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선언
양 팔을 벌린 채 내 앞으로 뛰어든 사람의 정체는 성 영감이었다.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는 분명 세자였고.
“영감! 어째서, 어째서 제 앞을 막아서시는 겁니까!”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하게! 여기서 전하를 시해한다 하여 자네에게 이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네!”
임금을 겨누고 있던 총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능양군을 겨눌 때에는 한 치 흐트러짐도 없던 총구였다.
그 총구 앞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라를 사랑하기로는 이 조선 땅에서 제일일 사람이었다.
“자네의 거사를 막으려 동행한 것은 결코 아니네. 허나, 전하를 상왕의 자리에 올리고 유폐하는 일이 있더라도 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영감…….”
“섬기던 임금의 피를 손에 묻혀서는 안 되네! 영원히 자네 이름이 역사에 오명으로 남을 것이야. 그래도 좋단 말인가? 계해년 반정 때, 폐주를 살려둔 이유를 잘 생각해 보게!”
성 영감의 강직한 눈빛이 전해져왔다.
그의 눈빛은 마치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반정이 성공한다 해도 능양군을 이 자리에서 처단한다면, 그 일은 정치적으로 마이너스가 될 뿐이라는 것을.
암군이라도 왕은 왕인가. 이대로 능양군의 친위세력을 전부 숙청해 후환을 없앤다 해도, 목숨은 붙여놓아야 한단 말인가.
진성대군이 연산군을 살려놓고, 능양군이 광해군을 살려 놓았듯이?
“하하…… 그래도 역도 중에서도 염치를 아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구나. 부제학, 네가 역모에 가담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전하께서 좌의정 김상헌을 등용하려 하실 때, 신이 그것을 막지 못해 결국 크나큰 불충을 저질렀나이다. 그것에 대한 속죄라 생각해주시옵소서.”
“속죄라? 부제학, 네가 시골에서 상경시킨 자가 역도가 되었다는 사실부터 속죄해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내 총애를 받고도 네가 역모에 가담한 일을 속죄해야하는 것이 아니더냐?”
성 영감은 능양군의 면박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복잡한 심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내적 갈등이 극에 달할 만했다. 성 영감은 결국 전형적인 조선 왕조의 충신이었으니까. 나처럼 충이고 뭐고 체화하지 못한 현대인과는 다를 수밖에.
한편으로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 총구 앞에 뛰어든 충신을 대하는 능양군의 태도를 보고, 내 안에서 적개심이 불같이 일고 있었다.
“하,하, 으하하하! 내 아주 만고의 충신을 둔 것 같구나! 역모에도 가담하고, 나를 향한 총구도 막아서고, 길이길이 역사에 남을 충신이 아니냐!”
그 와중에도 능양군은 그 충신 덕에 다시 힘을 찾은 모양이었다. 다시 비꼬기를 시작한 그의 혀에 힘이 돌아온 것 같았으니.
성 영감이 그를 겨누는 총구를 가로막은 탓에 여유라도 생긴 것일까. 그의 희번덕거리는 눈빛 또한 성 영감 뒤로 엿보이고 있었다.
“비켜라! 부제학! 내 저 역적 놈의 손에 차라리 목숨을 잃는 편이 나을 테니!”
임금의 손에 치인 성 영감이 바닥을 굴렀다. 그걸 본 내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잠시 기울어졌던 총구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아바마마! 안 교리를 자극하지 마시옵소서!”
마루를 쿵쿵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내 오른팔에 와닿는 강한 손길이 느껴졌다. 세자였다.
세자까지 능양군의 처단을 막으려 하는가. 헌데, 이런 상황에서 임금은 안도하기는커녕 입꼬리를 괴상하게 찌그러뜨릴 뿐이었다.
“아비를 친 자식이 드디어 왔구나!”
“아바마마!”
이번엔 세자인가.
“왕아. 내 네가 언젠가 나를 배신할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걸 막기 위해 붙인 자 역시 나를 배신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아바마마! 소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심을 품었던 적이 한시도 없었사옵니다! 아버님과 대립을 피하고자 동궁을 떠난 적이 없었사온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을 위해 와신상담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그게 궁궐을 다시 피로 뒤덮은 네가 입에 담을 이야기라 생각하느냐? 하.”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능양군이었다. 이런 상황에 자신의 편을 드는 사람들을 밀치고 입씨름을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기억하거라. 언젠가 저놈은 네 목줄기도 물어뜯을 것이다. 한 번 주인의 피 맛을 본 개는 그것을 잊지 못하는 법이다.”
