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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17화 (117/298)

117화. 홀로서기

“무슨 말씀이세요? 세자빈마마라뇨.”

“다 알고 왔다. 잡아뗄 생각이거든 이쯤 하거라.”

요안의 표정에 생글거림이 금방 돌아왔으나, 여전히 내 눈에는 당황한 녀석의 얼굴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하연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강빈에게 대체 무슨 말을 들었던 것인지.

“다 알고 오셨다니요? 마마는 그저 제 소설을 감명 깊게 읽으시고 칭찬해주시려고 부르셨을 뿐이세요.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빈궁께서 네게 맡기신 일에 대해 직접 듣고 오는 길이다. 솔직하게 말해다오, 요안아. 널 염려하여 이러는 것이니.”

녀석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었구나.

“……어디까지 알고 오신 거예요?”

“내가 네 아버님께 죄를 지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그 일이 사실이더냐.”

“선생님이 왜 죄를 지어요? 그건…… 그건 제 선택이에요.”

“요안아, 나는 너를 단순한 제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내 피붙이, 내 누이동생처럼 여겼다. 그런 네가 궁으로 들어가 신세를 망칠지도 모르게 되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잠시 녀석의 고개가 땅을 향했다. 지그시 내려감은 푸른 눈 탓에, 내 마음도 잠기는 듯했다.

“신세를 망치다뇨. 에이, 선생님도 참.”

“다 알아보고 온 것이다. 네 선택에 따라 궁녀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지 않다 해도 그럴 뻔한 여인으로 뭇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면 네게 좋을 것이 없다.”

“…….”

“내가 도와줄 테니 동궁으로 가자꾸나. 가서 마마께 다시…….”

그래, 아직 녀석은 어린애니까.

그러니까 잠깐 생각을 잘못 품고 강빈의 위세에 눌렸을 뿐일 것이다.

그럴 것이다.

“싫어요.”

하지만 요안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내 기대와 정반대였다. 이제는 녀석의 바다를 닮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싫다…… 고?”

“네. 싫어요, 선생님.”

“어째서, 어째서냐? 남들의 시선만이 문제가 아니다. 궁에서 빈궁 마마를 모시는 일은 네 생각보다 훨씬 고될 것이야. 아무리 왕실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는 하나 어린 네게는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하다.”

“알고 있어요. 과연 나이 많은 궁녀들이 제 말을 잘 들을까. 세자빈마마의 마음에 계속해서 들 수 있을까. 제가 생각한대로 일이 잘 풀릴까…….”

요안의 말끝이 살짝 흐려졌다. 녀석도 분명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아주 생각 없이 저지른 일도 분명 아니었다.

그만큼 녀석의 결정에는 많은 고민이 엿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런 고민을 하고도 내린 결정이란 말이냐? 지금처럼 마음껏 글을 쓰는 생활이 즐겁지 않더냐? 그건 네가 어려서부터 바라던 일이 아니냐.”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네요. 맞아요, 저는 지금 굉장히 행복해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왜……?”

“선생님이 절 이렇게 가르치셨잖아요. 잊으셨어요?”

옷고름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댄 요안이 웃음 지었다.

그 얼굴에, 먹물을 뒤집어쓰고 눈물 흘리던 녀석이 순간 겹쳐 보였다.

“너…….”

“멀고 먼 청나라에 가서도 저를 잊지 않고 매번 서찰을 보내주셨었죠. 이제 아이가 아닌데도, 제가 언젠가 청나라 과자를 먹고 싶다는 말을 적은 걸 기억하시고는 그것 역시 잊지 않고 동봉해주셨어요.”

“……그랬었지.”

“그날, 제게 한 약속을 선생님은 어기신 적이 없었네요. 제 눈이 되어주고, 귀가 되어주신다던 약속……. 덕분에 선생님이 청에 계신 동안 즐겁지 않았던 날이 없었고, 멀고 먼 나라에 대한 동경이 사그라든 적이 없었네요.”

그날의 일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잠시 눈꺼풀을 내리고 편안한 미소를 짓는 녀석도 머릿속에 그 장면을 떠올리는 듯했다.

내가 다급하게 약속했던 것에 불과한 일을, 녀석은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혈육을 빼면 늘 외톨이던 제게 언니를 데려다주신 것도 선생님이세요. 시무룩해 있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얼굴에 웃음을 찾아주신 것도 선생님이세요.”

“요안아…….”

