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산 채로 산채(山砦)에
나는 왜 지금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가.
그래, 임금이 내린 봉서(封書)를 뜯었을 때, 종이 두 장이 튀어나왔을 적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아니 무슨 한 이닝에 만루 홈런을 두 방 때리는 것도 아니고, 마패 한 번 내려주고 지방 두 군데를 돌라고 하는 임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한참을 투덜거리며 첫 번째 목적지였던 전라도에서의 어사출두를 마무리 지었고, 그 후 두 번째 목적지인 황해도로 막 진입하자마자 일이 터지고 말았다.
“당장 가진 거 다 내놓으라!”
“…….”
“아니, 이 양반이? 우리가 무섭지도 않네?”
무섭겠냐? 웬 거지 떼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데?
임금이 내린 명령서에는 분명 대동강 하구의 포구들과 황해도 황주 근방을 시찰하고 오라는 어명이 적혀 있었다. 황해도에도 대동법을 확대할 수 있는지 상황을 보고, 호란 때 반파된 정방산성과 사신 영접을 위한 객관(客館)을 점검하라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그 근방을 관할하는 황주 목사의 이름이 봉서에 적혀있는 것을 보면, 그놈이 이번에 정의봉으로 후려 패야 할 대상임이 분명했다. 전라도에서 부패한 수령 몇 놈의 피를 마신 정의봉이 황해도 공기를 맡자마자 울부짖는 것이 느껴졌었다. 헌데.
“……어찌할깝쇼?”
“그러기에 구월산 나들이는 나중에 하자고 허지 않았씨요, 나으리.”
나랏일 도중에 땡땡이를 치겠다 불순한 마음을 먹었던 것이 화근이었나.
전라도 영광 법성포부터 배를 몇 번을 갈아탔던가. 서해안의 옹진반도까지 삥 돌아 대동강 하구, 은율현의 금산포에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르겠다.
육로로 갈 수도 있었겠으나, 어쨌건 대동미를 실어 나르는 수운(水運)의 현황을 점검하고자 했던 일이라 거의 반강제로 배를 탈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문제는 며칠이나 내내 배를 탄 나머지 육지가 너무 그리워졌다는 점.
그렇게 땅에 내려 육지멀미로 현기증을 느끼던 우리를 웬 산 하나가 반겨주었다.
한반도 4대 명산으로 꼽히는 구월산이었다.
멀리서 비치는 구월산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산에 올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뱃길에 뒤집혀졌던 속이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아 등산이 끌렸던 것인데, 그 결과 지금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나들이라니? 내 분명 구월산성을 시찰하자 말했을 텐데? 그리고 구월산에 산적이 들끓고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유 서리 자네는 알고 있었는가?”
“아니, 구월산을 오르자던 나으리 속이 훤하게 보이셨는데 그런 변명을 허씨요? 그리고 지금 그것이 문제랑게요?”
“걱정하지 마, 유 서리. 무슨 일이라도 있으려고. 나나 나으리나 몸 쓰는 데는 이골이 나 있지 않아? 대원들을 떼놓고 왔다고 해도 이 정도는 가뿐하지.”
김 갑사, 자네는 내 무재(武才)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게 탈이라니까. 아무튼.
그렇게 오른 등산길인데 초행부터 재수 옴 붙을 줄이야. 멀미로 고생하던 호포대원들에게 휴식을 명하고 심복들만 이끌고 산에 오른 것이 문제였나.
무계획적인 등산의 끝은 파멸뿐이라는 마속의 고사를 조금 더 무겁게 여겼어야 했다. 그나마 귀중품과 말은 숙소에 맡기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 안 들려? 가진 거 다 내놓으라 했지 않네!”
“우리가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이네?”
하지만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누가 봐도 이 자들은 산적보다는 거지 떼로 보였으니까.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이, 웬 헐어빠진 방망이와 죽창을 들고 길을 막은 거지 떼가 두려울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하나같이 이놈들은 낡아빠진 옷차림에, 그 틈으로 드러난 몸은 빼빼 말라있었다.
임금이 나를 파견한 이유가 있었구나.
분명 주위 지역의 학정으로 인해 구월산으로 흘러든 유민들이 산적이 된 것이 분명했다.
