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협박
단 세 줄짜리 서찰이었다.
하지만 유여시가 기녀의 핑계를 대고 전한 그 짧은 서찰은 내게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암시하고 있었다.
‘조선의 물품을 따로 교역하고 싶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머리에 무언가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음날 정성공을 만나는 자리에서 확고하게 굳어졌다. 유여시에게 인삼을 넘겨달란 이야기를 듣고, 마침 가져온 홍삼의 처분에 대해 논하던 자리였다.
“제가 가져온 인삼을 전부 국성야에게 넘기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대명과 조선 사이에 오갈 무역도 이런 식으로 행해질 것이 아닙니까. 누가 뭐래도 폐하의 명을 받든 이 주성공이 남경의 모든 물류를 다스려야 하니까요.”
“허어, 어제 찾아온 손님이 인삼을 조금 팔아달라고 부탁을 남겼는데요. 그것마저 가져가시려는 겝니까?”
“강운루의 사람들 말이군요. 고려인삼 몇 뿌리 정도야 그들 몫으로 빼놓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도승지. 사들이는 가격도 우리 쪽에서 정하게 될 겁니다.”
말투는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은 날카로웠다. 숭정제는 생명의 은인인 내게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려는 마음에 무역 제한을 풀어주었으나, 정성공의 이런 행동을 보니 황제의 충복들은 주인과는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정성공은 조선에서 들어오는 인삼을 누군가에게 양보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아마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지겠지. 당장 그제 강운루에서 열을 올렸던 이유도, 그들이 지정한 가격으로만 상품을 매입하겠다 고집을 부렸던 정성공 때문이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이건 공정한 무역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국성야.”
“공정하지 않다니요. 조선도 어쨌건 바다를 건너는 수고비 정도는 충분히 받아 갈 수 있을 겁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나라의 허락을 받고 시행되는 교역이라고는 하나, 적어도 우리 조선의 입장도 가격에 반영할 수 있어야 공정하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도승지. 도승지께서는 교역에 직접 종사해보시지 않아 모르시는 모양인데, 이 정도면 충분히 조선 측을 배려한 파격적인 대우입니다.”
정성공은 나를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다루듯 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에서 수입한 물건을 남경에서 팔아 얻는 이익은 자신이 전부 차지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문득 한 명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업에 잔뼈가 굵은 충신을 데려왔으면 조금 상황이 나았으려나.
“어차피 남경에서 가져가시는 사치품들을 조선에서 팔아 이문을 남기실 것이 아닙니까. 그것으론 충분하지 않은가요. 조공을 통해 양국의 물품이 오갈 적에도 이러한 형태를 취했을 텐데요.”
“하지만 국성야, 나도 나랏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는…….”
“이문을 더 남기고 싶으시다면 조선에서 더 많이, 더 자주 물건을 싣고 오십시오. 그러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이 문제를 논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어차피 일방적인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은 본인이라 이건가.
글렀다. 이런 상황에서 충신을 데려왔어도 정성공에게 이 이상의 협상이 먹혀들 리가 없었다.
여기 남경은 정성공의 홈 그라운드였고, 무엇보다 바다 위에서 쥐고 있는 힘의 규모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이 조건대로 무역이 계속된다면, 장사를 하는 보람도 없이 일방적으로 명나라에게 이익을 빨아 먹힐 뿐이다. 더는 이 갑질을 참을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였다.
“어디 가실 곳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그대로 앉아 계시는 게 좋을 텐데요?”
“폐하께 고하러 가겠습니다. 이런 불공정한 거래가 이뤄지라고 폐하께서 조선에 무역권을 내려주신 게 아닙니다.”
“저는 분명 앉아 계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 정성공이, 천천히 목을 길게 빼더니 고개를 기울여 내게 괴이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 기에 눌려, 그의 빈 손아귀에 칼자루가 잡혀있는 듯한 환영이 보일 정도였다.
“당신이 제 압박을 못 이겨 황궁을 찾아가리라는 예상을 이 주성공이 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도승지?”
