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허생과 변 역관
“그러니까, 성균관이 갓 설립된 시절, 그분이 성균관에 희사했던 노비들의 후손이 반촌 사람들이다. 이 말인가?”
“예, 도련님, 그렇습죠. 그래서 그분의 후손들께서 성균관에 입관하시면 저희도 극진히 대접해드리고 있습니다요. 헌데 도련님은 너무 짧게 머무셨던 데다, 반촌에도 오가신 적이 없으니 저희가 알지 못했을 수밖에요.”
반촌의 이명(異名)이 안 씨 노비촌이라는 것은 여기서 처음 안 사실이었다. 한반도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대학자 안향이 성균관에 기증한 노비들이 반촌의 시초였다는 것이다.
한때는 안 씨 노비문서가 없으면 반촌에 거주할 수 없었을 정도로,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들의 정체성은 끈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변 서방의 말투도 보통의 한양 말투와는 조금 달랐다.
그 정도로 그들이 전 주인을 대하는 태도는 진심인 것 같았다. 문묘에 모셔져 있는 안향의 초상을 베낀 그림이 집집마다 있다던가. 그 초상과 내 얼굴이 왜인지 닮은 것 같았다며 너스레를 떠는 변 서방이었다.
“성균관에 계시면서 장원급제를 하셨으면 아마 그때는 반촌의 실한 암소 중에 남아나는 놈이 없었을 것입죠. 아아, 문묘에 계신 어르신께서도 기뻐하시겠습니다요.”
“허어, 나는 전혀 그런 사실을 몰랐네. 알았으면 나도 반촌에 한 번이라도 들렀을 것이야.”
“죽성군파 분들은 세가 적으니까요. 본관은 달라지셨지만 저희에게는 다 같은 어르신의 후손 분들입니다요. 참, 제사상에 올릴 제수라 하셨지요? 쇤네가 최상품으로다가 엄선해서 공급해드리겠습니다요!”
방금과는 딴판으로 달라진 태도에 적응이 잘 되지 않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금 내 앞에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변 서방은 아마 내가 팥으로 메주를 쒀 오라고 해도 가져올 기세였다.
“최상품이라…… 한양에 곶감이란 놈이 씨가 말랐는데 자네는 어떻게 그걸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도련님께만 특별히 구해드리는 것입니다요. 원래는 한동안 묵혔어야 하는 물건인데, 도련님 부탁이면 꺼내드려얍지요.”
“고맙네. 그럼 물건은 언제 받을 수 있겠는가?”
“그거야 당장 바로…… 아, 광 열쇠는 그놈이 가지고 있는데…… 아직 반촌에 있을 것이니, 찾아오겠습니다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말을 맺자마자 변 서방이 꽁지가 빠지게 뛰쳐나갔으나 그를 붙잡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게 연기라면 아마 연기대상감이 아닐까.
그 정도로 경계심이 허물어진 변 서방의 태도는 허물이 없었다.
“어이, 도련님! 크크큭, 도련님이라니, 너랑 제일 안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냐? 핫핫핫.”
“사형!”
“이럴 줄 알았으면 성균관 재학 시절에 성근 자네와 반촌 나들이를 자주 할 걸 그랬네. 그럼 공짜 쇠고기는 원 없이 먹었을 터인데.”
“공짜 밥은 대신 사형의 기루에서 실컷 먹지 않았나? 그쯤 하게, 일정. 나도 견디기 힘드니까.”
어느새 다가온 두 벗은 쪽마루에 털썩 주저앉더니 잔뜩 빈정거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한 제관만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도련님, 이 자입니다요. 쇤네와는 성씨만 같은 사람인데, 술자리에서 친해진 이후로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고 있습죠.”
“역관 변승업이라 합니다, 나리. 처음 뵙겠습니다.”
좌명은 제관을 돌려보내러 성균관으로 돌아가고, 충신과 둘이 남아 다소 시간을 보낸 후에야 몸통임이 짐작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변승업?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이름인데.
열심히 기억을 뒤져보았으나 그 이름에서 연상되는 것은 최고의 홈런타자 그분뿐, 딱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역관? 당신도 청에 오가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오?”
“아닙니다. 그것은 제 친구 장현이란 자이고, 소인은 왜어(倭語)를 익혔습니다.”
“호오, 일본어라…….”
“소인도 안 교리님의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런 분이 제사에 쓰실 물건을 못 구하고 계신다니요. 마침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제수로 간신히 쓸 만한 물건이 제 손에 들어왔는데,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은 갓을 기울여 인사를 건네는 변승업이었다. 그러나 그 갓의 말총올 사이로 의뭉스러운 눈빛이 스쳐 지나간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 기억났다.
