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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46화 (146/298)

146화. 준비 태세

아마 임금이 네덜란드인들의 방문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어사 일로 지친 나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을 것이다. 요운이 입을 다문 것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허나 임금이 그리 스포일러를 하지 않으려 노력했건만, 내 집 별당에 들어앉아 있던 녀석에게는 어째 그 어명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한수 너에게는 무언가를 터럭만큼도 숨길 수 없겠구나. 내 너에게 휴식을 주려고 그 일을 잠시 숨겼던 것인데, 네가 하루 만에 다시 입궐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하, 하란타의 사절단이 한양을 방문하는 것은 이 나라가 세워진 이후로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그토록 중대한 일일진대 어찌하여 제가 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일을 숨기지 않았다면 너는 도승지로서 바로 등청해 국정을 맡겠다며 우겼을 테지. 내 뜻을 하나라도 관철하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편전에서 나를 맞이한 임금이었다. 내게 사실을 들켜 당황할 줄만 알았는데, 여유 있는 임금의 태도에 도리어 힘이 빠진 것은 나였다.

“힘든 일을 한 만큼 쉬도록 해라. 네가 부탁한 면천(免賤) 건도 이미 교지가 내려간 상태다. 네가 탐관오리를 벌할 때 그 정도로 공을 세운 아이라면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 교지를 제 손으로 꾸미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깊었을 테지만, 전하의 뜻이 그렇다면 따라야겠지요.”

“어차피 네가 어사로 나가 있던 사이 왜관을 통해 올라온 하란타의 문서에도 중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네가 요청한 사람을 이 땅으로 불러들이고 있다는 이야기와 사절단에게 즉위 축하 예물을 지참시키겠다는 언급 정도가 다였으니까.”

“그 정도면 어사로 나가기 전 전하와 예측했던 내용에서 벗어나진 않는군요. 전하께서 이리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들이 한양에 방문할 날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 마지막으로 받은 문서에 곧 장기(長崎, 나가사키)에서 사절단을 출발시킨다 하였으니 조만간 그들이 이 땅에 도착할 것이 자명하지 않느냐.”

임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부산포에서 장계가 올라오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쯤이면 네덜란드 인들이 이미 부산포를 찍고 남해와 서해를 돌아 한양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네가 앞으로 이 나라를 위해 일할 날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동안 힘을 네 한계 이상으로 쏟아냈으면, 다시 채울 줄도 알아야지. 네가 호포대를 훈련시킬 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벌써 잊었느냐.”

“‘훈련은 온 힘을 다해, 휴식도 온 힘을 다해’…….”

“왜 그 격언을 네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이냐.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란타 관련 일은 네 소실이나 그쪽 집안을 통해 준비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나, 그동안 다른 일에 손을 댔다가는 어명을 거역한 죄를 엄히 물을 것이다. 알겠느냐.”

입으로는 무시무시한 죄를 운운하는 임금의 눈빛에서는 따스함만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저런 임금을 앞에 두고 내가 무슨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사실 어사를 두 지방에 걸쳐 빡세게 다녀온 것도 전례가 생길 것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었던 일이긴 했다. 나중에 외관직을 제대로 경험하지 않은 이를 대충 가까운 곳에 어사로 보냈다가, 바로 당상관에 올리는 폐단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중대한 일이 아니거든 당분간 입궐 또한 금지하겠다. 정 중한 일이라면 서찰로도 충분히 뜻을 통할 수 있을뿐더러, 지금 네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휴식이다. 이해하느냐?”

“알겠습니다, 전하…… 그 명, 삼가 받들겠습니다.”

“내 너와 마주했던 세월이 몇 년이더냐. 네 낯빛만 보아도 상태가 짐작이 가는 경지에 이르렀느니라. 부디 푹 쉬도록 해라. 내 반복하여 네게 이르는 이유가 있도다.”

하긴, 어젯밤 안채에서 나를 마주한 하연 역시 반쪽이 된 내 얼굴을 보고 한참을 눈물 흘렸던 터였다. 요안이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 참았던 건가,

그래서 간밤에는 쌓였던 정을 풀기는커녕 하연에게 잔뜩 설교를 당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다. 임금의 염려 역시 아내가 보인 것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 뜻이 고마워 고개를 깊이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임금은 그제서야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어갔다.

“하루에 한 번씩 금군을 보내 집에서 휴식을 제대로 취하고 있는지 볼 것이니, 그 금군에게 서찰을 쥐여주면 될 것이다.”

“하하, 휴식이 휴식이 아닐 것 같습니다, 전하.”

“네 스승의 태도를 보면 너 역시도 어떨지 자명하지 않느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 일을 만들어 하려고 안달이 나겠지.”