“……이미 황제 폐하께도 손을 다 써 두셨다?”
“일을 저질러도 수습할 자신이 있다는 쪽이 가깝겠지만, 그 결과는 같지 않겠습니까. 결국 폐하께서는 제 고언을 들으실 수밖에 없거든요.”
정씨 가문이 쥐고 있는 경제력이 남명 조정에 끼치는 영향력이 그리도 컸던 건가. 자신만만한 정성공을 보니, 숭정제가 그를 다스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하긴, 북경에서 내게 손찌검을 당하던 황제가 비어가는 국고를 한탄하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 국고를 채워주는 데다, 몰아치는 청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자의 말을 황제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국성야, 그렇게 다 가져가셔야 정녕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나는 조선의 신하입니다. 나라에 이득이 되지 않는 거래를 하고도 가슴을 펴고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까?”
“도승지께서는 진실로 참된 충신이시군요. 조선을 향한 도승지의 충심에 같은 신하로써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도승지께서는 이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라니요?”
“저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명의 충신이라는 사실을요. 회수 너머에서 오랑캐 놈들이 호시탐탐 남경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 저는 조선의 편의를 이 이상 봐줄 생각도, 그럴 여유도 없습니다.”
내가 조선의 충신이듯, 자신도 명의 충신이라는 정성공의 말에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정성공이 방금 언급한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 역사대로라면 이미 남경은 팔기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남명의 황제는 북경에 끌려가 참수당했어야 하는 상황이다. 아무리 숭정제와 오삼계가 산해관 병력을 이끌고 남경으로 무사히 넘어왔다고는 해도 청군을 막아내는 일이 수월했을 리가 없다.
남경의 유흥가가 전쟁도 잊고 평소처럼 영업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아마 내 앞에 앉은 이 사람이 죽을힘을 다해 청에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이익을 뽑아내려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까.
그러나 내게는 최후의 수단이 남아있다. 깔려있는 판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
“그렇습니까? 그렇게 나오신다면 우리 조선 측이 대명과의 교역을 백지로 돌리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이 거래에 잠재되어 있는 이문을 포기하고 폐하의 분노까지 감당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백지로 돌린다…… 역시 조선의 충신다우십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방법까지 택하실 생각이시군요. 거래를 엎어서까지 뜻을 관철하시려는 겁니까?”
“우리 입장에서 공평하지 않은 거래를 이어갈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꽤나 아쉬워하시겠군요.”
“……그런 얕은 수가 제게 통할 거라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도승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정성공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렇게 거리를 좁혀온 그가 내 귀에 속삭이는 말에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쏟아지는 듯했다.
“당신이 그렇게 머리 나쁜 수를 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 주성공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무슨…….”
“처음 본 자리에서부터 알아봤지요. 당신도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도승지께서도 느끼고 계셨을 텐데요?”
“…….”
“도승지께서는 조선을 위해서라면 흙탕물도 거리낌 없이 마실 수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어쨌건 이 거래는 우리 대명에게 유리한 거래이긴 하나, 조선에도 아예 이득이 없는 거래는 아니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냉기가 흐르는 정성공에 말에,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성공은 계속해서 싸늘한 말을 이어갔다.
“나 역시 폐하와 대명을 위해서라면 구정물이라도 마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조선에서 새 국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상업을 육성하려 애를 쓰시는 모양인데, 과연 나와 아버님을 등지고 그것이 가능하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정성공의 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의 말을 듣지 않으려거든 이 구역에서 장사 접을 각오를 하라는 말.
남경에 머물며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
수많은 배들이 계속해서 장강을 따라 남경에 들어와 온갖 나라의 교역품들을 쏟아놓았다. 정씨 일가가 복건 지방에서 쌓아온 상업 네트워크는 강남의 풍부한 물산과 맞물려 명의 경제력을 말 그대로 폭발시키고 있었다.
“도승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시지 않는 것이고요.”
“…….”
“나는 도승지 같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꽤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지요. 그러니 잘 생각하십시오. 지금,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셔야 하는지 말입니다.”
