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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49화 (149/298)

149화. 문화 교류

박연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하고 당당했다.

그 단호함에 엘세라크가 잠시 당황을 감추지 못한 것을 빼면, 그날의 접견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약간의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카스텔라를 대접한 것이 엘세라크의 마음을 움직이기라도 한 걸까. 엘세라크는 그 자리에서 임금에게 커다란 약속 한 가지를 전하고 편전에서 물러났다.

“우물우물……. 저는 솔직히 하란타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지만요……. 이번 일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네덜란드 손님이 손도 대지 않은 카스텔라는 그걸 제일 좋아할 만한 녀석에게 상으로 내려졌다. 평소 행실과는 달리 붓끝 하나는 야무진 요안이 속기로 작성한 대화록이 임금의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동안 소설을 써온 솜씨 덕분인지, 속기 하나만큼은 나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어떻게 그 짧은 사이에 네덜란드어와 그것을 번역한 한문까지 다 적어냈는지.

“요안아, 서방님 앞이다. 계속 그런 추태를 보일 테니?”

허나 언뜻 어른스럽게 보이던 녀석의 이미지는 귀가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깨져버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임금이 내려준 하사품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침을 질질 흘릴 것 같던 녀석이었던지라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퇴궐시킨 것인데.

“죄, 죄송해요, 언니…….”

“괜찮습니다, 부인. 하루 이틀 그러던 아이도 아니고.”

용케 내가 퇴궐할 때까지 그걸 안 먹고 버티고 있었나 싶었다.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대문을 박차고 들어서자마자 언니가 있는 안채로 카스텔라를 들고 쪼르르 달려갔다나. 하연이 그걸 나를 두고 혼자 먹을 사람이 아니었던 게 문제였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잽싸게 카스텔라를 손에 쥐더니,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혀가며 오물거리던 녀석이었다. 먹으면서 말까지 하고 있었으니 하연이 그걸 곱게 볼 리가.

“너도 혼인을 하고 머리까지 올렸으면 이제 좀 어른스러워져야 할 게 아니니. 네가 그러고 다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간 서방님께서 욕을 먹는단 말이야.”

“그치만 밖에서는 이러지 않는걸요. 이게 다 언니랑 선생님 앞에 있으면 마음이 풀어져서…….”

“또, 또 변명한다! 어째 너보다 이번에 행랑채로 들어온 아이가 가끔은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구나. 너도 후처지만 숙인(淑人, 정삼품 당상관의 처)다운 몸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그리 일렀거늘.”

임금의 하사품에 큰절을 올리고는 기품 있게 카스텔라를 베어 물었던 하연이, 이제는 요안이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떼 주면서 혼을 내고 있었다.

정작 말과는 달리 눈에서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요안이 녀석은 자연스럽게 얼굴을 하연에게 맡기고 있다. 누가 봐도 언니에게 살뜰히 보살핌 받는 동생의 모습이다.

“부인. 전하 앞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풀어진 탓일 테니 오늘은 그냥 넘어가 줍시다. 혼은 나중에 내도 되는 것이고, 지금은 그저 그대가 귀한 음식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이 음식, 달고 맛있긴 하네요. 하란타 상인이 가져온 물건으로 만든 과자라고요?”

“사탕(砂糖)이라는 감미료가 들어갔습니다. 제주보다 더 남쪽, 더운 나라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입니다. 지금까지는 중원을 통해 조금씩 들어온 물건이지만, 하란타인들과 교역을 시작하면 더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조선시대 여인들 중에도 단맛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내의 얼굴에 포근한 웃음이 올라앉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까지 한없이 말랑말랑해지고 있었다.

“아! 맞아요! 언니, 이번에 들어왔던 하란타 사람들 중에 일부가 한양에 남는다고 했어요! 이거 말고도 신기한 식재료들을 많이 들고 왔던데, 앞으로 맛보게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너는 언제나 음식에 진심이구나. 헌데, 하란타 사람이 한양에 남는다니?”