“틀린 말씀은 아니옵니다. 하오나 전하.”

임금의 총애가 물씬 느껴지는 건 그렇다 치고, 무언가 의문 하나가 슬그머니 마음속으로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단 하나 임금의 말과 행동이 다른 점이 있었다. 사소한 것이지만.

“그렇다면 어사 장계의 요약본을 작성하는 일부터 미뤄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것 또한 심심풀이로 할 만한 일은 분명 아닐 텐데요.”

“틀린 말은 아니나 안 된다.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네 소실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도록 해라. 어차피 하란타 사람들을 맞는 건으로 계속 얼굴을 맞대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중전마마께서 꽤나 애를 태우시는 모양이군요, 전하.”

한숨과 웃음이 반쯤 섞인 무언가를 내뱉은 임금이 어깨를 들썩해 보였다.

***

하지만 임금이 바랐던 것처럼 내 휴식은 길지 못했다.

궁에서 철저한 휴식을 명받고 물러나온 다음날이었다. 금군이 헐레벌떡 뛰어와 전한 왕의 서찰에는 동래도호부에서 올라온 장계의 사본이 첨부되어 있었다. 말을 갈아타며 올라왔을 파발(擺撥)의 속도를 생각하면 사흘에서 나흘 전의 일.

“부산포에 입항했던 하란타의 이양선(異樣船)이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는구나. 곧 네 공부가 빛을 발할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조금 걱정이긴 하네요. 아버지도 고향의 말을 많이 잊으셨다고 하셨거든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하란타의 말이 과연 잘 통할지…….”

“그들도 일이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을 고려하고 차선책으로 역관 정도는 대동했을 게다. 열도에 상시 체류하는 자들이 사절단으로 온다 하였으니, 일본어가 가운데 끼면 크게 문제될 일은 없을 것이고.”

소식이 오자마자 나는 별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덜란드와 접촉하게 될 때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해 줘야 할 녀석이 내 집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요안이 녀석은 평소 성격과는 다르게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하지만요, 저 같은 아녀자가 그렇게 중대한 자리에 낀다는 것 자체가 너무 떨리는 걸요. 요운이가 하란타 말을 조금만 더 일찍 배우기 시작했더라도…….”

“어쩔 수 없지. 지금 그나마 하란타의 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종사관 어른과 너뿐이니까.”

“선생님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빨리 생기길 바랐지만, 이렇게 제 생각보다 빨리, 중대한 일이 될 줄은 몰랐어요…….”

녀석이 울상인 이유가 있었다.

창덕궁에서 열릴, 네덜란드 사절단을 맞아들이는 자리에 요안이가 여자로는 유일하게 참석하게 될 예정이었으니까.

박연이 통역을 맡아준다 하여도, 오가는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빠르게 왜곡 없이 기록할 사람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해야 왕비의 심복으로 일할 거라 생각했던 녀석에게는 분명 부담이 클 터.

어찌 그런 중대한 자리에 아녀자를 들이냐며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처음 찾아오는 손님에게 조선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명분 아래 다들 입을 다물었다고 들었다. 외교는 언제나 의전과 기싸움을 제외하면 성립이 되지 않기 마련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다 잘 될 테니까.”

“너무 떨려요…….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여전히 부들거림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요안이었다. 천천히 녀석을 향해 손을 뻗어, 부드러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괜찮다. 네 옆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 테니까. 그런 걸 수습하라고 있는 자리가 조정의 관료인 것이다.”

“……정말 괜찮겠죠? 하아, 선생님만 옆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파르르 떨리며 갈 곳을 잃어하던 요안의 손끝이 차분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좀 평정을 찾았는지, 입을 삐죽이며 내가 헝클어뜨린 머리칼을 정리하는 녀석을 보니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런 요안을 바라보며, 녀석을 맞아들이면서 했던 맹세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도록 하자. 녀석이 품은 뜻을 온전히 펼치게 해 주자.

어차피 우리는 이제 영원히 한 배를 탄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끝까지 녀석을 지켜주어야 스승으로서도, 남편으로서도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셈이겠지.

“핫! 선생님, 그래서 저희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네가 사용할 수 있는 하란타 표현들을 정리해보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네 능력을 정확히 알아야 나도 그 자리에서 도와주기 수월할 테니까.”

내 손에서 떨어져나간 녀석은 잔뜩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코앞에 닥친 중대한 나랏일이 우선이었다.

***

도승지로서 내 정식 출근은 그로부터 열흘이 좀 지나고 난 후에 이뤄졌다. 제물포에 네덜란드의 범선이 입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는 휴가를 늘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제물포에 들어온 네덜란드 범선은 플류트일까?’

