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57화 (157/298)

157화. 재회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디딘 땅에서 올라오는 땅멀미 탓이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사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 황궁에서 이뤄진 환영은 사행단 하나를 맞이하는 것보다 훨씬 화려하게 치러졌다. 조선에서 네덜란드 사절단을 맞이하던 때와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할 정도였다.

능양군이 폐주를 쳐내고 갓 옥좌에 올랐을 때, 조천사(朝天使, 명에 보내는 사신)로 북경에 갔던 사신들은 황제는커녕 관리들도 그들을 만나주지 않아 길바닥에 엎드리는 굴욕마저 당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오히려 조선에서 상국의 사신을 맞이하며 정성을 들였던 것과 비슷한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정양문 밖에서부터 시작된 환대는 황궁 내부까지 이어졌다.

“조선의 칙사는 고개를 들라.”

내 앞에 앉아있는 황제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사신을 맞이하는 절차를 모두 마무리하고, 백관(百官)의 앞에서 조선에서 온 답서와 예물을 전달받은 후였다.

그 후에 진행되기로 예정되었던 성대한 연회마저 취소하고, 황제는 내게 밀실로 들라 명했다. 내 뒤를 이어 익숙한 사람 둘과 낯선 사람 둘이 따라 들어왔다.

“조선국 도승지 안한수, 폐하를 뵙습니다.”

“충효백(忠孝伯) 성공, 이야기가 다르지 않느냐. 방금 예를 표한 사람이 정녕 내가 데려오라 명했던 이가 맞더냐.”

“예, 폐하. 분명 이 자가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정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화려한 남경성과 황궁의 자태에 눌리기라도 했던 걸까.

숭정제는 내게서 북경성이 불타던 날 자신을 구한 사람의 모습을 찾지 못한 듯했다.

황제의 질책에 놀란 정성공이 재빨리 품에서 비단주머니를 꺼내 바쳤다. 그것을 풀어본 황제는 여전히 개운하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내가 베어준 용포 조각이 맞는데……. 그 자는 이리 패기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 정표를 대리자에게 들려 보낸 것은 아니냐?”

“그 급한 상황 중에도 정체를 밝히라며 닦달하시던 분다우시군요. 그래도 제가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해 주신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이놈! 무엄하다!”

황제의 오른편에서 노성을 지르는 장군은 한번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청군과 연합해 이자성군을 격파하고 그대로 남경으로 떠난 산해관의 요동총병관, 오삼계였다.

“하, 핫하하하하! 그 어눌한 한어(漢語) 억양은 그날 그대로구나! 으하하하하!”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황제의 입에서 돌연 큰 소리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감정 표출에 놀란 중년 둘의 시선이, 급히 황제에게 향했다. 황제의 왼편에서 나를 지켜보던 낯선 신하 둘이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본성을 감추고 있었느냐? 너희는 모를 것이다. 그날 새벽 경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랑캐의 흰 갑주를 입고 홀연히 나타난 이 자가 내게 어떤 당돌한 짓을 했는지.”

“폐하께 변장할 옷가지와 표찰을 건네준 것이 다가 아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저 자에게 묻도록 해라.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황궁에서 얼이 빠진 척하던 것도 전부 연기였다니. 하하.”

웃음소리를 보니, 황제는 다시 급속하게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사실 나는 남경성에 조선에서 온 사신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이 이야기는 언젠가 청으로 새어나가 북경성에 들어앉아있는 도르곤에게까지 전해질 테니까.

물론 내가 남경성에 다녀왔다는 일 하나로 도르곤이 나를 의심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이번 일에 대해서 서찰로 적어 보내기도 할 것이고. 그러나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조선에서 저 한 명만을 밀사처럼 보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조선에서 답서를 품은 사신이 왔다는 사실을 만조백관들에게 공표하고 싶으셨겠지만, 이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사실은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하긴, 오랑캐 놈들의 칼날이 향할 수 있는 곳은 이곳뿐만이 아니렷다. 내 그것을 알고 너를 최대한 빠르게 밀실로 들인 것이다. 나를 거역하려는 놈들에게 위엄을 보여주는 것은 그 정도면 충분했으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정말로 나라를 잘 수습하신 모양이군요.”

북경성에서 내가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는지, 황제는 다시 한번 폭소를 터뜨렸다. 연회를 중단하고 밀실로 나를 들인 것을 보면, 그의 정치 감각은 충분히 살아있는 듯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네 명의 중신들만 그 광경을 지켜보며 눈을 껌벅거릴 뿐이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황제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네가 그날 내게 한 짓을 소상히 이 자리에서 밝히면 네 목을 베어버리겠다 날뛰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겠구나. 아쉽지만 참을 수밖에. 그래, 여기까지 오는 길은 평안했느냐.”

