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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16화 (116/298)

116화. 여장부

“빈궁, 그게 무슨 말이오?”

“저하께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지금 한양에서 제일 인기 있는 이야기는 전부 한 사람이 썼답니다. 소첩은 그 아이의 재능이 탐나 이 자리에 끼어든 것이고요.”

“재능이 탐나? 당신이 그 아이를 어찌하려 그러는 것이오? 동궁에 넣고 궁녀로 삼기라도 하려고?”

뜬금없이 입찰을 선언한 강빈이었다. 입찰 대상이 내가 아는 그 녀석이 맞나? 이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세자빈에게 쏠렸다.

“마마, 황공하오나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소인은 이해가 잘 가지 않나이다. 혹시 박 초관의 여식 이야기가 맞는지…….”

“맞네. 김 박사는 모를 만도 하지. 모든 일은 그 아이가 입궐한 오늘 결정되었으니까.”

“이제 이팔(二八)이 갓 지난 아이옵니다. 글 짓는 재주가 남들보다 뛰어나긴 하나 그것이 마마께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이다. 혹여나 마음에 드시는 글을 빨리 읽고 싶으신 것이라면…….”

“그런 사소한 일로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겠는가. 당분간 호판의 세책점 일을 끊지는 않을 것이네. 미리 준비를 하라는 것이지.”

좌명과 대화를 마치자마자 싸늘함이 풍기는 강빈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거기 실려 전해지는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왜지.

“스승이 좋아서인지 예절이 조금 부족한 것을 빼면 기본 소양은 잘 갖추고 있더군. 안 교리 자네에게도 감사를 표함세. 여러 가지로 말일세.”

“여러 가지라니요. 요안이가 마마께 실례라도 저질렀습니까?”

“실례는 오히려 내 쪽에서 저질렀지. 동반해 입궐한 자네 처에게도 조금 미안할 일이 있었네.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 두게.”

“그 무슨…….”

“총명하고, 친화력도 있고, 눈치도 빠른 아이더군. 거기에 외모도 뛰어나니 내 곁에 두고 쓰려 하네.”

그럼 정말로 녀석을 동궁전의 궁녀로 들이겠단 말인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박연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궁에서 평생 승은만을 기다리며 짝 없이 늙는 것은 요안이 본인에게도 절대 행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마. 다시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째서? 딱히 자네의 피붙이도 아니지 않은가? 본인이 수락한 이야기네. 자네가 이럴 이유라도 있나?”

“그것은…… 박 초관과의 친분도 있고…… 그가 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연뿐만 아니라 나 역시 녀석을 제자 이상으로, 여동생처럼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동안 녀석과 겪어온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소중한 아이를, 좋은 곳에 시집보내지 못할망정 무슨 죄를 지었다고 궁녀로 들여보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상하구만. 나는 자네가 이 일에 반대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녀자가 궁녀가 되어 입궁하는 일의 의미를 세자빈마마께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친분이 있는 아이가 그런 처지에 처하는 것을 누가 찬성하겠습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었네. 그리고…… 아닐세. 게다가 아직 완전히 궁녀로 들이려는 생각은 없네.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사가에서 궐에 다니게 하면서 본인이 결정하게 할 생각이었지.”

“그렇다 하여도 남들의 시선에서는 별다를 것이 없는 일입니다. 그 아이의 혼삿길이라도 막히면 저는 박 초관을 볼 낯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하아. 가벼운 한숨을 내쉰 강빈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희미하게 핏줄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자네는…… 참으로 고약한 사람일세. 내 더는 언급할 수 없지만 참으로 고약한 사람이야.”

“그 무슨…….”

“아녀자 사이의 일일세. 남정네들이 간섭할 영역이 아니지. 결국 본인이 내린 선택이니 존중해 주게.”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린 강빈이 내게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옆에 앉은 세자에게 계획을 설명하는 내내 그녀의 등은 나를 향해 찬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를 여사(女史)로 쓰면서 심복으로 키우겠다?”

“언젠가 저하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내명부를 개혁할 생각입니다. 늙어서 출궁한 궁녀들의 생계에 관해서도 손댈 것이 많고요. 특히 곧 남아 돌게 될 궁녀들을 제 대신 관리해줄 총명한 수족이 필요합니다.”

심양에 동행한 교양있는 여자는 거의 없었기에, 강빈은 볼모 생활동안 세자처럼 심복을 키워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요안이 녀석을 점찍은 건가.

