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남명의 충신
정성공!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싹 가라앉았다.
어째서 타국에 파견한 황제의 밀사가 이토록 젊은 사람이었는지, 밀사에 불과한 자가 이토록 여유를 보이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원 역사에서도 스물이 갓 넘은 나이에 남명의 2대 황제 융무제를 옹립한 공으로 명나라 황실의 국성(國姓)인 주 씨를 하사받은 자였으니, 그 능력과 충성심만은 의심할 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의문이 가는 것은, 정성공이 원 역사와 달라진 상황 속에서도 국성을 하사받았다는 점.
남경을 청에게 잃고 1대 황제 홍광제가 참수된 후, 무너지기 직전이던 남명 조정을 수습한 공에 비길 공을 세웠다는 소리인데.
“무엇을 그리 생각하십니까? 마치 제 이름을 듣고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행동하시는군요.”
“그럴 리가요. 우리는 오늘 처음 보는 자리가 아닙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흐음.”
오히려 그런 내 반응에 평정심을 잃은 것은 정성공인 듯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이 자가 숭정제의 명을 받고 조선을 찾아온 이유가 슬슬 손에 잡히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할 필요는 없겠지.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정성공의 속내가 슬슬 비치기 시작했고, 반대로 그는 내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하고 있다.
전세 역전이다.
“미안합니다. 거짓을 말했군요. 사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을 정식으로 대명의 칙사로 대하겠습니다.”
“예?”
“당신이 복건성의 복주(福州, 푸저우)와 하문(廈門, 샤먼) 근방에서 활동하는 해상 무역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쯤 되는 분이니 조선까지 이토록 은밀히 찾아오실 수 있었겠지요.”
“역시, 당신에게서 느낀 무언가는 틀리지 않았군요. 하지만 한 가지는 틀렸습니다. 그 집단의 우두머리는 제가 아니라 아버지거든요.”
정성공의 이마 한 구석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꽤 충격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한 기색마저 금세 숨겨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얕보이지 않으려 뱉은 말에서, 나는 한 가지 정보를 더 뽑아낼 수 있었다. 정성공의 아비인 정지룡이 아직도 남명을 받들며 정씨 집단의 수장으로 있다는 정보.
원 역사에서는 청이 남경을 점령한 후, 대륙의 대세가 정해진 것을 알아챈 정지룡이 청에 회유당해 투항한다. 그리고 아들인 정성공은 아버지를 거스르고 그의 세력을 이어받아 남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을 텐데.
내가 바꿔놓은 대륙의 정세가 이들 부자의 운명 역시 바꾼 모양이었다. 숭정제 아래 결집한 남명이 장강을 기준으로 청을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으니, 정지룡이 변절하지 않고 남명에 충성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그렇습니까? 대륙 남부에선 당신의 이름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만.”
“조금 부정확한 정보를 전달받으신 것 같습니다. 하하.”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멋쩍은 웃음을 짓는 정성공이었다. 나 역시 그에 대답하듯 입가에 미소를 흘렸지만, 그 와중에도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해서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앞에 앉은 숭정제의 밀사는 계속해서 내게 시선을 맞출 뿐이었다. 마치 나라는 사람을 하나하나 뜯어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대명국의 폐하께서 내리신 칙서를 확인해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정성공은 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진한 향이 물씬 풍기는, 화려한 문양이 조각된 나무 상자였다. 뚜껑이 열리자 누런 비단으로 감싸여 돌돌 말린 문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의 뚜껑을 연 직후, 정성공은 상자에 담긴 문서를 향해 벌떡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나 역시 황급히 그의 행동을 따라 해야 했다. 어쨌건 황제가 보낸 문서였다.
“……이 인장(印章), 예조에서 보관 중인 칙서에 찍혀있는 대명의 옥새와 정확히 같군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 칙서는 확실히 주상 전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이 정도 가지고요. 영파(寧波, 저장성 닝보)에서 박다(博多, 하카타, 후쿠오카)까지 뱃길은 제 상단에서는 어린아이도 눈 감고 다녀올 정도입니다.”
