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반정(反正)
왕은 잠들지 않았다.
오늘따라 묘한 흥분에 젖은 탓인지, 임금은 상선의 제안에 따르지 않았다.
평소처럼 침소에 드는 대신 양화당에서 밤을 새길 택한 것이다.
양화당 안은 이따금씩 촛불 심지가 타닥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제외하면 한없이 고요했다. 서안 위에 춘추를 올려놓은 채, 임금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조정은 임금의 뜻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던 세자는 갑작스럽게 학질로 쓰러져 골골대고 있었고, 자신의 입김을 받은 중신은 의도대로 칼날을 마구 휘둘러주었다.
단 하나 걱정했던 것, 강 건너 오랑캐들마저 때맞게 잠잠했다. 다섯 살짜리를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렸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흑환(黑還, 홍타이지)놈도 저세상으로 가버렸으니, 살아남는 자가 결국 이기는 법이다.’
왕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남한산성에서 평복을 입은 채 끌려 나가, 흑환을 향해 삼전도의 바닥에 머리를 수차례 박아야 했던 일은 최근까지도 꿈에 나왔던 터였다.
그놈이 수렁으로 떨어뜨려놓은 왕권을, 그놈이 요절한 덕에 세울 수 있다니 이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임금의 입가에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한당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지.’
정치란 본디 그런 것이다.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귀양지에서 납작 엎드려 있으면, 지금 임금의 칼날이 향한 신하들도 언젠가 조정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불만이 있고, 억울하더라도 그들이 어쩌겠는가.
조선은 왕의 나라다. 왕이 명하면 신하는 싫어도 따르는 것이 정상이다.
‘안한수, 그 놈은 조금 아깝긴 하다만…….’
어떻게든 칼날 앞에서 치우고 싶어 좌의정에게까지 명해가며 전향을 유도했던 인재였다.
오랑캐 땅에 끌려가서도 온갖 실적을 냈으며, 돌아와서는 바로 정오품 당하관 주제에 조정의 중심으로 급부상한 놈.
죽도록 탐이 나는 신하였다.
‘그놈을 세자에게 붙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사실 안한수의 행동은 의심할 바가 별로 없었다. 세자의 거동에 대한 보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편전으로 올라왔던 터였다.
그러나 세자에게 놈을 붙여 먼 오랑캐 땅으로 보내는 대신, 옆에 끼고 자신의 손발로 키웠다면 안한수가 이번 일로 숙청될 일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면서 호판의 여식 대신 산림 중에서 적당한 여식을 왕명으로 붙여주었다면, 대학자 안방준의 친척인 놈이 산당 대신 한당의 중심이 될 일도 없었겠지.
‘몇 년 고생시키고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여 중히 쓰자. 이대로 버리기엔 아까울뿐더러, 그쯤 고생했다 풀려나면 풀어준 나에 대한 충성도 한층 강해져 있겠지.’
그때는 놈으로 하여금 기세등등한 산림을 쳐내게 하고 또 한 번 왕권을 세우도록 할 것이다. 이미 백여 년 전 선왕들이 사화(士禍)라는 이름으로 왕권 강화를 위해 해낸 일들이다.
나라고 못할 것 없지.
임금은 생각했다.
어차피 사소한 트집에 불과하지만 안한수가 오랑캐에게 신형 조총을 유출시킨 것은 사실이 아닌가. 모반죄는 모반죄인 것을.
마음에 들었던 하란타인을 이 일로 희생시키는 것은 조금 안타깝긴 하지만, 나중에라도 처자라도 노비에서 방면시켜주면 그만일 것이다.
‘어차피 조정에 믿을 자 하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산림들의 왕은 공자인가, 나인가.’
몇몇 공신의 얼굴이 임금의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누군가는 반기를 들고 역모를 꾀해 임금을 공주까지 쫓아내기도 했다. 누군가는 오랑캐들이 쳐들어왔을 때 왕을 밀치고 나룻배에 올라타기도 했다.
임금을 배신하지 않은 자들도 무능하고 부패하긴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무능하지 않았던 한당의 영수 최명길은 사사건건 임금의 뜻에 반해 목소리를 내곤 했다.
‘제왕의 자리는 참으로 외로운 자리로구나. 참으로 외로워.’
갑자기 가슴에 치밀어 오른 무언가 탓에, 임금은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강하게 얼굴을 쓸어 올리고 말았다. 뜬금없는 마른세수 탓에, 임금의 수염이 마구 엉키었다.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꼬인 것일까.
