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십리진회(十里秦淮), 진회팔염(秦淮八艶)
솔직히 꽤 놀랐다.
청승을 떨며 지친 머리를 식히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기습을 당했으니 화들짝 놀라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황급히 몸을 빼 돌린 자리에는 젊은 여인의 은은한 웃음소리만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강물 위에 떠 있는 달빛까지 무색케 할 정도로 환하게 켜져 있는 불빛 덕분에, 나는 내 등 뒤에 서 있던 사람의 정체를 금방 판별해낼 수 있었다.
“방금 자리에 동석하셨던 분이군요. 국성야의 부탁으로 자리를 오래 비운 소생을 찾으러 오신 겝니까?”
아까 그 자리에서 정성공이 어떻게든 내게 붙여주려던 기녀 하나가 있었다. 내가 아내를 핑계대고 정중히 거절의 뜻을 보이자, 그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아마 여색으로 내 혼이라도 빼 놓으려고 했던 걸까.
그 기녀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린가. 정성공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성공의 의도가 슬며시 피부에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접대는 예나 지금이나 이런 식인가 보다. 물론 현대에서는 겪어본 적은 없었지만.
“아닙니다. 그저 소녀는 손님의 걸음걸이가 조금 쓸쓸해 보이셨기에 따라와 본 것입니다. 감히 말을 걸게 된 것은 난간이 낮아 위험했기 때문이고요.”
“마음을 써주신 것은 감사하오나, 소생은 괜찮습니다. 국성야가 권한 대로 소저를 가까이 할 생각도 없고요. 어서 자리로 돌아가시지요.”
방금 정성공과의 교섭에서 붙은 짜증 때문일까, 평소보다 쌀쌀맞은 말이 입에서 튀어나갔지만 앞에 선 기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미소를 띤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그보다 여기가 정말로 전면전 중인 나라의 도읍이 맞나.
불야성(不夜城).
말 그대로 켜놓은 등불로 밤을 잊을 지경인 이곳은 낮에 황궁을 향해 거슬러 올라왔던 진회하(秦淮河) 강가였다. 그 강가를 따라 늘어서 있는 유흥가들은 현 남경의 경제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정성공이 나를 이쪽으로 인도할 때까지만 해도 공자를 모신 부자묘(夫子廟)에 가자는 뜻인 줄만 알았다. 조선으로 치면 성균관과 같은 곳이니, 그런 곳에 외국의 신하를 데리고 가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 터.
그러나 남경은 정말로 이상한 동네였다.
미래의 인재들을 기르는 학궁(學宮) 건너편에 교방명기취집지(敎坊名妓聚集地)라 불리는 유흥가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은 술과 차를 파는 것뿐만 아니라, 기녀들을 교육시키는 기숙학교 역할까지 수행하는 장소였다.
유생과 기녀가 같은 공간에서 커 가는 묘한 장소.
이곳을 부자묘 근방 십 리 가량의 진회하, 십리진회(十里秦淮)라 부른다며 정성공은 너털웃음을 지었었다. 그렇게 잘 아는 것을 보니 단골이기라도 한 건가.
“무언가 오해라도 하신 것 같은데, 이 기루의 기녀들은 누구의 명도 받지 않습니다. 저희가 파는 것은 술잔과 저희의 재주뿐이지요.”
“그렇습니까, 실례했습니다. 신경 써 주신 것은 감사하나, 그렇다고 하여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방금 아내분의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그분은 멀리 조선에 계시지 않습니까? 먼 남경에서 일어난 하룻밤 이야기는 그분께서 알지 못하실 텐데요.”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리는 미인의 모습이 매력적이긴 했다. 저 모습도 학습된 것이려나.
“저와 아내와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늘 함께 있지요. 소생은 그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뿐입니다.”
“이상하군요. 저 건너편 학궁에서 공부하는 무수한 유생들 중에 소녀에게 그런 말을 한 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조선도 유학자의 나라라 들었는데, 이곳과는 무엇이 다른 걸까요?”