남원에서 내게 뇌물을 건네던 그 형방 놈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강직한 선비랍시고 그의 뇌물을 거절한다면 통발에 다 들어온 물고기는 그 자리에서 물살을 박차고 도망칠 것이다.
“흠. 그렇소? 내 그럼 고맙게 받겠소, 다만, 물건이 어떤지 확인은 해봐야겠소. 아무래도 제사에 쓸 것이니만큼 아무 물건이나 올릴 수는 없지 않겠소.”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럼 소인이 저장고로 가 물건을 가져오겠…….”
“아니오,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겠소. 아무리 잘 말린 물건이라 해도 정결한 곳에서 보관되었는지까지 확인해야 제물을 올릴 조상님께 낯이 서겠지. 앞장서시겠소?”
변승업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하더니, 의외로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했다.
어차피 내게 뇌물을 바치고 관계를 트려 하는데, 고작 곶감저장고 하나를 보여준다고 무슨 상관이겠냐는 생각이겠지.
홍문관 교리가 이런 사소한 걸 잡으러 다닐 짬도 아니고.
그렇게 변승업의 뒤를 따라가 도달한 장소는 반촌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집 한 채였다. 툇마루에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것이 사람이 거주하는 집은 아니지 싶었다.
“이런 곳에 제대로 된 곶감이 있단 말이오? 내 변 역관을 잘못 본 것인가?”
“아닙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저 광 안에 토굴을 파 놨는데, 적당히 서늘하고 마른 공기가 곶감을 보존하는 데 아주 그만입니다.”
역관이 허리춤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더니 광을 걸어 잠근 자물쇠를 풀었다. 먼지 가득한 마루와는 달리 윤기가 흐르는 자물쇠는 사람의 손을 자주 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광의 문이 열리자 시꺼먼 토굴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변승업의 몸이 토굴 아래로 사라졌다.
“여기까지 곶감 마른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저 토굴에는 곶감이 적어도 수십 석은 쌓여 있을 거다. 제대로 꼬랑지를 잡았다.”
“사형은 무슨 개코라도 가졌습니까?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데요. 아무튼 몸통이 완전히 나올 때까지는 좀 참으십시오.”
“알고 있다. 빗자루로 쓸어낸 흔적이 있으나 광 앞에 짐꾼들이 남긴 게 분명한 발자국이 잔뜩 나 있지 않느냐. 하루 이틀, 한두 사람이 드나든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충신이 쏘아대는 매의 눈빛은 이 암상인들이 지운 흔적까지 읽어내고 있었다. 이 인간이 지금 조선에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나 혼자였다면 절대 이곳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변승업이 다시 지상으로 몸을 드러내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나와 충신 사이에는 낮은 목소리로 수많은 대화가 오갔다. 이제는 저 역관에게서 무슨 정보를 더 캐내야할지 명확해져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물건을 확인하시지요.”
“과육도 통통하고, 단맛을 상징하는 백분도 잔뜩 묻은 데다 색과 향기도 영롱하니 최상품이 분명하구만. 어떻게 이런 좋은 물건을 구한 겐가? 한양 바닥에는 하급품도 씨가 말랐는데.”
“감으로 유명한 정읍에서 난 물건입니다. 제가 조금 힘을 쓰면 이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호오, 그런가? 한양에 앉아 이런 귀물을 구할 수 있다니, 자네 능력이 대단하구만.”
“동업자가 안성에 내려가 있어 구할 수 있었던 물건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리?”
답은 명백해졌다. 정읍에서 만든 최상품 곶감이 여기 있다?
충청, 전라에서 증발했던 물량이 죄다 여기 숨어있었던 모양이다. 여기 이 변승업이라는 역관과 한패인 놈들이 보존 가능한 과일들을 매점매석하고 있다.
헌데 곶감이 꿰인 꿰미를 건네는 변승업의 표정이 묘하다. 아무래도 이자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는 뇌물을 은밀하게 건네기 위함만은 아닌 듯했다.
“자네, 따로 할 말이 더 있는 모양이구만.”
“예, 나리. 송구하지만 제안 하나를 더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공손히, 그리고 깊게 고개를 숙인 변승업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뒤에서 그를 노려보는 충신의 눈빛이 따갑게 느껴졌다.
“소인은 단순히 역관 일에만 종사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비의 부(富)를 거름삼고 익힌 왜어를 수단삼아 왜인들과 거래를 트고 있습니다.”
