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호가호위(狐假虎威)
침묵이 흘렀다.
대답이 나올 것이었다면 이미 몇 번은 나왔을 시간이 흘렀으나, 낭자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다시 묻겠습니다. 정녕…….”
“아닙니다, 선비님. 제가 주제넘은 요청을 드렸습니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선비님께서 굳이 저 같은 계집 하나 때문에 그런 험악한 사람과 각을 세우려 들지는 않으셨겠죠. 게다가, 방금 선비님의 태도에서 느낀 것이 있었어요.”
방금까지 낭자의 눈동자에 얼핏 비치던 의심의 기미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선비님은 방금,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다면 분명 정체를 밝히셨을 거예요. 그렇죠?”
“물론, 지금이라도 원하신다면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었던 분이셨다면 잠깐이나마 망설이시거나 고민하는 기색을 비치셨을 거예요. 헌데 선비님은 망설이시기는커녕, 곧바로 가슴께에 있는 무언가에 손을 댈 뿐이시더군요.”
낭자는 꽤나 눈썰미가 있는 듯했다. 사실 고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얼굴에 드러날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 다행인가.
“소녀는 선비님을 믿겠습니다. 어차피 그들에게 노비로 팔아 아버님을 봉양하려 했던 몸, 더 잃을 것이 있을까요.”
“노비로 팔다니요, 낭자…….”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비님. 저를 도와주세요.”
낭자는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왔다. 사람이 진심을 담아 부탁하는데, 그걸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리라.
게다가 나는 그녀 같은 백성들을 구해야 하는 어사가 아니던가.
***
산채에 들자마자 주위를 물리고 그녀의 사연을 들었다.
그녀의 성이 심 씨라는 것을 듣자마자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까지 내가 아는 그 고전소설의 주인공과 같지는 않았지만, 아마 지금 나는 그 고전소설의 본(本)이 된 이야기 중 하나를 겪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추측은 점점 확신이 되어갔다.
물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소설의 내용과는 영 딴판이긴 했다. 아마 이야기가 민담이, 설화가 되고 소설로까지 변하면서, 다분히 미화된 바가 있었겠지.
“……겨우 입에 풀칠을 해가며 버티지도 못하게 된 것은 그 일 이후부터였어요. 몇 년 전부터 아버님이 군적에 들었다며 아전들이 찾아와 군포 두 필을 요구하더군요.”
“아버님은 분명 맹인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 저도 처음에는 무엇이 잘못된 줄만 알았었죠. 하지만 아전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고, 맹인을 군적에 넣는 법이 어딨냐며 항의하자 도망간 이웃의 몫이라며 저희가 대신 납부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어요.”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
“선비님도 알고 계시는 일인가요? 저 말고도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많은가요?”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조선을 좀먹은 폐단 중 환곡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악습을.
조선 백성들이 병역을 수행하는 대신 납부하던 세금인 군포(軍布), 그 폐단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가 이쯤이었나.
왜란과 호란의 피해를 회복하면서 더 많은 군사를 확보하기 위해 중앙에서 내린 무리한 명령이, 일선에서는 이런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병역 비리는 어느 시절에나 존재하기 마련인가.
“어린아이도, 죽은 사람도 군적에 넣어 거둬야 하는 군포의 수를 늘리고, 그걸 뜯어낼 곳이 없으면 그들의 친척과 이웃에게 대신 내도록 시킨 것이로군요.”
“어떻게 아셨어요, 선비님? 선비님은 대체…….”
“제가 그래서 낭자를 이곳으로 모셔온 겁니다. 모셔온 보람이 있었군요. 그래서 스스로를 노비로 팔아 군포를 충당하려 하셨던 겁니까.”
“적어도 아버님이 살아계신 동안은 그 마귀들에게 시달리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심 낭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나 역시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유학자의 입장에서 그것이 어찌 진정한 효(孝)겠냐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겠지. 하지만 심 낭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유학에서 가장 강조되는 가치인 효 또한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될 뿐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를 어찌 함부로 다룰 수 있겠냐는 말을 백 번 외워봐야 무엇하겠는가.
그것은 매일 협박을 가해 오는 아전 몇 놈을 쫓을 주문조차 되지 못할 터였다.
“허나 낭자, 스스로를 노비로 파는 행위는 국법으로 엄금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낭자 같은 분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신 것입니까.”
“지엄한 국법을 저 같은 사람이 어찌 알겠어요. 다만, 어머니가 다니던 절에 이 일을 상담해보았더니, 큰돈이 급하다면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주지스님께서 오리포의 기와집을 찾아가라 하시더군요.”
“어찌 승려란 자가 감히…….”
“저는 그저…… 이곳에 오면 조금이라도 나은 벌이를 할 수 있을 줄만 알았어요. 헌데 포구까지 와서 기와집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불길한 소리를 하더군요.”
