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계승
탐관오리 두 마리는 그렇게 피떡이 되어 옥에 처넣어졌다. 하지만 어사 일이 그걸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건 나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다 겪어본 일이었다. 이미 거쳐 온 전라도에서도, 그리고 몇 년 전 어사의 손에 이끌려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워나가던 시절에도 말이다. 그 때문에 어사의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가끔 눈가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소매로 급히 훑어내야 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어사의 혜안은 오늘날까지 뻗어 있었나.
문득 나를 미치광이 취급하던 상왕의 앞에서 내 칭찬에 거리낌이 없던 어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말로 높이, 멀리 보셨던 것은 어사 당신이셨는데.
“나으리, 힘에 겨우시면 조금 쉬다 오셔도 되시지라. 쉬시는 동안 문서 정리를 소인이 할 터이니,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하시랑게요.”
“아니네, 유 서리. 나는 괜찮으니 이대로 계속하지.”
눈치 빠른 유 서리 역시 내 속을 눈치챈 듯했다. 그 역시 분명 나만큼 어사를 그리워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해도에서 본 폐단, 군역의 문란과 밀무역의 성행 문제를 어찌 바로잡을지 고민이 깊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허나 그렇다고 고민에 빠져 손을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 역시 어사가 내게 들여준 습관 중 하나였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쌓여있던 서류의 산을 헤쳐나가던 무렵이었다.
“어사 아저씨! 좀 쉬시는 게 좋겠어요! 표정이 너무 울상이시잖아요!”
“예끼! 이 녀석! 나으리께 존칭을 쓰라 안 헜냐!”
“그런 어려운 말은 아직 모른다니까요! 아저씨도 괜찮으시다잖아요!”
언제부터였던가 내게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던 꼬마였다. 지금도 내 옆에서 잔수발을 들며 알지도 못하는 업무를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녀석은 고리대금업자에게 불벼락을 내리고 온 날부터 마치 내 심부름꾼이 된 것마냥 굴었다. 몽운사의 쓰레기들을 징벌하러 갈 적에는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 자원하기도 했다.
“유 서리, 아이가 무얼 알겠는가. 나는 괜찮으니 일에나 집중하세.”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이 녀석에게 너무 헐하시당게요!”
“언젠가 이 녀석도 모든 걸 제대로 알게 될 날이 올 것일세. 그러니 이런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말게.”
다소 불만이 있어 보이는 유 서리였지만, 금세 입을 다물고 다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 서리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 역시 어사에게 일을 처음 배울 때는 실수투성이였다는 사실을.
선비의 기억 외에는 아무 것도 없던 머저리를, 대리 어사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단기간에 탈바꿈시키셨던 어사 나리였다. 그때 내가 어사와 일하며 저질렀던 잘못들에 비하면, 아이의 천진난만함에서 비롯된 무례 따위야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너는 정말 운이 좋은 줄 알그라. 저런 양반님은 참말로 조선 팔도에 흔한 분이 아니니께.”
“알아요, 서리 아저씨. 제가 그동안 봐왔던 양반들이랑은 너무나 다른 분인걸요. 그리고 그…… 뭐라 하더라,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는 얘기도 있잖아요?”
“그건 그럴 때 쓰는 속담이 아니랑게! 나으리께서 늘 봐주시니까 이 까불이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고!”
유 서리의 꿀밤이 꼬마의 머리에 가볍게 내리꽂혔다. 그 기계 같던 유 서리가 저리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보니, 은근히 꼬마 녀석이 마음에 든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마의 볼멘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우울했던 분위기가 풀렸으니 고맙게 여겨야 하나.
“그치만요! 저도 잘 알아서 이러는 거예요! 서리 아저씨 말대로 어사 아저씨는 대단한 분이신 걸요!”
“알긴 알어? 그걸 아는 녀석이 그라믄 쓰냐!”
“그래도…… 저도 언젠간 그런 멋진 어른이 되고 싶어요! 저는 양반이 아니니까 아저씨 같은 대단한 사람은 못 되겠지만요…….”
아이의 입에서 생각도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왜 저 녀석의 말 한 마디가 가슴에 꽂힌 것일까. 단순히 나를 칭찬하는 말을 들어서?
