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하란타 사절단
“처음엔 제가 승정원에 들어와도 되는 것인가 꽤나 망설였지만, 영보의 말이 옳았습니다. 도승지 영감.”
“그게 무슨 뜻입니까, 좌승지?”
“그 깐깐한 영보가 영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당파 간 갈등이 심했을 무렵부터 말입니다.”
승정원에서 업무를 다루게 된 첫날, 바빠서 눈이 돌아갈 것 같던 하루를 마치고 퇴청할 준비를 하던 도중 송준길이 꺼낸 말이었다.
송시열과 비슷한 연배라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음에도, 나를 대하는 데 있어 공대를 한시도 떼지 않는 송준길이었다. 승지들은 명목상 모두 같은 정삼품이라고는 하나, 승정원의 수장에게는 반드시 예를 갖춰야 한다나.
“그렇게나 길게 암행을 나갔다오신 분 같지가 않습니다. 오늘 맡으신 승정원 업무도 능숙하기가 다른 승지들과 다를 바가 없으시고요.”
“과찬이십니다. 그저 이전에 비슷한 업무를 많이 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으십니다. 윤 주서(注書, 승정원 정7품) 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처음 맡는 승정원 업무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건만,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았나보다. 벼루에 쓰고 남은 먹물을 꼼꼼히 닦아내며 나를 바라보는 송준길의 시선에서 묘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윤 주서요?”
“저기 오는 저 사람 말입니다. 마침 제 얘기를 하니 바로 나타나는군요.”
송준길의 소매 끝을 따라가니 그 방향에는 윤휴가 이쪽을 보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 인간은 내가 승정원으로 출근하기 전부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닌 건지.
“좌승지 영감, 소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새 도승지 영감은 대단하신 분이라니까요. 제가 미리 겪어보고 말씀드렸다 하지 않았습니까.”
“자네가 도승지 영감께 내린 평가가 어지간히 과장된 것이어야지. 허나 이제 알겠네. 그 말에 과장이 없었단 사실을.”
“이제 좌승지 영감도 도승지 영감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핫핫. 저도 금방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십여 년 전 송준길을 처음 만났던 시절의 이야기까지 꺼내가며 껄껄 웃는 윤휴였다. 송준길 역시 소리 없는 웃음을 입가에 띤 채 윤휴의 말을 받아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서인 계열과 남인 계열이 서로 칼을 겨누게 된 것은 효종이 죽고 예송논쟁이 불붙고 나서였다. 소현세자가 왕위에 오른 이 역사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어떻습니까? 퇴청하고 승정원 관료들끼리 술 한 잔 하시는 건?”
“자네, 오늘 일이 적었다고 너무 정신을 놓은 건 아닌가? 이 대궐에서 가장 바쁜 관청이 승정원일진대, 벌써부터 해이해져서는 안 되네.”
“거 참. 농담입니다, 농담. 소인도 하란타 사절단 일로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만큼 두 분과 함께 일하게 되어 기분이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올시다! 와핫핫!”
윤휴의 저 성격은 승정원에서도 말리기 어려울 모양이었다. 그나마 송준길이 제때 일침을 넣어가며 김을 빼 주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나란히 승정원을 나서는 둘을 보며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원 역사에서는 벗에서 원수로 사이가 틀어진 둘이지만, 여기서만큼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적어도 정통성이 바로 선 왕이 인조의 뒤를 잇게 된 만큼, 예송논쟁과 같은 일로 당파가 갈려 서로 피를 보게 될 일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혹여나 비슷한 기미가 생기더라도 그것을 막아내는 게 내 임무가 되겠지.
***
네덜란드인들이 한양으로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조정에서 웬 양이(洋夷)들을 도성에 들여도 되냐는 논쟁이 잠시 벌어지긴 했다. 그러나 감자 종자 같은 신문물을 얻은 창구가 그들이니 쫓아낼 필요는 없으며, 박연의 신변에 대해서도 논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 주류를 이뤘다.
어차피 류큐나 베트남에서 사신이 찾아왔을 때도 예를 다해 맞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왕의 즉위를 축하하며 예물을 들고 찾아온 손님들을 쫓아낼 명분은 없었다.
결국 모르는 나라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조선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사절단을 한양까지 접대하고 호송하는 원접사(遠接使)로 임명된 것은 당연히 나였다. 네덜란드 인들과 접촉해본 경험이 있고, 사절단을 맞아들이기 적당한 위치의 관직을 가진 사람은 조선 땅에 나뿐이었으니까.
그렇게 통역을 맡은 박연과 함께 제물포까지 나가 네덜란드 사절단을 맞이하러 나갔을 때였다. 스무 명 남짓인 사절단 안에는 익숙한 얼굴이 하나 끼어있었다.