창덕궁을 향해 걷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네덜란드 앞바다도 한반도만큼은 아니지만 수심이 얕기로 유명했다. 그런 나라에서 만들어 흘수(吃水, 물에 잠기는 부분)가 얕은 선박은 갯벌투성이인 서해를 거슬러오는 데 도움이 꽤 됐을 것이다.

아마 생각보다 도착이 늦은 것도 그 때문이겠지.

부산포에서 물길을 알려주려 붙인 배는 느렸을 것이고, 그 배를 따라가는 동안 나름대로 연안 측량도 했을 테니까. 아마 익숙한 바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달렸으면, 부산포에서 제물포까지 플류트로는 일주일도 차고 넘쳤을 것이다.

이런 최신 선박 기술을 네덜란드에게서 전수받을 수 있다면, 이 나라의 무역은 순식간에 몇 단계는 진보할 것이다. 군선인 판옥선보다도 두 배는 빠른 속도에, 월등한 적재량까지 따지면 기존에 쓰던 배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 분명하니까.

“나으리, 아니, 이제 도승지시면 뭐라고 불러드려야 합니꺼?”

생각들이 흩어진 것은 궐내각사로 통하는 금호문 앞에서였다.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생각에서 현실로 끌고 나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인, 금호문 앞에서 출근하는 관료들의 소지품을 검사하던 수문장의 낯이 익었다. 호포대 출신들이 죄다 금군의 빈자리를 채웠으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영감이라고 불리는 게 맞지만, 그냥 평소대로 나리라 부르게, 박 오장.”

호포대 시절의 호칭을 그대로 부르자 수문장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이름까지 지어준 대원이 출세해 궁궐의 수문장까지 맡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도 여간 흐뭇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금호문을 통과해 도승지로서 첫 발을 궁에 내디뎠을 무렵, 내 눈에 웬 이상한 광경 하나가 보였다.

익숙한 이가 낯선 차림을 하고 낯선 행동을 하고 있었다.

“사형,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겝니까?”

“어! 한수 아니냐! 살았다!”

웬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때깔 좋은 관복을 걸쳐 입은 충신이었다.

누구보다 청색 관복 차림새가 어울리지 않는 양반 같으니라고.

반정에 공을 세웠다고 과거에 턱걸이로 합격한 자가 종육품 관직을 받은 건 그렇다 치고, 왜 갑자기 덩치랑 어울리지도 않게 내 뒤에 몸을 숨기려 그리 애를 쓰는가.

“뭐 하는 겁니까? 궐내에서 당상관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질 않나, 참상관쯤 되는 사람이 체통을 깨는 행동을 하질 않나.”

“그런 거 나는 모르겠다. 잠시, 잠시만 이렇게 있게 해다오. 부탁이다.”

“그 무슨……?”

그때였다.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또 들려온 것은.

“어! 사위 아닌가! 궐내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구만. 드디어 승정원으로 정식으로 등청하는 겐가?”

붉은 관복을 차려입고 나를 향해 접근하는 분이 계셨다. 장인어른이었다.

좌의정쯤 되시는 분이 여기서 무얼 하시는 거지.

“좌상 대감? 헌데 궐내각사에서 나오신 걸 보면 이미 등청하신 모양인데, 어째서 다시 이 금호문으로 오신 겁니까? 자택에 두고 온 물건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어허, 궐내라고 예의 차리지 말게. 내가 자네를 도승지라고 부르면 좋겠는가? 그리고, 물건은 아니지만 잃어버린 게 하나 있긴 하네.”

씨익. 김육의 한쪽 입꼬리가 높이 올라붙었다.

“장인어른, 그래도 모든 관원들에게 본을 보이셔야 하는 정승이신 분이…….”

“됐고, 자네 뒤에 숨은 병아리 하나를 어서 내놓게. 일만 시키면 도망가려 하니 목줄을 채울 수도 없고 이거야 원.”

김육의 손가락이 천천히 들려, 내 등 뒤에 숨은 충신을 가리켰다. 숨넘어가는 소리가 등 뒤에서 새어나왔다.

“아, 이 사람이 호조 별제(別提, 종6품)로 임명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헌데 어째서 장인어른께서 직접?”

“싹이 아주 파릇파릇해 보이는 신진을 발견했는데 어찌 가만둘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제 가진 능력과는 달리 꾀를 부리려 용을 쓰는데, 조선의 신료로서 기본자세부터 다시 가르쳐야지.”

“한수야! 나 좀 살려다오! 좌상대감께서 그동안……!”

