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풍수지탄(風樹之嘆)
사소한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지난 일을 뒤돌아보았을 때, 소수의 적이 갑자기 나타난 정도의 일은 사소한 사고에 불과했어야 했다.
지금까지 마주친 병력들은 전부 격멸한 상태였으나, 아직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 백여 명의 병력이 남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금군과 홍화문 수비병을 격멸한 후에도 진형을 유지하라는 명을 이미 내렸던 터였다.
그 잔병들이 집춘문 방향에서 울려 퍼진 호각소리를 감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허나 그들이 양화당으로 들이닥친다 해도, 병력의 질과 양 모두 호포대가 우위인 이상 손에 들어온 능양군을 놓칠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런데…….
“영감! 정신 차리십시오! 영감!”
어째서?
어째서 지금 성 영감이 내 눈앞에서 화살을 맞고 쓰러진 것인가.
“역도의 수괴는 쓰러졌다! 너희 오합지졸들은 어서 투항해 목숨이라도 건지는 것이 어떠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적이 어떤 책략을 쓴 것인지, 적과 호포대의 현황은 어떤지. 지휘관으로서 판단해야 할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로지 성 영감에게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만이 내 귓가를 울릴 뿐이었다. 내 방패가 된 그의 몸에 깔린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너희의 수괴는 쓰러졌다! 속히 투항하라!”
이가 빠드득 갈렸다. 적은 정면으로 붙으면 승산이 없으니 지휘관을 기습하는 작전을 쓴 것인가.
“나으리!”
김 갑사와 김귀돌이 동시에 나를 부르짖는 말 역시, 저 멀리 어딘가에서 전해지는 것처럼 어렴풋하게 들리고 있을 때였다.
이게 무슨 온기지? 갑자기 와닿은 낯선 촉감에 문득 성 영감에게 얹힌 왼손을 빼 보았다.
손바닥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호포대.”
“옛!”
목구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울분을 토해낸 외침은 내 성대를 온통 갈라놓고 말았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
**
반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잠시 혼란에 빠졌던 한양의 민심은 금세 진정되었다.
격문(檄文) 수백 장이 빠르게 한양바닥에 뿌려진 덕분이었다.
병에 걸려 쇠약해진 임금의 눈을 가리고, 민생을 외면하는 간신들을 벌한다는 명분이 적힌 격문. 김육의 인쇄소에서 미리 파놓은 목판으로 인쇄한 물건이었다.
거기 박혀있는 내 이름 세 글자가 민심을 가라앉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굳이 부정하진 않겠다. 정치인은 이미지라는 격언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던 건이었다.
그렇게 날조와 선동이 인쇄된 종이들이 반정의 뒷수습을 하는 내내 한양에 지속적으로 살포되었다.
“전 좌의정 김상헌은 사약을 받으시오!”
그리고 나는, 결국 정적(政敵)들의 피를 손에 묻히고 말았다.
임금의 명을 받아 반대파를 숙청하려던 김상헌과 그의 당파는 체포되어 처형되고, 그 추종자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병중이던 임금을 감금하고 임금의 뜻을 날조해 충신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죄목이었다.
능양군에게 세자와 세자빈을 쉴 새 없이 음해하던 소의 조씨는 폐서인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원역사에서는 사약을 받았는데, 목숨은 부지했으니 그녀로서는 다행인가.
궁궐에서 호포대를 막아섰던 금군은 김상헌과 산림 극단주의자의 사주를 받아 임금을 감금한 역적이 되었다. 이미 대부분의 금군은 그날 궁궐에서 죽었고, 죽은 자들은 말이 없는 법이었으니까.
“으……으으!”
반정의 후속 조치를 시행하느라 퇴근은커녕 잠시 눈을 붙일 시간마저 모자라,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이다가도 악몽에 시달려 깨어나기 일쑤였다.
베이기 전에 먼저 베어야 한다. 이미 전장을 숱하게 구르며 배운 교훈이었으나, 내 손으로 조정에 핏물을 흩뿌리게 된 일에 아무 감흥이 없을 리 없었다.