가족을 떠나 상경해 부자묘에서 공부하는 유생들도 외로움은 타겠지. 꽃이 피는 곳에 나비가 날아든 것인지, 나비가 모여든 곳에 꽃씨가 흘러든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아닙니다. 이것은 소생 개인의 신념일 뿐. 조선에도 성균관이라 하여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공간이 따로 있지만, 그곳의 유생들도 크게 다를 바는 없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곳의 유생이었던지라.”
“그렇다면 다른 유생들처럼 행동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말도 있는데, 무엇을 그리 꺼리신단 말씀이십니까?”
“사기(史記)에서 이르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얻지 않는다 했습니다. 열녀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진대, 충신이 새 아내를 얻지 않는다 하여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후훗. 기녀의 입에서 살풋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보다 표정이 조금 풀린 것 같아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인가.
“주 충효백께서 손님을 신경 쓰시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손님과 밤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탁 수준이라면 제가 어떻게 무마할 수 있을 겁니다. 정 안되면 밤을 보냈다 말만이라도 맞춰 드리겠습니다.”
“아니오, 그것은 손님과 대화를 나누기 전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손님께 흥미가 조금 생겼습니다. 아이(阿姨, 나이 많은 여성을 가리키는 호칭)께 부탁받은 일도 있고요.”
너무 뻗댔나.
정성공쯤 되는 사람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을 보면 여기는 남경제일의 기루라 봐도 무방할 터인데, 그 기녀의 자존심을 밟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내 앞에 선 여인의 표정은 그리 분해보이지도,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아이(阿姨)’에게 받은 부탁이, 정성공에게 받은 부탁보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듯싶었다.
“‘아이’요?”
“괜찮으시다면 남경에 머무르시는 동안 그분을 한번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이 기루도 아이께서 세우신 곳이랍니다.”
“그분이 이 기루의 주인이신 모양이군요. 헌데 어째서 소생 같은 타국의 관리를 만나려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기녀는 대답 대신 조그만 비단주머니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주머니의 아가리를 느슨하게 벌리자, 익숙하지만 미약해진 향기가 내 코에 스며들었다.
“인삼이군요. 향이 약한 것을 보니 꽤 오래된 물건이지 싶은데.”
“네. 북쪽을 오랑캐들이 막고 조선과의 길이 끊긴 이후로 고려인삼은 구하기 힘든 귀물이 되어버렸어요. 아시다시피 이곳은 정력제가 많이 필요한 장소라서요.”
“‘아이’께서 인삼을 원하시는 겁니까? 제게 노자로 쓰려 가져온 인삼이 있긴 합니다. 아마 이곳에서 아는 모양과는 조금 다를 테지만요.”
“그걸 저희 측에 처분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이야기는 ‘아이’와 나눠주셨으면 좋겠고요.”
노잣돈이라 핑계를 댔지만, 실은 그 인삼은 남경에서 완수해야할 임무를 위한 자금이다. 충신이 요청한 조선공을 데려가거나, 곧 남경에서 재개될 조명 무역의 기반을 다져놓기 위한 자금.
헌데 내가 먼저 움직이기도 전에, 수수께끼의 ‘아이’라는 사람이 먼저 접근해온 것 같다. 당분간 정성공이 내게 주의를 쏟을 것이 분명하니 행동에 제약이 걸릴 것 같은데, 이 ‘아이’라는 사람의 손을 빌리면 일이 조금 편해질지도.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들어 볼 가치가 있는 이야기겠군요. 저는 당분간 국성야의 저택에 머물 예정이니, 그리로 연락을 넣어주시면 될 겁니다.”
“충효백의 저택으로 찾아가 조선국 도승지를 만나게 해 달라 청하면 되겠습니까. 아, 혹시 소녀를 만나고 싶으시거든…….”
“‘아이’라는 분과 제가 먼저 접촉할 필요가 생겼을 때 이야기겠지요?”
“네, 네! 그러실 때에는 강운루(絳雲樓)의 구백문(寇白門)을 찾아주세요. 부끄럽지만 그 이름을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
다음날은 여독과 숙취를 핑계 삼아 하루 종일 푹 쉴 수 있었다. 헌데, 내가 먼저 연락을 넣기도 전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고 말았다. 어지간히도 일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어제 접대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그리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소. 충효백이 젊은 나이에 큰 공을 세워 조정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긴 하나, 어찌 보면 도승지보다 어린 사내가 아니오.”
