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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14화 (114/298)

114화. 검거 완료

“이거, 오늘 자리는 길어질 것 같군요. 집에 일찍 돌아가지 못한다고 기별을 넣어야겠습니다.”

“그런가? 나는 이 자리를 길게 끌 생각이 없네만.”

허생이 애써 여유를 부리는 것 같기에, 칼같이 끊어냈다. 웃음을 가장한 그의 눈가에 주름이 하나 늘어난 것이 보였다.

오늘 자리는 놈에게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끌어내야 하는 자리다.

놈을 안달 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십니까?”

“어차피 정해진 결론은 하나지 않은가. 자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판을 엎고 나를 적으로 돌리거나.”

“그 중간의 어딘가에서 합의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으신 모양이군요, 나리.”

“착각하지 말게. 내 제안이 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합의란 없네. 자네와 나는 같은 위치가 아니라는 걸 자각하길 바라네.”

허생의 입꼬리에 올라앉은 미소는 더욱 짙어졌지만, 그의 가면에 희미한 금이 그어진 것을 나는 분명 보았다.

“조금 기분이 이상해지려 하는군요. 나리께서 제게 무작정 이러실 처지는 분명 아니실 텐데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제수를 매점매석한 목적이 단순히 이문을 취하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나 보지? 불쾌해야 할 사람을 착각하지 않았는가?”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어찌 일개 서자 한 명이 장사에 다른 마음을 품겠습니까? 이 자리에 나온 것 또한 이문을 늘려 받으려는 속셈에서 비롯된 행동이지요.”

가볍게 손부채질을 하며 태연을 가장하는 허생이었다.

놈의 시커먼 뱃속에는 이것 외에도 구렁이가 몇 마리나 들어앉아 있을 것인가.

“혓바닥 하나는 청산유수군. 하필 매점매석을 해도 대동법이 시행될 양호 지방을 노린다? 내 약점을 대놓고 찌른 자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는데, 그걸 믿어줄 정도로 나는 쉬운 사람이 아니네.”

“……그렇습니까?”

“본 목적이 있으면 빨리 털어놓는 게 좋을 것일세. 나는 자네와 다르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거든. 내일도 나랏일을 해야 하는 몸이라.”

앞에 앉은 자에게서 조그만 반응이 있었다. 관직에 출사하지 못하는 서자라 이쪽에 콤플렉스가 있는 건가?

생각을 가다듬었다. 결국 오늘 이 자리에서 적어도 허생이란 자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야 할 것이다. 아직 과도기 상태인 대동법의 약점을 찌른 행동이 정말로 돈을 노려서인지, 아니면 나를 노려서인지 말이지.

“하하, 역시 나리는 승업의 말대로 보통 분은 아니시군요.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상납금입니까? 아니면 제 조직입니까?”

“어찌 선비 된 자가 삿된 재물을 탐하겠나? 내가 알기로는 자네도 글줄깨나 읽은 자일 텐데,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닐 테고.”

“요새 세상에 선비란 사람들이 선비답지 않다보니, 나리가 원하시는 것을 제가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아차, 실례.”

허생은 소매에서 능숙하게 곰방대를 꺼내 물더니 촛불을 기울여 불을 붙였다. 느긋하게 속담배를 즐기면서 코로 연기를 뿜는 것을 보니 한두 번 피워 본 솜씨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족치고 싶은 모습이었으나, 흡연예절이라는 게 없던 시절이니 일단은 두고 보는 것이 맞겠지. 나 대신 담배 일로 허생에게 뭐라 따져 물은 변승업도 끽연에 웬 예절을 따지냐는 이야기를 듣고 찌그러지고 말았다.

“담파(湛巴)라는 물건입니다. 나리께선 아십니까?”

“잘 알지. 아마 자네보다 더 많이. 그리고 그게 은자로 쉽게 바꿀 수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도 역시.”

“역시 대동법을 추진하시는 분답게 이쪽 사정에 밝으시군요. 나리도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사양하겠네. 입에서 냄새를 풍기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그리고 그걸 그렇게 자주 피우다 보면 언젠가는 가슴병을 앓게 될 것이네.”

후. 허생은 이마까지 찌푸려가며 곰방대를 맛있게 빨고는, 연기를 뿜어 고리 모양까지 만들고 나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조사한 그대로군요. 의술에도 밝다 하시던데…….”

“내 뒷조사도 한 모양이지? 고작해야 홍문관 교리에 오른 사람을 조사해서 어디에 쓰려고.”

“후후. 소생은 용의주도한 성격이어서 말입니다. 오늘 자리에 나올 분이 어떤 분인지는 알아야겠지요. 마침 나리에 대해서 말해줄 높으신 분들을 몇 분 정도 알기도 하고요.”

“잡설이 길구만. 용건부터 말하게.”

높으신 분들의 존재를 대놓고 들이미는 허생의 실눈에는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담뱃불을 눌러 끄더니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앞으로 소생과 나리가 엮이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이번에 제가 사들인 물건 정도는 친애의 의미로 넘겨드리겠습니다.”

