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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26화 (126/298)

126화. 맹세

그로부터 몇 시각 전, 반촌 토굴 중 가장 큰 곳.

아직 곶감 냄새가 어슴푸레 남아있는 토굴은 장정들로 바글바글했다. 몇백 석은 너끈히 들어갈 넓은 공간이었지만, 칠백 명의 정예병을 품기엔 조금 모자랐다.

“……이상, 여기까지가 대장의 전언이다. 참여하지 않을 자는 참여하지 않아도 좋다 하셨다. 다만, 거사가 끝날 때까지 신변을 구속당해야 하겠지만 말이지.”

그 말을 꺼낸 텁석부리 덩치의 눈가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토굴의 벽에서 흙먼지 조금이 떨어져 나오는 소리까지 들릴 듯했다.

그 침묵이 깨진 것은 잠시 후였다.

“니미럴, 청나라 팔기군 신분까지 버리고 나으리를 따라왔더니, 이제 역적놀음을 하라고?”

“대남이!”

“내가 틀린 말을 했남? 나으리께서 가죽값도 넉넉히 챙겨주신 덕분에 처자식까지 생겼지마는, 내가 역모에 끼어들려고 압록강을 넘었던 게 아니여!”

호포대 백장(伯長) 박큰노미, 조선에 돌아와서는 그들의 대장에게 대남(大男)이라는 멋들어진 이름까지 내려받고 그 ‘나으리’를 열성적으로 따르던 자였다.

그런 자가 지금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반박이 어려웠는지, 수백의 장정이 모여 앉은 토굴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말은 똑바로 하자고! 다들 이렇게 많은 사내들이 부귀영화 버리고 나으리 한 사람만 보고 조선으로 돌아온 이유는, 내 고향 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 그런 것이제. 안 그런가?”

“…….”

“그런데 갑자기 나랏님 상대로 목숨을 걸어뿌라니, 이게 말이여? 성님, 말씀 좀 해 보시요. 예?”

“나으리께서는 이 일에 내가 개입하지 말라 엄중히 명하셨어. 그럴 순 없다.”

굳어진 얼굴로 덩치가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박대남은 답답했는지 가슴을 연신 쾅쾅 소리가 나도록 두들길 뿐이었다. 어느새 호포대원들의 고개는 바닥을 향해 있었다.

“난 이런 일로 목숨을 걸긴 싫여. 지금까지 삼십 평생을 그렇게 살아서 오랑캐 땅에서도 노비로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지금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그걸 몽땅 걸어뿌라고?”

“…….”

“느그들도 말 좀 해 봐라! 여 있는 사내놈들 중에 입 터진 놈은 나 뿐이여?”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박대남은 갑갑하다는 듯 쾅 소리와 함께 땅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그렇게 박대남의 주먹이 다시 자신의 가슴으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덩치의 오른편에 얌전히 앉아있던 사내 한 사람이 일어섰다. 그의 어깨에는 호랑이 탈이 얹혀 있었다.

“귀돌 성님! 성님도 말씀 좀 해 보요! 이 아우는 대체 우째야 할지 모르겄소!”

“아새끼야. 우리 대장님이 스스로 선택하라 명령하셨으면 그걸 따라야 호포대 아니냐?”

“성님 말이 맞소. 내가 아는 나으리라면 이 일에 손을 빌려드리지 않더라도 나를 벌하시진 않겠제. 헌데, 왜 그걸 알면서도 내 발걸음은 움직이지 않는거요? 성님은 그 이유를 아십니꺼?”

김귀돌의 걸음이 뚜벅뚜벅 박대남을 향해 다가섰다. 그 모습을 본 박대남은 움찔했으나, 그를 피하지는 않았다.

“내가 알려주랴?”

“성님!”

“그건 니 아랫도리에 물어보라. 사내새끼면 가끔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향하는 대로 움직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비.”

김귀돌의 주먹이 박대남의 어깨를 강타했다. 갑작스러운 타격이었음에도, 박대남은 눈을 크게 뜨고 김귀돌을 바라볼 뿐이었다.

김귀돌은 그런 자였다. 청나라에서 니루 장긴의 지위가 그대로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나으리’와 함께 귀국을 택한 유일한 자.

