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10화 (110/298)

110화. 독점

최명길과 김육을 비롯한 개혁파 관료들 역시 산림 세력이 변화하는 모습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산림 스스로의 일, 밖에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었다.

결국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우리 할 일에나 집중하자는 결론이 나왔고, 나는 늘 그렇듯이 홍문관에서 성 영감에게 갈리느라 여념이 없던 차였다.

“참, 안 교리, 빈궁이 네게 직접 전할 말이 있다는구나. 괜찮겠느냐?”

저녁마다 세자와 갖던 수업 시간, 성정각에서 여느 때처럼 서연을 끝마치고는 책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본인이 용상에 앉아있을 때는 도끼를 품고 정전에 들 생각은 말라며 농을 치던 세자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자빈마마께서요? 제게 갑자기 무슨 용건이시기에…….”

“그동안 수고를 치하하는 것도 있고, 네게 부탁할 일이 몇 가지 있다고 들었다. 들어보니 이 건은 빈궁이 직접 말하는 것이 맞지 싶어 이 자리에 부르려 한다.”

“저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따라야겠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민회빈 강씨와 직접 말을 섞은 일은 심양 시절에도 거의 없던 터였다. 거의 세자가 말을 받아 전해주거나, 무역 관련 일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쳐진 대나무발 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나는 내명부에서 둘째가는 여인을 마주했다. 냉철해 보이는 인상에서 기품이 묻어나고 있었다.

가벼운 첫인사를 나누자마자 강빈은 바로 본론을 던져왔다.

“……제게 조사를 맡기실 일이 있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청국에서 주기적으로 요구하는 무역품 중에 홍시와 건시(乾柿, 곶감)가 있다는 것은 자네도 알 터, 섭정왕이 조공을 무역으로 전환한 후에도 그 수요는 변하지 않았네.”

“예, 저하께서 그 일로 심양에서 곤혹을 치르신 적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강 진사의 상단에서 무역품의 매입을 도맡아 해주고 있었는데, 기한이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수량을 맞추지 못해서 말이지. 청은커녕 왕실에 납품할 물량도 부족한 것 같다네.”

감 농사가 잘 안되기라도 했나?

허나 강빈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그것이 문제는 아니지 싶었다.

“강 진사는 아직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여나 상단의 일 처리가 미숙하기라도 한 것인지요?”

“아니, 그것은 아니네. 그의 상단이 가진 능력은 의심할 데가 없지. 강 진사가 자리를 비웠다고 일을 허투루 할 사람들은 아니라 믿네. 그러니 자네의 힘이 필요한 것일세.”

충신과 강빈의 성씨인 진주 강씨와 금천 강씨는 본디 한 뿌리였다며, 이래서 상피제를 어기고 친척에게 일을 맡기면 안 된다고 가볍게 농담을 흘리는 강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원래부터 촉이 좋은 사람이었으니, 지금의 사태에서 무언가를 짚은 듯했다.

“제가 말입니까? 홍문관에서 그 일을 도울 수 있는 방도가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만…….”

“홍시와 건시는 본디 공납품으로 다루어지던 것, 호조의 업무가 아니겠는가. 호조에는 자네의 빙장도 있고.”

“호조에 올라온 장계에서 올해 감 농사 작황을 조사해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그런 간단한 일을 시키려고 자네를 불렀겠는가? 올해 농사를 특별나게 망쳤다는 이야기는 상단 쪽에서도 듣지 못했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이면에 숨은 것 같아서 자네에게 부탁하려는 것이야.”

“아, 설마…….”

“이번에 양호 지방에 대동법을 확대했다면서? 듣자 하니 이제 대동미로 필요한 공물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하던데, 감의 주산지도 상당수가 양호 지방에 있지 않은가. 혹여나 문제가 자네의 정책에까지 옮겨붙을까 그것이 걱정이네.”

촉이 좋은 강 여사님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감의 품귀현상은 감 농사의 결과와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방납업자들이 중간에 농간을 부렸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기존 방납업자인지, 재물 냄새를 맡은 다른 자들일지는 모르지. 아무튼 나도 상업으로 재물을 쥐어보니 그들의 사고방식이 눈에 밟히듯 선하지 않은가.”

“이문이 된다면 무엇이든 한다…… 납품가를 올려 받으려는 술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저 기우일지는 모르겠으나, 자네도 짐작은 하고 있지?”

대동미로 걷은 쌀로 기존처럼 공물 공급을 원활히 하지 못한다…… 그것은 대동법의 존재 의미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단순히 청과의 무역에 차질이 생기는 것뿐만 아니라 내 정치적 입지에 타격이 올지도 모르는 일.

“미리 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자빈마마. 충분히 조사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군요.”

“강 진사도 청에서 곧 돌아오는 것으로 알고 있네. 둘이 그 뒤를 캐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네.”