“마마께 세자 저하와 선생님이 계획하고 계신 이야기를 들었어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뛸 정도로 이 나라를 바꿔놓을 수 있는 멋진 계획이었어요. 그 일에 힘을 보태고 싶어요.”

“……네가 지금까지 글을 써준 것만으로도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어.”

“고맙습니다. 하지만 세자빈마마와 함께라면 저는 더 많은 일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선생님께 입은 은혜를 최소한이라도 갚는 길이라 생각해요.”

요안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녀석의 황금빛 땋은 머리에 달린 빨간 댕기가 나비처럼 휘날렸다.

앞으로 박연에게 네덜란드어도 열심히 배워, 훗날 찾아올 하란타 상인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며 기특한 소리를 늘어놓는 요안이었다.

그런 녀석 앞에서,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고 있어요. 힘들고 어려울 길이라는 걸. 하지만, 걱정하시는 것만큼 혼인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몰라요. 세자빈마마께서 제 마음만 내키면 책임지고 좋은 짝과 연결해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책임…….”

“그러고 보니 선생님도 아버지 앞에서 책임진다는 말을 하셨었죠. 그럼 선생님도 제가 마음이 바뀌면 책임지고 좋은 짝을 만나게 해주세요. 귀여운 제자의 부탁이에요. 후후.”

이 요망한 녀석 같으니. 어느새 내가 녀석을 반대할 의지를 잃어버린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방금까지 비장함이 서려 있던 요안의 말투는 어느새 한껏 풀려 있었다.

“언니도 늦은 나이에 좋은 짝을 찾았잖아요. 이제 관아에서 시집가라고 압박하는 일은 마마께서 전교를 내려 막아주실 테니, 그때까지 저하와, 마마와, 선생님을 도우면서 좋은 사람을 찾아볼래요. 그래도 되겠죠?”

어느새 녀석의 얼굴에서 내가 알던 아이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흘러간 세월은 요안이를 몰라보게 탈바꿈시키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

결국 그날, 요안이 녀석을 말리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집에 돌아가 하연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뿐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안사람과 함께 녀석을 만나러 가는 게 나았을지도.

하지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하연은 오래도록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을 때, 그 눈가가 웬일인지 촉촉하게 젖어있는 것이 보였다.

“부인, 무슨 일 있습니까? 갑자기 어인 눈물이세요.”

“아닙니다. 다만…….”

“다만?”

“왜 세자빈마마께서 요안이와 만난 자리에서 저를 밖으로 물리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허나…… 마마께서 당신께 이것은 아녀자의 일이라 선을 그은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하연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혼란에 빠져 머리를 감싸고 있는데, 베갯머리에서 잠시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하연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그대가 감정이 복받치시는 거고요?”

“요안이가 스스로 결정한 일입니다. 서방님께서 그 아이를 진실로 아끼시고, 저를 사랑하신다면 당분간은 두고 봐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연이 내게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숫제 울먹이려는 내 아내를 앞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끌어안아 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물에 담긴 의미는 오래도록 의문으로 남았다. 잠시 동안 아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려주는 수밖에. 그동안 감정을 가라앉힌 하연이 내 품에 안겨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잠시 후였다.

“서방님, 기억하세요? 저희가 처음 만났던 날.”

“물론입니다. 아직도 당신 방에 쳐져 있던 대나무 발이 몇 조각으로 이루어졌는지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요.”

“당신도 참……. 헌데 그 날, 제가 왜 당신께 공부를 배우려 했는지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게, 왜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와 접점을 만들고 싶어서겠지만, 갑자기 내 현명한 아내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리 서방님은 여인을 모르기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네요.”

바보가 된 기분으로 떠오른 그대로를 대답하자, 하연은 가볍게 웃으며 내게 타박을 줄 뿐이었다. 헌데, 진짜 정답을 말해주는 하연의 표정이 묘하게 구슬펐다.

“소첩도 당신과 조금이라도 같은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답니다. 당신은 성현들의 말씀을 접하며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그것을 해석한 글귀는 또 당신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그러셨습니까. 나는 그대가 그렇게 깊은 생각에서 나온 제안을 건넸는지 몰랐습니다.”

“여인네들은 반한 남정네에게 그런 감정을 품기 마련이랍니다. 부부란 같은 곳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 관계니까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부인. 나는 그저…… 그대가 나를 처음 본 자리에서부터 그런 생각을 해 주었다는 것이 기쁩니다.”

