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업둥이
“특사요? 제가 아니라 박 종사관이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버지께서 틀림없는 조선 사람인 것은 확인했지만, 아무래도 본국의 높으신 분들을 설득하려면 겉까지 조선 사람인 분이 대표로 가야 알맞을 거래요.”
아아. 그 얘기였나.
하긴 박연이 특사랍시고 네덜란드로 건너가면, 동아시아에 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 정말로 조선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어디 말이 어눌한 사람을 데려다 거짓으로 꾸민 것인지 구분이 어렵겠지.
엘세라크가 박연에게 무례를 무릅쓰고 조국이 어디냐 물어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게다가 하란타에서 조선에 특사로 오시는 분이 상당히 귀하신 분인가 봐요. 마음 같아서는 그에 비기는 분을 특사로 요구하고 싶으나, 아무래도 조선의 상황을 보니 어려울 것 같다네요.”
“그래서 가장 특사로 적합한 이가 저라고 판단하셨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나 저도 본국에서 맡은 일로 바쁜지라…….”
“어쩔 수 없으면 아버지를 특사로 데려가겠지만, 오늘 나눈 대화만 보아도 그 임무에 가장 알맞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선생님이 더 잘 알 거라고 하네요.”
네덜란드에 방문한다……. 현대에서도 가본 적이 없는 네덜란드를 17세기에 방문하게 된 것이 조금 재밌는 상황이긴 했다.
허나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은 절대 아니다. 뱃길로 네덜란드까지 가려면 희망봉을 돌아 왕복하는 데 일 년 반 가량의 시간이 걸릴 터.
조선에서 할 일들이 태산같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쉽게 버릴 수 없는 시간이다.
“그리고 아무리 자신과 본국의 의향이 같다고는 해도, 조선 측 사람이 직접 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오늘 한 이야기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네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박 종사관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결정은 조선에서 하는 것이니 본인은 특사가 올 때까지 맡은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겠답니다. 유쾌한 강 씨에게 조선말도 열심히 배우겠다네요.”
충신과 엘세라크, 나이도 국적도 인종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에게 흐르는 거상의 피에 반응이라도 한 건가? 일단 두 사람이 친해져서 나쁠 건 없어보였다.
한없이 가벼운 게 문제긴 했지만 충신이 중요할 때 흥에 못 이겨 선을 넘을 사람도 아니었고.
“어…… 네?”
“무슨 일이더냐.”
“어…… 그게…… 선생님이 특사로 가면 당연히 저도 하란타에 따라가는 거냐고 묻고 있어요! 그게…… 그게……!”
이제 진지한 이야기가 끝이 나고, 엘세라크가 농담처럼 던진 한 마디였다. 그 말에 요안이 녀석의 귀가 다시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왜 예전에 굳게 맺었던 약속이 새삼 떠오르는 것일까.
***
엘세라크와의 접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요안의 귀에 올라앉은 붉은 기운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운이 뺨까지 퍼져 얼굴이 달아오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랏일로 무리라도 한 것이니? 힘들면 별채로 돌아가 쉬지 않고.”
“아녜요, 언니. 그게…….”
“괜찮을 겁니다, 부인. 저 열은 몸이 상해 올라오는 열이 아닙니다.”
의아해하는 하연이었으나 이윽고 납득한 표정을 하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어차피 조만간 중요한 이야기를 하연에게 꺼내놓아야 하는데, 요안이 녀석의 뺨이 달아오른 이유도 함께 설명하면 될 것이다.
헌데 지금 사랑채의 분위기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본래 이 시간이면 사랑채에 가족 셋이 모여 하루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오늘은 손님 한 사람이 이 자리에 더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제는 손님이 아닌가.
“길산아, 뭐가 그리 무서워 얼어있단 말이냐. 몽운사에서 중들을 희롱하던 기개는 어디로 가고.”
“사부 나리, 그게요…….”
“사부님이면 사부님이고 나리면 나리지, 그 호칭은 또 무어란 말이냐. 하하.”
그동안 본인의 면천 문제도 있었고, 내가 신임 도승지 일과 네덜란드 일로 바쁘다보니 민폐를 끼치기 싫다며 내 집에 들어오길 극구 거부하던 녀석이었다.
결국 김 갑사의 집에 얹혀살면서 눈칫밥을 먹다 한계가 온 것 같지만 말이다.
“아가, 사내답게 잘도 생겼구나, 올해로 나이가 몇이나 되니?”
“어…… 사모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그게…… 저도 잘…….”
“네 호적에는 경진년 생으로 되어있더구나. 관아를 뒤지느라 고생 좀 했지만, 너를 면천시키려면 그 정도는 해야 했다. 나이를 알게 된 것은 덤으로 여기려무나.”