“아, 그건 내가 설명하겠습니다, 부인. 하란타 사절단의 우두머리가 전하께 주청을 올린 결과입니다.”

박연의 선언 후, 깊은 생각에 빠졌던 엘세라크가 꺼낸 말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나가사키 상관장 임기가 마무리되어 후임에게 물려주고 떠나온 길이었다며, 가능하면 조선에 머물 곳을 내려달라 요청한 것이다.

엘세라크는 조선과 본격적인 무역이 시작되기 전에 지금 당장부터라도 기틀을 다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차피 조선에 체류할 사람도 적으니 문제가 될 여지도 적고, 본국의 특사가 오기 전 교류를 나누고 싶다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그런데 한양 안에 그 사람들이 마땅히 머물 곳이 있나요? 종사관 나리와 요안이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적당한 장소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혹시 우리 집에 머물게 할 생각은 아니시겠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적당한 곳이 한 군데 있었습니다. 제 영향력이 뻗어있는 곳이라 혹시나 하란타인들이 다른 마음을 품더라도 금방 잡아낼 수 있는 곳이고요.”

“아버지도 거기 사람들이랑 안면이 있어요! 평소에 거기서 사 오신 고기를 자주 드시거든요!”

네덜란드의 조선 상관이 들어설 자리는 바로 반촌이었다. 천민들 사이에 머물게 한다고 불만이 나올까 했었는데, 오히려 반응이 나쁘지 않아 조금 놀랐었다.

어쨌건 대궐과 가깝고, 혜화문으로 나서면 도자기 가마가 즐비한 이천으로 향하는 길이 나타난다는 점이 엘세라크의 마음에 든 듯했다. 어쨌건 그 자가 바라던 것은 조선에서 양질의 도자기를 공급받는 것이었으니까.

신선한 육류를 금방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원한다면 여의도의 왕실 목장과 교하의 속환인 마을에서 생산된 유제품도 내려주겠다고 하니 엘세라크는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무래도 입에 안 맞는 음식을 먹는 건 정말 고역일 테니까요. 아버지가 옛날 얘기를 해 주시던 시절에 항상 강조하시던 거예요.”

“그건 종사관 어른이 강조하시지 않았더라도…… 아니다. 아마 그래서 당분간 너도 그 사람들과 자주 마주쳐야 할 일이 많아질 게다. 종사관 어른은 총통위에서 맡은 일도 있고 하니.”

“하란타 말을 통역하는 일 말씀이시죠? 맡겨만 두세요!”

다음 바깥나들이를 기대하는 모양인지 신이 난 요안이었다. 아마 녀석 마음대로만은 되지 않겠지만 말이지.

아무리 네덜란드인 통역이라지만 여자를 단독으로 보낼 만큼 조선이 열려있는 나라는 아니었으니까. 녀석을 제어할 겸, 또 네덜란드어와 측량도 배울 겸 오라비인 요운이가 늘 녀석에게 붙어 다닐 것이었다.

암행을 복귀한 자리에서, 임금이 성근학당 관련해서 나중에 말해주겠다 했던 이야기가 이것인 모양이었다. 지금은 네덜란드어 기초가 되어있는 요운이 한 명만 반촌에 드나들겠지만, 점점 네덜란드와 접촉하는 학도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제 오라비와 투닥거리는 일은 없겠지? 요운이가 네덜란드인들에게 측량을 배우는 사이, 요안이 녀석이 얌전히 있길 바랄 수밖에.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또 새로운 무언가를 만날 기대감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나는 그 순진한 동심을 차마 깰 수 없었다.

***

그렇게 조선에 체류하게 된 엘세라크가 나와 접견을 원한다며 연락을 넣어 온 것은 몇 주 후였다. 그들이 타고 왔던 플류트는 나가사키로 돌아가고, 그가 데리고 온 몇 명만 남아 반촌에 새로운 상관이 한창 건설 중이던 무렵의 일.