아담 샬의 주선으로 북경에 찾아왔던 그놈이었다.
“안흐남 케니스 떼 마켄!”
“…….”
네덜란드어는 쥐뿔도 몰랐지만 맥락상 그 뜻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갑다는 뜻이겠지. 허나 그 말을 통역해야 할 박연은 멍하니 서서 제 임무를 잊은 듯했다.
“왓 이스 어 흐뷸드?”
“박 종사관?”
외모 탓일까. 조선 측 수행원보다는 네덜란드 사절단의 일원으로 보이는 박연이었다.
그의 눈가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아, 아……. 내가 그만 정신을……. 이 자리까지 보내주신 상감마마의 은혜를 잊을 뻔했군.”
다행히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박연은 능숙하게 네덜란드어로 조선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를 사절단에게 건넸다.
사절단 맨 앞에 서 있던 외알 안경을 쓴 이가 그 인사를 받더니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전했다. 박연이 조선에 표류한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뜻이 통할 정도의 네덜란드어는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란타 사신은 관대하신 국왕 전하의 즉위를 축하드리며, 그들이 가져온 선물을 한양에 가져가 상감마마의 어전에 직접 바치고 싶다고 합니다.”
“선물? 그러고 보니 예물을 지참하겠단 이야기가 이미 문서로 오갔었지. 도성에 들어가기 전, 확인해보아도 좋겠냐고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당연한 절차니 따르겠다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직접 확인하겠냐고 묻고 있습니다.”
외알 안경을 쓴 자가 신호를 보내자, 뒤에서 웬 선원 하나가 묵직한 상자 하나를 받쳐 들고 앞으로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화려하게 장식된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나는 이들의 속셈이 무엇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저놈들이……!”
“박 종사관, 무슨 일입니까.”
“뒤에 선 하란타 일행 사이에서 역시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자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이들이 가져온 선물을 보고, 내 낯빛이 눈에 띄게 변하기라도 한 건가.
그럴 만한 물건이긴 했다.
상자 안에는 선명한 파란색을 띠는 가루가 가득 담겨 있었다.
***
네덜란드 사절단을 맞아들이는 절차는 일본이나 유구국 사신을 맞아들이는 절차와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그만큼 임금이 네덜란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승지로 출근하기 시작한 직후 가졌던 임금과의 독대에서, 내가 네덜란드와 관련된 미래 지식을 죄다 풀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임금은 그제서야 내가 왜 북경에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해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종사관, 이 하란타인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고작 총독의 대리인이자 일개 상관의 우두머리에 불과한 본인을 이토록 환대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옵니다.”
임금과 나, 그리고 박연, 거기에 외알 안경을 낀 네덜란드 사절단의 우두머리. 이렇게 네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모두 물리고 편전에 들어앉아있었다.
사신을 맞아들이는 의례인 수린국서폐의(受隣國書幣儀), 연인국사의(宴隣國使儀)를 모두 마친 직후였다. 사절단은 임금에게 절을 올리고 국서를 전한 후, 임금이 베풀어준 연회에 예를 갖춰 참석해야만 했다.
중간에 임금에게 사배(四拜)를 올리는 과정에서 그들 식으로 절을 하겠다 잠시 실랑이가 일었으나, 지금 임금 앞에 앉아있는 엘세라크라는 자가 동행들의 불만을 전부 무마하고 임금에게 몸소 조선식 절을 올렸다.
“내가 그의 처세술에 감탄했다는 칭찬을 전하도록. 그 때문에 그를 이 자리에 불렀다는 것 또한 전하고.”
“어…… 그게…… 처세술이 아닌, 진심을 보이고 싶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내려주신 은혜 또한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통역을 맡은 박연은 점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려운 단어가 나올 때마다 더듬거리는 것은 그렇다 치고, 아예 생소한 개념의 단어를 접할 때마다 점점 얼굴빛이 어두워지는 박연이었다.
나나 임금은 그런 박연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나, 박연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않고 있을 터.
생각보다 원활하지 않은 소통 탓인지, 엘세라크라 불린 네덜란드인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최대한 풀어 말하기 시작한 후부터 그나마 통역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좋다. 그 또한 진심이고, 나 또한 진심이라면 이야기는 쉽게 풀리겠군. 한양까지 오는 길은 편안했냐고 묻거라.”
“이 땅의 바다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거칠었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배를 모는 맛도, 측량하는 맛도 나는 바다였다고 하는군요.”