작성하던 서류를 밀어놓고 붓을 내려놓았다. 왜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된 작업으로 피곤해서였을까.
마침 벼루에는 먹물이 마르고, 연적에 담았던 물 역시 떨어져 잠시 휴식을 취하기에 적당한 타이밍이긴 했다.
“꼬마야. 연적에 물이 떨어졌구나. 채워다 주겠느냐.”
“네? 네! 어사 아저씨!”
“그리고, 가기 전에. 기특한 소리를 한 대가로 네게 도움이 될 말 하나를 해 주마.”
“도움이요? 뭔데요?”
고작 그런 내 말 한마디에, 꼬마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뚫어지듯 응시하고 있었다.
저런 눈빛을 받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요안이와 요운이를 첫 제자로 받았을 때였나.
“너도 충분히 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목표는 크게 가지도록 해라.”
“네? 하지만…… 저는 양반이 아닌 걸요?”
“이 나라의 국법에서는 사람의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만 구분 짓고 있다. 양반은 과거 응시가 가능한 양인 중에서 과거에 급제해 사대부의 의무를 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예상치 못한 말이 날아왔는지, 눈을 꿈뻑이고만 있던 꼬마였다. 하지만 곧 녀석의 표정이 밝아진 것으로 보아, 명민한 머리로 내 말뜻을 해석해낸 듯했다.
“그 말씀은…… 저도 아저씨처럼?”
“네 신분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네가 천민의 굴레를 지고 있다면 내 떠나기 전에 그것을 벗겨주마. 그 뒤는 네 노력 여하에 따라 달렸지만.”
아이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고작 그 정도의 덕담에, 아이는 눈에 띌 정도로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나으리!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되신당게요! 이 꼬마를 면천(免賤)시킨다 해도 그게 다가 아닌 건 나으리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당가요!”
“알지. 그래서 하는 말일세.”
“나으리께서 지금껏 외우셨던 책은 몇백 권이며, 신체를 단련해오신 시간은 몇천 시간인지를 소인이 더 잘 알고 있지라! 그걸 이 천덕꾸러기가 어찌 따라 할 수 있겠씨요!”
그래, 유 서리는 지금 꼬마에게 헛바람을 넣지 말라는 말을 에둘러 전해오고 있었다. 꼬마에게 전하는, 헛된 꿈을 꾸지 말라는 충고이기도 하겠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대놓고 꿈을 박살 내는 말 탓일까, 꼬마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유 서리, 남원 시절의 나도 이 아이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생각하네.”
“그 시절의 나으리께서요? 처음 뵀던 자리부터 뛰어난 투창술에, 신묘한 의술까지 펼쳐 보이셨던 나으리께서요?”
“이 아이는 그런 재주보다 더 귀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세월과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를 말일세.”
“허나……!”
“어사 나리께서 지금 계셨다면, 그때의 나나 이 아이나 다르지 않게 보셨을 걸세. 그렇지 않은가, 유 서리.”
뭐라 반박을 꺼내려던 유 서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리 보인 것이 있다고 하나, 생면부지의 선비를 한양으로 데려가 뒷바라지를 하는 일은 분명 범인(凡人)이 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천천히 유 서리에게서 몸을 돌려 아이를 향했다. 녀석은 아직도 그늘진 얼굴을 한 채,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듯했다.
“꼬마야.”
“아, 아저씨, 사실 제 이름은…….”
“내 이렇게 말은 했지만, 유 서리가 한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알고 있느냐.”
“……그럴 거라 생각은 했어요. 아저씨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쉬울 리는 없으니까요.”
총명한 아이였다. 그 탓에 나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 말았다. 얼이 빠져 있는 녀석에게, 텅 비어있는 연적을 쥐여주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생각 없이 입에 담은 말 탓에 낙담이 심했겠구나.”
“아니에요. 그래도……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좋았어요. 저 같은 천한 아이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희망을 주신 점이요.”
“네가 하기에 따라서 그것이 희망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단다. 허나.”
“네?”