“사부!”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채로 나를 향했다. 나이도, 이름도 잊은 채 묻힐 뻔한 녀석이 내게 저런 반응을 보여주자 여간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길산이라던 녀석의 이름 정도.
설마 그 길산이 그 길산이겠어?
“그럼 만으로 여섯 살이 아닙니까? 소첩은 이 아이가 적어도 여덟 살, 아니 더 나아가면 열 살은 족히 되었다 생각하였는데…….”
“호적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성장이 모두 같을 수는 없는 법이 아닙니까. 이 아이처럼 성장이 빠른 사람도 있기 마련이지요.”
아니면 이 녀석이 비범한 신체를 타고난 덕분일지도.
녀석의 나이가 호적에 잘못 기재되어 여덟 살이라 쳐도, 제 세간을 전부 짊어지고 한양까지 걸어온 힘과 체력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총명함은 또 어떤가? 양반 자제 중에서도 이만큼 명석한 아이는 본 적이 드물었다.
그런 녀석의 특이함 때문에 더욱 길산이라는 이름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고 있던 차였다. 조선 후기를 주름잡을 대도적이 되려면 이 정도는 타고나야 가능할 테니.
헌데, 하연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무언가를 고운 입술로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녀석의 나이를 계속 되뇌는 것인지, 이유가 궁금했다.
“길산이가 여섯 살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이상합니까, 부인?”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저희가 혼인한지도 꽤나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 하늘이 아이를 점지해주지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인…….”
“만약 당신이 심양에 가시지 않고 곧바로 혼인할 수 있었더라면, 이만한 아이가 저희 사이에 있지 않았을까 해서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묘하게 당신과 이 아이가 닮은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가? 그 말을 듣고 곰곰이 녀석의 얼굴을 뜯어보아도 하연의 말뜻이 와닿지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지금의 얼굴은 녀석과 별로 닮은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선 굵게 잘생긴 얼굴은 충신과 비슷하지 않나?
그러나 그걸 따져봐야 무엇하겠는가. 하연이 무심코 꺼낸 아이 이야기 탓에 심장이 찌르듯 아파와, 그딴 잡생각 따위는 모두 잊고 말았다.
“굳이 그런 생각은 안 하셨으면 합니다. 그대의 몸 상태도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후사 걱정은 하지 않으시는 게…….”
“걱정하는 게 아니랍니다, 서방님. 그저 당신을 사부라 부르는 이 아이에게 정 붙일 구석을 하나 찾았을 따름이랍니다.”
“…….”
“길산이라고 했느냐. 이 나이에 사모님이라고 불리기는 조금 어색하고, 작은어머니 정도로 부르는 것은 어떻겠느냐.”
길산에게 ‘어머니’라는 단어를 가르치는 하연을 보며, 내 목울대는 꽉 막혀왔다. 아무리 나랏일에 바쁘더라도 하연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절대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
“작은어머니요? 언니, 그건 안 돼요. 그럼 제가 불릴 호칭이 없어지는 걸요.”
“어머. 그렇구나, 요안아. 내가 큰어머니고, 네가 작은어머니인 게 맞으려나?”
“작은…… 어머니요? 이 희한한 여인은 누구세요?”
두 여자의 대화 사이로, 한껏 혼란을 감추지 못하는 길산이었다. 태어나서 서양인의 외모를 처음 보았을 테니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일 테지.
“희한? 이게 귀엽게 봐 줬더니!”
“요안아!”
아차, 요안의 금발벽안을 처음부터 편견 없이 봐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유독 많았던 탓에, 길산이 녀석에게 미리 그 사실을 일러준다는 것을 그만 깜빡 잊고 만 것이다.
아마 길산이 녀석도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목소리 톤만 봐도 나름 예를 갖추려 말하려던 것인데, 아는 어휘가 적어 단어 선택에 실패한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사정을 헤아릴 정도로 어른스럽지 않은 분이 또 이 집의 별당아씨라는 게 문제다. 온 힘을 다한 요안의 꿀밤이 딱콩 소리를 내며 길산의 머리에 작렬했다.
“아얏! 봐요! 어떻게 이런 분이 사부님의 색시란 말이에요! 이런 눈동자랑 머리칼을 가진 사람 이 어떻게 귀한 사람일…… 아얏!”
“요게 어딜 사모님한테 버릇없이!”
“으아아앙! 큰어머니!”
“이리 와! 내가 사대부가의 예절이란 어떤 건지 똑똑히 교육해줄게!”
난장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버릇이 없는 사람이 과연 길산이 하나뿐일까?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난감했다. 아니, 유학 책은 물론이고 현대에서도 이런 사태에서 어찌 행동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않았다고.