“아바마마!”
“나를 밀어내고 네가 옥좌에 오른다 한들, 얼마나 더 잘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내 자리에 있었다면,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겠느냐?”
능양군은 모질지 못한 세자를 붙잡고 숫제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아니,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방어기제이자 자기합리화인가.
“오랑캐의 말발굽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너는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 그걸 아는 자가 나를 어찌 힐난할 수 있단 말이냐!”
“그건…….”
“잊지 마라. 저놈은 지금 너를 받드는 체하고 있지만, 너를 옹립하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모든 책임을 네게 뒤집어씌우고 또다시 궁을 습격할 놈이다.”
“…….”
“그래. 지금 나에게 하듯이 말이다. 아들아.”
내 오른팔을 막고 있는 세자의 손길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긴박한 상황 탓일까, 세자는 분명 능양군의 도발에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가 영원히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저놈도 사람인 이상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끝까지 훼방을 놓겠단 소리군.
세자는 임금의 기에 눌렸는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금도 가서는 안 될 세자와의 관계에 능양군이 쐐기를 밀어 넣는 상황을 이렇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왜 말이 없느냐, 왕아? 너도 이미 저놈에게 그걸 느끼기라도 한 것이냐?”
“…….”
세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런 세자를 바라보며, 능양군의 조롱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도 능양군은 우리를 흔들어놓는가. 천천히 방아쇠를 향해 검지가 움직이고 있던 찰나였다.
내 오른팔을 쥐고 있던 세자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세자의 입에서는 낮고 굳은 결의가 흘러나왔다.
“……소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라?”
“아버님께서는 소자와 안 교리가 겪었던 일을 하나도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고작 그런 도발적인 언사로 흔들릴 정도로, 저희의 신뢰는 얕지 않습니다.”
분노로 흐려졌던 시야가 천천히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힘이 실린, 세자의 명료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아버님께서 신하들을 어떻게 여기셨는지는 소자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아버님의 실패를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실패라 했느냐? 네가 무엇을 안다고! 정치라고는 심양관의 소꿉놀이 외에는 접해본 적이 없는 놈이 어찌 그리 단언하는 게냐!”
“신하들의 파벌을 가르고, 그들을 이용하는 방법은 아버님만큼 알 수 없겠지요. 허나 남의 땅에서 조선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끌려간 백성들이 내는 신음소리가 어떠한지는 아버님보다 더 선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놈의 백성, 백성! 그 백성들이 도륙을 당할지언정 어찌 내가 성을 나갈 수 있었겠느냐! 내가 곧 조선이고 내가 쓰러지면 조선도 쓰러지는 법인데!”
능양군은 여전히 악을 쓰고 있었지만, 세자가 다시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 때문일까, 내 팔에 닿아 있는 세자의 손아귀에서 더 이상 힘이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나는 어느새 왕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일조차 잊고 있었다.
능양군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세자가 이렇게 대드는 일은 그도 처음 접하는 상황이었는지, 어느새 기세등등하던 임금의 분위기가 한풀 꺾인 것이 느껴졌다.
“아바마마, 소자는 스스로 볼모가 되고자 남한산성을 나서던 그 순간에도 아바마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청의 요구와 조정의 변명 사이에 끼어 전전긍긍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한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
“그것이 조선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자가 잠시 괴롭고 불편하더라도 군주와 그 후계의 사이가 더는 벌어지면 아니 될 일이기에! 세자 된 몸으로서 더 멀고 큰 미래를 봐야 했기에! 헌데 어찌하여!”
세자의 목소리가 이토록 격정에 휩싸인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찌하여 아바마마께서는 소자에게 칼을 들이미신 것입니까? 어찌하여 제 수족과 같은 안 교리와 한당의 신하들을 쳐내려 하신 것입니까? 제가 동궁에 틀어박혀 쥐 죽은 듯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셨던 것입니까? 어째서?”
“……국법을 어긴 자를 징벌하려 든 것이 내 잘못이란 말이냐?”
“안 교리가 세운 공에 비하면 그가 저지른 과오는 터럭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바마마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능양군을 노려보는 세자의 눈에서 푸른 불길이 흘렀다. 그에 맞서는 임금의 기운은 점점 누그러들고 있었다.