그 말을 들은 하연이 내 머리를 꼭 끌어안아왔다. 귓가에 그녀의 가벼운 한숨이 스쳤다.

“그때 저도 언젠가 당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이 오길 바랐답니다. 당신은 그러기엔 너무나 큰 사람이었지만요.”

하연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자, 어느 생각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말았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어려운 사실이었으니까.

허생과 겪었던 일 때문일까, 나 스스로의 의지로 서자(庶子)를 만들지도 모르는 일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

결국 하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무엇보다 강빈이 내 얼굴을 봐서라도 설마 아이의 앞길을 망쳐놓는 일을 할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요안이와 나눈 대화를 들은 강빈이 그것만은 어기지 않겠다며 굳게 약조하기도 했고.

그렇게 녀석은 궐을 드나들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세자빈에게 하사받은 새 옷을 입고 일하는 녀석이 처음에는 신경 쓰였지만, 홍문관에 쌓인 내 일만으로도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고맙소, 선생.”

“아닙니다, 초관 어른. 결국 녀석을 말리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와서 이런 이야기밖에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허허, 부모 말도 안 듣는 녀석이 선생 말이라고 듣겠소? 신경 써 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오.”

녀석의 나이에 맞게 반항기가 찾아온 것인지, 박연 역시 그 이야기를 내게서 처음 들은 눈치였다. 하지만 딸이 궁녀가 될 위기에 처했음에도 박연의 반응은 생각보다 온건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도 최대한 손을 써 보겠지만 요안이에게 여인으로서 좋은 일은 결코 아닌지라.”

“세자빈마마께서 그렇다 하시고, 안 선생도 최선을 다해줄 텐데 무슨 걱정이 들겠소. 제 앞길을 결정한 것은 요안이 자신이오. 오히려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

“참, 내 선생에게 줄 선물이 있다오. 받아주시겠소?”

잠시 방을 나갔던 박연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서는 낯익은 물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놀라게 해 줄 심보였는지, 내 반응을 기대하던 박연의 얼굴에 실망이 스쳐 갔다.

“이 수총(手銃)을 보고 어찌 놀라지 않는 것이오? 나는 선생이 내 선물을 보고 놀랄 줄만 알았는데.”

“그보다는 ‘권총’이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지 싶습니다. 한 손으로 쓸 수 있는 무기에는 주먹 권자를 쓰는 것이 맞지요.”

“허어, 선생도 참 대단한 사람이시오. 마치 이런 물건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 같구려.”

해적을 다루는 영화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그 물건이었다. 보고 놀랄 리가 없지.

박연에게는 기병들이 쓰던 마상총을 본 적이 있어 놀라지 않았다 둘러댔다. 현대로 치면 총신이 짧은 카빈에 가까운 물건이지만 어쨌건 조총을 줄인 형태인 것은 같으니까.

“선생이 청에서 겪었던 일을 들었소. 말 위에서 총을 격발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는데, 맞소?”

“북경성에서 명령에 거역하던 자와 단기결전을 치렀던 이야기군요.”

“이번에도 허생이란 자도 선생의 면전까지 무기를 숨겨 들어왔다 하지 않았소. 진심으로 선생의 신변이 걱정되어서 만든 물건이오. 위험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꼭 소지해 주시오.”

이번에는 좌명의 지휘로 성근학당에서 <허생전>을 새로이 집필하면서, 요운이 녀석에게 그 일이 알려진 모양이었다. 원작과는 달리 상도덕을 어지럽히면 벌을 받는다는 내용과 차별받는 서자의 내용이 주였지만.

이것의 총신에도 강선을 파 놨다며, 내게 권총을 건네는 박연의 눈에는 염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군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쓸 일이 있다고 하지 마시오. 선생은 절대 몸을 상하면 아니 되는 사람이니까. 이게 있다고 무리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오.”

박연은 소지하기 편할 것이라며 기름종이로 일회분의 화약과 탄을 포장한 탄약포까지 몇 개 같이 건네왔다.

내가 남긴 은자도, 녹봉도 전부 연구에 쏟아부으면서 이런 건 언제 또 마련했단 말인가. 혹시 요안이가 커다란 일을 자꾸 맡으려는 이유는 집안의 경제 사정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박연의 예상은 다른 쪽에서 적중했다. 그의 말대로 곧바로 위험한 일이 내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칼이 아닌, 붓과 혀로 가해진 위협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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