강빈의 비단옷자락이 나풀거리더니, 그녀의 소매에서 책 한 권이 튀어나왔다. 무언가 해서 살펴보았더니 또 김육의 책방에서 신간이 나온 모양이었다.

“또 제 이야기입니까? 전번에 저하를 통해 알려주신 덕분에 범인을 잡는 일에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만…….”

“아니, 안타깝네만 안 교리 이야기는 아니네. 왜, 그 책 덕분에 공인과 사이가 돈독해졌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그 기회를 놓쳐 아쉬운 것인가?”

“예에? 아닙니다, 마마. 안사람과는 그런 것 없이도 사이가 좋은지라…… 오히려 보는 눈이 너무 많아져 곤란할 지경입니다.”

“신혼답게 금슬이 좋은 모양이야? 언젠가 자네 부인도 창덕궁으로 불러올려 세간에 자자한 ‘열녀 김씨’의 미색을 감상해야 할 터인데.”

“아닙니다, 마마. 소인의 처는 조금 몸이 병약한지라…….”

“허어, 쉬는 날마다 함께 외출한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잘 들어 알고 있는데? 저하처럼 애처가인 것은 좋으나, 너무 부인을 숨기는 것도 밖에서 보면 좋지 않게 보이는 법이네.”

아니, 이 아줌마가? 세자는 갇혀있는 갑갑함을 캐치볼로 푼다더니, 강빈은 로맨스 소설을 탐독하며 푸는 모양이었다. 로맨스 스위치가 들어간 사모님을 어떻게 말리지?

세자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여덟이나 나왔다는 점에서 금슬이 좋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핑크빛 분위기를 나한테까지 묻히려 들 줄이야. 다른 의미로 입안이 말라오고 있었다.

세자는 그 와중에도 지부상소를 올리면서도 식은땀 하나 흘리지 않던 녀석이 이런 자리에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며 빙긋 웃고만 있다.

아니, 당신 마누라 좀 말려 봐요. 이 양반아.

“뭐, 당장 김 공인을 보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나온 신간도 읽어봤는데 글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마마의 궐 생활에 낙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호판에게 차기작을 빨리 내라 전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기다리는 기쁨이란 것도 있으니 굳이 닦달할 필요는 없네. 헌데, 이제는 이 책의 작자가 누군지 궁금하단 말이지. 글에 발랄함이 묻어있으면서도 감정선을 잘 살렸어.”

이번엔 오리지널 로맨스 소설인가. 강빈의 손에 천천히 넘어가는 책장에 적힌 글씨체가 낯익다. 범인을 확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특히 여기서 박 낭자가 읊은 시조가 아주 마음에 드네. 눈 내린 겨울밤 산하에 매화나무 한 그루 서 있는데, 가지 하나에 핀 매화 두 송이 서로 정다워라. 때를 놓쳐 물가에 노랗게 움튼 수선화는 홀로 설워하노라.”

“아이치고는 잘 쓴 시조군요. 가르친 스승이 좋았지 싶습니다.”

“아니, 안 교리는 이걸 읽고도 느껴지는 것이 없는가? 메마른 사람 같으니라고. 헌데, 아이라니? 자네는 이 글을 쓴 작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잘 알지요. 마마께서 보시길 원한다면 입궐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할까요?”

요안이 녀석이 본의 아니게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으니, 되갚아줘도 문제는 없겠지. 대궐에 들어서며 녀석이 쭈뼛거릴 모습을 떠올리니 열녀김씨전으로 받은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듯했다.

헌데, 그렇게 동궁에서 물러나오고 퇴궐한 후에야 내가 자살골을 넣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수발을 들어주는 하연에게 세자빈을 만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였다.

“당신 탓에 저도 입궐을 준비해야겠군요.”

“그게 무슨 소리요, 부인?”

“그 천방지축 요안이를 세자빈마마와 독대시킬 생각이십니까? 언니인 저라도 가야 어떻게 수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안 될 것 같으면 새언니라도 모셔가야겠습니다.”

“아…… 그대를 입궐시키지 않으려 한 행동이었는데,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헌데 새언니요? 아주머님은 왜?”

“새언니는 선대왕 전하의 외손녀이니 세자빈 마마와 인척이기도 하지요. 궐의 분위기도 저보단 익숙할 테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제서야 좌명이 매번 얼버무리던 부인의 정체가 선조의 서녀인 정숙옹주의 딸이란 사실을 명확하게 알았다. 어쩐지 좌명이 놈이 부인한테는 꼼짝을 못하더니.

하연의 말로는 어릴 때부터 교분이 있었고, 철들기 전부터 부인 쪽에서 좌명을 점찍어놨다나 뭐라나. 잘생긴 놈이니 여자가 침을 일찍 발라놓은 건가.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시지요. 당신도 만나자마자 제게 낙인을 찍은 것과 다름없는 짓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후후.”

“그대도 처음 보는 사내의 옷을 갈아입히려 했으면서, 남 말은 하지 맙시다. 하핫.”