그가 그동안 세운 군공과 지킨 의리는 호포대 안에서 그의 권위와 위치를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기 있는 아새끼들은 다 잘 들으라! 느그들도 여 있는 대남이마냥 똑같은 생각 품고 있는 거 내 잘 알고 있음메!”

“성님, 성님은 나으리를 따르실 생각입니꺼? 그거, 죽으러 가는 길 아닙니꺼?”

“이 은혜도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새끼레.”

철썩.

김귀돌의 두꺼운 손바닥이 박대남의 오른뺨을 후려쳤다. 그러나 단련된 사내답게, 고개만 돌아갔을 뿐, 박대남의 몸은 꼿꼿이 서 있었다.

“이 배은망덕한 새끼! 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나으리께 입은 은혜를 갚겠다 돌아온 것이 아니었데?”

“성님…….”

“다들 잊었네? 노예였던 우리를 풀어주시고, 밥과 옷과 짝도 찾아주시고, 심양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어깨를 펼 수 있게 만들어주시고, 우리가 노예 출신이라 손가락질 당할 때 그 염병할 새끼를 몸소 조져주신 분은 누구데?”

땅을 향해 떨어져 있던 사내들의 고개가, 하나 둘씩 싹이 튼 것마냥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시선들은, 명백히 김귀돌을 향하고 있었다.

“죽은 대원들의 시신 앞에서 저하와 함께 눈물 흘리시던 분은 또 누구데!”

“…….”

“내 사람 한 명도 낯선 땅에 남겨두고 올 수 없다며, 마지막 한 사람의 뼈까지 수습해 오신 분이 누구인지 느그들은 잊었네?”

둑이 터진 것마냥 울분을 터뜨린 김귀돌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어느새 눈 깜빡할 사이, 그의 손에는 대검이 뽑혀 있었다.

“거기 너! 예쁜 각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 덕임메?”

“…….”

“거기 너! 팔려갔던 어미와 누이를 찾아올 수 있었던 건 누구 덕임메?”

칼끝을 연달아 겨누며 감정을 쏟아내는 김귀돌 앞에서, 대원들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느그들, 병자년에 끌려가 심양에서 노예로 살 때, 느그를 구해주려 나섰던 자가 몇이나 있었간?”

“…….”

“심양에 수차례 오갔던 사신 딱지를 단 높으신 분들 중에 느그를 사람대접한 양반들이 몇이나 있었냐 이 말임메!”

“김 장긴! 참게!”

“이 개 같은 새끼덜아! 한낱 짐승도 은혜를 갚는 법을 안다 했지비. 사람으로 태어나 짐승보다 못하게 살 수는 없지 않나! 느그덜언 정녕 머리 검은 짐승이 되고 싶은 것임메?”

얼굴을 굳힌 채 그 자리를 지켜보기만 하던 덩치가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김귀돌의 칼날이 점점 허공을 위협적으로 맴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몸부림치며 악을 쓰는 김귀돌을 멈추는 것은 덩치 큰 김 갑사에게도 한참이 걸려야하는 일이었다.

“갑사님! 내 호포대가 되고 나서 이토록 기분이 더러운 날은 처음이우다! 어찌 나으리께 입은 은혜를 기억하는 놈덜이 이럴 수 있단 말이우까!”

“다들 알고 있으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에 이리 고민이 깊은 것 아니겠나! 자네 마음은 나도 이해한다니까!”

“박대남이! 너도 알고 있을 것임메! 나으리께 입은 은혜가 도망가려는 네놈의 발을 못박아 놓은 것이니!”

그보다 한참은 큰 김 갑사가 전력을 다해 막고 있음에도, 김귀돌의 몸부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날이 허공을 몇 번이고 갈랐다.

그러나 그 살벌한 장면을 지켜보는 박대남 역시 움직임이 없었다.

방금까지 불만을 토해놓던 자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놓으시우다! 갑사님!”

“이 자리에서 피를 보게 생겼는데, 어찌 놓으란 말인가!”

“하지만 갑사님! 이건, 이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우까! 나으리께서 우리와 조선 백성들에게 쏟은 정성이 얼마인데, 나랏님이라는 자가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게!”

김귀돌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이 붉게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까.

“나는 나으리와 함께 갈 테요!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자! 총검을 뽑아들라!”

“김 장긴!”