“먼 바다를 건너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으나, 폐하께서 보내주신 국성야의 항해술이 워낙 뛰어나 시름을 꽤 덜어주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잘 왔다. 사실 충효백을 조선으로 보내면서도 임무를 성공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고, 계획보다 그의 배가 장강 하구에 일찍 나타났다는 말에 실패했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일이 잘 풀리다니, 하늘이 돕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말하며 기쁨을 숨기지 않는 숭정제와는 달리 나는 아직 눈치를 조금 보고 있었다. 정체를 모르는 중년 두 명의 시선이 여전히 내 쪽을 뚫어져라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 분위기를 읽었는지, 황제는 두 신하를 진정시키고 내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안심해라, 이 밀실에 모인 자들은 나의 충성스러운 측근들뿐이다. 너에게 소리를 지른 오 도독은 북경에서의 일도 대강 알고 있고, 이미 구면일 테니 다시 인사를 나누도록.”

“방금은 도가 지나쳤소, 젊은 장군. 허나 이자성 놈의 반란군을 쓸어버릴 때, 장군의 병력이 참으로 큰 힘이 되었었지.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던 전령 놈의 머리통을 뚫어버린 것도 장군이 아니었는가.”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총관님, 아니 이제 도독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어깨에 흰 띠를 맨 도독님의 병력들이 북경성 벌판에서 용맹하게 싸우던 모습, 저 역시 머릿속에 여전히 새기고 있습니다.”

오삼계와는 좋은 기억만 남아 있었다. 그 역시 내게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겠지.

당시 청군의 우익, 거기서도 최전방의 진을 함께 구성했던 것이 오삼계의 산해관 병력과 내 타스하 잘안이었으니까. 우린 말 그대로 함께 피 흘리며 싸운 사이였다.

게다가 오삼계가 자신과 병사들의 가족을 북경성에서 빼내 남경으로 향하면서, 호포대가 폭주한 청군의 약탈을 막은 일까지 전해진 듯했다. 그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오삼계의 시선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이 자에게 진 신세를 갚아야 하는 것은 짐만이 아닌 모양이구나.”

“여기 젊은 장군에게 가족의 목숨을 빚진 자가 제 군대에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폐하. 감사를 표할 수밖에요.”

양심이 조금 찔렸다. 북경성이 청군의 아래에 떨어져 잠시나마 유린된 것도 원인을 따지고 올라가면 내가 홍타이지와 머리를 맞대 짜낸 대전략이 금주의 명군을 격멸하고 이자성을 끌어들였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그 일들은 시기만 조금 당겨졌을 뿐, 어차피 일어났을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덜컹거리는 양심을 가라앉혔다. 내가 청에서 했던 일들이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온대 폐하,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 수보(首輔, 명나라의 재상 격인 내각대학사 수보의 준말),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냐.”

“말씀하시는 것만 들으면 폐하와 우리 대명을 위해 몸 바쳐 일한 자가 아닙니까. 헌데 그런 자가 어째서 지금까지 조선에서 조용히 지냈단 말입니까? 우리 조정이 남경에서 재기했다는 소식은 분명 조선까지 전해졌을 텐데요?”

중년의 작고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사 씨인 것을 보니 이 사람이 정성공이 한양에서 언급했던 사가법(史可法)인 모양이었다. 원 역사에서는 남경에서 홍광제를 받들어 장강 너머 양주를 지키다 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충신.

지금 남명 조정의 재상 자리에 올라있는 것을 보니, 숭정제가 남하했을 때 그를 지지해 토호들을 진압하는데 큰 공이라도 세운 건가. 아마 숭정제의 문관 쪽 최측근은 이 사가법이라 봐도 무방할 듯했다.

“지금 이 자를 의심하는 것이냐, 사 수보?”

“의심한다기보다는 해명을 요구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결국 조선도 우리를 버리고 오랑캐에 붙은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폐하를 위해서라면 조금의 위험이라도 살펴야 합니다.”

“사 수보, 조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는지는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이런 즐거운 자리에서 짐의 흥을 깨뜨리지 말라.”

“하오나 폐하, 고언은 입에 쓰지만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폐하의 흥도 중요하지만, 이 나라 사직 역시 폐하만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말다툼이 붙은 황제와 사가법 옆으로, 남은 중년 하나의 귓가에 정성공이 열심히 귀엣말을 건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묘하게 정성공과 닮은 얼굴에 친밀한 관계를 보니 그가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인 듯했다.

