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27화 (127/298)

127화. 개시(開始)

나는 틀리지 않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 일은 결코 틀린 일이 아니었다. 남원에서 한양, 심양, 그리고 다시 한양까지.

마음에 남아있던 한 점의 불안감은 온데간데없었다. 한 명의 이탈도 없이 내 뒤를 따라 한밤중의 한양 거리를 내달리는 대원들 덕분이었다.

“나으리! 서쪽에서 불길이 오릅니다요!”

“창의문 방향이군. 계획 대로네.”

반촌과 성균관의 경계인 하마비를 넘고 성균관의 남측 담장을 달려 정문인 신삼문을 지나쳤을 무렵, 드디어 내 눈에 이상이 관측되었다.

파주 목사와 교하 현감이 끌고 온 군졸들이 한양의 북서쪽에 난 소문, 창의문에 공격을 개시한 모양이었다. 이제 순라군들을 포함해 경계근무를 서던 온 도성의 수비군들은 불길이 오른 방향으로 몰려가겠지.

“……옛일이 생각납니다요.”

“김 갑사?”

“계해년에 나라님이 바뀌었을 때, 저도 저 자리에 있었습죠. 황해도에서 범을 잡다가 갑자기 한양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맞아, 김 갑사는 착호갑사 출신이었다. 당시 평산 부사로 있던 이귀가 이끈 착호갑사들이 인조반정의 주력군이었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떠올랐다. 그렇다면 김 갑사도?

“하지만 계해년과 지금은 너무나 다릅니다요. 그때는 갓 갑사가 된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갔다면, 지금은 나으리를 섬기게 된 일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요.”

“거사 전에 불길한 말 하지 말게, 김 갑사.”

“나으리께서 선비님이시던 시절, 남원에서부터 백성 한 명 한 명을 아끼던 나으리의 모습은 지금까지 변하시지 않았습죠. 이 나라는 나으리 같은 분께서 바꾸셔야 합니다요. 대원들도 모두 같은 마음일 테고요.”

평소 같았으면 얼굴이 따끔거렸을 말이었으나, 지금은 목숨이 걸린 자리였다. 그 비장한 분위기는 김 갑사의 우스꽝스러운 말투도 의미심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김 갑사…….”

“거사가 성공하더라도 지금 품으신 마음을 잃어버리시면 아니 됩니다요. 물론 나으리께서 그럴 분이 아니시란 건 소인이 더 잘 알지만 말입죠.”

“…….”

“고개 숙이지 마십쇼. 지금은 마음을 단단히 드셔야 할 자리입니다요. 마침 앞에 맞이해야 할 사람들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요.”

성균관의 서쪽 쪽문 앞, 집합 장소로 미리 약조했던 곳이었다. 성균관을 감싸고 흐르는 반수(泮水)만 건너면 창경궁의 북동쪽 소문인 집춘문까지는 불과 몇 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위치한 장소였다.

분명 이 자리로 나오기로 한 사람은 두 명이었을 터, 헌데 약속 장소에는 세 명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셋 다 눈에 익은 그림자였다.

“한수야!”

“성근!”

그 셋은 내가 호랑이 가면을 벗기도 전에 이미 내 정체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성균관에서 입번을 서다 활을 들고 합류한 좌명과, 여전히 한양 밤거리를 제 앞마당처럼 노니는 충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양반은 대체 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인가.

“왔는가? 창의문 방향에서 불길이 오른 것은 자네도 보았을 테지?”

“부제학 영감? 어째서?”

“걱정 말게. 자네들 발목을 잡을 일은 없을 테니까.”

성이성이었다.

분명 한당의 중신들은 미리 도성 밖에 대기 중이던 파주 목사의 병력에 합류해 기만 작전을 펼치기로 했던 터였다. 지금쯤 성문을 부수는 자리에 있어야 할 성 영감이 이 자리에 어떻게 나타났단 말인가.

“젊은 혈기들이 모였으니, 혹여나 내가 필요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는가? 게다가 창경궁 침전의 지리를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벼슬살이하는 내내 뻔질나게 다녔던 곳은 반대편인 창덕궁에 위치한 궐내각사였고, 집춘문과 붙어있는 창경궁, 특히 왕족들이 생활하는 구역은 세자를 만나러 갈 때를 제외하면 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낭비할 시간이 없네, 목적지까지 최대한 전투가 없이 돌파해야 할 것이니.”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저희가 맡은 임무는 가장 위험한 임무이기도 합니다. 영감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내 수제자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군사들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란 말인가? 그것 이야말로 안 될 말이지.”