“요안아. 지금 서방님 앞에서 무슨 짓이니!”
“언니!”
“너도 사대부가의 여인이면 체통을 지켜야지! 서방님 얼굴에 먹칠을 할 셈이니!”
“아……. 죄송해요, 언니.”
하지만 그런 냉랭한 이야기를 꺼내는 하연의 표정 역시 평범하진 않았다. 요안이 녀석의 무례를 혼내는 눈썹 사이에는 화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지만, 입가에는 화는커녕 묘한 웃음이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 하연이 품으로 파고든 길산이 녀석의 등을 토닥거리는 것과 하연의 미소가 관련이 있지 싶었다. 이런 기묘한 상황 속에서도 그 속내가 짐작되어 또다시 마음이 아파오고 있었다.
“그리고 길산아. 아무리 네 작은어미의 나이가 어리고 외양이 남다르더라도 네 사부의 아내임은 변하지 않는단다.”
“큰어머니…….”
“마침 잘 되었구나. 첫날부터 액땜을 하였으니, 앞으로 다시는 이런 무례는 저지르지 않겠지.”
“네?”
하연이 이런 사람이었던가.
길산이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과, 눈에서 쏟아지는 냉기가 어떻게 같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 좋은 어머니라면 저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건가.
그러면서도 하연은 남은 한 손을 이용해 서안을 뒤지더니, 안에서 무언가 길쭉한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본 요안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요안아. 너도 내훈(內訓)을 읽었을 테지. 그 세 번째 권, 모의(母儀)에는 무엇이라 적혀있었니.”
“아, ‘자식이 현명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어머니에게 달렸으니…….’로 시작하는 문장 말인가요?”
“‘어찌 감히 자식의 허물을 남에게 돌리겠는가.’ 거기에, 예쁜 자식일수록 매를 들어 가르치라는 옛말도 있지? 길산이가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서방님을 사부로 부르니 어찌 내가 자식처럼 여기지 않겠니.”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네요. 제가 이 아이, 확실하게 훈육하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요안이 하연의 손에서 회초리를 받아가더니, 반대쪽 손을 길산의 저고리 동정으로 뻗어 잡아당겼다. 하연의 품에 안겨있던 길산이 녀석은 당연히 그 힘에 방바닥을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사부님! 큰어머니!”
“네가 악의 없이 한 일이란 건 알고 있으나,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양반가의 법도란다. 아래위를 확실히 깨닫고 더 나은 길산이가 되길 이 큰어미는 바란단다.”
“큰어머니…….”
“요안이 너도 선을 지켜서 훈육하도록 해라. 선을 넘었다가는 종아리를 맞는 것은 길산이로 끝나지 않을 것이야.”
하지만 하연의 그런 조용한 협박에도, 요안이 녀석은 지지 않고 손을 들어 화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길산이가 요안의 손에 질질 끌려 별당으로 사라진 후에야 나는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부인…… 이런 모습은 처음입니다, 정말로.”
“당신, 길산이를 정말 잘 데려오셨습니다. 이제 이 집에 조금 사람 사는 냄새가 날 것 같네요.”
“부인?”
“꽤 오랫동안 꿈꿔왔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피가 섞인 아이는 아니지만, 조금은 쌓였던 것이 풀린 것 같아 속이 후련합니다.”
“그대…….”
기쁨과 슬픔이 묘하게 뒤섞인 하연의 표정을 보고, 나는 그저 이 가녀린 여자를 품어주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마침 이 시간에 둘만 남은 것도 오랜만이 아닌가.
“다 잘 될 것입니다, 부인. 그러니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 주세요.”
“서방님만 제 옆에 있어주신다면 아무것도 바랄게 없답니다. 정말이에요.”
***
그렇게 길산이는 화려한 신고식을 치르고 우리 집 행랑채에 얹혀살게 되었다. 낮에는 총통위에서 일하는 박연이나 김 갑사에게 놀러 가 신체를 단련하고, 밤에는 퇴근한 내게 글을 배우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가끔 집으로 돌아와 안채에 들렀을 때, 길산이를 앉혀놓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며 몸가짐을 당부하는 하연의 모습은 영락없는 한 명의 엄마였다. 길산이 녀석도 그 마음에 보답하려는지, 벌써부터 집안일을 돕기 시작해 하연의 수고가 여러모로 덜어진 모양이었다.
“자, 따라 해 봐! 작은어머니!”
“작은…… 못하겠어요.”
“왜! 왜 못하겠다는 건데!”
요안이는 어떻게든 녀석에게서 어머니 소리를 듣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쉽지 않아 보였다.