능양군 시절 반정을 모의했던 때부터? 공신들이 내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던 때부터?
아니면 삼전도에서 그 치욕을 겪은 후부터?
이제 임금에게 남은 것은 장기말 몇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씨를 받아 태어난 아들마저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손에 쥔 권력 외에 무엇을 의지한단 말인가.
충(忠)이란 가치는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공허한 가치였다. 그랬기에 임금은 그나마 장기말로 쓰는 신하들에게 그토록 충을 강조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견제해라. 한없이 물어뜯어라. 그리고 모두 쓰러져라!”
속이 콱 막혔던 탓일까.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만 굴리던 생각이 입 밖으로 고함이 되어 빠져나간 것을 알아챈 임금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허나 그것에 놀란 사람은 임금뿐만이 아닌 듯했다. 웬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약간 굽은 채 방밖을 지키던 상선의 그림자가 움찔거리는 모습이 고개를 돌린 임금의 시야에 잡혔다.
동시에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가 밖까지 들려 잠자던 새라도 깨운 것인가. 임금의 입가가 씁쓸한 조소를 머금던 때였다.
탕!
타타탕!
적막만이 감돌던 창경궁의 공기가 느닷없는 폭음에 찢어발겨지고 있었다. 복잡한 속내를 단숨에 잊게 만든 그 폭음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양화당을 울려댔다.
“상선!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이냐! 어서 자초지종을 알아오라!”
하지만 임금의 노성이 터진 것도 잠시,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터지는 폭음과 뒤이어 들려오기 시작한 비명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피슝.
무언가가 불쾌한 소리와 함께 임금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임금은 여전히 폭발음이 연달아 들리는 바깥을 뒤로 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머리 위로 세 뼘 위, 병풍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임금은 그제서야 방밖에서 파고든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장지문에도 비슷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으니까.
갑자기 낯선 감각이 밀어닥쳤다.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감각이었다.
계해년의 폐주가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쉼 없이 달려 창경궁의 후원을 돌파하자마자 시야가 다시 천천히 밝아지고 있었다.
관덕정이라 이름 붙은 정자를 지나 왕이 농사를 직접 시연하는 땅인 권농장(勸農場)까지 통과하자, 화톳불에 둘러싸여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구역이 나타났다. 성 영감이 말한 침전(寢殿)이 위치한 구역이었다.
“……전하께서는 오늘도 양화당에 머무시는 모양이구만.”
성 영감이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열의 맨 앞을 달리며 호포대를 이끈 영감님이었다.
그의 시선이 가닿는 방향을 따라가 보니, 주위에 붉은 복장을 한 병사들이 유독 눈에 띄는 건물 하나가 보였다. 왕을 지키는 금군들이었다.
“경춘전에 드시지 않은 걸 보니 일이 조금 편해질지도 모르겠네.”
“경춘전이라면 중전마마께서 머무시는 공간이 아닙니까.”
“다뤄야 할 귀한 분이 여럿이 되면 신경 쓸 일도 많아지는 법일세. 전하께서 오늘 밤 합궁하시지 않은 게 다행이지 않은가.”
성 영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이 경춘전인 모양이었다. 역시 여인이 거처하는 공간답게 더 깊숙이 창덕궁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능양군이 그곳에 머물렀었다간 거추장스러운 일이 하나 더 생겼을지도.
하지만 양화당은 달랐다. 창경궁 후원을 벗어나면 바로 양화당이 나타난다. 그만큼 배치된 병력을 어둠 속에서 관찰하기 편하고, 기습 또한 용이하다.
“김 갑사, 금군 병력은 얼마나 되어 보이는가.”
“순찰을 도는 병력도 있을 테지만 대략 백오십 명가량 되어 보입니다요.”
“예상대로군. 빠르게 일제사격으로 적을 제압하고 전원 양화당을 포위한 채 홍화문 방향을 향해 방진을 구축한다.”
집춘문에서 소리 없이 파수병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집춘문이 외진 곳에 위치한 쪽문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초소에 배치된 병력도 적었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능양군이 있을 것이 분명한 양화당과,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의 거리는 멀지 않다. 재빨리 저 금군을 각개격파하지 않으면 홍화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백수십의 병력을 이끌고 양화당으로 들이칠 것이다.
“전원, 장전.”