이런 성 영감의 말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이토록 염려가 가득 담긴 눈빛이 절절히 전해져오는데.

“어차피 이변을 감지한 궁궐방위대도 경계를 강화했을 걸세. 돌아갈 길은 막혔다 봐야겠지.”

“…….”

“이미 나와 전략을 공유했지 않은가. 시간이 생명인 전략이니, 길잡이는 필수가 아니겠는가.”

“……알겠습니다. 부디 신체를 상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 이상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었다. 집춘문은 어영청의 숙위(宿衛) 구역, 바로 옆에 분영(分營)인 집춘영(集春營)까지 설치해 초관 한 명과 군사 이십 명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키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집춘문의 방위는 의외로 허술했다. 새벽 두 시 즈음에 숙위군 전원이 일어나 한 바퀴 순찰을 도는 것을 제외하면, 집춘문에서 경계 근무를 교대해 가면서 지키는 병력은 몇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을 처리한다 해도 능양군이 잠들어있을 창경궁의 침전은 대략 백오십인가량의 금군, 호위군관, 선전관이 방비하고 있다. 이들을 빠른 시간 안에 격멸하고 새로운 방어선을 세워야 했다.

‘임금이 도망쳤다가는 삼일천하로 끝날 가능성도 있으니까.’

능양군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앞에 언급한 병력을 섬멸한다 해도 궁 외곽에는 여전히 상당수의 경계병이 남아있다. 임금이 그들과 합류해 빠져나간다면 공들였던 일이 허사가 될 수도 있다.

왕을 손에 넣더라도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방금 언급한 병력들이 침입자를 제거하려 몰려든다면, 또 한 번의 일전을 각오해야 한다. 아무리 호포대가 최정예병이라지만 적 역시 정예일뿐더러, 그 숫자마저 비등하다.

입이 바짝 말라 왔다. 저 멀리 집춘문 옆, 불타는 화톳불에 비치는 파수병들을 제거하는 순간부터 거사는 시작이다.

“김 장긴.”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귀돌이 소리 없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더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그와 눈빛이 교환되자마자, 김귀돌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대원 일부를 이끌고 집춘영 방향을 향해 멀어져갔다.

나 역시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나머지를 이끌고 집춘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곧 목표가 사거리 안에 들어왔다.

“사형, 일정, 준비됐습니까?”

그 말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투창기를 뽑아 들었다. 역시 활보다는 이 녀석이 편했다.

충신과 좌명 역시 자신의 활에 화살을 잰 상태였다. 내 손에 활이 들려있지 않은 것을 본 성 영감의 표정이 조금 찡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미안해요, 영감님.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하나 봐요.’

등허리에 묶인 투창 하나를 뽑아 들었다. 천천히 그 끝을 투창기에 꽂고 목표를 조준했다.

토시로 묶은 옷자락은 팔을 채찍처럼 휘두르는 동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손끝을 떠난 투창은 목표를 향해 날아가며 공기를 찢어발겼다.

오늘 나는, 조선을 뒤흔든다.

***

송막남의 입에서 하품이 터져 나왔다.

그가 어영청의 말단 초관이나마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젊은 시절, 계해년 반정에 잡졸로나마 참가한 이력 덕분이었다.

‘왜 갑자기 그날 일이 떠오르는가.’

오늘따라 왜 그날의 생각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왜 같은 조선군끼리 칼을 맞대야 하냐며 항명했던 갑사 하나가 칼등에 얻어맞고는 군적에서 쫓겨났던 일이.

그 멍청이에 비하면 그는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앞에 놓인 화톳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젠장, 이놈의 불은 늙은이 양물처럼 걸핏하면 죽어가는구만.

계절은 봄의 중턱이라지만 밤공기는 아직 차가움을 간직하고 있다. 눈치를 받았는지, 꾸벅거리며 졸던 졸병 하나가 발치에 놓여있던 장작개비 하나를 불에 던져 넣었다.