여사(女史). 중국에서 왕비나 후궁을 섬기며 기록과 문서를 맡아보던 여인 사관(史官)을 말한다. 조선에서도 몇 번 언급된 적은 있으나 그 제도가 도입되었던 적은 없을 터였다.

강빈이 그래서 녀석의 글솜씨를 탐낸 것인가. 하지만 뒤이어 세자에게 설명하는 것까지 들으니, 그녀의 계획은 거기서 끝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궁녀는 왜? 아, 하긴 보위에 오르고도 후궁을 들일 생각은 딱히 없으니 그럴 수 있겠군.”

“어찌 보면 심양에서 하던 일의 연장입니다, 저하. 저기 있는 강 진사가 도와줄 것이고요. 여인네도 일선 장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빈은 은퇴한 궁녀들의 복지 차원으로 한양에 점포를 열고, 추후에는 남아돌게 될 궁녀 인력을 활용해 사업을 확대시킬 생각인 모양이었다.

내탕금도 불리고, 물가도 안정시키고, 세자가 보위에 오른 후 추진할 중상주의 정책도 거들 수 있는 계획이건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을 들어보니 그녀가 왕비의 자리에서 마음대로 운신하지 못하는 동안 그 일을 대리시킬 사람이 요안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요한 일을 스물도 안 되는 어린아이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마마, 재고해주십시오.”

“안 교리가 그런 말을 할 처지인가? 자네가 부제학의 어사 마패를 대신 들었던 나이와 별 차이가 나지 않을 텐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네. 머리가 깨어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으윽…… 하지만 마마…….”

“지금 자네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것처럼, 나 역시 미래를 준비해야하지 않겠는가?”

강빈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차마 반박할 거리가 없다는 사실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와 어울리지 않게 그녀에게 반기를 드는 이유는, 내가 요안이에게 큰 부채감을 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오라비의 심정인지 선생의 심정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건 녀석은 행복해야 했다.

“자네도 여기까지 들었으면 그 명민한 머리로 누구보다 빨리 깨달았을 텐데? 장원급제자의 머리로도 다른 적임자가 조선 땅에 거의 없을 것이란 사실을 파악할 수 없는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바깥 경험이 없는 궁녀들에게 바깥 이야기를 누구보다 생생하게 전해줄 수 있으며, 글과 글씨 또한 가르칠 수 있고, 짧지만 세책점 일로 장사 경험도 있네. 그 아이의 가르침을 받으면 궁녀 중에 소설을 쓰는 아이가 나올 수도 있겠지.”

“…….”

“그래! 그 아이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궁녀 중에 재능 있는 자를 책비로 훈련시켜도 되겠구만. 여염의 안방과 중궁전이 직통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야.”

아마 책비가 늘어나면 좌명의 신문 사업에도 정보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덧붙이는 강빈이었다. 이미 그녀의 포석은 방금 처음 들은 사업에까지 뻗쳐 있었다.

머리가 빨리 돌고 사업 감각이 좋은 여사님이란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멀리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관료로서의 나는 강빈의 말에 한마디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녀석이 그런 일을 하면서 행복해할 수 있을까. 적어도 본인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강빈의 말에 차마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았다.

“마마의 말이 이치에 틀리지 않다는 것은 알겠사옵니다. 허나 그 아이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십시오.”

“기회라니, 무슨 기회를 주란 말인가?”

“아직 너무도 어린아이입니다. 마마를 처음 뵙는 자리에서 이성이 흐트러졌을 수도 있는 일이고, 아직 본인이 하게 될 일을 잘 모르고 마마께 확답을 드렸을 수도 있으니, 소인이 스승된 입장으로서 한 번 확인할 기회를 주십시오.”

내게 꽂혀있던 강빈의 시선이 한 겹 더 차가워진 것은 기분 탓일까. 도대체 이 여사님이 왜 내게 이렇게 적의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이를 어린애 취급하는 일은 그쯤 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뭐, 자네가 끼어든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을 테니, 허락하겠네. 마음대로 해보게.”

“감사합니다, 마마.”

“그 아이를 그토록 아끼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더 아껴줬어야지. 못난 사내 같으니라고.”

강빈의 뜻 모를 말이 뒤따르며, 이날 모인 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좌명과 충신 역시 강빈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

다음 날, 운종가에 위치한 세책점을 찾아갔다. 성근학당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 위치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내 발걸음 자꾸만 잘못된 골목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젯밤 퇴궐 후 하연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요안이 녀석과 입궐한 일에 관한 대화였다. 처음에는 소설 이야기가 진짜냐고 웃으며 묻던 강빈이, 요안이의 과거 이야기까지 주르륵 듣더니 갑작스레 제안을 날렸다고 했다.