“그래도 먼 길임은 분명하지요. 부산포까지의 뱃길도 있고, 동래에서 한양까지 역참의 말을 타고 올라오는 것도 고된 일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도 고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나니, 그 길이 헛고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조심스럽게 칙서가 담긴 상자를 수습해 품에 넣는데, 순간 정성공의 눈빛이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역시, 이 자의 또 다른 목표는 나였군.
“이제 알겠습니다. 주 대인, 당신쯤 되는 사람이 칙서 한 장만을 몰래 전하자고 조선에 직접 올 리가 없었지요.”
“반쯤은 허탕을 각오하고 온 길이었는데, 이토록 목표를 빨리 만나게 된 것 역시 황제 폐하의 은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에서 사람을 찾아오라는 임무를 받고 오셨군요.”
“폐하께서 애타게 찾고 계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안 승지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남명에서 밀사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 그 물건을 품고 왔던 것인데.
천천히 품에서 비단주머니 하나를 꺼내 정성공의 앞에 밀어놓았다. 그의 눈빛이 점점 형형해지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폐하의 용포! 역시 당신이……!”
“그래, 이제 그 궁금증이 풀리셨습니까? 황제 폐하께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그날 경산에서 폐하와 마주한 장수가, 약속대로 폐하께서 나라를 잘 수습하셨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고요.”
“마지막까지 건방진 놈이었다며 폐하께서 전해주신 증언과 똑같군요! 그랬던 당신이 조선에서 이렇게 높은 위치에!”
정성공은 숭정제의 용포 조각을 움켜쥐고 감탄을 늘어놓고 있었다. 다만 홀로 환희에 가득 찼던 그의 표정은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이제 목표를 달성하셨군요. 축하드리고, 저희 측에서 답서를 작성하는 동안 피로를 풀고 푹 쉬시길 바랍니다.”
“아닙니다. 아직 제가 조선에 온 목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단 말입니까?”
밀사의 손이 천천히 들려졌다. 그리고 그 손끝은 나를 향해 있었다.
“당신을 남경으로 모셔오라는 황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제 가장 큰 임무입니다.”
***
“무엇이? 황제가 너를 남경으로 데려오라 했다?”
방금까지 숭정제의 책봉조서를 받아 읽으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던 임금이었다. 그런 임금이 정성공과의 일을 내게 전해 듣고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은 거절의 의사를 표했습니다만, 상대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듯합니다, 전하.”
“그렇겠지. 어쨌든 너는 황제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 아니더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너를 남경으로 데려가려 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예. 제가 전하의 심복이자 조선의 실세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아니 이미 알게 되었겠군요. 이제 명국도 저를 포섭하기 위해 안달을 내겠지요.”
“난감하구나.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너를 멀리 보내는 일만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제야 도승지 일을 제대로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났으니, 임금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승정원이 착착 굴러가는 것만 보면 수라를 들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던 임금이었다.
더구나 남경까지 가는 바닷길은 오래전부터 다녀 위험이 적은 항로라고는 하나, 어쨌건 먼바다로 나가야 하는 길이다. 바다가 잔잔한 계절이라고는 하나 만일의 일도 염려해야 할 터.
임금이 걱정을 표할만했다.
“하오나 전하, 언젠가 이런 일은 일어날 것이었습니다. 조선이 상업과 무역에 힘을 쏟기로 한 이상, 대륙의 남부에서 무역을 주름잡고 있는 세력과는 마주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것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더구나 우리가 먼저 접촉한 것도 아니고, 황제가 너를 찾아 심복을 밀사로 보낸 것이 아니더냐. 남경으로 천도한 황제가 이제 여유를 조금 찾은 모양이지?”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어쨌건 밀사를 조선으로 보낸 명분은 전하를 책봉한다는 칙서를 내리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의 번국이 된 조선을 포섭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맛살이 깊게 패인 것을 보니 임금 역시 그 문제로 깊은 생각에 빠져든 듯했다.