아마 내가 오리포에서 처음 만난 아낙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겠지. 고리대금업자의 악행을 포구 사람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 기와집은 고리대금업자의 집이고, 돈을 갚지 못한 사람들을 노비로 팔아넘긴다.”
“정확하세요. 그런데 제게 따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겠어요. 그래서 대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하늘이 도우신 것인지 선비님과 마주하게 된 거예요. 그 이후 이야기는 선비님도 잘 아실 거고요.”
심 낭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어느 정도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군포를 더 거둬들이려는 관아, 그런 급박한 처지에 몰린 백성들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인신매매 브로커, 아마 그들과 연관이 있을 사찰과 승려.
몇 년 전 심양에서 겪었던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호포대를 처음 양성할 때, 내 주머니가 탈탈 털려나갔던 기억이었다.
분명 조선에서의 노비 값보다 청에서의 노비 값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비쌌다.
“다행이군요. 제가 낭자를 막아 세우지 않았다면, 아마 낭자는 지금쯤 청으로 가는 배에 태워져 평생 아버님을 뵙지 못하게 되셨을 겁니다.”
심 낭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럴 만했다. 그녀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을 테니.
이곳은 청으로 가는 선박이 수시로 드나드는 포구다. 증거인멸을 위해서건 더 큰 이익을 위해서건, 잡아들인 노비를 청으로 처분하는 것이 브로커들에게는 합리적 행동일 터.
고전소설의 주인공이 인당수에 빠져야만 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정말로 물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용왕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이 횡행했거나, 아니면 상품가치가 없어진 노비를 처분하는 방도 중 하나였겠지.
문득 건방진 꼬마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 녀석의 부모 역시 꽤 오래 전 그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아마도 꼬마 녀석은…….
“낭자의 말씀을 들으니 일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일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낭자가 궁금해 하시던 제 정체와 관련된 일입니다. 낭자 정도의 인품을 가지신 분이라면, 당분간 함구해 주실 것이라 믿겠습니다.”
“예?”
“아버님을 모셔오는 일은 하루 이틀만 미루겠습니다. 그놈들의 소굴에 붙잡힌 채 청나라 행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황해도에서 호랑이 탈을 뒤집어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관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말이지.
***
산에서 짐승 떼가 내려온 것은 깊은 밤이었다.
맨 앞에 선 호랑이를 따라, 짐승 무리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목적지는 오리포의 기와집.
감히 산군의 수염을 건드린 자들의 소굴이었다.
“힉! 히익!”
기와집 내부에서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여러 번 터져 나왔다. 기와집의 뒷마당, 광을 개조해 만든 노비 우리에는 불곰의 도끼가 내리쳐졌다.
콰직.
자물쇠가 박살 나는 소음에 눈을 뜬 노비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비벼야 했다. 온갖 짐승탈을 쓴 무리들이 짧은 칼을 들고 그들을 결박하고 있던 밧줄을 끊어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쉿!”
줄무늬 옷을 입은 짐승들은 하나같이 입에 검지 하나씩을 세우며 노비들에게 침묵을 다짐시키고 있었다. 상상도 못 했을,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입술을 덜덜 떨던 노비들은 침 삼키는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모든 노비들을 풀어주고, 밧줄로 묶여있던 자리를 주무르는 노비들을 향해 짐승들이 손짓을 보냈다. 그들의 손끝은, 마치 영원히 갇혀있을 줄만 알았던 기와집의 바깥을 향해 있었다.
꿈이 아닐까 두려워 노비들은 쭈뼛거리며 기와집 밖으로 향했다. 그런 그들을, 짐승들은 귀중한 물건을 호위하듯 지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그들의 앞에 웬 사람 하나를 짊어진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도포를 걸친 그 사내는 얼굴에 호랑이 가죽을 덮어쓰고 있었다.
“……전원 임무를 완수했나?”
짐승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풀려난 노비들 중 몇몇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내의 어깨에 얹힌 사람의 머리에서, 그리고 사내의 손에 들린 괴상한 몽둥이에서 붉고 찐득한 액체가 몇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본진으로 귀환한다. 서둘러라.”
호랑이 탈을 쓴 사내는 자신이 짊어졌던 사람을 불곰의 어깨에 얹었다. 그의 발걸음은 짐승들을 따라가는 노비들의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그 지옥 같았던 기와집에 아직 볼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
화르륵.
노비들이 포구와 마을을 벗어나 구월산으로 향하는 산길로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등 뒤가 밝아져 놀라 돌아본 노비들의 눈에, 포구에서 오르기 시작한 커다란 불길이 비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잡혀있던 지옥의 틈에서 새어나오는 불길 같았다.
***
촤악.
기절해 있던 자의 얼굴에 얼음처럼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명산(名山)은 역시 물맛도 좋다며, 이 산채에서 제일 높으신 분이 내내 감탄했던 그 물이었다.
