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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31화 (131/298)

131화. 순응

순간, 공기가 멎었다. 양화당 안은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듯이 침묵만이 감돌았다.

“저, 저 미친놈이! 왕아, 너는 저런 미친놈을 믿고 아비에게 반기를 든 것이냐? 네 아비에게 서슴지 않고 총알을 쏘아대는 광인을 믿고?”

“…….”

“부제학! 네가 아끼던 제자가 실은 미치광이였구나! 그 미치광이를 막지 못하고 최악의 불충을 저지른 심정이 어떠하냐?”

그러나 이 상황에서 입을 여는 자는 능양군 한 명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두 명을 향해 능양군의 눈동자가 번갈아 움직였다.

“어째서 아무 반응도 없는 것이냐! 저런 허황된 말을 늘어놓는 자에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냐?”

“…….”

“어서 절망해라! 자괴감에 빠져들어라! 네놈들이 믿고 따르던 저놈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지 않았느냐!”

글쎄,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누구일까.

내게 향해 있는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은 평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앞을 막아서고 있던 세자가 천천히 긴 한숨을 쉰 것은 잠시 후였다.

“드디어 말해주었구나. 안 교리.”

“저하…….”

“내 홀로 속을 썩이며 어림짐작만 하고 있었다. 어째서 네가 그런 신묘한 지식들을 알고 있었는지, 왜 청의 거물들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는지, 어떻게 무관도 아닌 네가 신이 내린 것만 같은 전략들을 풀어놓았는지.”

“왕아! 너도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냐? 어째서 그런 미치광이의 말을!”

“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글로만 전달받은 아바마마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안 교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제게 보여주었는지, 그것은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겠지요.”

세자가 나를 향해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무한한 신뢰가, 내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세자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는지 능양군의 얼굴에서 얼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다급해진 임금의 눈동자가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아 있는 성 영감에게로 향했다.

“부제학! 저 둘이 동시에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하다! 저놈들이 오랑캐 놈들과 있는 사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부제학은 아는가?”

“……전하, 소신이 호남에 어사로 다녀오면서 분명히 보고 드리지 않았사옵니까.”

“부제학?”

“신이 상을 치르는 중이던 웬 선비를 만나게 된 것은 분명, 혜성이 떨어진 자리를 좇았던 자리에서였사옵니다. 분명 서계에도 그리 적어 올렸을 터.”

영감님…….

성 영감에게도 일격을 맞은 능양군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숨을 몰아쉬던 임금은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유자(儒者) 된 입장으로서 괴력난신의 언급은 삿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오나, 소신 역시 안 교리에게 평범한 이들과 다른 무언가를 줄곧 느끼고 있었나이다.”

“평범한 이들과는 당연히 다르겠지! 저놈은 반골의 상이 아닌가!”

“처음엔 저도 안 교리를 이상하다 생각했었지요. 허나 어사 임무를 수행하며 그와 부대끼게 되면서 마음이 달라졌나이다. 이 해괴한 선비는 나보다 더 멀리, 더 높은 곳을 보고 있고,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또한 진짜다. 그러니…….”

“……다들 미쳤구나!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

능양군을 바라보던 성 영감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어사는 남원에서 내게 위정자의 본분을 가르치던 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사람이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주자. 그가 가진 신비한 무언가를 조선을 위해 쓰도록 도와주자. 그런 마음을 품고 한양으로 데리고 올라왔었나이다.”

“네놈이 완전히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니냐! 임금을 치는 일이 잘못된 길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안 교리의 진실된 마음을 먼저 외면한 사람은 전하셨사옵니다. 그가 한양 바닥을 구르며 모아온 부정의 증거도, 드디어 벼슬길에 올라 나라를 위해 골수까지 바쳐가며 일하던 모습조차 외면하시고는 쳐내려 하시지 않았나이까.”