‘처음에는 마마의 제안에 요안이도 얌전히 거절의 뜻을 전했습니다. 자신은 글이나 쓰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 하더군요. 참으로 그 아이다운 대답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부인? 그런데 세자빈마마께서는 왜 그렇게 자신에 차 계셨을까요?’

‘헌데, 마마께옵서 잠시 둘만 있게 해 달라 하신 후에 갑자기 그 아이의 태도가 바뀌었거든요.’

‘대체 왜……? 그대는 왜 갑자기 요안이의 태도가 변했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저도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마를 다시 뵈러 들어갔을 때 요안이 눈이 조금 젖어 있더니, 동궁전에서 물러 나오고 나서는 눈물을 금하지 못할 정도로 펑펑 울며 걷더군요.’

언니인 자신에게도 강빈과 있었던 일을 털어놓지 않는다며,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는 하연이었다. 요안이가 어떤 일을 숨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했다.

언니처럼 여기는 하연에게도 밝히지 않은 이야기를 녀석이 내게 말해줄까.

걸음이 자꾸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세책점 안은 책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점원에게 내 이름을 대고 찾는 사람의 위치를 묻자, 그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뒷문을 가리켰다. 책을 작업하는 공간이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너, 또 왔구나? 학당 빼먹으면 오라버니한테 종아리 맞는다고 하지 않았니?”

“너가 아니라 선생이에요, 배 선(船), 날 생(生). 내가 저번에 이름 알려줬잖아요.”

“그랬던가? 저번에 나도 말하지 않았니? 내가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으니 아명(兒名) 말고 제대로 된 이름을 쓰게 되면 불러준다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에 실린 말투는 그와 다르게 낯설었다.

요안이 녀석, 내 앞에서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굴더니, 평소에는 이런 말투를 쓰고 있었나.

흘러간 세월을 갑자기 실감했다.

“무시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소학도 다 뗐고, 내 나이에 장가간 사람도 있는데 아이처럼 대하지 말란 말예요!”

“소학은 누나도 예엣날에 다 뗐는걸? 누나랑 소학 내용으로 대결해보련?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귀엽기는.”

“아, 귀엽다 하지 말라고요! 나도 사내라니까요?”

“그래, 그래. 누나한테 장가오고 싶으면 적어도…….”

아는 아이와 농담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아이를 얼러대는 말투는 달라졌지만 속내는 그대로인 요안이란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긴 숨이 새어 나왔다.

헌데, 갑자기 내 발걸음이 멈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왜.

“……적어도 후대에 이름이 길이 남을 사내 정도는 되어야 한단다. 다음 세상에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크고 또 큰 사람 말야.”

“에이, 그게 뭐예요. 또 지난번이랑 똑같은 말 하네. 나도 커서 그런 사람 될 수 있다니깐요?”

“너는 한참, 하아아아안참 멀었어. 가서 밥이나 천 그릇은 먹은 다음에 오렴.”

“우씨, 무시하지 말라니까요! 지금은 홀어머니 밑에서 크지만, 우리 아버지는 병자년 난에도 뜻을 꺾지 않으시고 순국하신 훌륭한 분이라고요! 나도 아버지처럼 큰 사람이 될 거예요!”

“그래, 그래.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녀석의 발랄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착 가라앉아 있었다. 몇 걸음만 더 나가면 녀석에게 인사할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왠지 모르게 요안이 녀석 앞에 나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녀석과 사내아이가 투닥거리는 것을 자리에 멈춰서 잠시 듣고만 있었다. 귀로는 우리 종조부가 이조판서네 하는 이야기가 흘러들어왔으나 왜인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아이가 자리를 떠나고, 녀석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잠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 선생님? 여기는 웬일이세요?”

“…….”

“아, 혹시 제가 쓴 소설 때문에 곤란해지셔서 오신 건가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열두 살 때의 모습을 드러내는 요안이 앞에서 목이 잠겨온 것은 왜일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세자빈마마와 관련된 일이다.”

방금까지 생글거리던 녀석의 눈초리에 그늘이 감돌고, 푸른 구슬을 닮은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눈부신 금발에 반사된 아침 햇살이 눈을 맵게 만들고 있었으나,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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