“……정신이 드나? 내 아끼던 구월산 약수를 아낌없이 부어줬는데, 물맛이 어떻던가?”
온몸을 덮은 얼음장 같은 냉수에, 고리대금업자는 그제서야 몸에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조금씩 퍼져가는 차갑고 축축한 감각 사이로, 몸의 구석구석에서 욱신거리는 감각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우…… 으윽…….”
“이상하구만. 약수(藥水)라 하면 상처에도 효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으리, 지금 농담하실 상황이 아닙니다요.”
윙윙 울리기 시작한 고리대금업자의 귓가에 두 남자의 목소리가 잡혔다. 조금씩 들기 시작한 정신 사이로, 방금 있었던 일의 기억들이 조각조각 떠오르고 있었다.
자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기에 성질을 내며 일어나 봤더니…… 눈앞에 웬 호랑이가!
“히익!”
“약수의 효험이 좀 늦은 모양이구만. 그래도 다행일세, 자네가 정신을 차려서.”
고리대금업자는 무언가가 머리에 내려쳐지고 정신을 잃었던 사실까지 기억해냈다. 껌뻑이는 눈꺼풀 사이로, 조각난 기억들이 조금씩 맞춰져갔다.
‘여긴 어디지?’
“김 갑사, 내가 최근에 힘이 좀 늘었던가?”
“출두를 여러 차례 하시면서 몸 쓰실 일이 많으셨으니, 한양서 일하시던 시절보다는 느셨을 것입니다요.”
“흐음…… 그래서 힘 조절을 잘 못했던 것인가. 저자의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 내 예상보다 느리구만.”
출두? 한양? 뜻 모를 단어에 고리대금업자의 정신은 더 멍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침묵이 얼마나 흘렀던가.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힘없이 처박혀 있던 고리대금업자의 고개를 앞을 향한 것은 그때였다.
“히익!”
그런 반응이 나올 만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호랑이가, 아니 호랑이의 대가리를 한 사람이 정면에 놓인 의자에 앉아 고리대금업자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의자에 단단히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몰려드는 공포에 동공이 한없이 쪼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자네가 그토록 주워섬기던 그 높으신 분들의 권세가 내게도 통할지 궁금하구먼.”
“히……히익! 나으리! 살려주십쇼!”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라면 조금 더 당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오면 내가 섭섭한데.”
※ 작가의 말
1. 심청전
고전소설인 심청전은 여러 가지 판본(버전)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판본에 따라 심청전의 배경을 어디로 설정하고 있는지도 조금씩 다르죠.
다수의 판본에서는 심청전의 배경을 중국 송나라 혹은 명나라 시절의 황주로 설정하고 있지만, 일부 판본에서는 황해도 황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부 판본에서 작중에 묘사된 배경을 보면 영락없는 조선 후기 그 자체입니다. 신분제가 무너져 심학규 같은 잔반이 생겼다든지, 대놓고 작중에 심청을 사가는 청나라 상인이 등장한다는 식이니 말입니다.
사실 송나라 시절이라면 지방을 로(路)로 구분할 텐데 조선식인 도(道)로 구분하는데서 이미 티가 좀 나긴 하지만요.
국문학계에서는 조선 후기에 고전소설로서 <심청전>이 완성이 되는 과정에서, 원형이 된 더 이전의 설화들에 조선 후기의 배경 설정이 합쳐지면서 일어난 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작품 내에서 이미 조선 후기의 양상을 묘사했으면서도 배경을 송나라 황주라고 명시한 것은, 혹시나 소설이 현실 비판적으로 보여 탄압을 받지 않을까 작가가 우려한 나머지, 조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핑계를 대보려는 ‘어른의 사정’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되고 있고요.
독자 여러분들도 한 번쯤 인당수의 위치가 백령도 근처라는 이야기를 들으셨던 적이 있을 텐데, 위와 같은 해석에 기반한 이야기가 대중적으로 퍼진 결과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에서 심청전을 모티브로 창작된 문학작품들은 대다수가 심청전의 배경이 황해도 황주라는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소설가 최인훈 씨가 심청전을 모티브로 창작한 희곡,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서도 그러하고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셔도 좋겠지만, 이 글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깊고 어두운 심청전 재해석에 주의하셔야 할 겁니다.
2. 황구첨정과 백골징포
삼정의 문란은 조금 더 후대의 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실록에 기록된 것만 따져도 이 시기보다 약간 후대인 숙종 치세에도 적혀있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조선 조정은 15세 이상을 군적으로 올리도록 하는 법을 11세로 고쳐 군포를 징수하는 등, 군비를 백성들에게 부담하기 바빴습니다. 5세에서 10세까지 명부를 따로 기록해 군적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할 정도였죠.
영조시기에 균역법이 대두된 것은 군포 문제가 하루 이틀 쌓였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균역법 실시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