원 역사에서선 청에 항복한 아비까지 가차 없이 쳐낸 자가 정성공이었다. 혈육에게까지 그럴진대, 고작해야 소국의 밀사를 상대로 자비를 베풀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따른다면 조선 입장에서는 무역을 하는 의미가 크게 줄어든다. 사치품을 가져다 조선에 비싸게 팔아봤자 그 이익은 나라 안에서 돌고 돌 뿐이다.
그것들을 처리할 수 있는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아직 활발하지 않을뿐더러, 어쨌건 조선이 얻어가는 이득이 대폭 줄어드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남경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남겨가야 조선의 재화가 늘어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내 국성야의 말을 깊이 고민해 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 아무에게나 방금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닮은 사람끼리 잘 해보십시다, 우리.”
정성공은 내가 뜻을 접고 그에게 항복했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딱딱하던 분위기를 풀어내고 내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니 아마 내 추측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성공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와는 끝까지 같은 배를 타지 못할 운명이겠지, 아마도.
명나라 입장에서는 이 정도면 조선에게 충분히 베풀었다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청과 대치중인 상황이 나아질수록 조선에게 이익을 더 풀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뼛속까지 명을 따르던 유교 탈레반들은 거기에 만족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젊은 나이에 거둔 성공이 그에게 오만을 심었기 때문일까, 정성공은 몇 가지 판단 미스를 저질렀다. 조선을 발전시키려는 내 야심을 읽어내는데는 성공했으나, 그는 내가 거대한 적과 마주했을 때 순응하기는커녕 돌파구를 찾는 사람이라는 것은 읽어내지 못했다.
호랑이, 탐관오리, 성균관의 망나니, 발톱을 숨긴 간신, 북방을 평정한 카간, 의심병에 걸린 암군.
그리고 이번엔 남해의 해상왕인가.
또한, 정성공은 내가 그를 적대하는 세력에 손을 뻗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한양에 정착중인 네덜란드 세력도 그러하고, 마침 남경에서 우연히도 그 해답이 될지도 모르는 세력과 손이 닿았다.
그렇다면 한 번 놀아 볼까. 원 역사에 비해 한층 더 복잡해진 동북아에서 말이지.
***
정성공과의 회담을 마치자마자, 나는 마치 몸이 달아있는 사람처럼 강운루를 향해 달려갔다. 남이 보면 여색에 빠진 자의 행동으로 보일 것이나, 그깟 오명쯤은 얼마든지 뒤집어쓸 수 있었다.
정성공은 아마 내가 자포자기한 나머지 기녀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으러 갔다 생각하겠지. 아마 조선의 도승지는 말과 행동이 다른 자라 비웃으려나.
하지만 그가 나를 깔볼수록 좋았다. 그래야 내 꿍꿍이가 그에게 들키지 않을 테니까.
“낮부터 소녀를 찾으시다니요. 조금 놀랐습니다. 바로 이부자리를 놓을까요.”
“이제 그렇게 기녀의 본분에 충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소저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이(阿姨) 말씀대로군요. 그분께 연락을 넣을까요.”
“가능한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구백문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무적으로 변했다. 아마 유여시처럼 그녀 역시 기녀일 뿐만 아니라 사치품 무역에도 발을 담그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역시 남경제일의 기녀답게 그녀의 일 처리는 빈틈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안내받은 방으로 연락을 받은 유여시가 도착했다.
“오늘도 그 아이를 마다하시다니, 제가 도승지께 거짓을 듣지는 않았나 보군요.”
“제게 여인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조선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뿐입니다. 헌데,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당신을 부른 것이 아니란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럼 도승지께서 제가 드린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다 봐도 되겠지요?”
유여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갈하기 이를 데 없는 유여시의 붉은 입술 한구석이 말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이 사람은 나에게, 그리고 조선에게 과연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가.
눈앞에 떠오르는 정성공의 오만한 표정을 애써 지워내며, 앞에 앉은 여인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