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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62화 (162/298)

162화. 편가르기

아마 유여시도 내가 그녀를 소환한 이유를 조금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운루의 주인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인삼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역시 속마음을 숨기는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인삼을 한 포(包, 10근)라도 손에 넣을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만족스러운 양은 아니지만 당분간 저희 기루에 인삼이 끊어지는 날은 없게 되었습니다.”

“인삼 일부를 다른 곳에 넘기겠다 했을 뿐인데도 국성야의 반대가 극심하더군요. 내 물건을 파는 데도 이렇게 애를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충효백의 영향 밖에서 일어나는 상행은 남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후후.”

유여시는 인삼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나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낸 것은 잠시 후였다.

“하지만 도승지께서 고작 인삼 이야기를 나누자 저를 이리로 불러내신 것은 아니겠지요. 제가 드린 서찰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이야기를 더 나눠본 후에 결정할 이야기입니다. 헌데, 기루 하나에서 그리 많은 인삼을 쓴다라……. 역시, 제 앞에 앉아있는 분은 단순히 기루 하나에만 손을 뻗고 계신 건 아닌 모양이군요.”

“알아채셨습니까? 도승지께서도 예사 인물은 아니시군요.”

입을 가볍게 가리고 웃는 유여시를 보며,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기루 하나에서 쓸 인삼을 구하자고 바다의 지배자인 정성공에게 밉보일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내게 접근한 것은 아닐 테지.

그녀 역시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이 내 궁금증에 입을 열어 답했다.

“태태께서는 거래를 이번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아마 원하시는 물품도 인삼 하나는 아닐 것이고요.”

“정확하십니다. 그날 은밀히 서찰을 드린 보람이 있군요. 원래 기루란 온갖 사치품이 모여드는 장소, 필요한 물건이 한 종류일 리는 없지요. 조선뿐만 아니라 화북의 물건도, 왜국의 물건도 필요하답니다.”

“그걸 지금까지 공급해준 사람이 국성야입니까? 허나 모든 사치품이 그의 손을 거친다면 매입하는 가격이 배로 뛰어 올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군요. 그 비용을 아끼시려는 것입니까.”

“차라리 그의 상단에서 붙이는 이문이 그 수준이었으면 제가 도승지께 접촉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나라를 위한다는 핑계라고는 하나 도를 넘은 착취가 분명하니까요. 게다가…….”

그저 커다란 상단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던 자가 국성과 백작위를 하사받는 일이 쉬웠을 리가 없다. 아마 정성공은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재물을 국고에 채우며 공을 세웠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명 황조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겠지. 그러나 그렇게 거둬들인 돈이 명나라 조정의 숨통을 풀어주는 사이, 삥을 뜯기는 아래에서는 불만이 차곡차곡 쌓였던 모양이다.

이제야 유여시가 내게 접근한 의도가 명확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긴장을 조금 놓은 사이, 강운루의 주인은 내가 생각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말았다.

“이 같은 횡포에 불만을 품은 사람은 남경에 저뿐만이 아니랍니다. 도승지께서 조금만 더 저를 도와주신다면, 조선에게도 꽤나 커다란 이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 조선 측에서 태태께 몰래 교역품을 공급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태태의 뒤에 커다란 세력 하나가 비치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은 아니겠지요?”

유여시의 뒤에 도사린 세력이 생각보다 거대하다면,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을지도. 그 생각을 읽었는지, 유여시는 조용히 아랫입술에 검지손톱을 가져다 대었다.

“쉿, 여인의 비밀은 감출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법이랍니다. 교역품의 가격은 넉넉히 쳐서 매입해드리겠습니다. 그 자라면 도승지께도 매입가를 후려치려 들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태태께서 제가 명 조정과 관계 악화를 감수할 만큼의 가격을 제시하실 수 있겠습니까?”

유여시는 싱긋 웃음 짓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세 배?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 탓인지, 아니면 그녀가 제시한 파격적인 가격 탓인지 혼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정성공이 홍삼의 가격으로 얼마를 책정했는지 답하고 말았다. 그것을 듣자마자 유여시는 손가락 하나를 더 펴들었다.

“정가(家)가 제시한 가격이 그 정도라면 네 곱절은 충분히 맞춰드릴 수 있겠군요. 멀리서 오신 분께도 그런 오만한 태도라니, 참으로 몹쓸 사람이 아닙니까.”