“저는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안 교리도, 다른 신하들도 잃을 수 없습니다. 아바마마께서 그들을 쳐내려는 목적이 고작 그런 사소한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셨다면…….”
“고작 사소하다니! 말을 가려 하거라!”
“저는 차라리 제 신하의 방패가 되어 아바마마의 칼날을 쳐내고 왕위를 계승하겠습니다.”
“이노오오옴!”
다시 한번 능양군의 노성이 양화당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세자의 등은 흔들림이 없었다.
“감히 신하 따위의 편을 들어 혈육이자 임금인 내게 반기를 들어? 네놈이……! 네놈이……!”
“아바마마! 제발 이성을 찾으십시오! 그깟 권력이 무엇이라고 죄 없는 이들을 국문하고 유배를 보내서까지 얻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깟? 그깟이라고 했느냐, 왕아?”
능양군의 입에서 길게 침 한 줄기가 튀어나왔다. 임금은 더 이상 감정의 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권력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이상이자, 목적이자, 시작이자, 끝이다! 내 폐주를 쳐냈을 때도, 그에게 부당하게 권력으로 찍어 눌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결심한 것이야! 내 아비와 형을 그의 손에 잃었기에!”
“…….”
“반정 공신들이 어찌하여 내게 붙었다 생각하느냐? 내가 왜 이괄을 역적으로 몰았다 생각하느냐? 늙은 김상헌은 어찌하여 노구를 이끌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생각하느냐!”
“아바마마!”
“누구든 권력을 한 번 맛보면 절대 내려놓지 못하는 법이다! 세상에서 가장 달디 단 미약(媚藥)이자 맹독이지! 네놈과 뜻을 함께하는 한당들도, 아니, 내게 총구를 겨눈 저놈도 무엇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느냐!”
핫. 격정을 토해내던 임금의 입에서 갑자기 코웃음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천천히 치켜들린 그의 손가락은, 똑바로 나를 향해 뻗어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나를 옥좌에서 끌어내려 가두더라도 목숨만은 붙여놓을 생각인가 본데, 고맙다. 아주 고맙다, 왕아.”
“갑자기 그 무슨……!”
“내 끝까지 질기게 명줄을 이어가며 네놈들이 타락하는 모습을 끝까지 봐 주지! 지금은 고귀한 척 떠들어대던 왕이 네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너 스스로 증명하는 꼴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봐 주겠다!”
능양군의 광기 어린 웃음이 한참 동안 양화당을 가득 울렸다. 그것을 듣는 이들의 등줄기에 소름이 흐르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싸워라! 물어뜯어라! 서로 죽여라! 이괄이 그러했고, 한명련이 그러했고, 흥안군이 그러했듯이! 네놈들도 권력에 미쳐 서로에게 칼날을 돌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
“왕이 너도 깨달은 모양이구나! 네 몸에도 내 피가 흐르고,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될 것이란 것을! 크핫하하하!”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능양군이 궤변으로 세자를 현혹하는 꼴을 더 이상은 봐 줄 수 없었다.
오른팔에 힘이 들어갔다. 목표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총구는 한 뼘 위를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탕!
권총에 달린 부싯돌에서 불꽃이 튐과 동시에, 탄이 발사되었다.
대들보에 쌓여 있던 먼지 일부가 우수수 떨어져 침전 안에 자욱하게 일었다.
“으아아악!”
발사된 탄은 목표에 정확히 명중했다.
능양군이 쓰고 있던 익선관을 총알이 관통한 것이다.
“안 교리!”
“저, 저 미친놈이 감히 나를 향해!”
왕의 상징이 내 발 아래에 굴렀다. 맨상투가 된 임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리 말씀 잘 하셨습니다, 전하. 허나, 전하께서 세자 저하를 염려해 하신 말씀은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뭐야?”
“제가 있는 한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왜냐…….”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청나라에서 모든 일을 마치고 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언젠가는 내가 미래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저는 당신이 그대로 옥좌에 버티고 있었을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부 알고 있으니까요.”
“허, 허튼 소리! 네놈이 무당이라도 된단 말이냐? 몇 번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간이 부은 모양이구나!”
능양군이 쏟아내는 독설은 그저 내 귓가를 스칠 뿐이었다.
내가 내뱉은 의외의 말에, 바닥을 구르던 성 영감과 내 앞을 막아섰던 세자의 시선이 전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무당이 아닙니다. 저는 미래에서 온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