마음을 먹었다. 내게 모든 것을 전해준 사람을 잃고 어사로 나온 자리에서, 이런 특별한 아이와 만나게 된 것은 분명 보통 인연에서 비롯된 일이 아닐 테니까.
“이 일은 너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내가 남겨줄 재물로 논밭 몇 뙈기를 사 농부로 살 것인지, 아니면 나를 따라와 피 묻은 가시밭길을 걸을 것인지 말이다.”
“피 묻은…… 가시밭길이요?”
“내 일은 얼핏 보면 화려해 보이지만, 유 서리의 말 이상으로 피를 말리고 몸을 갈아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마음 편히 땅을 갈아 먹고사는 것이, 내 옆에서 온갖 풍파를 겪는 것보다 나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이는 말을 잊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첫 번째 가르침으로 삼기에는 너무 냉혹한 말이었나.
“모든 건 네 뜻에 맡기겠다. 충분히 생각해보고 결정하거라. 고향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나를 따라올 것인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를 따라오는 것은 퍽 고된 일이 될 것이다.”
“…….”
“그래. 이제 얼굴 좀 펴고. 휴식이 너무 길었으니 작업을 다시 개시해야겠다. 얼른 연적에 물이나 떠 오려무나.”
***
그렇게 황해도에서의 모든 일이 마무리 된 후, 나는 한양으로 향하는 관서대로에 다시 발을 디뎠다. 그래도 이번에는 배를 탈 일이 없으니, 뱃멀미로 고생할 일은 없겠지.
이번 어사 일에서 얻어가는 것이 많았다. 심 낭자와 산적들을 비롯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단순히 탐관오리들을 징벌한 일 외에도 말이다.
군포, 노비 매매 같은 중앙에 돌아가 다스려야 하는 폐단도 그렇고, 앞으로 상업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할 이 나라에서 밀무역을 어떻게 단속할 것인지 아직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분명 하루 이틀로 해결될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나으리,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요?”
“음, 별 거 아닐세. 산채는 잘 정리해놓고 내려왔겠지?”
“물론입죠. 새로 훈련시킬 신병들이 쓸 산채인데, 함부로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요.”
그 말이 나온 이유가 있었다. 산적들을 이끌고 내려와 비게 된 산채는 호포대의 거점으로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산적들의 증언도 그랬고, 황주목 관아에서 호환(虎患)에 관한 보고가 적힌 서류를 꽤나 많이 발견한 데서 착안한 발상이었다.
평양과 개성을 잇는 길목, 동선령과 자비령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보고였다. 그런 중요한 길목에 출몰하는 맹수들은 마땅히 씨를 말려야 했다.
어차피 당분간 황해도 쪽 포구에 대한 감시도 강화해야 했고,
“삼개나루 상단에도 협조를 요청하게. 일단 가죽 거래 건으로 평소에도 협조하고 있던 사이인 데다, 청국과의 밀무역을 근절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요청을 거절하진 않을 걸세.”
“안 그래도 나으리께서 산채를 그런 목적으로 쓰자는 말씀을 하시자마자 유 서리에게 이야기를 꺼내놓았습죠. 한양에 도착하거든 저희가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요.”
“든든하구만, 김 갑사. 헌데, 그 유 서리는 어디 있는 겐가?”
출발 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일행 중 유 서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양에서 출발할 적에는 내가 늦었다는 이유로 감히 타박을 준 사람이 말이지.
“어, 그게…… 오늘 새벽에 어디로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시간에 늦을 사람은 절대 아니었는지라 그러려니 하고 넘겼습니다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설마, 유 서리가 쓸 데 없는 일로 약속을 어길 사람은 아닐 터인데.”
“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옵니다요. 어?”
김 갑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자리에, 사람의 형상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형상은 하나가 아니었다. 유 서리인 것이 분명한 그림자 옆에 조그만 그림자 하나가 따라붙어 있었다.
“늦어서 죄송하당게요. 나으리께서 마음쓰실 일 하나를 처리하느라 그만.”
“자네도 이 꼬마가 마음에 걸렸던 겐가?”
“마음에 걸렸다기보다는…… 제 분수도 모르고 허황된 꿈을 꿀까봐 짐을 꾸리고 있던 녀석을 찾아가 나리의 옛 이야기를 조금 했을 뿐이지라.”