유여시가 보기에도 상도덕을 벗어난 가격이었는지, 대뜸 그녀가 부르는 정성공의 호칭이 ‘정가(家)’로 바뀌었다. 그 호칭에서 풍겨오는 묘한 적대감에, 나는 조금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가격에 매입하셔도 이문을 남기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 측에서 밀무역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격이긴 합니다만…….”

“후후, 도승지께서는 장삿일에 아직 미숙하시군요. 제가 당신께 호감을 품지 않았더라면 더 유리한 조건을 끌어냈겠지만, 이번에는 봐 드리겠습니다.”

내 어떤 점이 그녀에게 호감으로 작용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다음에는 장사에 잔뼈가 굵은 이를 보내라며, 유여시는 내게 가벼운 타박을 더했다. 분명 충신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딱 한 가지가 걸리긴 하지만.

그렇게 협상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유여시는 거래 장소로 장강 하구 앞바다에 떠 있는 어느 섬을 제시했다. 주산 군도에 속한 그 섬은, 아마 그녀의 배후에 있는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섬이지 싶었다.

“……그럼 조선 측에서 다음에 남경을 방문할 때 거래할 물건은 이 정도로 하기로 하고, 도승지께서 조선으로 돌아가시기 전 백문이 편에 장강 하구와 주산 군도 근방의 해도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남경에 도착하기 전 그 섬에 조선에서 가져온 교역품을 내려놓고, 조선으로 출발하면서 그 대가를 싣고 돌아가면 되겠군요. 현장을 급습당하지 않는 이상 들킬 일은 없겠고요.”

인삼처럼 부피가 작은 물건을 주로 거래할 테니 배에 남는 공간이 많다고 의심을 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아마 다음부터 남경으로 보낼 ‘잔뼈가 굵은 사람’이 알아서 더 잘 하겠지만 말이지.

“……결국 역사는 반복되는 모양이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든 재화는 넘치는 곳에서 모자란 곳으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으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도승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상업에 통달하신 분이나 입에 담을 말을 하시다니요.”

허생을 술상으로 후려패기 전, 놈이 내게 준 교훈이 왜 이 자리에서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 내가 기억하는 역사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 역시 함께 떠올랐다.

무로마치 막부 시절, 감합무역이 이루어지던 명과 일본 사이 무역로가 막히자 일본 상인들은 중국 해적들과 밀무역에 나서는 한편, 왜구로 돌변해 명나라 해안가를 약탈했다.

일본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선 역시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순조 치세, 인삼 무역이 조정에 의해 일 년에 이백 근으로 제한되자, 송상은 밀무역을 통해 수천 근의 인삼을 중국에 넘긴다.

무작정 억누르는 방법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정성공의 함대가 동아시아 최강이라지만 모든 섬, 모든 해안을 감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남하하는 청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고.

“감사합니다, 도승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라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양쪽에게 이익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오늘은 제게 정말로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손을 잡게 된 기념으로, 소소한 선물 하나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선물이요?”

선물의 답례품으로 줄 물건이 없어 고개를 저었으나, 유여시는 그런 나를 만류하고는 재빨리 품에 손을 넣었다. 미리 선물을 준비해온 눈치였다.

곧이어 그녀의 품에서 나온 것은 웬 자그마한 상자였다.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이건 뭡니까? 혹시 향낭이라도 들어있습니까?”

“향낭보다 훨씬 귀한 것이 들어있지요. 황궁에서 흘러나온 비전과 남경의 기루에 전해져온 전통이 합쳐진 물건입니다.”

웃으며 상자를 열어보라 권하는 유여시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자를 열고, 그 안에 들어있던 비단주머니를 여는 도중에 정체모를 선물에서 풍기는 향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이거, 환약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도승지께서는 이 약의 정체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글쎄요. 여기까지 오는데 파도에 온통 시달렸으니, 멀미라도 막아주는 약이 아닐지…….”

짚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내 추측을 들은 유여시는 소리 내어 웃을 뿐이었다.

“호호호. 아, 죄송합니다. 그런 흔한 약을 선물이랍시고 드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약입니까? 제 신체는 아직 튼튼한지라 약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도승지께 필요한 약이 아닙니다. 도승지께서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분께 필요한 약이지요.”

“예?”

이게 무슨 소리지?

“그날 퇴짜를 받은 백문이가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도대체 자신을 거절하게 만든 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한 나머지, 도승지를 따라온 아이에게까지 사연을 물었다 하더군요.”

“길산이 말입니까? 하긴 그날 기루에서 산해진미를 대접받긴 했었지요. 헌데 녀석이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쌀쌀맞은 백문이가 그 아이와 어설프게 나눈 필담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떨어뜨리더군요. 너무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라 했습니다.”

