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대이타(大理紽)
가뜩이나 갈아먹을 사람도 없는데, 행정 또한 비효율적이다. 그렇다고 나랏일을 맡길 고급 인력을 땅에서 캐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일 것이다.
“자네 말대로 정리하기 편하게 장계와 영수증을 고을별로, 시간별로 나누어 정리를 끝마쳐두었네. 이 일을 대체 어찌 처리하려고 이런 부탁을 한 것인가?”
“지켜만 보십시오. 장인어른.”
낮시간에 홍문관이 아닌 타 부서에서 일하는 것은 꽤나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성 영감의 허락을 받고 호조로 파견 온 것이건만, 괜히 일을 째고 놀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얼른 이 일을 끝내버려야 퇴근하고 쌓인 피로를 풀 여유라도 생길 것이다.
“산학교수 이하 호조의 관원들은 들으시오. 내 설명대로만 하면 이 산더미 같은 장계들로부터 금방 벗어날 수 있을 것이오.”
자존심이 있지, 웬 타 부서 놈이 굴러와 업무를 지시하는 일에 호조의 참하관들은 거부감을 품을지도 몰랐다. 아마 김육 부장님 사위만 아니었어도, 쌓인 일이 첩첩산중만 아니었어도 반발이 크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잠시 접어둘 때였다. 다행히 감자 보급 건에서 쌓인 유능한 관리라는 명성은 이 사태에 꽤나 도움이 되고 있었다.
“거, 업무는 그렇다 치고 안 교리님. 혹여나 홍문관으로 복귀하시기 전에 수결(手決, 사인) 하나 남겨주실 수 있습니까?”
“어렵지 않은 일이나, 내 수결을 어디에 쓰려고 그러오?”
“아, 그게 안 교리님이 우리 일을 도우러 드나드신다는 말을 들은 여편네가 그만…….”
“크흠! 공사를 구분하시오!”
이들이 고분고분한 이유가 유능한 관리라는 명성 탓일까, 아니면 <열녀김씨전>의 선풍적인 인기 탓일까. 하마터면 이마를 짚을 뻔했으나 겨우 참아냈다.
이런 대화로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다들 앞으로 나와 양식이 적힌 종이를 두 부씩 받아 가시오. 각각 다른 양식이 적혀있을 것이오.”
“이게…… 무엇입니까?”
“앞으로 몇만 자나 써 내려가야 할지 모르는 귀관들의 팔뚝 건강을 지켜줄 녀석들이지. 자, 설명부터 들으시오.”
가로 칸에는 연도를 비롯한 날짜를 적는다. 시범을 보이는 나를 따라 관리들의 날렵한 세필이 숭정이라는 연호 뒤로 공납품을 수령한 날짜를 적어 내려갔다.
‘올해는 숭정 십칠 년…… 1644년인가. 아직도 명나라 연호를 쓰는 걸 보니 이 일로 언젠가 혼이 날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지 안 벌어질지 모르는 일을 걱정할 여유는 없다.
연이어 세로 칸 큰 칸에는 각자가 맡은 고을의 이름을 적고, 아래 딸린 작은 칸에는 고을마다 납부하기로 정해진 공납품의 종류를 채워나갔다. 이제 특정 고을에서 공납품이 몇 종류가, 얼마만큼 올라왔는지 정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내용이 들어갈 칸을 두 개로 나누는 것이었다. 왼쪽에는 고을에서 올려보냈다 장계로 보고한 수량을, 오른쪽에는 호조에서 수령한 수량을 적어 유실된 양을 파악케 했다.
“이거, 나리께서 고안한 이 종이면 몇 쪽만 가지고도 장부 몇 권 치의 내용을 담을 수 있겠습니다!”
“어허, 기뻐하기는 이르오. 두 번째 양식은 수령한 공납품을 당시 쌀 시세로 계산해 내용을 채워야 할 것이오. 이건 귀관들의 산술이 요구되겠지. 검산은 내가 직접 할 것이니 틀리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예? 나리께서 아무리 장원급제한 분이시라고는 하나, 산술은 저희의 전문분야인데요? 게다가 여기 있는 모두의 결과물을 나리께서 모두 검산하신단 말씀이십니까?”
마치 도전을 받았다는 듯이 묘한 표정을 짓는 호조관원이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장인어른이 콧김을 뿜으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김육은 나와 일하며 내 계산 솜씨를 알고 있었다.
산가지를 쓰는 조선식 계산법도 생각보다 느린 편은 아니지만, 현대식 필산(筆算)보다는 빠를 수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표 서식에 익숙하지 않은 호조 관원들은 평소 계산 속도의 절반도 겨우 내면 다행인 듯했다.
