 아는 자는 드물지 않겠느냐.”
“그 폐단을 살피고 고치라 전하께서 파견한 자들이 있었지 않사옵니까. 그들의 의견을 묻는 것은 어떻사옵니까.”
“아. 그 얘기인가? 적합한 자가 떠올랐다.”
방납의 폐단이라. 왠지 아련한 기억 하나가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부제학. 이 자리에서 어사를 두 번이나 나간 경험이 있는 자는 너뿐이렷다.”
“예. 신 홍문관 부제학 성이성, 전하의 하해와 같은 배려로 호서와 호남에 각각 한 차례씩 암행을 나간 적이 분명 있나이다.”
“그때 접했던 폐단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하라. 마침 대동법의 확대 대상으로 꼽히는 지방도 양호 지방이다. 네 경험이 도움이 될 터.”
기다렸다는 듯이 암행어사로 겪었던 일을 브리핑하는 성 영감이었다. 그가 풀어놓는 기억이 얼마나 생생한지 마치 어제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정축년에 나간 호서 암행에서 잡아낸 비리를 줄줄이 고하던 성 영감의 입이 멈춘 것은 잠시 후였다. 방금까지는 좔좔 쏟아져 나온 기억이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왜 갑자기 말이 멎었느냐. 호남에 암행했던 일이 더 최근이 아니더냐?”
“전하, 전번에 보고드렸다시피 호남에서는 신이 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던지라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듯하옵니다. 아직 승정원에 장계의 사본이 남아있을 터이니 그것을 살피시겠나이까, 아니면…….”
왕의 안색을 살피던 성 영감의 고개가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왔다.
저 눈빛, 절대 무엇을 잊었을 리 없는 눈빛이다.
저렇게 총기 가득한 철인 영감이 도대체 무엇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저기 있는 안 교리가 서생이던 시절, 방자로 신을 수행했었사온데 그의 기억이라도 들으시겠나이까.”
“호오. 하긴 당시에 관료가 아니었던 자의 시선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구나. 더구나 안 교리는 젊으니 기억력 또한 더욱 또렷할 터. 그 편이 좋겠도다.”
이 논쟁에서 한몫을 거들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나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임금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꽂히며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상경한 이후로 떠올릴 일이 없을 줄만 알았던 기억이었다. 생각해보면 조선에 떨어진 지가 벌써 햇수로 육 년째였나. 꽤나 긴 시간이 흐른 상태였지만 남원에서 겪었던 일들은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 두꺼비 같은 놈이 빼돌렸던 게 공납품인 한지(韓紙)였던가.’
공상지(供上紙)라 불리던 종이를 공납하는 과정에서 남원부사가 해처먹은 백성의 피땀이 얼마던가. 그것이 그놈의 궁둥짝에 정의봉을 휘두르게 된 죄목 중 하나였다.
이 몸의 원래 고향이던 진안군에서도 버섯을 비롯한 임산물을 마련하는데 허리가 휠 지경이었던 사실도 함께 기억이 났다. 이런 선명한 기억들이 임금과 만조백관 앞에서 혀를 놀려야 하는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을 지워주었다.
“……소신이 호남에서 겪은 공납 관련 경험은 약소하지만 이 정도가 전부이옵니다. 호남은 호란을 비껴간 지역임에도 이러한 폐단 탓에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이 날로 늘고 있었나이다.”
“이제야 장계에서 읽었던 내용이 기억이 나는구나. 병자년의 변고 이후로 풍년이 든 해가 드물 정도로 천재(天災)까지 겹쳤으니 백성들의 고통이 오죽했겠느냐.”
“남원부처럼 큰 고을에서도 아사하는 자가 드물지 않았으며, 장시에는 활기가 없을 정도였나이다. 소신이 청에서 마령서와 감저를 들여온 것도 그런 배고픈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사온데…….”
“그런데?”
“제아무리 좋은 씨앗과 밭이 있더라도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싹이 돋고 열매를 맺을 수 없나이다. 현재의 과도한 공납은 가난한 백성들을 전답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니, 어찌 이 폐단을 고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백성들은 중앙으로 바칠 공물을 마련하러 매년 산과 들을 누벼야 했다. 그 시간에 농지를 더 개간하고 잡곡이라도 심었으면 배를 곯는 백성들이 줄었겠지.
형편이 그나마 나은 백성들은 쌀과 베로 공물을 사들여 바치기도 했지만, 이 대납(代納)을 맡은 방납인들의 횡포 역시 말로 다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공물의 대금으로 시세의 몇 배를 받는 경우가 양반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임금의 고개가 김집을 향해 돌아갔다. 잠자코 내 경험을 듣고만 있던 김집은 방금보다 다소 풀이 죽어 보였다.
“그래, 이판. 이판 또한 향리에 묻혀 산 기간이 길었던 만큼 공납의 폐단에 대해 어둡기 어렵겠지. 대동법에 대해 논한 적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그렇지 않은가?”
“예. 전하의 말씀 그대로이나이다. 허나 그것은 기존 공납제도를 다듬는 선에서 해결이 가능한 문제라 사료되옵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굳이 대동법처럼 급진적인 개혁안이 아니라도 해결책은 여럿이 있기 마련이나이다. 예컨대…….”
공물의 목록을 보고 줄일 수 있는 것을 조사하여 감경한 후, 생산지와 납부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바로잡고, 공물을 사들이는 가격을 준수하도록 해 방납인들이 농간을 부리는 것을 방지하면 충분하다는 이야기였다.
우유부단한 임금답게, 그 이야기를 들은 능양군은 또다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그럴 만했다. 지금 조선의 상황에서 아주 오답이라 단정할 수 있는 주장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김집의 의견이 받아들여진다면 대동법의 전면 시행은 또다시 미뤄지게 된다. 상업 양성의 밑거름이 될 대동법이 연기된다면 역사를 바꿀 원동력 역시 깎여나갈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 벌어질 경신대기근이라는 재앙에 백성들은 무수히 죽어 나가겠지.
‘결국 이 방법밖에 없나…….’
그 상황을 김육 역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고민에 빠진 임금을 놓고 두 대신 사이에서는 다시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내디디며 관복의 소매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손아귀에 잡혔던 물건은 천천히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쿵.
난데없이 인정전을 울린 소음에 김육과 김집의 논쟁에 집중되어있던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방금까지만 해도 어리둥절해 있던 눈빛들은 점차 경악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 장소와 맞지 않는 물건이 소음과 함께 바닥을 굴렀기 때문이었다.
날이 시퍼렇게 올라 있는 손도끼 한 자루였다.
※ 작가의 말
대동법(大同法)은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제도입니다. 허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대동법이 광해군 시기에 곧바로 전국에 시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해군 치세에는 경기에만 시범적으로 실시되었었고,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시행 지역이 확대되었다, 철폐되었다 하는 과정을 거쳐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평안, 함경,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본격적으로 시행되게 됩니다.
실제로도 꽤 긴 기간 동안 조정 내에서도 대동법 찬성파와 반대파가 갈렸습니다. 작중에서 김집과 김육 사이에서 대동법에 대해 오간 격론은, 실제로 실록에 기록된 그들의 발언을 기초로 창작한 것입니다. 원 역사에서는 조금 후대인 효종 대에 충청도, 전라도에 대동법을 확대하자는 논쟁이 벌어졌을 때 나왔던 발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