그제서야 유 서리의 옆에 붙어있는 꼬마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제 소유의 세간을 전부 짊어지고 왔는지, 몸뚱이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타고난 힘 하나는 좋은 건가.
“옛 이야기라? 자네가 이 꼬마에게 할 옛 이야기가 있던가?”
“나으리께서 국경을 넘나들며 해왔던 고생담을 쭉 늘어놓으면, 웬만한 놈들은 꽁지 빠지게 도망가야 정상이랑게요. 헌데 이 녀석은…….”
평소답지 않게 입을 다물고 눈빛만을 빛내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 팍팍한 이야기를 듣고도 날 따라오겠다고 결심했다고?
“정말 결심이 선 것이 맞느냐?”
“예. 어사 나리. 저는 아무리 힘든 일이 기다리더라도 나리를 따라갈래요.”
“아직은 좀 멀었지만 어느새 말버릇까지도 말끔하게 고쳐왔당게요. 이런 녀석을 어찌 말릴 수 있었겠지라.”
유 서리가 양손을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해준 것을 보면 유 서리 역시도 꼬마가 아주 밉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알았다. 네 정 그렇다니 한양으로 데려가도록 하겠다, 그걸로 되겠느냐.”
“고맙습니다, 나리! 그런데…….”
“그런데?”
“나리,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저를 데려가기 전에 혹시 대답해 주실 수 있으세요?”
녀석의 시선이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두근. 갑자기 가슴에 품은 마패에서 진동이 감지된 것은 그때였다.
“무엇이더냐, 묻거라.”
“나리는 어째서 저희 같은 하찮은 백성들에게까지 잘해주신 건가요? 두령인 장씨 아저씨도 그렇고, 이번에 만난 누나나 다른 산적 아저씨들도 그렇고, 나리를 만나 따라가게 되어 인생이 핀 것 같다며 다들 좋아하고 있었어요.”
“내가 탐관오리들을 벌주며 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느냐. 그것으로도 부족하더냐.”
“그치만…… 저는 그저 천한 아이 한 명일 뿐이잖아요. 어째서 제게도 이렇게 잘해주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리를 따라가겠다 다짐은 했지만, 그게 너무 궁금해서 어젯밤에는 잠도 자지 못했거든요,”
눈 아래가 거뭇해진 아이의 말이, 내 기억 밑바닥에 있던 소중한 추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갑자기 울컥한 눈시울 탓에, 그만 눈가에 손날을 가져다 대고 말았다.
“나리?”
“별 것 아니다. 그래,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로구나.”
아이의 질문은, 남원을 떠나며 내가 어사에게 던졌던 질문과 닮아 있었다.
어째서 나를 호환에서 구해주고, 하나하나 붙어서 가르치며 마패까지 쥐여주었는가.
그 질문에 어사는 무엇이라 답했던가.
대답 대신, 나는 품에서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는 마패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쥔 채로, 어리둥절하고 있는 녀석의 손에 둥근 쇳덩이를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이 쇳덩이에서 무엇이 느껴지느냐.”
“차갑고, 딱딱해요.”
녀석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만도 하지. 그러나 내 마음속은 불어닥치는 감정으로 온통 엉망이 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께서 내게 이 마패를 전해주셨단다. 그러면서 백성을 어여삐 여기고 너희 같은 이들을 가엽게 생각하라 가르쳐주셨었지.”
“나리께서 존경하는 분이시라면, 아주 훌륭한 분이셨나 봐요? 맞죠?”
“그래. 나 따위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훌륭한 분이셨다.”
“…….”
“나는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란다. 이것으로 대답이 되었느냐.”
눈가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오려 했으나 억지로 찍어 눌렀다. 어사의 위신이 달린 문제였다.
“……그 말을 들으니, 이 물건에서 무언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 그거면 되었다. 내 그분에게 전해 받은 것들을 앞으로 네게도 가르쳐 주마.”
“그런 귀한 가르침을 제게요?”
“그러나 쉬운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해라.”
아이의 손에서 마패를 떼고 몸을 돌렸다. 조금만 더 녀석을 마주하고 있었다가는 추한 꼴을 보일 뻔했다.