“그러하냐. 그들의 항해술이 꽤나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젠가 그 진가를 한 번 보고 싶다 전하거라. 그리고 지금부터는 여기 있는 도승지가 나를 대리해서 그를 상대할 것이라는 것 역시 전하도록 하고.”
박연이 임금의 말을 엘세라크에게 전하자, 그는 즉시 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원래 서양인들이 이토록 자존심을 쉽게 굽히는 자들이었나? 발톱을 숨긴 것인지, 고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법이 뛰어난 것인지는 몰라도 만만히 봐서는 안 될 자임이 분명했다.
“반갑습니다, 얀 판 엘세라크 상관장님. 조선국 승정원 도승지 안한수라고 합니다.”
“당신 이름은 부하를 통해 감명 깊게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반쯤은 당신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피터르라 불리던 하란타인 말인가 보군. 이번 자리에도 동행시켰던데.”
“그 자가 페킹…… 북경에서 저지른 실례에 대해 대신 사과드린다고 합니다. 그때 일이 양국의 우호를 망치지 않길 바란다는군요.”
“좋습니다. 그것은 전하께서도 바라지 않으실 터. 종사관, 밖에 대기 중인 여사(女史)를 들게 하십시오.”
이야기가 본론에 들어갈 때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처음으로 조선과 네덜란드가 제대로 외교를 통하게 되는 자리. 한 글자도 허투루 다뤄서는 안 될 것이다.
“허어……!”
상궁의 복장을 하고 지필묵을 든 채 편전으로 들어온 요안을 보고, 네덜란드 상관장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로 벨테브레이가 이 땅에 살아있었던 것도 놀라운데, 자식까지 낳은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네덜란드어 공부를 하더니, 요안이 녀석은 엘세라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듯했다. 녀석의 얼굴이 잔뜩 굳어져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북경으로부터 전해들은 말이 사실이었다며, 정말로 전하의 대리인이신 도승지께서 하란타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확인하여 기쁘다 합니다.”
“북경에서? 아…….”
네덜란드인들을 끌어내기 위해 박연과의 인연을 강조하려고 요안이를 내 정혼자라 속였던 일이 기억났다. 결국 내 입으로 뱉은 말은 책임을 져야 하는 모양이었다.
요안은 그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오가는 네덜란드어 대화를 그대로 세필로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뒤에 앉아있던 임금이 녀석에게 적혀있는 내용을 묻는 말이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문서에 명시했던 대로, 이번에 한양으로 올라오며 측량한 결과물은 이쪽에도 사본을 넘겨야 할 것입니다. 알고 계시겠지요.”
“약속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 하나에게 측량을 가르치는 것 역시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그리고?”
“측량은 약속한 대로 부산포에서 제물포 사이까지만 실행했지만, 한양까지 오는 나머지 물길까지 측량을 허락해주면 조만간 자신들이 몰고 온 범선과 같은 종류의 배를 선물할 의향도 있다고 합니다.”
요안과 대화를 나누던 임금의 음성이 정지했다.
타고 온 배, 그러니까 플류트를 선물한다고?
“그건 매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나, 아시다시피 도성 근방의 지형은 이 나라의 안보와 관련된 것, 함부로 넘길 수 없다 전하시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다고 합니다. 허나 한강 수로를 이용하면 훨씬 더 편하게 교역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상관장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한강은 하상계수가 미쳐 날뛰는 강이니 사시사철 이용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한강의 수량이 적당한 계절에 작은 플류트 범선을 이용한다면 한강을 거슬러 올라 마포나루에 배를 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화도 근방의 물길이 험하다지만 진보된 측량기술로 해도를 제대로 작성한다면 항해 난이도가 대폭 감소할지도. 침이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다.
정말로 이 자들은 조선 교역에 진심인 건가.
“전하께 바치는 예물 중 하나의 정체를 알아채신 분이라면, 자신들의 본심 또한 알아채셨을 거라 생각한다 합니다. 그…….”
“상관장이 방금 입에 담은 ‘코발트 블라우(kobalt blauw)’가 무엇인지 종사관은 모를 만하지. 그건 회회청(回回靑)이라는 염료요.”
박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의 통역을 전해들은 엘세라크의 눈 역시 커다랗게 변하고 있었다. 어떻게 조선 사람이 네덜란드어로, 그것도 염료를 가리키는 특정한 단어를 알아들었는지 감도 안 오겠지.
더 궁금해 해라. 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조선에서 느껴라.
이미 나는 이 엘세라크라는 자가 선물로 코발트 블루 염료를 들고 왔을 때부터 그의 목적을 파악한 상태였다. 카드를 내보인 네덜란드와 감추고 있는 조선, 이 담판이 앞으로 누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