나직한 목소리로 내린 명령이 대원들 사이에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총 쓰는 일이라면 이골이 난 정예답게 호포대 칠백 명의 장전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성 영감의 경탄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나 역시 화약과 탄을 총열에 장전했다. 청을 떠난 이후로 만진 기억이 손에 꼽는 총이었지만, 아직 몸은 만주 벌판을 구르던 기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천천히 오른편 주먹을 치켜올렸다. 등 뒤에서 오장(伍長)들이 부하들에게 표적이 겹치지 않도록 속삭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저들도 전장에서 피 흘렸던 경험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형.”
“듣고 있다.”
“저하를 모셔오는 일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맡겨만 다오. 좌명이와 둘이면 충분하다. 다만……”
충신의 목소리가 이토록 딱딱하게 굳은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전장에서도 굴러본 인간도 거사를 앞두고는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가.
“한수 네가 결국 나를 진짜 역적으로 만드는구나. 빌어먹을 벗 하나를 잘못 두어서 역사에 영원히 역적으로 남게 생겼어.”
“선진, 중요한 일을 앞두고 성근에게 초를 치지 마십시오. 그럴 농담할 기운이 있으면 화살이라도 한 대 더 쏘셔야지요.”
“윽!”
“반정이 성공하면 성근과 선진을 역적으로 부를 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역사는 승자의 손에 쓰이는 거니까요. 세조 대왕이 그러하셨고, 중종 대왕이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슬며시 나타나 충신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쑤시는 좌명이었다.
이제야 알아챈 사실이지만, 집춘문을 들이치기 직전 다들 탈바가지로 얼굴을 가린 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놈의 얼굴에도 웬 탈 하나가 올라앉아 있었다. 생각해보니 녀석은 김자점의 집을 털 때부터 나와 충신처럼 얼굴을 가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던가.
‘각시탈?’
그럼 좌명의 손에 들려있어야 할 것은 평소에 쓰던 활이 아니라 쇠퉁소여야 어울리는 것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이 복잡하던 머리를 잠시 비워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갈비뼈에서 올라오는 고통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충신을 끌고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피식. 그 모습을 보고 바짝 말라있던 입안에 물기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처남 하나는 잘 둔 것 같다.
“대장, 놈들이 뭔가를 보고하는 것 같수다.”
어느새 귓가에 들려온 김귀돌의 말에 풀어졌던 긴장이 다시 돌아왔다. 다시 정면의 양화당을 바라보자, 방금 창덕궁 방향의 어둠에서 뛰쳐나온 금군 몇이 그들의 우두머리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이 보였다.
금군들의 긴장에 가득 찬 시선이 온통 그 방향으로 쏠렸다. 아마 창의문에서 불길이 오르며 벌어지기 시작한 변고에 대한 보고겠지.
보고를 듣는 금군 별장(別將)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곧 때가 온다.’
도성의 성문을 두들기는 무리가 있다는 소식이겠지. 그 소식은 금군들의 주의를 그들이 경계해야 할 구역이 아닌, 소식을 들고 온 전령에게로 집중시키는데 충분해 보였다.
이윽고 보고를 전부 듣고 생각에 잠겨 있던 별장이 양화당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임금에게 보고를 올려야 할 중대 사항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삐익!
삐이이이익!
그와 동시에 호각 소리가 날카롭게 밤하늘을 갈랐다. 지나쳐 온 집춘문 방향이었다.
‘이제야 궁 외곽을 순찰하는 다른 분영 경계병에게 걸린 모양이군.’
지나온 흔적이 발각되었음에도 대원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나아가지 않을 때는 숲처럼 고요하라. 손자병법의 구절 그대로였다.
오히려 적의 침입을 경고하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혼란에 빠진 것은 금군이었다. 석단 아래 대기 중이던 금군들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고, 막 양화당으로 들어가려던 금군 별장 역시 이것이 무슨 소리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쳐댈 뿐이었다.
휙.
여태까지 줄곧 들고 있었던 오른팔이 밤하늘을 가른 것은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부싯돌이 금속을 긁는 소리가 연달아 등 뒤를 울리기 시작했다. 아마 거기서 튀는 불똥들은 불꽃놀이를 방불케 하겠지.
탕!
타탕!
창경궁에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꽃이 피기 시작했다.
피어오른 백수십여 개의 꽃들은 순식간에 그 꽃잎을 양화당 주변에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