나를 찾아온 손님은 오삼계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정성공의 저택에 묵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오삼계는 아무래도 어제 술자리에서 나와 정성공 사이에서 갈등의 기류가 흐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독님. 국성야도 대명 조정에 충성을 다하는 신하이니, 섬기는 나라의 국익을 위해 힘쓰는 것을 무어라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교섭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지만요.”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좀 놓이는구려. 도승지도 잘 알겠지만 대명과 조선의 우호는 수백 년을 이어온 것이오. 임진년 전쟁 때 조선에 재조지은의 은혜를 베풀었듯, 우리 대명은 조선을 도와왔다는 점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소.”
처음에는 그가 정성공과 짜고 당근과 채찍을 써가며 나를 포섭하려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찬찬히 오삼계와 대화를 나눠보니, 북경에서 나와 등을 맞대고 싸운 명나라의 장수는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삼계는 정씨 일가에게 순수한 호감만을 품은 것은 아닌 듯했다. 하긴 북경에서 숭정제를 친위하며 내려온 세력과 정씨 일가의 입장이 아주 같을 수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난 웬 타격음에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선물로 준 표범 가죽에 대한 감사를 한참 늘어놓던 오삼계가 무릎을 탁하고 친 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참, 도승지께서 내게 귀한 선물을 주셨으니 나 역시 답례를 해야겠구려. 혹시 이 자리에 손님 몇을 더 들여도 되겠소?”
“손님이요? 오 도독께서 소개해주시는 분이라면 당연히 만나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참 다행이오. 이제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오삼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검고 커다란 얼굴 하나가 방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남경에 체류하는 동안 내 호위를 맡은 정성공의 부하였다.
“여기 머무는 귀빈을 찾아온 방문객이 계시다는데, 혹시 도승지께서 아시는 분입니까?”
“오 도독께서 소개해 주시려는 손님인가 보군. 들이라고 이르게.”
조선국 도승지께서는 자신을 보고 놀라는 기색도 없다며, 볼멘소리를 남기고는 정성공의 부하는 방문을 닫고 멀어져갔다.
놀랄 리가 있겠냐. 흑인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정성공에게는 그와 같은 해방노예 출신 호위무사가 오백 명은 더 있다고 알고 있었다. 내 호포대도 남들의 눈에는 이들처럼 보였으려나. 흑인이나 짐승탈이나 눈에 설은 것은 같을 테니.
“이 사람, 도승지를 만나고 싶어 꽤나 애를 먹었다고 들었소. 혹시 내가 소개하기 전 도승지에게 먼저 접근했을지도 모르겠구려.”
무사가 멀어지자마자 오삼계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제 기루에서 기녀 하나가 접근해 ‘아이’라는 사람과 만나 달라 요청했던 사실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혹시 그 ‘아이’란 사람이 오삼계를 통해서도 내게 기별을 넣은 건가? 그 추측이 맞다면 나를 찾아온 손님은 꽤나 거물일지도.
헌데, 내 예상과 달리 거처에 먼저 발을 들인 것은 웬 늙수그레한 중년의 사내 한 명이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는 한때는 북경의 조정에서 예부시랑 벼슬을 받았으나 지금은 탁류(濁流)에 몸을 맡긴 사람입니다. 이름은 전겸익이라 합니다.”
“조선에서 도승지로 있다 영광스럽게도 칙사의 임무를 받은 안한수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예부시랑이라는 벼슬은 익숙했다. 조선으로 치면 예조참판, 즉 외교부 차관 정도 되는 자리일 테지. 오삼계의 손님과 ‘아이’가 같은 사람일 것이라 예상한 내 추측은 틀린 모양이었다.
그런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겸익은 계속해서 소개를 이어가고 있었다. 넓은 미간에 웃음기를 띤 채였다.
“여기 계신 오 도독의 후실이 마침 제 후실과 친분이 있어, 이런 귀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제 일정이 꽤 고되셨을 텐데 휴식은 잘 취하셨는지요?”