“곤란한 상황에 빠졌구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명과 손을 잡고 청을 적대하는 선택은 지금은 절대 고를 수 없는 답이다, 그렇지 않느냐.”
“예, 적당한 때가 오더라도 고민을 깊이 해야 할 계획입니다. 우리가 더 국력을 기르고 청이 혼란에 빠져있으면 몰라도, 지금은 시기상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답은 하나뿐이군. 책봉 교서에 대한 답서를 보내되, 그 이상의 요구에는 대답을 회피한다?”
내게 시선을 고정한 임금의 손가락이 연신 서안을 두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남명이 끼어들어 복잡해진 국제 정세 탓에 머릿속이 어지럽겠지.
하지만 나는 정성공을 만나고 그 일에 대해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저 임금이 내가 내린 결론에 동의하길 바랄 뿐.
“맞습니다. 다만 전하의 말씀대로 시행하되, 이번에는 제가 남경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무엇 때문이냐? 그저 밀사에게 답서만 들려 보내면 그만인 것을?”
“전하, 저 밀사는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자입니다. 저를 남경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지키기 전에는 아마 조선을 떠나지 않으려 하겠지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이냐.”
“지금 한양에 조선 사람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이 땅에 오래 머물수록 그에게 보여서는 안 될 사람들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전하.”
임금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반촌에 머물고 있는 네덜란드인들의 존재를 그제서야 깨달은 듯했다.
사실 아담 샬과 접촉했을 때부터 네덜란드와 정성공의 세력은 적대 중이라는 사실을 입에 담았었으니, 임금의 기억만 온전하다면 이해는 빠를 것이다. 암행 전후로 현재 국제정세와 관련한 지식을 전해놓기도 했고.
“이번 일만 잘 넘어간다면 명국의 사람들이 조선까지 직접 찾아올 일은 당분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양에 머물고 있는 하란타인의 존재를 들킬 리도 없겠지요.”
“결국 우리 조선은 대명과 같은 배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렷다. 앞으로 하란타와 손을 잡기로 했으니 더더욱.”
“예, 그렇습니다. 전번에 보고드렸다시피, 하란타가 우리에게 선박 기술을 전수하려는 것을 보면 그들 역시 우리 수군을 양성해 이 지역의 해상 패권을 노려볼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상대는…….”
“지금 밀사로 온 주성공이라는 자의 함대겠구나.”
결국 조선이 해상강국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거쳐가야 할 단계였다. 가뜩이나 남명이 청을 상대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무역망을 틀어쥐고 있는 정지룡과 정성공 부자는 조선이 뻗어나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니까.
아직 그들이 조선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지금은 조선의 힘이 미약하고 네덜란드와 손을 잡는다 해서 그들을 이길 수 없으니, 정성공의 세력에게 대놓고 적의를 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의 뒤통수를 후려쳐야 한다.
그들이 취급하는 상품의 질과 양은 이미 조선이 따라잡기 어려운 경지에 가 있었다.
인구도 기술도 훨씬 발달되어 있으니 당연한 것.
“조선과 하란타의 관계는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겨야 합니다. 충분한 힘을 키우기 이전까지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정성공의 세력과도 당분간은 대립해서는 안 될 것이고요.”
“그래서 저 자의 시선을 조선에서 돌리고자, 네가 사신이 되어 남경으로 떠나겠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전하.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편전 안은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임금이 눈을 감고 오랜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겼기 때문이었다.
“즉위하자마자 내정을 중점적으로 다스릴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외교로구나. 대명 외에도 신경 쓸 나라가 많거늘.”
“청으로 보낸 사신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네가 밀사를 영접하던 사이 동래에서 장계가 하나 더 올라왔다. 그 일에 대해 너와 논할 생각이었는데, 이쯤 되면 이 건은 최대한 나 혼자 처리해야 하겠구나.”
임금이 서안에 쌓여있던 문서 더미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건넸다. 두루마리를 펼치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일본국대군’이라는 다섯 글자였다.
“명국을 상대하는 일은 네게 일임하겠다. 부디 조선의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