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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25화 (125/298)

125화. 결심

“강을 건너라니요. 모든 걸 버리고 강을 건너란 말씀이십니까?”

“강 진사의 힘을 빌리거나, 호포대의 호위를 받으면 너 하나쯤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하오나 저하…….”

“권토중래(捲土重來),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도 있지 않느냐. 잠시 숙이고 목숨을 부지하여 훗날을 기약하자꾸나. 이렇게 너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세자의 말투는 얼핏 담담하게 느껴졌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하얗게 튼 세자의 입술 한 편이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온몸에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일 텐데도 세자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기 때문이었다.

“청국이 그리도 탐내던 너를 조선으로 데려온 것은 나다. 적어도 그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느냐.”

“…….”

“상황의 여의치 않다면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살아라, 살아야만 한다, 한수야.”

나 혼자 강을 건너라니. 아무리 세자라지만 저리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세자의 말을 들어 압록강을 건너 청으로 간다면? 모반죄에 연루된 측근을 도피시킨 혐의가 세자에게까지 가면, 아무리 일국의 세자라지만 그런 명분을 쥐고 칼자루를 휘둘러댈 능양군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와 관련된 자들은 세자가 챙겨주겠다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 세자는 가시밭길 이상의 고난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안 그래도 능양군의 눈을 피해 그동안 바짝 엎드려 있던 세자였다.

“나를 두고 청으로 가거라. 너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저하…….”

“지금이라도 당장 짐을 꾸리도록 해라, 어서.”

“못 갑니다. 저하.”

“어째서?”

힘없이 축 처져 있던 세자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신하가 주군을 두고 어딜 혼자 가겠습니까. 신은 저하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습니다.”

“안 된다. 네가 지금 조선에 남는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렇다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청으로 가면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조국을 버리고 청에 붙은 매국노가 될 뿐입니다. 역관 정명수가 한양 백성들 사이에서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저하께서도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나라 팔아먹은 쥐새끼.

<안선비전>에 묘사된 정명수의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청에 붙어 나라에 해를 끼친 쥐새끼라며 욕하고 있었다.

그 소문은 궁녀들과 세자빈을 통해 세자에게도 들어갔을 것이다.

“게다가 제가 청으로 무사히 도피해 섭정왕의 위세를 업고 조선으로 돌아와 저하를 옹립했다 칩시다. 그렇게 되었을 때, 힘을 빌려준 섭정왕이 우리가 진 빚을 갚지 않아도 좋다 할 사람이라 생각하십니까?”

“나도 청에서 계산에 가장 밝은 사람을 고르라면 섭정왕을 고를 것이다…….”

“섭정왕이 저를 스스로의 휘하에 두는 것 대신 조선으로 보낸 것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여기서 그의 힘을 한 번 더 빌린다면…….”

“……조선은 청의 완전한 속국이 되고 말지도.”

“전조 시절처럼 왕의 시호 앞에 충(忠)자를 붙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고려가 원의 속국이던 시절, 공민왕이 자주노선을 추구하기 이전의 군주, 충렬왕부터 충정왕에 이르는 왕들은 원나라에 충성하겠다는 의미로 전부 시호 맨 첫 번째 글자에 충성할 충 자를 붙여야 했다.

청에서 볼모로 살아야 했던 세자는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무겁게 받아들일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청의 영향력 때문에 피와 살을 나눠준 아비와 칼을 맞대고 있는 세자이기에.

어깨에 얹혀있던 세자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털썩. 중심을 잃고 기울어지려는 세자의 몸을 황급히 대군이 받아냈다.

“그렇다면 어쩌려는 것이냐, 한수야. 이대로 의금부에 잡혀 귀한 목숨을 헛되이 허비하겠다는 말이냐. 내 그것만은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다.”

“제가 무사히 몸을 피한다 하여도, 저와 관계된 자들에게는 분명 전하의 불벼락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목숨은 붙어있다 해도 제 마음이 어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하께서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저만을 살리고 팔다리가 모두 잘린 채 전하의 처분만을 기다리실 것인지, 아니면…….”

말을 마무리하는 대신 세자의 눈동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세자 역시 뒤에 생략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잠시, 아주 잠시 세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형님!”

“봉림, 나는 괜찮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다오.”