사랑 이야기? 혹시 그거…….

“이 약은 황제 폐하의 후궁들이 애용하던 단약입니다. 사랑에 빠진 기녀들도 애용하던 물건이지요.”

“예? 그 말씀은…….”

“기가 허해진 여인의 몸을 보해주는데 특효라고나 할까요. 이쯤 말하면 도승지께서도 알아들으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유여시는 내게 눈을 찡긋거리며 야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여인이 분명 방금까지 나와 밀무역을 논하던 사람과 동일인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

명나라에 오가는 사신인 조천사(朝天使)는 보통 북경에서 사십 일 정도를 머물렀다. 그러나 그것은 정식 사신일 때의 이야기고, 조선을 오래 비울 수 없는 내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속전속결, 눈이 돌아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겉으로는 정성공에게 협상을 빙자한 일방적인 통보를 받으면서, 뒤로는 기루에 푹 빠진 척을 하며 유여시와 밀무역 일을 조율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성공은 선심을 쓰듯 상품의 매입가를 조금 올려주었고, 유여시의 배후에 있는 이들이 남경의 토호 세력이라는 사실도 알아냈으나, 어차피 지금까지 정해진 것들을 바꿔놓을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남경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던 어느 날이었다. 오전에 강운루에서 유여시를 만나 부탁했던 남경의 서적들을 전달받고 숙소로 막 돌아왔더니, 웬 갑작스러운 손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정말 빨리도 흐르는구나. 벌써 네가 조선으로 돌아갈 때가 머지않다니.”

“폐하의 은덕 덕분에 짧은 시간이나마 남경에서 몸 편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숙소에서 나를 기다리던 손님은 웬 환관이었다. 그를 따라 황궁으로 가자 정성공에게 끌려 다니느라 얼굴도 잘 보지 못했던 숭정제가 나를 반겼다.

“더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냐. 아직 네가 세운 공을 제대로 치하하지도 못했다.”

“폐하께서 저를 잊지 않고 남경으로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게다가 커다란 특권까지 선물로 얹어주시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하긴, 이번 방문이 밖으로 새나가는 일은 너도 원하지 않을 터. 남경에서 있었던 일들은 만족스러웠느냐.”

“예, 폐하. 평생 겪어본 적이 없는 일들을 경험한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숭정제는 표정에서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정성공을 조선에까지 보낸 것을 보면 남경에 내려와 드디어 자리를 잡고 생명의 은인인 나를 불러 보답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은데, 정작 남경까지 온 나는 좋은 대접을 받기는커녕 정성공에게 끌려 다니며 외교에 몰두하느라 바빴던 상황이니까.

“정말로 너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구나. 그러니 나를 다시 보는 자리에서도 원하는 상을 말하기는커녕 조선에 이득이 되는 것을 내려주길 요청했겠지.”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폐하.”

“오히려 남경에 와서는 고생만 하고 있지 않느냐. 충효백을 매일같이 상대하는 것도 녹록치 않을 텐데, 시간을 쪼개 따로 남경에서 장인까지 물색하고 있다지?”

“알고 계셨습니까? 아시다시피 조선에는 먼 바다를 건너는 선박이 부족한지라, 이 지역의 발달한 선박 기술을 배워가려고 조선 장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목표했던 대로 확보를 한 상태고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숭정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하던 것을 얻어가서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나를 구한 상을 갈음하기에는 한참 부족할 것이다. 내 듣기로 충효백이 조선과의 교역에 내건 조건이 꽤나 까다로웠다 들었는데.”

“그 말씀이 틀리지는 않으나, 그의 뜻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국성야 스스로도 자신의 뜻이 폐하의 뜻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 내가 재정에 관한 일을 그에게 일임하는 이유가 있다. 그만한 충신은 어디를 가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언젠가 이 나라에 여유가 생기면, 조선에 조금 더 유리하게 조건이 풀릴 수도 있겠지.”

“…….”

“하지만 그렇게 소소한 포상을 지참시켜 너를 조선으로 돌려보내기에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마련한 선물이다. 받아주겠느냐.”

숭정제가 눈짓을 보내자 환관 하나가 상자 하나를 들어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함께 열린 상자 안에서, 나는 웬 도장 하나와 책 여러 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 바다를 항해하는 기술이 쇠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것이 네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대명 최고의 제독(提督)이 남긴 기록이다.”

황제의 허락을 받아 열어본 책장에서, 나는 마삼보(馬三寶)라는 세 글자를 읽어냈다.

이 기록은 아마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귀한 기록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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