남원을 떠나던 날, 어사 나리의 심정도 이랬을까. 가슴은 한없이 묵직하고 먹먹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사 나리!”
“시간이 꽤 흘렀구나. 출발할 시간이 지났으니 모두 발걸음을 재촉하도록.”
꼬마를 뒤로 하고 말안장에 몸을 날려 올라탔다. 녀석은 지금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 그날의 나와 같은 시선을 하고 있을까.
내가 말에 탄 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짐을 내려놓고 있던 호포대원들 역시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발걸음을 옮길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그렇게 출발 신호를 막 내리려던 무렵이었다.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느새 내 말 옆으로 쪼르르 달려온 꼬마 녀석을 보며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었다.
“꼬마야. 한 가지만 묻자꾸나.”
“네?”
“구월산 산채의 산적들은 너를 언노미라 불렀었지. 네가 나를 따르게 되었으니,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줄까 하는데, 어떠하냐.”
제대로 된 이름이 없는 호포대 대원들도 원래 이름의 의미를 살려 제대로 된 한자 이름을 다 지어줬었다. ‘언노미’를 한문으로 바꾸면 하남(何男) 정도면 되려나.
그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꼬마였다. 그러나 곧이어 녀석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 장씨 아저씨는 저를 언노미라 불렀지만, 제 진짜 이름은 언노미가 아니에요!”
“그러하냐? 진짜 이름이 무엇이기에?”
“아저씨, 아니 나리께서 지어주신 이름도 좋겠지만, 저희 부모님이 지어주신 귀한 이름이 있어요. 들어보시겠어요?”
녀석의 목소리가 이렇게 환희에 차 있는 것은 처음 듣는 듯했다.
“제 이름은 길산(吉山)이에요! 나리! 꼭 기억해주세요!”
※ 작가의 말
1. 조선시대의 과거 응시 자격과 신분제도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신분은 양반─중인─상민─천민 4단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나누면 양인─천민 둘로 나눌 수 있었고, 과거 응시 자격 역시 양인이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제한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학문을 접하는 사람은 대다수가 양반 가문의 사람들이었고, 생활에 여유가 있어야 글도 읽었을 테니 양반은 대다수가 대물림되었죠. 그렇지 않은 이가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갑과에 들지 못하면 실직을 받지 못했고, 갑과에 들더라도 청요직에 올라가 출세할 일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양반’이라는 신분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공명첩이 남발되는 등 신분제도가 흔들리면서 인구에서 양반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승하긴 합니다. 나라에 공을 세운 자라면 왕이 천민의 굴레를 벗겨줄 수도, 벼슬을 내려줄 수도 있는 나라였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입니다.
2. 황해도의 호환.
조선은 전반적으로 호환이 워낙 잦았던 나라였지만, 황해도, 특히 자비령은 세조 치세에 호환 때문에 고개를 폐쇄했다는 기록과,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호환을 당했다는 기록이 내려올 정도로 범들의 소굴이었습니다.
동선령은 그에 비해 조금 덜했던 모양이지만, 이 고개에서도 호랑이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호랑이가 출몰한 것은 크게 다르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3. 장길산
홍길동, 임꺽정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도적 3인방으로 유명한 장길산이지만, 실은 그렇게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장길산은 끝까지 관아에 잡히지 않고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흔히 알려진 장길산의 이미지는 아마 황석영 씨가 저술한 소설 <장길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월산 산채, 부모를 잃고 자랐다는 설정은 거기서 따왔습니다.
실제 장길산의 기록은 숙종실록 초반부에 세 차례 나타난 것과, <추안급구안>, 그리고 성호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이라는 책에 언급되는 것이 전부입니다. 생몰년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장길산이 진짜 이름인지, 도적 두령들이 이어 쓰는 별명인지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숙종 시기, 장길산이 큰 무리를 이끌고 미륵 신앙으로 백성들을 선동하며 조력자들을 모아 한양의 반역을 꾀했다는 내용은 남아있습니다. 이때의 장길산이 장년 혹은 노년이었다고 가정하면 작중 시기의 장길산은 어린 아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