“재미있는 인연이군요. 헌데 예부시랑까지 지내셨던 분이 저를 찾으신 용건이 궁금한데, 바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오 도독님, 조선국 도승지와 단 둘만 있을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어차피 내 용건은 끝났으니 곧 돌아가려 했던 참이오. 그럼 도승지, 다음에 또 보겠소.”
말을 끝맺은 오삼계는 작별의 예를 취하고는 바로 방을 나섰다. 나를 찾아온 본 목적은 전겸익을 소개해주려는 것이었나.
허나 오삼계는 그렇다 치고, 내 앞에 앉은 사람의 속내는 전혀 짐작이 가는 곳이 없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평생 학문을 닦은 사람의 분위기만 풍길 뿐이다. 나와 유학에 대해 토론이라도 하려고 찾아온 것일까.
“조금 놀라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어제 미리 기별을 드렸던 것으로 아는데, 오 도독께서 도승지를 방문할 것이라는 전갈을 받고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어제 미리 기별을……. 아, 설마 그 기녀가 ‘아이’라 부르던 사람이…….”
남경에서는 남자에게도 여자 호칭을 붙여 부를 수 있는 건가? 보통 나이 많은 여자에게 붙이는 호칭이 예부시랑쯤 되는 고위직을 역임한 학자에게 붙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아아, 강운루에서 ‘아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의아해하실 만하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그분 대신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안 그래도 그녀를 소개해 올리려고 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겸익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행을 방 안으로 불러올렸다.
드디어 ‘아이’의 정체가 밝혀지나 싶어 침을 꿀꺽 삼키는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이는 웬 젊은 여인이었다. 그것도 나와 비슷한 나이의 미녀.
“유양애(柳楊愛)라 합니다. 세간에서는 저를 유여시(柳如是)라고 부르지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관직에서 은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새로이 얻은 부인입니다. 아까 오 도독의 후실과 친분이 있다는 후실이 이 사람을 가리킨 말이기도 하고요. 본래 예기(藝妓, 예능을 익힌 기녀) 출신으로, 그 미색과 학식에 반했지요. 하하.”
부녀 관계라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의 나이 차는 꽤 있어 보였다. 그러나 내 앞에서 전겸익의 글재주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유여시의 모습을 보니, 두 사람의 마음이 맞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전겸익은 늦게 맞아들인 첩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온갖 일을 다 해준 모양이었다. 여론의 비난도 무릅쓰고 본처와 같은 대우로 맞아들였다든지, 학문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집과 서재를 마련해준다든지 하는 일들을 말이다.
“매회세상천금소(買回世上千金笑), 송진평생백세우(送盡平生百歲憂)……. 이 사람과 제가 혼인을 올릴 때 탄 조각배에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읊은 시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천금을 주고 미인의 웃음을 사오니, 평생의 걱정거리를 모두 보내버렸다. 시랑께서 얼마나 흥겨우셨을지 저도 알 것 같습니다.”
“조정에서 권력다툼으로 피를 말리는 것보다는 수백 배는 훨씬 보람차고 즐거운 일이었지요. 하하.”
어제 정성공의 소개로 방문했던 기루, 강운루도 본래는 유여시의 서재 이름이라고 했다. 본래 두 남녀가 시문을 논하던 서재의 이름이 기루의 이름으로 옮겨간 사연이 궁금했지만 천천히 알아보면 될 것이다.
“헌데, 강운루의 주인께서 이리 젊으신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제가 가져온 인삼을 거래하고 싶으시다고요.”
“예, 그 아이가 잘 설명했겠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기루에는 고려인삼이 꼭 필요한 상황이랍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증이 하나 생겨서 실례를 무릅쓰고 자리에 동석했습니다.”
“궁금증이라니요?”
“어젯밤 웬 사내 한 분이 백문이와 제 자존심을 짓밟아 놓으셨거든요. 기녀는 자신의 마음은 팔지 않아도 가치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법인데, 아무 기녀도 아닌 강운루의 구백문을 목석(木石)보듯 대한 사내가 있었다니…….”