“역시 나으리십니다요. 북경성에서 단기결전을 붙으시던 시절의 피가 끓어오르신 겁니까요?”
“농담이겠지, 김 갑사? 이들을 상대로 무용을 뽐낼 생각인가?”
“아니, 그럼 산적 상대로 설교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요? 당장이라도 금방 때려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요?”
김 갑사는 당장이라도 등짐에 끼운 환도를 빼들 기세였다. 전라도에서 어사출두를 몇 차례 하는 동안 김 갑사를 너무 풀어줬던 것일까? 저 해골바가지들이 도대체 무슨 위협이 된다고 이러는지.
무기를 잡은 모양새들도 하나같이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창대를 쥐고 있는 손의 위치가 엉뚱하다든가, 하체에 취한 자세가 단단하지 못해 흔들리고 있다든가.
눈으로 살핀 것만으로도 견적이 나오는 것을 보니 나도 나름 무예를 닦으며 먹은 짬밥이 헛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김 갑사를 팔을 들어 제지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들이민 죽창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니, 이 자들이 제대로 된 산적이 아니라는 생각에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어허, 이 사람들. 머릿수 많은 쪽이 적은 쪽을 위협하고 있으면서 어찌 이리 마음이 급하단 말인가?”
“무…… 무슨 소리네, 이 양반이!”
“가진 걸 다 내놓으라고? 좋다. 내 가진 것을 다 줄 테니 너희들 두령에게로 안내해라.”
“뭐야?”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길손은 없었는지, 오히려 거지꼴을 한 산적 놈들이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우, 우리 두령님은 왜?”
“안내하라면 안내하래도. 아, 길 안내를 요청했으니 수고비가 필요하겠구만. 자, 받아라.”
주머니에서 은편 하나를 꺼내 맨 앞에 선 놈에게 살포시 던져주었다. 놈들의 눈빛이 삽시간에 변하는 것이 보였다.
“은……! 은이다!”
“더 받고 싶지 않느냐? 수고비 챙겨준 것은 철저히 비밀로 해줄 테니 나를 너희 산채로 안내해라. 말이 통하는 자와 만나고 싶구나.”
“더 주신다고요?”
삥을 뜯으려 들던 놈들이 슬그머니 존대를 하는 걸 보니 역시 추측대로였다.
진짜 산적이라면 나를 죽이고 전부 털어가려 했겠지. 그랬다면 허리에 숨긴 내 권총이 불을 뿜고 등짐에 든 투창이 날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이놈들은 산적질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어설픈 백성들이 분명했다.
분명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 나를 너희 산채로 안전히 모신다면, 너희 각자에게 은편 두 개씩을 주겠다. 물론 너희 두령에게는 비밀로 말이지.”
“정말, 정말이시죠?”
“거, 참. 양반에게 속고만 살았느냐. 정말이래도.”
놈들의 죽창이 향하는 방향은 이미 나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겨, 멍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들 한 명 한 명마다 은편을 직접 쥐어주기 시작했다.
“허, 허참!”
“나으리가 괴짜신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러실 줄은…….”
김 갑사와 유 서리의 투덜거림이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상황인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산적들은 은편을 쥐어주는 나를 제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놈들의 입가에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 침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이 배냇X신들이! 그렇다고 산채까지 길손을 데려오면 어쩌자는 거네!”
당연하지만, 산적 놈들이 두목에게 신명나게 털리는 이유가 있었다.
이 순박한 놈들은, 은편 하나씩을 더 쥐어준다는 내 말에 홀려 구월산의 명승지를 속속들이 안내까지 해 주고 산채로 나를 모셔온 판이었다.
이런 자들까지 산적질로 빠진 나라꼴에 한숨이 나오면서도,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 탓에 입가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내 뒤를 따르는 김 갑사와 유 서리가 조용해진 이유도 나와 같은 심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너는 또 뭐하는 양반이네! 돈이 그렇게 많으면 이놈들한테 적선하고 가던 길 갈 것이지!”
“자네가 이 산채의 두령인가?”
“왜, 나한테도 이놈들한테 하던 것처럼 선물이라도 주시갔어?”
“선물은 언제든지 줄 수 있지. 보아하니 자네들 패거리는 배를 곯은지 꽤 된 것 같은데, 내가 산을 내려가 너희에게 쌀가마니라도 보내는 것은 어떤가?”