어디 계산 실수라도 저지르기만 해 봐.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오. 다 자신이 있어서 하는 말이니.”
“나리의 총명과는 별개로 그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계산에 정성을 다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아,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떠오? 가장 빨리 계산이 무결한 문서를 제출한 자에게 마령서 한 광주리를, 늦더라도 계산이 무결한 문서를 제출한 자에게는 반 광주리를 주겠소.”
자리에 있던 모든 관원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 사람들도 남자는 남자구나.
감자가 정력에 좋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일 탓에 잠시 양심이 찔렸다.
그 와중에도 장인어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계신다.
“아랫사람에게 상을 주어 스스로를 부리게 한다?”
그 와중에도 나를 관찰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어허! 상을 주겠다는데 지금 그렇게 서서 눈빛만 빛내고 있을 시간이 있소! 어서 시작들 하시오!”
장인어른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재빨리 업무개시를 선언했지만, 묘하게 달라붙는 김육의 시선은 그 후로도 좀처럼 떨어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맡은 업무를 해치우는 내내 말이다.
차라리 죽기 직전까지 굴려지는 홍문관의 분위기가 편했다는 생각은 왜 드는 걸까. 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에게 내 일거수일투족이 분석당하는 느낌은 분명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 아니면 이거, 성 영감님한테 이미 조교당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지옥 같은 홍문관 혹사가 그리울 리가…….
***
“역시 내 사위야. 내 이럴 줄 알았지!”
“저, 장인어른. 사람들이 이쪽을 계속 쳐다봅니다. 목소리를 다소 낮추시는 건…….”
“타인의 시선이 무슨 상관인가? 내가 내 사위를 칭찬하겠다는데? 핫핫핫!”
눈치 없는 건 이 집안 남자들 내력일지도.
예상치 못했던 칼퇴 탓에 김육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아니, 국가행정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했기 때문인가.
“그래도 한양 거리 한가운데가 아닙니까. 곧 학당에 도착하는데, 그때까지만 참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허, 사위. 자네 능력과는 별개로 배포가 작지 않은가.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게!”
돌겠다. 왜 내 주위 어르신들은 죄다 이렇게 마이페이스신지.
내 등짝을 두들겨가며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발사해대는 김육 탓에 죽을 맛이었다.
“자네가 고안한 방법을 조금만 응용해 호조의 모든 임무에 적용하면 업무량이 반 이하로 줄어들 걸세!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면 몇 주는 예상했던 작업이 단 이틀 만에 정리되었으니 김육이 이토록 좋아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현대에서 엑셀을 꽤 다뤄본 경험이 있었던 것이 여러 가지로 정말 다행이었다.
‘정약용 선생님, 이번에도 큰 신세를 지고 갑니다!’
표를 이용해 막대한 데이터들을 정리할 생각을 한 사람이 조선시대에도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재 갈아먹기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조가 신하에게 짬을 때린 업무를 우리의 다산 선생께서는 너무나 쉽게 클리어 하셨다.
수레에 가득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의 장부를 표 한 장으로 요약해 임금에게 바쳤다던가.
그 일화를 기억하고 있었던 덕분에, 이렇게 장인어른에게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자네가 계속 중얼거리던 ‘대이타’라는 단어, 그건 또 무엇인가? 자네가 고안한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 대이타인가?”
“아, 그것이…….”
조선인들의 기록 덕후 기질에 질렸던 나머지, 문서를 정리하는 내내 중얼거렸던 말 중에 데이터라는 단어가 몇 개 섞여있었던 모양이었다. 데이터베이스라는 말도 중얼거렸던가?
어차피 우리 장인어른이 오해하고 계신 거, 설명이 귀찮으니 그냥 그대로 묻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클 대, 다스릴 이, 실타래 타. 세상의 이치가 실타래처럼 엮인 큰 문서라는 뜻을 담아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좋은 이름이군. 앞으로 그런 양식으로 문서를 정리하는 것을 대이타라 부르도록 하겠네!”
내가 얼떨결에 말한 단어가 정식 명칭이 된 게 지금까지 몇 개더라. 경구수액은 보수탕이라는 단어로 겨우 넘어갔지만 그 이후로는?
저 명칭들이 후대까지 전해지면 역사는 도대체 어떻게 평가될까. ‘환’을 추종하는 양반들이 환국이 영어에 끼친 영향이라며 근거로 삼는 건 아니겠지?
한숨이 절로 나오는 실수였다.
‘피자, 캐치구(球), 데이터? 하, 조 어르신, 어르신의 네이밍 센스가 그립습니다. 왜 그리 일찍 돌아가신 건가요?’
원치 않는 유명세의 시발점이 된 조 노인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그 양반이 춘향전만 이상하게 쓰지 않았어도 요안이가 나로 소설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텐데.