“부제학…… 내 처음부터 네놈이 저자를 자식 감싸듯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능양군이 자신을 향해 씹어뱉어대는 말을 듣고도 성 영감의 표정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충(忠) 대신 사적인 감정을 우선하는 자신을 능양군이 돌려서 비난하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을 터인데.

“……제 핏줄을 타고 태어난 자식만이 자식이겠나이까, 전하.”

“무엇이?”

“안사람과의 사이에서 얻은 못난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한은 아직도 남아있사옵니다만, 제 유학자로서의 모든 것과, 신료로서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자식은 이 땅에 남기고 갈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이…… 이잇……!”

어느새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한 성 영감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군주를 향해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부제학!”

“소신, 전하께 이러한 큰 불충을 저지르고도 조정에 더 이름을 올려놓을 생각은 없나이다. 허나 한 가지만 알아주시옵소서. 자식이 품은 큰 뜻을 펼치는데, 어떤 아비가 그 앞길을 막겠나이까.”

“네놈은 충보다 생판 남과 맺은 인연이 그리도 중요하단 말이냐!”

“남이라니요. 제 자식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전하.”

왕을 향해 깊이 절을 올렸던 성 영감이 몸을 바로 했다. 그를 바라보는 내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소신, 신하 된 자로서 전하와 끝을 함께하겠나이다. 그러니 소신과 함께 이제 물러나 주시옵소서. 그러기를 감히 청하옵나이다.”

“부제학! 나는 너를 끝까지 믿었건만! 너마저!”

“이미 반정군이 외부에서 끌어모은 병력이 창의문을 넘어 도성으로 진입했을 것이옵니다. 곧 좌의정 김상헌을 비롯한 전하의 친위세력들은 전부 추포되겠지요. 전하께서 계해년에 그러셨듯이.”

성 영감의 말에 실린 감정이 묘하게 구슬펐다.

그 복잡한 감정은,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고독했다.

능양군은 그런 성 영감을 마주하고 나서야 현실을 겨우 체감한 듯했다.

그도 잘 알 것이다. 방금까지 연이어 울려대던 총소리와 비명이 멈추었는데도 왕을 구하러 양화당으로 뛰어드는 병력이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완성부원군 최명길도 소신과 뜻을 같이했나이다. 부디, 새로운 세대에 조선을 맡기고 신과 끝을 함께해주시옵소서.”

“나더러, 나더러 왕위를 포기하란 말이냐, 부제학?”

“상왕으로 물러나실 필요까지 있겠나이까. 전하께서 잔병으로 고생하신지 오래인 것은 만조백관이 아는 사실이오니, 병을 칭하시고 저하께 대리청정만 명하셔도 모든 일은 순리대로 풀릴 것이나이다.”

아, 성 영감은 이걸 위해서 나와 동행한 것이었구나.

이제야 영감님이 언질도 없이 약속 장소에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정변(政變)을 최대한 온건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서, 만약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돌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 연세에 위험을 무릅쓰고 군사들의 맨 앞을 달리신 것이었다.

“전하께서 내리실 선택에 맡기겠사옵니다. 다만, 신은 전하께서 어떤 선택을 내리든 전하와 끝을 함께하겠나이다. 대리청정이든, 양위든, 아니면 또 다른 방법이든…….”

“……내가 이 자리에서 자진(自盡)한다고 해도 내 뒤를 따르겠느냐?”

“이미 전하께 씻지 못할 죄를 지은 몸이옵니다. 죽음인들 두렵겠나이까.”

다시 한번 성 영감이 능양군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 악에 받쳐 피라도 토해낼 것 같던 능양군은, 그런 자신의 신하를 보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 이 자들을 막아 세울 생각은 없단 말이냐.”

“소신 하나가 마음을 돌린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나이까. 소신은 지금, 소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고성이 오가던 양화당에 오랜만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능양군은 한 번 천장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다시 성 영감에게로 시선을 돌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임금의 입이 다시 열리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알았다. 네 뜻을 따르마, 부제학.”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폐주처럼 군으로 강등되어 제주로 유배를 떠나는 것보단 낫겠지. 저기 저 굳센 척하는 녀석도 아비를 이 이상은 모질게 대하지 못할 것이야.”