***

며칠 후, 나는 한양으로 막 돌아온 충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틈만 나면 압록강을 넘어 청으로 나르는 인간이라 얼굴을 본 것도 꽤나 오랜만이었다.

“어으! 이 자식, 아랫도리 힘이 아주 넘치네, 넘쳐!”

“반대쪽 정강이에도 혹을 달기 싫으면 입을 다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사형.”

혼인을 올리던 날 내 발바닥을 후려패고 해외로 뜬 인간이, 돌아오자마자 밤일은 어떠냐며 느물거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김 갑사에게 배운 촛대 차기를 충신의 정강이에 박아넣고 말았다.

새된 비명이 오랜만에 방문한 충신의 기루, 비밀의 방을 울렸으나 뭐 어쩌겠는가. 자업자득이지.

근처에 들을 사람도 없으니 한 번 더 울리게 해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조인트를 맞은 정강이를 쓰다듬던 충신이 제정신을 차리고 본론으로 들어간 것은 잠시 후였다. 조금 더 짙게 그을린 그의 피부 사이에서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네 덕분에 청을 오가며 미칠 듯이 은자를 쓸어 담는 것은 좋은데, 내가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이거지?”

“일단은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사형을 찾아온 것입니다. 사형 생각은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행수에게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감의 수량이 엄청나게 줄었다는 보고를 듣긴 했다. 네 얘기대로 호남과 호서에서 공급되는 물량이 거의 없어졌어. 영남에서 받는 물량으로는 수요를 채우기엔 택도 없는 수준이다.”

“역시, 무언가 부자연스럽군요. 흉년이 경상도만 비껴갔을 리는 없을 것이고.”

“호남에서 올라오는 다른 공납품들에는 이상이 없다. 어느 놈이 장난질을 치는 게 분명하다.”

손아귀에서 우드득 소리를 내는 충신이었다.

그의 잔뜩 찡그린 얼굴에는 ‘감히 내 먹이를 건드려?’라고 적혀 있는 듯했다.

“청에 갖다 팔 물건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다. 왕실이야 그래도 곶감 정도는 비축한 것이 조금 남아 있을 거고. 한수야, 진짜 문제가 뭔지 아냐?”

“청보다, 왕실보다 큰 문제가 있습니까?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인마, 장사꾼에게 황제와 왕보다 중요한 것은 신용이다, 신용. 곶감 따위 사소한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걸 구해주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곶감이 필수품도 아닌데, 그렇게 상인의 자존심까지 거실 필요가 있습니까?”

구겨진 채로 허공을 바라보던 충신의 표정이 나를 향했다.

이 인간, 나를 한심하게 보고 있다, 분명.

“야, 너 유학을 공부한 선비 맞냐? 곶감이 필수품이 아니라고?”

“그야 곶감이 없다고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 옛날이야기처럼 산골에 사는 백성들이 곶감으로 호랑이를 쫓는 것도 아니고.”

“인마, 감이 없으면 양반이고 상민이고 번듯한 제사를 어떻게 올린단 말이냐? 이거 과거 공부만 백날 해서 그런가 맹탕이 다 되었네.”

아, 그걸 잊고 있었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제사상에 최소한으로 올릴 과일을 꼽으라면 곶감과 대추, 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과일 중 가장 보존하기 용이한 것들이니, 구색을 갖추려면 그만한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 그게 없으면 제사를 제대로 지낼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이제 알겠냐? 너랑 좌명이 놈만 갑과에 들었기에 기분이 조금 상했었는데, 이쪽 머리는 나를 못 따라오는 걸 보니 다시 기분이 좋아지는구만, 핫핫.”

“그럼 사형의 말대로라면 대추와 밤도 한양 바닥에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까?”

“물론이지. 내가 누구냐? 이미 그쪽으로 머리가 돌았으면 바로 확인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사람 아니냐. 내 말대로 웬 놈이 어딘가의 창고에 물량을 차곡차곡 쟁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말 그대로 물건이 없어 부르는 게 값이 된 상황인 모양이었다. 고작 누군가의 손아귀 하나에 나라 전체의 물동량이 쥐락펴락 당하고 있다니. 앞으로의 과제가 하나 추가된 기분이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사형?”

“어쩌긴, 저번에 동장의 김식 놈 조졌을 때처럼 말단부터 꼬리를 잡아나가야지.”

“역시 그 방법뿐입니까…….”

“동참할 마음이 있다면 너도 병을 핑계 대고 홍문관 일은 며칠 쉬는 게 어떠냐. 세자 저하의 지시 때문이라면 부제학 영감께서도 허락하시겠지.”

얼레? 여기서 홍문관 탈출 각이 선다고?

그러고보니 쉬는 날 빼고는 궐내각사를 벗어난 적이 가물가물하긴 했다. 그런 나에게 충신의 제안은 너무나도 달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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