아마 미래에는 반촌이 나가사키의 데지마처럼 바뀌려나.

물론 에도 막부가 데지마를 감옥으로 써먹었던 것처럼 반촌을 쓸 생각은 없었다. 조정에서는 반발을 무마하느라 내 영향력이 닿는 천민촌에 몰아넣었다 변명했지만, 앞으로 이곳은 네덜란드와 조선의 친선의 장이 될 것이니까.

“반캅습니다! 도승지!”

네덜란드인들은 상관이 세워지기 전까지 충신이 반촌에 세워놓은 별장에 묵고 있었다. 말이 별장이지 반촌 사람들이 점점 충신의 상단 일을 자주 맡게 되면서 거의 출장사무소처럼 쓰이던 공간이었다.

엘세라크는 방에서 기다리기는커녕 대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그에게서 어색한 억양의 조선말이 들려왔다. 그새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조선말이 많이 느셨군요. 당신의 노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별것 아니래요. 언제까지고 역관의 신세를 질 수는 없다네요.”

박연과 요안이 다른 일도 맡고 있었던 탓에 그들에게 하루 종일 붙어 다닐 수 없다는 사실을 엘세라크는 깨달은 듯했다. 지금 요안이 이 시간에 반촌에 와 있는 것도 그들을 찾아온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아하하!”

“요안아, 왜 그러느냐?”

“상관장이 말하길, 아버지가 나 때는 역관도 없었다며 감사하게 여기라는 농담을 건넨 일이 기억난대요. 글쎄요, 제 생각엔 농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정말 조선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본래 상인이란 자들은 이문이 떨어지는 곳이라면 지옥까지 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조선말을 열심히 배우는 것도 자신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반경을 넓히기 위한 포석일지도 모르지.

내가 믿어야 할 사람은 임금을 위시로 한 조선 사람들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엘세라크를 따라 음식이 차려져 있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오?”

“낯선 땅에서 고생이 많으실 텐데, 향수라도 달래시라고 입에 익숙하실 만한 음식들을 몇 개 내 봤습니다.”

“원래 그리 음식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라 괜찮지만 고맙게 받겠다는데요? 하긴 아버지도 고향 음식을 별로 맛보여주신 적이 없긴 했어요.”

박연이 그랬던 이유는 아마 네덜란드에서 쓰이는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겠지만, 생각해보니 네덜란드 유학생과 꽤나 어울렸었음에도 기억에 남은 네덜란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해봐야 고다 치즈 정도?

덕분에 적당히 유제품과 밀가루가 쓰인 음식만 있으면 엘세라크의 입맛을 대강 만족시킬 수 있는 모양이었다. 네덜란드가 국제적인 상업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영국도 그쪽으론 비슷하고.

“우유가 넉넉한 나라가 아니라 들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구할 수 있어서 놀랐대요,”

“사실 아직도 쉽게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주상 전하께서 타국에 오래 계시던 시절, 밀가루와 유제품을 자주 즐기셨던 터라 지금도 궁궐에 들어가는 물량만은 착실히 생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심양에서 밀로 곡물을 자급자족하며 버티던 시절에 임금의 입맛이 바뀌었었는지, 세자 시절 청에서 귀국하면서도 임금은 사하보에서 가축을 키우던 이들을 데리고 귀국했던 터였다. 물론 밀 종자도 함께였다.

그렇게 데리고 들어와 교하에 정착시킨 백성들이 조선 땅에서도 열심히 가축을 치고 유제품을 만들어 궁궐로 올리고 있었다. 덕분에 전에는 약으로나 쓰이던 유제품들은 수랏상에 꽤 자주 모습을 보였다.

“그것참 다행이라네요. 상관장도 선원 생활을 오래 해서 좋은 밀떡과 어…… 까스만 있으면 신께 감사를 올리고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해요. 까스가 뭐죠?”