맨상투 차림의 왕이 바닥에 떨어진 익선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걸 바라보는 세자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곧 그 움직임은 잦아들었다.

왕은 그렇게 구멍 난 익선관에 한참 동안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익선관에 이런 상처가 난 것은 처음 보는군. 이걸 내려놓겠다 마음먹으니, 이토록 가슴이 시원한 것을.”

“…….”

“받아라, 왕아.”

어리둥절해있던 세자에게로 임금이 던진 모자가 날아들었다. 총탄에 찢긴 익선관의 정수리 부분이 유난히 을씨년스러워보였다.

“내 뒤로 물러나, 네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아바마마…….”

“옥새를 받았다고 끝난 일이라 생각하지 마라. 임금의 용포는 피로 물들어 붉은 빛을 띠는 것이니.”

“아바마마, 소자는 이런 결말까지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옥좌에 오르고 나면 반드시 내 생각이 드는 날이 올 것이다. 네가 과연 권력이란 독배를 들이키고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이 애비는 그것이 궁금하구나.”

임금의 걸음이 세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세자에게 손을 뻗으려던 임금은, 무엇이 걸리는지 손을 다시 거두어들이고는 제자리로 걸음을 돌렸다.

털썩. 방금까지 앉아있던 보료에 임금이 몸을 누였다. 그제서야 방금까지 있었던 일로 침전 안의 꼴이 말이 아닌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엎어진 서안, 나뒹구는 벼루와 먹물, 그리고 책.

“그리고, 너, 안한수.”

“예, 전하.”

“네놈이 미치광이라는 생각은 아직 바뀌지 않았지만, 한 가지만 묻겠다.”

맨 상투머리를 한 임금의 눈동자가 나에게 고정되었다. 양화당을 박차고 들어선 이래로, 가장 묵직하게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나와 세자의 차이가 무엇이었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내 너를 쳐내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에 너를 다시 중히 쓰려 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네놈이 장원 백패 두 장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너를 중하게 쓰겠다 생각하지 않았던 적이 없느니.”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봐야 내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텐데.

하지만 능양군에게서 이런 감정이 전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가시 갑옷을 두르고 있던 것 같았던 임금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생각해 보거라. 네놈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거든 너를 세자에게 붙여 오랑캐의 땅으로 보냈겠느냐. 물론 네놈이 이렇게 반기를 들 놈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은 내 실책이다만.”

“…….”

“어째서 세자와 나 사이에서 세자를 고른 것이냐? 아예 김상헌의 손을 잡고 내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으면 너를 쳐낼 일도 없었을 터.”

임금이 가볍게 한숨을 토했다. 그 한숨에는 조그만 후회가 묻어나고 있었다.

“대답해다오. 나와 세자가 무엇이 달랐기에, 나를 버리고 세자를 택했느냐.”

“……군주로서 신하에게 요구하신 것이 달랐습니다.”

“요구한 것이라?”

“전하께서는 분명 제게 절대적인 충을 요구하셨지요. 아직도 대전별감의 칼날을 운운하시며 충성을 맹세하라던 전하의 목소리가 제 귀에 선합니다.”

“그것은 군주로서 당연한 처사가 아니더냐? 세자는 무엇이 달랐단 말이냐?”

많이 달랐지. 당신과는.

임금의 목소리에 점점 비통함이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선택받지 못한 자의 안타까움인가.

“저하는 제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말도 기수를 고른다는 건방진 선비에게 질책 하나 하지 않았습니다. 청주가 저를 탐낼 적에는 오히려 저를 풀어주려고까지 했습니다.”

“…….”