결국 김 갑사도 김귀돌을 제어하지 못했다. 김 갑사의 몸에서 튕겨져 나온 니루 장긴은 칼날을 높이 치켜 올렸다.

“나도 함께 하겠슴네다!”

“나도 뜻을 같이 하겠소!”

“나도요!”

발 구르는 소리가 연달아 토굴을 울렸다. 벽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먼지가 그들의 시야를 부옇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누구도 넓은 토굴 안에서 앉아있는 자를 찾을 수 없었다.

“자네……!”

김 갑사도 더 이상 김귀돌에게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유를 되찾은 김귀돌의 칼끝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들도 그를 따라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 칼날의 끝은 방금까지 다투던 박대남을 향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핏줄이 솟아있는 김귀돌의 왼 팔뚝에 붉은 줄이 한 줄 그였다.

“내 팔뚝에서 흐르는 피에 맹세한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나으리의 호포대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나으리의 호포대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나으리의 호포대다!”

그 자리에서 칠백 개의 붉은 줄이 그어졌다.

김귀돌을 말리던 김 갑사도 자신의 대검을 꺼내 왼팔을 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멍하니 자리에 못박혀있던 박대남 역시, 천천히 자신의 왼팔에 깊은 칼자국을 남겼다.

그 모습을 바라본 김귀돌은 자신의 어깨에 걸쳐 있던 호랑이 가죽을 천천히 뒤집어썼다. 그의 눈가는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오늘 흘린 너희의 피에 서약해라! 죽어도 은혜를 갚고 사내답게 죽자!”

“사내답게 죽자!”

악을 내지르고는 자신의 팔뚝에서 방울지어 흐르는 피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귀돌이었다.

이윽고 그의 팔뚝이 얼굴께로 올라갔다.

철퍽.

그의 호랑이 탈이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모두의 시야도 붉게 물들었다.

***

“그런 일이…….”

“우리는 지옥 끝까지라도 나으리를 따라가겠습메다. 모두의 총의이니 받아주시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들의 뜻은 내가 받기에는 너무나 크고 고귀했다.

“너희들…… 어째서…….”

“엇, 대장, 지금 사내가 부하들 앞에서 눈물이라도 보이시는 것이우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능글맞게 나를 놀리는 김귀돌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걸 가리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앞에 선 내 부하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입 다물라! 조용히 지켜봐드리라!”

천천히 갓끈을 풀고 머리에 얹힌 흑립을 내려놓았다. 품고 왔던 호랑이 가면으로 나도 그들처럼 얼굴을 가렸다.

스릉.

칼집을 떠난 대검이 달빛에 빛났다. 그러나 내 의지를 보이기 전, 앞에 선 충직한 자들의 진심에 답할 의무가 나에게는 있었다.

“……대장!”

“대장!”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양 무릎이 땅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바닥을 향해 내려간 이마가 세 번, 지면에 충돌했다.

쾅. 쾅. 쾅.

내 앞에 선 칠백 명의 전사들이 얼어붙었다. 그 김귀돌마저도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너희의 무거운 목숨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표현이다. 마음에 두지 말거라.”

“대장!”

“나 역시, 너희와 죽음 끝까지 함께하겠다.”

널찍한 도포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앞에 선 자들의 좁은 소매와 비교되는 양반의 증표가 이토록 부끄럽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저렇게 충직한 자들을 믿지 못하고, 명령을 내리기는커녕 스스로 선택하라며 도망치고 말았었구나. 수치스러운 얼굴을 호랑이 가죽이 가려주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진심에 보답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대장까지 그러실 필요는……!”

두 번의 칼질이 허공을 갈랐다.

내 사람들과 동일한 표시가 내 왼 팔뚝에도 새겨졌다.

“나으리!”

“괜찮네, 김 갑사. 나도 자네들과 같은 사람일진대, 같은 상처를 입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대장!”

천천히 피가 흐르는 팔뚝을 치켜 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 것이 느껴졌다.

팔뚝에서 흐르는 비릿한 향기에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상처에서는 어떠한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철퍽.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이제야 그들의 심정이 온전히 내게 전해진 듯했다.

“가자.”

사내 사이에는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 멀리, 창덕궁이 위치한 서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눈가가 붉게 젖어든 짐승 무리가 그림자에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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