이윽고 먹이를 받아먹은 불꽃은 다시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와 동시에, 송막남의 등 뒤에 위치한 담장 너머도 환하게 밝아졌지만 그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짓거리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종구품 초관의 녹봉으로는 손이 큰 송막남의 씀씀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그는 집춘영 초관의 권한을 남용하여 추가 수입을 쏠쏠히 받고 있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분영에는 본래 십칠 명이 잠들어 있어야 할 터, 허나 지금 다음 근무를 대기하며 잠들어있을 인원은 십칠 명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어차피 누가 나라님이 계신 궁궐을 범하겠어. 게다가 집춘문처럼 이런 후미진 공간을 침입할 멍청이도 없을 게야.’

집춘문을 넘어봐야 연못과 초목, 정자가 가득한 창덕궁의 후원뿐이다. 아니면 집춘문의 반대편, 유생과 성현들의 위패만 가득한 반궁을 털어 무엇하겠는가.

그렇게 송막남이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하던 찰나였다.

“끄그극…….”

생각에 잠겨있던 송막남의 귀에 웬 거품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오른편에서 화톳불을 쬐고 있던 부하 방향이었다.

“아니?”

부하의 목줄기를 웬 짧은 화살 하나가 꿰뚫은 모습이 송막남의 눈에 들어왔다.

애기살이다. 생각해보니 방금 희미하게 바람을 가른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습격이다. 초관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지만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품에 있는 호루라기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끄억…….”

철릭 사이를 빠르게 오가던 송막남의 손이 정지했다. 그의 목 한가운데에서 불에 지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커…… 커컥…….”

그의 시야에 익숙한 창대가 잡히고 있었다. 등패수들이 주로 쓰는 표창(鏢槍)이었다.

목에 꽂힌 짧은 창을 뽑아내려 무수한 손짓이 오갔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초관의 커다란 몸뚱이는 천천히 기울어져 갔다.

‘누…… 누군가는 이 사태를 알려야 한다…….’

하지만 송막남의 마지막 기대는 형편없이 깨져나갔다. 무너지는 그의 마지막 시야에 들어온 것은, 왼눈과 심장에 각각 화살 한 대씩이 박혀 절명한 또 다른 부하의 모습이었으니까.

곧 송막남의 눈앞이 온통 시꺼멓게 변했다.

***

창경궁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지키던 파수병 셋은 그렇게 쓰러졌다.

가장 먼저 날아간 내 투창이 담장에 기대 졸고 있던 초관의 목을 꿰뚫었고, 충신의 강궁에서 발사된 애기살과 좌명이 빠르게 쏘아붙인 두 대의 화살이 화톳불을 쬐던 나머지 둘의 명줄을 끊어놓았다.

“도성문에 불이 올랐는데도 이렇게 무방비하다니. 호란 때 그리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구만?”

충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릴 정도로 집춘문은 너무나 싱겁게 제압되고 말았다. 아예 창의문에 불이 오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아무리 궁의 외진 곳에 위치한 문이라고는 해도 경계 태세가 너무 허술했다.

분영으로 대원들을 이끌고 잠입한 김귀돌도 잠시 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총검을 들고 부대에 합류했다. 나머지 파수병들이 잠들어 있었을 집춘영의 내부가 어찌 되었을지 눈에 선하게 잡히는 듯했다.

“대장, 분영 안도 개판이었수다.”

분영 안에 잠들어 있어야 했던 병사의 수가 예상보다 턱없이 적었다는 김귀돌의 보고를 듣고, 나는 성공을 직감했다.

궁궐의 방위는 생각보다 허술한 모양이었다.

“언제 연락병이 이곳으로 들이닥칠지 모른다. 빠르게 이동한다.”

도성의 성문이 방금 공격받았다는 보고가 금군을 위시로 한 궁궐 방위대에도 곧 올라갈 것이다. 그렇다면 잠들었던 병력들을 전부 깨우고 경계 태세를 강화하도록 각 구역에 명령이 내려가겠지.

그 명령을 들고 온 연락병이 지금 집춘문에서 벌어진 참사를 목격하는 순간,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것이다. 그전까지 최대한 목적지인 침전에 최대한 접근해야 한다.

품에서 익숙한 가면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뒤집어썼다.

대륙에서 맡았던 피 냄새가 코끝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