“마치 자네의 것을 내게 베푸는 것처럼 들리는데?”

“소생이 경국대전에 실린 법령을 어긴 것은 아니잖습니까? 고작해야 과일 찌꺼기로 얻을 푼돈 정도는 포기해드리지요.”

이 시대에 독과점 방지법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놈을 놔두었다가는 제2, 제3의 곶감이 조선 땅을 어지럽힐 것이다.

“그럴 순 없네. 자네가 이번 일 같은 사건을 또다시 저지른다면, 나와 다시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이네. 자네 태도를 보니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당연한 이야기지요. 조선이란 나라는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지 못해서, 온갖 물화(物貨)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소생이 과일 몇 가지를 슬그머니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내 귀엔 마치 자네가 자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자네가 하는 일이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만든다는 사실을.”

훗. 허생이 웃었다. 처음으로 놈의 표정이 달라진 순간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지요?”

“뭐야?”

“그래서 소생이 양호의 곶감을 매점매석할 때, 이 나라는 무엇을 했습니까? 저를 찾은 사람이 나리 외에 또 있었습니까?”

“…….”

“본디 구분이 없어야 할 사농공상에 차별을 두고, 넘치는 곳에서 모자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은 이 나라가 소생을 탓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십니까?”

지금 조선의 상황이 막장이었다는 사실은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점차 고쳐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정치판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내가 미래에서 오지 않았다면 이자의 논리에 휘둘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이놈의 혀는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궤변에 불과하다. 네가 없어도 그 정도의 물량은 늘 한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너는 그 사이에서 부정한 이문을 남기려 한 악덕 상인일뿐이다.”

“악덕 상인이라…… 이 나라는 늘 상(商)을 이렇게 취급해왔지요. 중간에서 남을 등쳐먹고,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일이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네놈이 부풀려놓은 곶감 값이 결국 백성들의 대동미 부담을 가중시키게 될 것이다. 그걸 알고도 부정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고작 은 몇 만 냥으로 나라 전체의 가격이 좌지우지되도록 방치하지 마셨어야지요? 선한 백성이던 소생의 아우들이 집도 땅도 없이 떠돌다 도적질을 하지 않게 만드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놈이 이끌고 다니던 검계의 출처는 유랑하던 농민들이었나.

먹고 살기 쉬운 나라를 만들든가! 라고 외치는 듯한 놈의 낯짝 탓에 속이 콱 막혀왔다.

놈도 속이 막혔는지, 허생은 상에 놓인 술병에 손을 뻗어 그대로 들이켰다. 숨도 쉬지 않은 채 독주 한 병이 그의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크흐. 혹여나 소생을 막을 수 있다 착각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나리께서 잡으려 드신다면 잠시 빈 섬으로 몸을 피해 있으면 그만이고요. 나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에게까지 제 영향력은 뻗어 있으니까요.”

“뇌물이라도 바친 모양이지? 그래서, 이 짓거리를 계속 하시겠다? 내가 이 자리에서 무력으로 자네를 제압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나?”

“설마요. 호랑이 소굴에 들어오면서 그 정도 준비도 하지 않을 정도로, 소생을 모자란 인간으로 보시는 겁니까?”

허생이 품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호루라기였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뽑아든 곰방대는 어느새 가느다란 날을 빛내는 단도로 변해있었다.

놈의 수행원도 소매를 걷어 올리고 칼자국이 난 팔뚝을 드러낸 채 이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완전한 겁박이었다.

‘결국 본성을 드러냈군.’

마음이 굳어졌다. 결국 놈이 선택한 길은 제 뒷배와 무리를 근거삼아 나를 협박하는 것이었다. 고작해야 정오품 관리 정도면 제 혀와 힘으로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생각했나?

오만한 자식 같으니.

혹시나 허생이 변승업 같은 자였다면 내 밑에 거두어 중하게 쓰려 했거늘. 이젠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내 표정이 딱딱해지는 걸 보았는지, 놈의 혀는 더 요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기를 압수당한 채 들어온 아우들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지금쯤 이 기루를 포위하고 있겠군요. 소생이 이걸 불기만 하면…… 어떻게 될지 아시겠지요?”

“이놈이……?”

“지켜야 하는 것이 있으시니, 함부로 행동하시긴 어려우시지 않겠습니까.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의 발악은 무서운 법이니까요.”

“호오, 이렇게 나오시겠다?”

“저를 이 자리에서 놓아 보내셔야 할 겁니다. 더 이상 저를 적대하셨다가는 안방에서 나리를 기다리고 계실 아씨께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선 넘네, 이 개새끼가?

조금만 더 두고 보려 했는데,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촥.

손에 쥐고 있던 잔의 내용물을 흩뿌렸다. 신호였다.

“지랄하지 마라. 이 혓바닥만 긴 새끼야!”

“으억!”

술잔에서 날아간 독한 술이 놈의 작은 눈 사이에 명중했다. 뒤이어 내 손을 떠난 묵직한 백자 술잔이 놈의 인중을 그대로 박살내 놓았다.