이런 잡생각이 계속해서 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호조에 쌓여있던 일을 마무리했으니 이제 처가를 벗어나 집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 장인어른께서 칼퇴하는 내 뒷목을 또다시 잡아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는 번화가인 운종가 근방에 위치한 곳이었다. 낙향한 이의 기와집을 개조해 만들었다던 장소에는 웬 낯부끄러운 표찰이 기둥에 매달려 이곳의 정체를 알리고 있었다.
“성…… 근…… 학당…….”
“어떤가? 감격에 겨운 것인가? 원래는 더 일찍 보여주려 했는데, 자네가 하도 바쁘고 쉬는 날이면 우리 딸아이만 예뻐하는 바람에 틈이 있었어야지.”
감격이요? 저 이름을 보고 감격이요?
집안 사정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다 가르치는 서당을 열었다는 이야기는 이전에 들은 바가 있었다. 헌데 내가 알기로는 이 정도 규모도 아니었고, 이런 이름도 붙이지 않았을 텐데?
“자네가 멋지게 장원급제한 이후로 자네가 쓴 ‘소학유공비’가 얼마나 잘 팔렸는지 모르네. 찍어내기 무섭게 팔려나갈 정도였지. 거기서 나온 수익으로 마련한 공간일세.”
“아니 그렇다 쳐도 제 이름을 감히…….”
“그렇게 겸손 떨 것 없네. 자네는 이런 대접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아마 자네의 방식을 이어받은 자들이 늘어나면 하나의 학파도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학파의 이름은 ‘성근학파’가 되는 건가? 그런 끔찍한 소리를!
지그시 악문 이빨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아주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어금니가 박살 나면 안 될 텐데, 치과도 없는 시대에.
이 눈치 없는 장인어른은 내가 감동이라도 받아 말을 잇지 못한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성근이란 별호 붙인 것도 이 인간 아들놈이었네. 하아.
떨리는 걸음을 천천히 학당을 향해 옮겼다. 머릿속은 온통 저놈의 명패를 어떻게 은밀히 불지를 수 있을지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김자점의 집을 털었을 때처럼 멀리서 물매로 불덩이를 날리면 되지 않을까.
“어허, 스승님이 어디 계신 지는 저도 모른대도요!”
“아니, 본인 이름이 걸린 학당에, 본인이 가르친 제자가 있는데, 안 교리 그분이 어디 계신 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어서 진실을 고하시게!”
성근이라는 이름을 잿더미로 만들기 위한 온갖 계략이 꿈틀거리던 머릿속을 한 방에 비워준 것은, 그 학당의 마당에서 옥신각신하는 두 명의 그림자였다.
하나는 익숙했으나, 하나는 낯설었다.
“자네들, 예서 무슨 소란인가?”
“호판 대감, 오셨습니까? 그것이…… 저자가 다짜고짜 스승님의 행방을 묻기에 대응 중이었습니다. 아니, 옆에 계신 분은……!”
슬슬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으나, 내리기 시작하는 어둠도 녀석의 잘생긴 얼굴을 감추지는 못했다.
내 첫 제자, 요운이었다.
소과에 입격하고 후진들을 양성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모습을 실제로 마주한 것은 한양에 돌아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녀석도 나도 바빴던 탓도 있고, 녀석은 나보다 먼저 혼인해 분가했던 탓에 박연을 찾아가도 만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훌쩍 어른스럽게 성장한 요운의 모습에 내가 괜히 뿌듯했다.
“스승님! 이 얼마 만에 뵙는 것입니까!”
“내 나랏일이 바빠 그동안 너를 찾지 못했다. 의젓해진 모습을 보니 기쁘구나.”
“스승님께서는 변한 것이 없으십니다. 참, 호판 대감 댁 아가씨와 혼인하셨다지요? 수업 시간에 꿈꾸듯 이야기하시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감축드립니다. 스승님!”
요운을 만나게 해주려고 장인어른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가?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몇 년만의 상봉에서 온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요운이 녀석과 다투던 불청객이 용건을 들고 슬며시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자네의 스승이라면 이분이 안 교리?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구만?”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사내였다. 양 끝이 솟은 눈썹과 큰 코가 인상적이었는데, 외모와 어울리게 말투 또한 꽤나 도전적이었다.
“영보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소. 그런 재미있는 선비가 있다기에 어떤 자인지 구경이나 하려고 왔지. 헌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안 교리는 훨씬 재미있어 보이는 사람이구려?”
영보면 송시열을 가리키는 말일 터. 송시열이 내게 사람을 보낸 것인가? 왜?
정체불명의 선비는 꽤나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산림과 연이 있음이 분명한 그의 태도에서, 적대감은 한 톨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실로 묘한 첫인상의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