일단 그전에 본인부터 길산이에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게 낫지 않으려나. 가끔 길산이와 투닥대는 것을 보면 사모와 제자가 아니라 나이 차 조금 나는 남매로 보이는데 말이지.
그렇게 세월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승정원에서 송준길과 윤휴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일하는 것도, 가끔 반촌에 나가 점점 조선말 실력이 늘어가는 엘세라크를 보는 것도 즐겁기 이를 데가 없었다.
“자왈, 삼인행하면 필유아사언이니라. 택기선자이종지하고 기불선자이개지니라.”
하지만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임금의 부탁으로 승정원에서 퇴근 후 귀가 전에 새로운 세자를 가르쳐야 했다.
하필 퇴근 후에!
자신이 열넷이라는 늦은 나이에 세자에 책봉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임금은 즉위 직후 맏아들인 원손을 바로 세자로 책봉했다. 원 역사에서는 경선군 이석철로 알려진 아이, 소현세자 사후 강빈마저 모함당해 사사당하고 유배되어 제주도에서 쓸쓸히 죽어간 그 아이였다.
“잘 읽으셨습니다, 저하. 이번에는 뜻도 풀어보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세 사람이 가면…….”
솔직히 말해 버거운 업무였다. 승정원의 일은 그 홍문관에 비해서도 빡빡했는데, 거기에 전처럼 세자를 가르치는 일까지 해내려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임금은 매일같이 동궁으로 가 세자를 가르치라고 명하지는 않았다. 나를 달래듯이 시강원 정삼품 겸보덕(兼輔德)으로 품계를 올려주면서 건넨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나는 세자를 내 뜻을 잇는 임금으로 키우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바쁜 너를 세자에게 붙이는 것이다.’
‘사실은 이틀에 한 번 동궁을 방문하는 것도 버겁습니다만…… 전하께서 명하신다면 어찌 거스르겠습니까.’
‘사흘에 한 번도 좋다. 세자에게 우리가 심양에서 고생하며 얻었던 교훈들을 반드시 새겨 넣도록.’
임금이 자신의 후대까지 내게 맡기고 있는데, 신하된 도리로써 어떻게 그것을 거절하겠는가.
다행히 세자는 총명한 편이었고, 젖도 떼기 전부터 심양에서 살아서 그런지 바깥일에 관심이 많던 터였다.
그렇게 논어를 또박또박 해석해가는 세자를 피로도 잊고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찰나였다. 갑자기 동궁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영감! 도승지 영감! 큰일 났습니다요!”
소란을 벌인 목소리의 주인은 이날의 궁궐 숙위를 서던 김 갑사였다. 출입을 허락받자마자 늙수그레한 내관을 밀어내고 그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동궁에서 무슨 소란인가, 김 별장? 저하께서 계시는 자리일진대.”
“도승지, 아바마마께서 계신 곳에서 온 군사가 아니냐. 급한 일인가 보니 어서 이야기부터 나누거라.”
“저하, 그러신다고 오늘 읽어야 할 논어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김 갑사의 손에 들린 웬 봉투에 시선을 맞춘 채로, 칼같이 세자의 농땡이를 쳐냈다. 아이의 앓는 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끄응……. 도승지는 늘 엄격하구나. 여염집 아이들처럼 또래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더냐.”
“저하께서는 주상 전하의 뒤를 이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배우고 익힐 시간이 한 시도 아쉬울 뿐더러, 저하를 엄히 가르치라 명하신 분은 다름 아닌 전하십니다.”
오늘도 아버님을 팔아먹는다며 꿍얼거린 세자였지만, 곧 내가 일러준 대로 책장을 잡고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버지를 닮아 끈기 하나는 충분한 아들이었다.
“김 별장, 이렇게 급한 것을 보면 어지간히 중대한 일인가 보구만. 무슨 일인가?”
“도승지 영감! 전하께서 급히 침전으로 들라는 어명을 내리셨습니다요!”
“침전으로 들라는 어명을? 어이하여?”
“저도 그건 모릅니다요! 이걸 읽어보시면 알 것이라 하시며 읽으시던 문서를 봉해 내려주셨는데……!”
김 갑사가 헐레벌떡 손에 들었던 장계를 다시 내게 들이밀었다. 그 겉봉에 옥새가 찍힌 것을 확인하고 급히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동래부에서 온 장계가 아닌가? 명의 선박? 국서를 들고 온 밀사? 이 무슨……?”
예상치 못한 사태가 또 벌어진 모양이었다. 오늘도 퇴근은 글렀다. 망할.
※ 작가의 말
논어 제7편 술이편 21장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자왈,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공자가 말하길,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는 법이다. 그의 좋은 점은 골라서 따르고, 그의 좋지 못한 점은 고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