화살에 귀가 꿰뚫려 땅에 엎드린 채로 목이 잘려나간 자들의 환영이 몇 번이고 내 눈앞을 떠돌았다. 김상헌의 사주를 받아, 내가 유배되면 귀양지에서 나를 제거할 계획을 꾸민 자들이었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내 마음이 어떻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격언 그대로였다.
반정을 저지른 내겐, 조정을 정상적으로 굴러가게 만들 책임이 있었다. 멀쩡하던 정신에 천천히 구석부터 금이 가는 중이었다.
반정의 뒤처리를 하는 내내, 집으로 돌아가 아내의 품에 얼굴을 묻고 모든 것을 잊고 싶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평소엔 그렇게 가깝던 내 집은 한없이 멀어진 채였다.
“납득할 수 없소. 어찌하여…….”
“전하의 뜻이오. 산당에서도…….”
김상헌의 일파를 제거하는 것에는 뜻을 모은 산당이었으나, 능양군의 양위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최명길과 김육이 김집을 상대하는 동안, 송시열과 기나긴 입씨름을 벌여야 했다. 그와 이렇게 격론을 벌이는 일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풀려나갔다. 옥새를 내던지고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겨간 상왕이 침전에 틀어박혀 접견마저 모두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상황에 몰리니 능양군이 현자가 된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에 세자에 대한 부성애가 깨어난 것인지, 아니면 눈앞에서 화살을 맞아 의식을 잃은 충신을 본 충격 탓일지는 몰라도, 전 임금은 우리의 앞길을 막을 생각이 더는 없음이 확실했다.
차라리 ‘살려만 다오, 조선이고 왕위고 모두 주겠다’라고 울부짖는 능양군을 쳐냈다면 속이 시원하기라도 했을 텐데.
하지만 내 마음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된 것이 세자와 조선의 미래에는 훨씬 유리할 것이다. 강상죄를 저지른 군주의 정통성이 결코 멀쩡할 순 없는 법이니까. 적어도 세자가 아비를 죽인 자라는 삿대질을 받을 일은 없겠지.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는 와중에도 매일같이 경희궁으로 건너가 새벽 저녁으로 문을 닫아건 아비에게 문안을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모습 탓인지, 세자의 진심을 의심하는 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를 말린 성 영감의 판단은 옳았다. 허나 나를 위해서라면 총구 앞에 몸을 들이밀기도 서슴지 않던, 내 스승의 용태는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아 내 마음을 무겁게 할 뿐이었다.
“나으리! 큰일 났습니다요!”
일거리가 쌓여있던 궐내각사로 웬 무장이 뛰어든 것은 반정의 뒤처리가 마무리되어가던 무렵이었다. 쓸려나간 금군의 역할을 당분간 호포대가 대신하게 되면서 호위별장 역할을 맡고 있던 김 갑사였다.
“무슨 일인가? 자네 근무지는 여기가 아니라 저하께서 계신 편전일 텐데?”
“수문장, 돈화문 수문장에게서 소식이 들어왔는데, 부제학 영감께서!”
김 갑사의 입에서 성 영감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자마자 불길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가 말을 미처 끝맺기도 전에, 나는 전각을 박차고 뛰어나와 달려 나가고 말았다.
***
“여긴 어인 일로 왔는가? 나랏일이 분명 급할 터인데.”
자리에 누운 성 영감은 평온해 보였다. 분명 영감님의 가족에게서 나를 불러오라는 전갈을 받고 뛰어간 것이었는데, 도리어 내 스승은 일거리를 미뤄두고 달려온 나를 타박했다.
“영감…….”
“자네는 정말 끝까지 말을 안 듣는구만. 내 분명 예전부터 영감이란 호칭은 싫어한다 했거늘.”
성 영감이 영감이라 불리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종삼품 사간에서 정삼품 대사간으로 진급해 나리에서 영감으로 호칭이 바뀌게 된 것이……. 아, 나와 만난 직후였다.
그와 보낸 세월을 깨닫고 코가 시큰해진 나를 보며, 성 영감은 힘없는 미소를 띠었다.