숫제 비명을 질러댈 것 같은 충신이었으나, 그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장인어른께서는 뚜벅뚜벅 거리를 좁혀올 뿐이었다.

이윽고 김육은 내게, 아니 내 등 뒤에 숨은 충신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어찌나 바싹 붙었는지, 그의 콧날에 남은 천연두 자국 하나하나를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사위…… 알지?”

“물론이지요. 장인어른. 고작 신진 관료 하나 다스리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서 데려가 버릇을 고쳐놓으시지요.”

“야! 안한수! 인마!”

“궐 안에서 아래위도 모르고 날뛰는 것을 보니 앞길이 구만리는 남았지 싶지만, 장인어른이시라면 금방 교화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나중에 안사람 데리고 자택에서 뵙겠습니다.”

재빨리 김육과 충신 사이에서 몸을 빼냈다. 그리고는 충신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며 승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늘 낮것은 정말로 꿀맛이겠군.

승정원은 궐내각사 중에서도 왕의 공간과 가까운 동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비서실 격인 기관이니 당연한 것.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걸어 새 직장인 승정원에 도착했을 때였다.

여덟 명의 관료들이 승정원 앞에 도열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나에 꽂히자마자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나였지 싶었다.

“다들 여기서 무엇들 하고 계십니까?”

“도승지 영감이 처음으로 등청하시는 날이 아닙니까. 승정원의 수장을 처음 뵙는 자리인데, 다들 인사라도 올리려 이리 모였습니다.”

맨 앞에서 나를 맞이하는 이는 이번에 좌승지로 새로 임명받은 산당 관료였다.

송준길. 송시열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다른 승정원의 관료들 역시 내게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임금의 기분이 좋은 이유가 있었다.

산당의 본거지인 삼사에서 한당 영수의 맏아들, 김좌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수족이 될 승정원에는 산당의 기린아, 송준길이 스스로 지원해 들어왔다.

당파를 구분하지 않고 중하게 쓰겠다던 임금의 계획이 벌써 이렇게 실현되고 있었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다섯 명의 승지들과 각각 인사를 나누고, 그들을 보좌하는 세 명의 참하관들과도 인사를 나누려던 찰나였다. 녹색 공복을 차려입고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채로 나를 맞이하는 익숙한 사람 하나가 있었다.

“오셨습니까, 도승지 영감! 궐에서 뵈니 더 반갑습니다!”

아침햇살이 희미하게 비치는 승정원 마당에서도, 그 얼굴에 붙은 커다란 코 하나는 명확히 분별할 수 있었다. 성근학당의 전 일타강사, 윤휴였다.

뒤통수에 불길한 느낌이 감돌았다. 이 자를 승정원으로 꽂아 넣은 임금의 의도는 손에 잡힐 듯이 명확했으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 광신도가 내 밑에서 일하게 되면 도대체 얼마나 나를 피곤하게 만들 것인가.

곧 네덜란드 사절단이 한양으로 들어온다는 송준길의 말이 귓등으로 스칠 정도로 심정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하아.

※ 작가의 말

작중에 언급된 플류트(fluyt), 혹은 플루이트라는 선박과 그와 관련한 용어들에 대해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추가적인 서술을 남깁니다.

플류트는 돛을 이용해 바람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범선입니다.

원래 이 시기에는 갤리온(Galleon)이라는 만능 범선이 존재했으나, 제작비와 운용비가 비싼 데다, 덩치도 커서 배 한 척을 움직이는데 들어가는 인력마저 많이 필요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인구도 적고 앞바다가 얕은 탓에 제대로 된 항구가 발달하기 어려운 나라라 갤리온을 운영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독일─덴마크에 걸쳐있는 갯벌지대는 남해와 서해의 갯벌에 비길 만한 규모거든요.

그래서 네덜란드인들은 지혜를 짜내 이 갤리온을 상업에 특화된 플류트로 개조하게 됩니다.

오로지 무역만을 위해 개발된 배였기 때문에, 조립식 용골이나 다단 돛대, 표준화된 자재까지 개발해 갤리온에 비해 건조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1/3으로 줄였습니다. 거기에 대포 등의 무장은 최소한으로 싣고, 운용하는 선원도 갤리온에 비하면 1/3 가량, 실을 수 있는 짐의 부피는 최대로, 상업에서 시간은 곧 돈인데다 전투는 피해야하므로 속력 또한 빠르게.

얕은 바다와 깊은 바다를 둘 다 다녀야 했기 때문에, 무게중심은 아래에 가 있으면서도 물에 잠기는 부분(흘수)는 얕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플류트라는 범선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세계 곳곳을 누비던 이 녀석이 끌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자카르타까지 편도로 대략 7개월이면 주파가 가능했다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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