“유제품 이야기를 한 걸 보니 아마 낙(酪, 치즈)이 아니겠느냐, 아직 하란타의 뛰어난 낙보다는 못하지만 언젠가 조선에서도 비슷한 품질의 낙을 먹을 수 있을 거라 전하거라.”

“안 그래도 선생님이 허락하시면 만드는 법을 자세히 적어드리겠다고 하네요. 까스가 도대체 뭐길래 저렇게 목숨을 거는지.”

아마 녀석도 먹어보면 엘세라크가 이해가 가지 않을까? 마침 그들이 자랑하는 그 치즈를 이용한 음식을 오늘 음식상에 올렸던 터였다.

“오오!”

음식상에 자리를 잡고, 앞에 놓인 두 가지 음식을 본 엘세라크는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감탄을 이끌어낸 요리는 박연이 내게 만들어준 비프 스튜와, 내가 심양에서 만들었던 요리였다.

치즈에 색소를 많이 안 타던 시기여서 그런가, 뒤집혀진 뚝배기와 빵 사이로 살짝 연노랑이 감도는 끈적한 치즈가 녹아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뚝배기가 들리고, 그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수증기와 치즈향기에 엘세라크가 무어라 감탄사를 더 뱉어내던 와중이었다. 요안이가 웬 뜬금없는 말을 물어왔다.

“선생님, 나폴리가 어디인 줄 아세요? 상관장이 나폴리에서 먹었던 낙 과자가 왜 여기 있냐면서 혼란에 빠져 있어요. 모양은 좀 다르다고 중얼거리긴 하는데…….”

“낙 과자? 마리나라(marinara)라고 한 게 그 뜻이었나 보구나? 내가 심양에 있었던 시절 고안한 요리라고 전하거라.”

“이걸 조선 땅에서 볼 줄은 몰랐다는데요? 선생님이랑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네요. 기뻐하고 있어요.”

요안이 조심스럽게 고다 치즈를 얹은 시카고 피자를 잘라내 내 접시와, 엘세라크의 접시에 옮겨 담았다. 나 역시 오리지널 치즈를 쓴 피자를 오랜만에 먹을 생각에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오 메인 호트!”

피자를 입에 넣자마자 상관장은 양손을 맞잡고는 이마 위로 올리고 말았다. 마치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선생님, 로마는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요?”

“로마? 그게 무슨 소리냐?”

“상관장이 말하길, 여기가 동방의 로마냐고 그러는데요?”

“뭐야?”

“‘이렇게 똑같은 것이 동방의 먼 땅에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우연의 일치겠는가! 신의 이끄심이 분명하다!’ 라고 하고 있어요. 재미있는 아저씨네.”

이런 자리에서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키득거리는 녀석과는 정반대로, 엘세라크는 진지하게 뚝배기 피자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기도하는 듯한 동작을 취하면서 말이지.

카스텔라를 보며 냉정한 반응을 보이기에 별 생각 없이 대접한 것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이미 포르투갈이 나가사키에 전해준 카스텔라와 이제 막 현지에서 발명된 피자는 받아들여지는 의미가 다를 것이었다.

세상에. 나, 뭔가 큰 사고를 쳤을지도.

※ 작가의 말

피자의 원형으로 여러 이설들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피자가 현재 형태로 정착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입니다.

그중 나폴리에서 만들어지던 피자에 토마토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로 추정됩니다.

엘세라크가 말한 ‘마리나라’라는 요리가 그것입니다.

여담으로 모차렐라 치즈가 들어가 현재의 상태가 완성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라고 전해집니다. 피자 마르게리따라고 불리는 그 음식이죠. 다만, 이 시기보다 훨씬 오래 전에 쓰인 요리책에도 비슷한 형태의 요리가 적혀있다고도 하네요.

위에 적힌 내용은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가 짓고 윤병언 씨가 옮긴, <맛의 천재─이탈리아, 맛의 역사를 쓰다>라는 책을 참고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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