“하지만, 하지만 저는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어찌 아버님과 형님이……!”

“우리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볼모로 잡혀가길 자청했던 순간부터, 이런 결말은 예정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봉림. 아니면 나를 치고 네가 아버님의 뒤를 잇겠느냐?”

세자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그 사이, 질끈 감겼다 떠진 세자의 흰자위에는 붉은 핏줄이 여러 개 솟아 있었다.

그런 세자를 바라보는 대군의 눈가에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형과 아버지가 곧 칼을 맞대게 된 현실을 대면한 봉림대군의 심정은 도대체 어떠할 것인가.

“저, 저는 형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이런……!”

“아우야. 내가 너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다오. 나는 본래 아버님과 칼을 맞댈 생각은 추호도 없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형님. 하지만 이건, 이건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사가로 돌아가거라. 돌아가서 나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거라. 만일 내가 실패한다면, 내 본심을 아는 자가 한 명이라도 왕실에 남아야 할 것이 아니냐.”

세자의 목소리가 짙게 잠겨있었다. 결심을 내린 것인가.

“안 됩니다, 형님!”

“내가 아버님의 칼 앞에 쓰러지거든, 네가 세자 자리에 오르거라. 그리고 오늘 나눴던 얘기들을 영원히 기억해다오. 그것이면 될 것 같구나.”

“형님!”

“빈궁과 아이들을 부탁한다. 일이 잘못되거든 내 피붙이들을 역적의 후손으로 만들어도 좋으니 목숨만은 잇게 해다오. 나는…….”

세자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나를 받들고 있는 자들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 봉림.”

***

봉림대군은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커다란 체구를 눈물로 가득 적신 채였다.

“나는 최명길의 집에 들렀다 궁으로 돌아가겠다. 나를 부축할 노비를 빌려주겠느냐.”

“물론입니다. 바로 저하의 명의로 파주 부사에게 격문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호포대만으로도 거사는 가능해 보이나, 만일에 만일을 대비해야겠지. 게다가 전 청주가 즐겨 쓰던 전법처럼 기만과 양동작전을 섞으면 도성 수비병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저하. 금주에서의 첫 출진에서 병사들을 보고 눈을 질끈 감으시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피식. 코웃음을 흘린 세자가 눈을 감았다. 잠시 동안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눈꺼풀을 내리고 있던 세자였다.

“그 시절에는 참으로 나약했지. 청국과 조정 사이에 끼어, 매일같이 타박 받지 아니하는 날이 없었지. 항상 기죽은 채로 지내면서 약이 없이는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었느니.”

“저하…….”

“하지만 너를 만나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수야.”

바닥에 놓인 내 손 위로 세자가 자신의 손을 겹쳐왔다. 방금과 다르게 세자의 손아귀에서 힘이 전해지고 있었다.

“너와 함께 조선의 미래를 꿈꾸면서, 하루도 즐겁지 않았던 날이 없었느니라. 너는 그것을 알고 있느냐.”

“저 또한 그랬습니다, 저하.”

“나를 선택해줘서 고맙다. 그렇다면 나도 네 선택에 보답하는 것이 도리겠지.”

“제가 저하의 앞을 막는 자들을 베어 넘기는 칼이 되겠습니다.”

“나는 너를 해하려 달려드는 자들을 막아내는 방패가 되겠다. 그러니…….”

세자의 나머지 한 손마저 마저 내 손 위에 겹쳐졌다.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내 곁을 떠나지 말아다오. 이 거사가 끝나고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살아 제 손으로 저하를 옥좌에 앉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꿈꾸던 미래를 실현시키자꾸나. 반드시.”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세자와 손을 마주 잡고 있었을까. 궁을 너무 오래 비울 수는 없다며 세자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거사의 시간과 장소를 대략적으로 정한 후였다.

말라리아의 후유증 탓에 걸음에 비틀거림이 남아있는 세자를 노비에게 맡겨 배웅한 후, 무거운 걸음을 안고 대문으로 다시 들어섰을 때였다.

텅 비어있던 사랑방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하연이었다.

“부인…….”

“요안이는 방금까지 울다 잠들었습니다, 서방님. 이제 많이 안정된 것 같아요.”

“눈치 채셨습니까?”