“사 수보의 말이 옳습니다, 폐하. 저희는 이 자와 조선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될지를 깊이 따져봐야 합니다.”

“주 도독!”

“아무리 제 아들이 먼바다를 제집 드나들 듯 한다 해도, 여전히 장거리 항해는 목숨을 걸고 나서야 하는 길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그럼에도 조선에서 꽤 높은 위치에 오른 자가 아무 목적도 없이 남경까지 바다를 건넌다? 단순히 폐하를 뵙고 좋은 대접을 받은 후 선물이나 챙겨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누가 상인 출신 아니랄까봐. 어느새 정지룡은 내가 남경에 온 손익을 깐깐하게 따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반응,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먼 곳에서 온 손님에게 너무 말이 심하신 것이 아닙니까. 여기 젊은 장군이 다른 뜻을 품었다면 어찌 목숨을 걸고 폐하를 살렸단 말입니까.”

“죽은 오랑캐의 우두머리는 지략을 잘 쓰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종의 계략이 배후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지요.”

나보다 먼저 발끈한 오삼계가 변호를 시작했으나 사가법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명나라 육군사령관의 목에 굵은 핏줄이 불뚝 솟는 것이 보였다.

결국 두 사람의 논쟁은 한참을 이어갔다.

하긴 저런 충신들이 숭정제의 주위에 더 많았더라도, 숭정제가 그들의 말을 조금 더 귀담아 들었더라도 청은 산해관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상황이 숭정제와 남명 쪽으로 좋게 변해서 다행인 건가.

하지만 결국 내가 이들의 궁금증에 답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입장 표명 없이는 오삼계와 사가법의 입씨름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알겠습니다. 두 대신께서 어떤 것을 염려하시는지도, 제게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지도 모두 파악이 되었습니다.”

굳이 이 자리에서 그럴 필요는 없다며 만류하는 숭정제였지만, 그의 충신 두 사람을 설득하지 못하면 여기 머무는 내내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이 뻔했다.

어차피 남경에 있는 동안 언젠가는 받았을 질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대답하는 것이 속이 편할 터.

“먼저 사 수보께 답하겠습니다. 저는 조선에서 조용히 지내지 않았습니다. 볼모로 잡혀있던 세자 저하를 모시다가 본국을 돌아간 후, 그분이 보위에 오르시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여유가 생긴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건 이쪽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라도 양국의 친선을 위해 간략하게나마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시지요.”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조선은 그동안 육로를 통해 화북과 교류하는 것을 빼면 나라 문을 닫아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건너는 일은 동남쪽의 왜나, 가끔 황해를 건너 산동으로 향하는 일이 전부였지요.”

“…….”

“남경으로 오는 길은 그 항로에 비하면 몇 배는 멀고 험한 길입니다. 그 항로도 제대로 아는 자가 없는 데다 긴 항해에 적합한 배도 없는데, 어찌 조선에서 먼저 대명을 찾았어야 한다고 타박하시는 겁니까.”

단어 몇 개를 뱉던 사가법의 입이 다물어졌다. 목숨을 걸고 해금령이 내려진 해안을 돌아 명과 접촉해야 했냐는 물음에 사가정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음 차례는 정지룡이었다. 조금 힘이 솟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주 도독께 묻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저를 찾으신다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바다를 건널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날 경산에서 있었던 일을 저 또한 어찌 잊었겠습니까.”

“조선국 도승지의 말이 맞다. 짐의 충신인 너희들에게까지도 밝힐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분명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일이지.”

“게다가 저는 국성야를 따라나설 때, 빈손으로 따라나서지 않았습니다. 조선과 대명에 이득이 될 수 있는 제안을 들고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다섯 명의 시선이 몽땅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지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무거운 입술을 눌러 열었다.

“조선은 점점 상행의 규모를 늘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화북과 무역을 하고 있는 나라는 조선이 유일합니다.”

“그렇소. 놈들이 화북의 백성들을 전부 해안에서 소개(疏開)시켰기 때문이오.”

“그 때문에 현재 장강 이남에서는 화북의 산물들을 구하지 못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구할 방도가 생긴다면 어떨까요.”

“그 말은……!”

정씨 부자의 눈이 빛났다. 계산에 밝은 사람들이니, 내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이들도 알고 있겠지.

“조선이 강남과 화북의 중간다리 역할을 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이 먼 곳까지 왔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