유여시는 스스로 남경 최고의, 아니 대륙 최고의 기루를 운영하는데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구백문은 그 기루, 강운루의 제일가는 기녀고. 헌데 강운루가 열린 이래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 남경에서 웬만한 사내는 눈길조차 주기 힘든 아이가 백문이입니다. 그런 아이를 거절하시다니, 저희가 준비한 것에 무언가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혹시 조선에 저희가 모르는 풍습이라도?”
그제서야 나는 유여시가 가리키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나를 함락하지 못한 것이 그리도 자존심이 상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제 벗 중 하나가 한양 제일의 기루를 운영하고 있어 이쪽의 생리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분명 조선에서는 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대접이 소홀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백문이의 성의를 거절하셨습니까? 그 아이에게 전해들은 설명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아 제가 직접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옆에서 자신은 내 글 솜씨가 궁금해 온 것이라며, 전겸익이 변명처럼 해명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는 젊은 첩의 요청에 못 이겨 나를 찾아온 것이라 봐야겠지.
헌데 조금 이상했다. 나 같이 기녀를 거절한 사람이 정말로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을까? 게다가 고작해야 손님이 기녀 하나를 거절한 일로, 남편의 권위까지 동원해가며 손님을 다시 찾을 이유가 있을까?
아마 그녀에게는 무언가 숨기고 있는 꿍꿍이가 더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인삼 값을 흥정하는 것 이상의 꿍꿍이가 말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귀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까? 저는 어젯밤 그 기녀에게 숨기거나 빼놓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녀의 매력이 부족하거나 저를 대접하는데 소홀했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유 태태(太太, 기혼녀를 부르는 존칭)가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것 외에는 지금의 상황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여시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품에 들어갔다 나온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웬 한 장의 서찰이었다.
역시, 목적은 그것이었나.
은밀히 전할 뜻은 저 한 장의 종이에 담겨 있는 듯했다. 아마 이 여자는 내가 구백문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손님께서 그러시다면 저는 마음을 놓고 물러가겠습니다. 다만 다음번에 저희가 저지른 실례를 만회할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전겸익 역시 꼭 자신의 집에 방문해 시문(詩文)을 논하자며, 첩의 말에 한 마디를 더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마치고 두 사람이 물러가는 것을 보며, 나는 유여시가 내 앞에 밀어놓은 서찰을 재빨리 품에 감췄다.
「이곳은 충효백의 눈과 귀가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저는 인삼을 비롯한 조선의 물품을 따로 교역하는데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디 한적한 장소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오길 바랍니다.」
※ 작가의 말
이번 화의 소제목인 십리진회, 진회팔염은 배경과 등장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진회하 양쪽 기슭 십 리에 걸쳐 위치한 유흥가, 십리진회(十里秦淮).
그리고 그 십리진회에서 유명했던 기녀 여덟 명, 진회팔염(秦淮八艶).
진회팔염 여덟 명 중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 명입니다.
첫 번째 진회팔염인 유여시와 전겸익이 만난 이야기는 역사에 전해 내려오는 일화 그대로입니다. 실제로 유여시는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간 사람이기도 했고요. 원 역사에서는 남경이 함락당하고 반청 운동에 나서는 두 사람이지만, 남명이 제대로 버티고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상상력을 더해보았습니다.
두 번째 진회팔염은 구백문입니다. 본래 기녀였으나 명나라 공신의 후손인 주국필에게 첩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러나 시집간 지 3년 만에 남편이 청의 포로가 되어 북경으로 잡혀가고 맙니다. 헌데 남편인 주국필은 포로에서 풀려나기 위해 집안의 모든 여인들을 팔아 몸값을 마련하는 길을 선택하죠.
구백문은 자신을 파는 대신 다시 진회하의 기루로 돌아가기를 청한 후, 기녀가 되어 모은 돈으로 주국필의 몸값을 치러주고 인연을 끊습니다. 고작 그녀가 스물한 살 이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세 번째 진회팔염은 퀴즈로 남겨 놓겠습니다. 야사로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산해관에서 대륙의 운명을 바꿔 놓은 여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