“그럼 격에 맞지 않는 나리라는 호칭을 원하십니까. 부제학까지 오르신 분을 나리라 부르면 주위에서 저를 욕할 것입니다.”
“하하. 이미 한 나라도 뒤집어본 사람이 남의 시선을 따지는가. 다만 나리라는 호칭도 나쁘지 않구만. 자네와 장수 산골에서 만났던 그 날이 떠오르는 듯하이.”
아련해진 어사의 눈동자는 지나온 과거를 훑고 있는 듯했다. 그의 초췌해진 얼굴은 마치 운봉에서 염병으로 쓰러졌던 그 시절과 같았다.
하지만 그때와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화살이 쪼개놓은 뼈를 아물게 하는 치료약은 없었으니까.
“즐거운 옛 이야기를 하는데 표정이 왜 그런가? 자네도 나이를 헛먹은 것이 분명하구만, 장가까지 간 사람이 말이야.”
“어사 나리…….”
“어허, 내 분명 감정을 얼굴에 쉬이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지 않은가. 내 가르침을 벌써 잊은 것인가?”
어사의 타박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이 방을 비우고 나와 어사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마련해준 이유를.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 그리 자책하지 말게. 내 스스로 원해서 행동한 결과이니.”
“제가, 제가 조금만 더 용의주도했어도…….”
“좁은 궁궐 안에서 어둠에 몸을 숨긴 살수를 어찌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위험한 부분은 피해갈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것도 어찌 보면 노환 탓이라 봐야 하는가, 하.”
평소 같으면 농담을 건네며 소리 내어 웃었을 어사였다. 허나 지금은 얼굴에 웃음을 짓기도 벅찬지 얼굴을 찡그릴 뿐이었다.
“그래도 자네같이 앞길이 창창한 사람 대신 나 같은 늙은이가 가게 되어 다행일세. 자네가 그 화살에 당했더라면 나는 평생을 후회했을 것이네.”
“……소인도 나리를 이렇게 보내게 된 것을 평생 후회할 것입니다.”
“후회하지 말게. 청에서 온갖 참상을 접한 사람이 어찌 사람 하나 상한 일에 이리 마음을 상해하는가. 앞으로 중한 나랏일을 맡으며 더한 일도 숱하게 겪을 것인데.”
마지막 자리에서까지 성 영감은 나를 훈계하고 있었다. 그 가르침은 몸속 깊이 스며들면서 묘한 슬픔을 남겼다.
“그리고…… 아비가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나리…….”
“내 전하 앞에서 꺼냈던 말 중 진심 아닌 것이 없었다네. 이제 와서 자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낯부끄럽지만 말이지.”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어사 나리께서는 쾌차하실 것입니다. 제가 운봉에서 그랬듯 어떻게든…….”
목에서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 때문에, 나는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그런 나를 어사는 애틋한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이 조선이 아니었다면, 항생제나 소독약, 수술해줄 외과의든 뭐든 있는 현대였다면 고작해야 이런 상처로 어사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쇠맛이 느껴졌다.
“그러지 말게. 난 내 운명을 알고 있다네.”
“그 무슨…….”
“가족들에게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지만, 실은 이 자리에는 한 사람이 더 와 있거든.”
“……예?”
“내 머리맡에 앉아있는 사람 말일세. 자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겐가?”
방 안에는 분명 나와 어사뿐이었다. 어사가 가리킨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사의 시선은 허공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그렇군. 정말 갈 때가 된 모양이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나리.”
“이 사람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긴 하나, 자네에게까지 모습을 숨길 사람은 아니거든.”
어사의 얼굴에 서글픈 웃음이 날아가 얹혔다. 어사의 시선과 허공이 맞닿은 자리에서, 나 역시 초승달을 닮은 눈썹과 붉은 입술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런 어사의 모습은 왜인지 모르게, 몽룡이라 불리던 젊은 시절의 그를 떠올리게 했다.
“유학자가 어떻고, 괴력난신이 어떻고 장광설을 풀어놓은 것이 부끄러울 정도구만. 세상의 이치란 이리도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것을.”