“사형!”

말을 건넬 필요도 없었다. 충신이 주안상을 뛰어넘어 얼이 빠져 있던 짝귀 수행원을 걷어차자마자 내 팔뚝에도 힘이 불끈 들어갔다.

내 앞에서 하연을 언급하고 칼까지 빼들었으면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지.

상다리가 부러져라 쌓여 있던 안주와 술병들이 공중을 수놓았다.

“이게 무슨…… 헉?”

놈의 눈이 그렇게 휘둥그레진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힘껏 치켜든 술상이 놈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퍽!

술상의 모서리가 혼이 나가 있던 허생의 아래턱에 그대로 들이박혔다.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툭. 툭. 허생의 손에서 벗어난 단도와 호루라기가 맥없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칼을 뽑아?”

뜻밖의 기습이었는지 놈은 반항조차 못하고 맞기만 했다. 아무리 허당이라도 칼 든 자에게 맨주먹으로 맞설 필요는 없지. 방어와 공격이 동시에 되는 이런 넓은 술상이면 단도를 든 양아치 정도는 제압하고도 남는다.

“백성들에게 물러터지기 일쑤인 녀석이니 그 세 치 혀로 동정을 사는 게 나았을 텐데, 이놈도 제 힘을 과신하는 놈이로구나. 안 그러냐, 한수야?”

“동정한 적 없습니다. 사형. 거기 수행원 놈이나 잘 다스리시지요.”

“이…… 이 고작해야 풋내기 샌님 놈이! 으헉!”

술상을 허생의 몸에 몇 번이나 내려쳤을까. 늘어진 놈의 팔을 꺾으며 몸수색을 하고 있자니, 충신은 어느새 상대를 곤죽을 만들어 놓고 농담이나 지껄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몸 쓰는 것은 일품인 형님이었다.

“윽……. 나, 나를 이렇게 만들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내 아우들이 네놈을…… 컥!”

“너는 나를 너무 얕보았다. 시중에 나도는 소설 몇 권만 읽었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었을 텐데.”

“그깟 허구의 이야기를 누가! 끄악!”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글만 읽은 샌님이 아니거든. 누구에게 정보를 들은 것인지는 몰라도, 놈들은 나를 꽤 저평가하는 모양이군.”

놈의 어깨관절에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새된 비명이 방안을 울렸다. 김 갑사가 제대로 가르친 모양이군.

그와 동시에 방밖에서도 사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였다.

“하…… 하핫…… 내 아우들이 이상을 감지한 모양이구나! 어디 상단의 주먹패들로 감당이 되겠느냐! 네놈도 곧 내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게 될 것이다! 으헉!”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네 검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예들을 손에 쥐고 있거든. 백성들 등쳐먹는 칼잡이들이랑은 격이 다른 숙련병들이다.”

“뭐, 뭐야?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내가 이야기했잖냐. 그 소설들은 허구가 아니라고. 내 호포수들의 실력은 거기 적혀있지 않지만 말이지.”

허생이 검계 무리를 이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경기 일대에서 활약하던 호포대 일부를 소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냥꾼으로 위장한 수십 명의 병사가 나뭇짐 사이에 총을 숨긴 채 한양 성문을 통과했다.

무장한 사병을 도성에 들였다는 것을 들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총을 발사할 수는 없었지만, 전쟁을 경험한 최정예 호포대를 고작해야 칼 든 양아치들 따위가 당해낼 수는 없겠지.

바깥에서 김 갑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그가 제일 앞에서 신나게 검계들을 때려잡고 있을 것이다. 돌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나는 걸 보니 돌팔매질이라도 곁들인 건가.

“처음에는 나를 슬슬 띄우는 것 같더니, 점점 건방지게 나올 때 알아챘다. 네놈이 나를 보통 얕본 게 아니라는 것을. 다른 당하관 중에는 네놈 손에 놀아난 자가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거든.”

“으으…… 이 애송이 놈이……! 여기서 일이 끝날 줄 생각하면 오산이다!”

“알아, 알아. 자네 끈이 조정 어딘가에 닿아 있다는 것도. 자네가 번 돈 중 일부를 누구에게 상납했는지도 대충은 윤곽이 잡히는구나.”

곶감 수사를 나섰던 첫날, 충신에게 쫓겨 안성까지 내려갔던 행수가 현지에서 물어온 정보가 있었다. 그것을 토대로 알아낸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거 아나? 자네가 아는 것보다 나는 품계에 비해 꽤 큰 힘을 쥐고 있거든. 자네의 뒷배가 누구든지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뭣이? 고작 정오품관 주제에!”

“대과는커녕 소과 초시도 응시 못한 서자 놈이 말이 많구만? 내가 유생시절부터 간신놈들을 박살내고 다녔다는 사실은 알려나? 그러기에 책 좀 많이 읽으라니까.”

허생의 협박이 하나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알아낸 놈의 뒷배는 분명 일개 벼슬아치 수준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마음이 편안한 것을 보면, 나도 그동안 꽤 성장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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