“호오…….”
“헌데 최근 왜상 중 천도(川島)라는 자가 말하길, 청의 물건을 구해다 주면 몇 배의 이문을 붙여주겠다 했습니다. 하지만 소인은 청의 상품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나리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르곤에게서 받아온 독점무역허가증 때문에, 충신의 상단이 국경에서 열리는 청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변승업은 본인이 청의 물품을 구하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충신은 한 술 더 떠 심양관을 대사관 겸 상관으로 활용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것까지 변승업이 알 리는 없고. 어쨌건 그 덕분에 충신이 조선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다리를 놔 달라?”
“청의 섭정왕과 긴밀한 관계시라 들었습니다. 지금 특혜를 받고 있는 상단도 심양에서 나리께서 고생하시던 시절의 인연 덕분에 행운을 쥐었다고 하고요.”
“행운이 아닐세. 그들은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이지.”
“저도 나리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 잘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기회를 한 번만 주십시오, 나리.”
충신의 이맛살이 구겨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변 서방에게 내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짧은 시간 동안 계산을 여기까지 굴렸단 말이지.
돈 냄새를 맡는 것도 그렇고, 일본과의 무역 파이프를 쥐고 있는 것도 그렇고 능력은 분명 있는 자였다. 허나 이렇게 매점매석으로 내 정치적 입지를 갉아먹는 자가 왜 내 밑으로 들어오려 하는 것인지, 그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방금 변승업이 언급한 동업자란 단어가 뇌리를 스친 것은.
“흠…… 조금 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자네의 말에 거짓이 없다면 변승업이라는 사람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싶네.”
“감사, 감사합니다! 나리! 그렇다면 소인도…….”
“아니, 그 전에 자네에 대해서 더 알아야겠네. 자네가 나와 일을 하고 싶다면 내게 숨기는 일이 없어야 옳지 않겠는가.”
“숨기다니요? 아, 혹시 아까 언급한 동업자에 대해서 궁금하신 것입니까?”
아마 변승업은 지금 속으로 ‘이건 기회야. 안 교리님께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거야.’를 연신 되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냥감이 독점무역권이라는 먹이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을 때, 우려낼 수 있는 것은 전부 우려내는 게 맞겠지.
“사실 그를 만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소인의 사가(私家)에서였죠. 묵적골에서 온 뜨내기가 돈을 빌려달라기에 처음엔 웬 미친놈이 왔나 싶었습니다…….”
웬 낡은 선비의 차림새를 하고는 초면부터 장사를 하게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나타났기에, 술 한 잔 먹이고 쫓아내려 했다고 담담하게 썰을 푸는 변승업이었다.
그러나 술이 들어간 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온갖 솔깃한 제안으로 변승업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모양이었다. 그 제안 중 하나가 곶감, 밤, 대추의 매점매석이었고.
“……그 이야기만 했으면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헌데 그 친구는 묘한 확신에 차서는, 높은 관직에 있는 친척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며 그대로만 하면 분명 큰 이문이 남는 일이 될 것이라더군요.”
아마 친척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는 대동법 확대에 관한 이야기겠지. 머리는 좀 돌아가는 놈임이 분명했으나, 결국 독점을 통해 국고를 축내겠다는 심보였다.
“그걸 그대로 믿었단 말인가?”
“믿을 수밖에요. 그 친구의 신분을 들으니 적어도 친척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지 싶었습니다.”
“신분이 어떻기에?”
“대갓집의 서자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허씨 가문의 서자이니 자신을 허생이라고 부르라 하더군요.”
허생!
그제서야 변승업의 이름에서 느꼈던 묘한 친밀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허생전에 나오는 변 부자는 실존 인물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더니, 이런 것이었나?
신나게 썰을 푸는 변승업의 이야기를 머리 한 구석에 정리하면서도, 내 신경은 온통 허생이라 불리는 그 사내에게 쏠려있었다. 그가 뻗은 매점매석이라는 칼날에서, 왠지 모르게 나를 향하고 있는 적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 작가의 말
<허생전>의 등장인물, 허생에게 은 만 냥을 쉽게 꾸어주었던 변 부자는 실제 모델이 존재합니다. 작가인 연암 박지원이 <옥갑야화>의 서문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변승업 본인 혹은 조부나 부친에서 모티프를 따 왔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허생도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이 있고, 동시기에 존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창작된 파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시기 공물을 매점매석하는 폐단에 대해 사간원에서 상소한 내역이 있더군요.
작중에 등장하는 감 산지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