“전하께서 제게 칼날을 들이미셨을 때, 저하는 본인이 위험에 처할 것이 분명함에도 저를 압록강 너머로 보내려 애썼습니다. 학질에 걸려 회복 중인 몸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임금은 말을 잃었다. 본인도 깨닫는 것이 있기를.

“저하는 제게 용이 되라 했습니다. 스스로 용이 되는 대신, 용이 노닐 물이 되어 제 뜻을 펼치도록 하겠다 했습니다.”

“하…….”

“전하가 저를 미치광이라 부를 때, 저하는 제가 도깨비여도 품겠다 했습니다. 그것이 저하와 전하의 차이였습니다, 전하.”

“그것을 어찌 군신(君臣)의 관계라 이를 수 있겠느냐. 마치 너를 또 다른 임금으로 삼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능양군의 입가에 괴상한 웃음이 올라앉고 있었다. 마치 나와 세자를 비웃는 것처럼.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세자가 대화에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완전히 다릅니다. 아버님.”

“……무엇이 말이냐, 왕아.”

“소자와 안 교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도, 안 교리도 누군가의 명령을 따라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 일입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그리도 중요하단 말이냐.”

“백 가지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군신의 관계도 백 가지쯤이 있다고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아바마마.”

세자의 시선이 흘긋 나를 향했다 다시 멀어졌다. 세자도 내가 느끼는 기분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으려나.

“오륜에서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소자와 안 교리 사이의 의(義)는 감히 말씀드리자면 천하 어디에도 비길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훌륭한 군신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

“지켜봐 주십시오, 아바마마. 안 교리에 대한 제 판단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미래에서 왔다는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믿겠다는 것이냐.”

“믿습니다. 안 교리가 그동안 소자를 위해 한 일들은, 그 정도의 비범한 인물이 아니면 해낼 수 없었을 일들이니까요.”

말을 끝맺은 세자가 가벼운 웃음을 내뱉었다. 마치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신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세자는 쓰게 웃고 있었다.

“……부럽구나.”

“아바마마?”

“내게도 너처럼…….”

임금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와 함께 내뱉어진 임금의 탄식에는, 쓸쓸함이 가득 담긴 듯했다.

***

탄식과 함께 꽤 오랜 시간 동안 말을 잊고 있던 임금은, 스스로 경덕궁으로 상왕이 되어 이어(移御)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경덕궁, 내가 아는 현대의 이름은 경희궁. 폐주 광해가 임금의 아버지 정원군의 저택에서 왕기가 흐른다 하여, 그 부지를 몰수하고 새로 세운 별궁.

서궐로 불리면서 이궁(異宮)의 역할을 하던 궁궐이니, 능양군을 격리하기에 이곳보다 최적의 장소는 없었다. 임금 스스로 그 뜻을 내비쳐 준 것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잠시 나는 세자와 나눌 이야기가 있다. 자리를 비켜다오.”

어차피 임금의 처분이 결정되었으니, 이제 반정을 마무리할 일만 남은 상태였다. 능양군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원역사에서 오해와 의심이 쌓여 파탄에 이르렀던 부자(父子) 관계도, 조금은 봉합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침전 밖으로 막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위험하네!”

갑자기 누군가 내 옆구리를 밀쳐냈다. 열린 문 사이로 비친, 이전보다 조금 밝아진 밤하늘에서 무언가가 반짝, 하고 빛난 것이 눈에 들어온 직후였다.

“영감?”

나를 갑작스레 마룻바닥에 넘어뜨린 것은 동행중이던 성 영감이었다. 갑자기 왜?

“으…… 으으…….”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성 영감이 흘리기 시작한 신음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를 밀쳐내며 마루에 엎드린 그의 옥색 도포에, 웬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영감! 어째서!”

꿩 깃이 달린 화살이 성 영감의 등판 한가운데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화살촉이 파고 들어간 상처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도포에 얼룩지고 있는 것이 황망해진 내 눈에 들어왔다.

“궁을 범한 역적들은 들어라! 더 이상의 피를 보기 전에 투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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