“나리…….”
“어릴 때 떠나보낸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 이리도 선명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고 나니, 자네가 미래에서 왔다는 말에 품었던 일말의 의심도 사라졌다네.”
허공을 헤매던 어사의 시선이 내게 와닿았다. 그 눈빛에는 사그라드는 잔불만이 고요히 불타고 있었다.
“혹시 자네, 전하와 저하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나리. 어찌 나리 앞에서 제가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자네가 알던 조선은 이 이후로 어찌 흘러갔는가. 원래의 역사를 알고 싶네.”
어사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요절하고, 강빈과 세손들은 인조의 손에 죽어나가며,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이야기를 어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귀에 담았다.
예송논쟁이 일어나고, 숙종, 영조, 정조 치세에 신하들의 피가 흐르며, 그 후 살아남은 외척이 정권을 잡고, 결국 조선은 스러지고 인접국의 식민지가 되는 역사를 간략히 풀어내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녕 이 나라가 그렇게 무너졌는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었음에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나리.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자네. 그것은 모를 것일세. 내가 정신을 잃었던 동안 꿈꿨던 것들이 있거든. 들어보겠는가?”
성이성의 이야기는 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야기의 요점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어사의 꿈은 장수 산골에서 나를 만나지 못했던 장면으로 시작해, 자신이 노환으로 죽는 장면까지였으니까.
“나는 아직도 꿈에서 두 번째 호남 어사로 나가 광한루에 올라 한탄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네. 자네를 만난 이후로 해소되었던 한(恨)이 다시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지.”
“나리, 그것은…….”
“자네 반응을 보니 이제 알겠구만. 자네가 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런 인생을 살았을 게야. 그렇지 않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사의 눈꼬리가 보기 좋게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 얼마나 끔찍한 삶인가. 이 사람을 그렇게 보낸 한은 풀지도 못하고, 전하께 직언을 올리다 결국 지방관으로 쫓겨나듯 나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다니.”
“하지만, 그래도 나리께서는 소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천수를 누리셨을 겁니다…….”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가슴에 돌을 매달고, 뜻도 펴지 못하는 생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너져가는 이 나라를 지켜보며 한탄만 해야 하는 삶이 천천히 죽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내 생이 이렇게 바뀌어 도리어 다행이라 생각하네. 그러니, 내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말도록 하게.”
쿨럭. 어사가 거친 기침을 계속해서 뱉기 시작했다. 당황해 사람을 부르려는 나를, 어사는 시선으로 만류했다.
“……그래. 자네, 이 땅에 내려진 저주 받은 운명을 바꿔놓을 자신은 있는가?”
“어떻게든 해보려 합니다. 이미 역사는 제가 아는 것과 꽤나 달라졌으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평범하고 이기적인 소시민이던 저를, 백성을 아끼는 위정자로 바꾸어놓은 것은 나리시니까요. 나리가 제게 가르치신 대로만 행동하면, 이 나라는 바뀔 것입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어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잠시 말을 잊었던 어사는 내게 자신의 손을 잡아 달라 부탁하더니, 약간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너는 분명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들아.”
어사의 따스한 말 한 마디에, 고여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체온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어사의 손에서 미약한 힘과 함께 그의 의지가 전해지고 있었다.
“아버지…….”
“이제 여한이 없구나. 내 뜻과 지식을 모두 이어받은,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키워놓았는데 어찌 생에 미련이 남겠느냐.”
“아버지…… 아버지…….”
“울지 말거라. 그동안 영문도 모르고 낯선 곳에 떨어져 수년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나같이 모자란 사람이라도 네게 의지가 될 수 있었다니 그것만으로도 기쁘구나.”
몰려드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사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은 채 한참 동안 말을 잊었다.
그렇게 나는 이날 밤새워 쌓였던 이야기와 감정을 모두 풀어놓았다. 조선에서 만난 아버지와 나누어야 할 말은 끝이 없었는데,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
궐내각사로 부고가 날아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지, 장대같은 비가 모든 것을 쓸어버릴 기세로 내리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