“……어찌 아녀자가 사내 가는 길을 막겠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내 아내를 품 안 가득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대가 붙잡아도 나는 가야 합니다.”

“당신께서 역적의 몸이 되셔도 저는 영원히 당신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하연의 어깨가 천천히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 아내의 눈빛에서는 그 어떤 흔들림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어찌 보면 세자나 나보다 더.

“……지지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절대 저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세자의 명을 어기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

다음날 밤, 반촌 인근 공터.

칠백 인의 장정이 달빛이 내리는 공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평소와 달랐다. 얼룩덜룩한 전투복을 입고, 조선에 들어오고는 한 번도 꺼내 쓰지 않았던 짐승 가면들을 얼굴에 쓴 상태였다.

“칠백인 전원이 남았는가…….”

“예, 나으리. 말씀대로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거사에 참가하라는 뜻을 전했고, 모두가 나으리를 따라 목숨을 걸기로 결의했습니다요.”

불곰 대가리를 뒤집어쓴 김 갑사였다. 헌데, 짐승탈의 눈구멍이 뚫린 부분에 무언가 검붉은 얼룩이 져 있는 것이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도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본 적이 없는 얼룩이었다. 의사를 결정하는 동안 싸움이라도 붙은 것인가.

“눈가에 얼룩은 웬 것인가? 혹시 억지로 전원을 참가시킨 것은 아니겠지?”

“절대 아닙니다요. 나으리께서 그리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그럴 리가 없습죠.”

김 갑사의 머리가 대열을 이뤄 서 있는 칠백 명의 호포대를 향해 돌아갔다. 그들의 맨 앞에는 호랑이 탈을 쓴 대장 하나가 서 있었다.

김귀돌. 충신을 제외한 니루 장긴 중 유일하게 귀국을 결정한 대원.

대원들과 술 한 잔 나눌 기회가 있었을 때, 내게 빠따를 최초로 맞은 것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던 자였다. 그의 호랑이 탈 눈가에도 검붉은 얼룩이 올라앉아 있었다.

“김 장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네가 설명하려 나온 것인가?”

“그렇수다, 대장. 내 장담할 수 있슴메다. 여 있는 호포대 전원은 대장과 함께하기로 결의했수다.”

진한 함경도 사투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최초의 호포대 오십 인으로 시작해 나와 사선을 수차례 함께 넘나들며 익숙해진 말투였다.

“전원! 소매를 확 까제끼라!”

절도 있게 돌아선 김귀돌이 공터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자, 그 자리에 있던 대원들 전원이 왼팔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 앞으로 내밀었다.

다시 나를 향해 몸을 돌린 김귀돌도 그의 왼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그렇게 드러난 그의 왼 팔뚝에는, 갓 새겨진 것이 분명한 긴 상처가 한 줄 드러나 있었다.

“김 장긴, 이건 대체?”

“대장에게 보내는 우리의 맹세지요. 흔들린 아새끼들이 아주 없던 건 아닌디, 다들 대의에 함께하기로 뜻을 모았수다.”

말을 마친 김귀돌이 허리춤에서 대검을 뽑아 들었다. 총구에 결합하는 그 물건이었다.

“나 김귀돌, 그리고 우리 호포대 전원, 모두 대장과 생과 사를 함께할 것임메다. 그것을 이 피로 맹세하우다.”

김귀돌의 칼끝이 이미 난 상처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상처는 십자 모양이 되고, 칼끝이 지나간 자리에는 피가 방울져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 장긴, 이게 무슨 짓인가?”

“대장, 우리는 죽어서도 살아서도 한 몸이우다.”

뭉글거리며 솟아난 피가 충분히 고이자, 김귀돌은 팔뚝을 들어 그것을 눈가에 거칠게 문질렀다. 그의 호랑이탈이 피로 다시 한번 시뻘겋게 물들었다.

“김 장긴!”

피를 본 사람은 김귀돌 한 명이 아니었다. 뒤에 따라 선 육백구십구 인의 호포대 전원이 김귀돌의 동작을 똑같이 따라 하고 있었다.

곰, 표범, 늑대, 멧돼지, 산양. 짐승들의 눈가에 철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핏방울들이 튀었다. 그들에 눈가에 흘러내린 여분의 핏물은 마치 피눈물을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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