애써 화낸 표정을 짓던 두목의 표정이 쌀가마니 소리가 나오자마자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 참, 이런 놈을 두목으로 두고 산적질을 하다니.
두목의 표정 변화를 제외하더라도 산채의 상황은 좋지 않아 보였다. 멀쩡한 방도 몇 칸 되지 않았을뿐더러, 너와를 얼기설기 이은 지붕은 금방이라도 비가 샐 지경이었고, 흙벽마다 움푹 흙이 떨어져 나간 곳이 몇 군데나 있었다.
차라리 반촌의 토굴에서 생활하는 게 나아 보일 정도로 이들의 산채는 열악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울타리랍시고 세워놓은 나무토막들도 꼴이 말이 아니었지.
“쌀? 쌀이라면 당연히…… 아니, 당신을 뭘 믿고 그대로 돌려보내? 그냥 주머니에 든 거 싹 내놓고 꺼지란 말이야!”
“오호라, 이제야 조금 산적다워지는구만? 이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이 필요한 겐가?”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꺼내 아가리를 끄르고 내용물을 두목의 앞에 부었다. 은자 두어 개와 은편 몇 개가 금속 특유의 마찰음을 내며 두목의 앞을 굴렀다.
번쩍거리는 것이 바닥을 구르는 것을 본 놈의 태도가 일변했다. 놈의 몸은 이미 바닥을 구르는 은자를 집으려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두목에게 털려 시무룩하던 산적들 역시 튀어나간 은편을 붙잡으려 동분서주했다.
방금까지 두목이랍시고 꼿꼿해 보이려 애쓰던 놈도 부하들과 별 다를 바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 이 양반이 미쳤네?”
은덩어리를 붙잡고 바닥에 엎드려 있는 와중에도 두목의 입은 살아있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추한 모습을 자각하고 있는지 구석으로 굴러간 은편을 찾는 부하들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본디 순박한 백성들이었을 그의 부하들이 그런 눈치를 줄 리가 없었다. 다들 은편 하나씩을 손에 쥐고 해골바가지에 웃음을 띠며 히히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왜 그러는가? 주머니에 든 걸 싹 내놓고 꺼지라고 한 것은 자네가 아닌가?”
“아니…… 그게…….”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는데, 왜 기가 죽었는지 모르겠구만. 하긴, 쌀가마니를 선택했다면 그 은자의 몇 배는 될 쌀을 보냈을 터인데, 그 기회를 잃은 것이 허탈하려나?”
“……?!”
“그럼 자네 말대로 주머니에 든 것을 다 털었으니 나는 사라져드리겠네. 핫핫.”
어차피 놈들의 구월산 구경도 잘 했겠다, 놈들에게 피해를 입기는커녕 이야깃거리만 생긴 마당이다. 유쾌한 연극 한 편 봤다 생각하면 이 정도 관람료는 충분히 치를 만했다.
그렇게 막 등을 돌려 산채를 나서려는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까지 그 목소리에 묻어나던 공격성은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나, 나으리! 저희가 잘못했누만요!”
“저희가 나으리 같은 분을 몰라뵙고 큰 죄를 지었시다!”
비슷한 짓거리를 예전에도 했던 적이 있었다.
수상개화(樹上開花), 꽃을 피울 수 없는 나무에 조화를 올려 장식하라.
허장성세, 허허실실과 맥이 닿아있는 손자병법의 전법이다.
고작해야 은자 몇 개로, 우리 일행 세 명이 산적 십수 명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내가 뿌린 은자는 그 이상으로 놈들의 마음까지 움직여 버린 모양이었다.
“왜 이러는가? 자네가 방금까지 나를 대하던 태도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쇤네가 대인 어른을 몰라 뵙고 실례를 저질렀습죠! 용서해주십쇼!”
갑자기 변한 그들의 태도처럼, 내 생각도 바뀌고 있었다.
그저 구월산 구경을 하다 겪은 유쾌한 일 정도로 여길까 했는데, 이 불쌍한 백성들을 이용하면 어사 일을 조금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잔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이왕 나온 어사,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자리를 영감님께서 대신하고 계셨더라도, 분명 그러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