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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65화 (165/298)

165화. 대군과 대군

반년 쯤 뒤, 에도(江戸, 지금의 도쿄).

쇼군의 거처인 치요다성(千代田城)은 예고된 귀빈을 맞기 위해 분주했다. 먼 길을 온 손님을 위한 긴 환영행사가 끝나고, 쇼군은 혼마루오오쿠(本丸大奥)에 위치한 방으로 귀빈을 불러들였다.

에도 막부의 세 번째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그렇게 조선통신사의 정사를 독대했다. 분명 조선 측에서 처음으로 흔쾌히 보내준 통신사가 도착했단 사실에 흥이 머리끝까지 올라있던 쇼군이었다.

그동안 줄기차게 통신사를 요구하며 조선에 보냈던 유화적 신호에 대한 답인가? 조선에 새로운 국왕이 즉위했다더니, 이제 일본과의 관계에 신경을 쓰겠다는 신호로 보여 기분이 좋았는데.

“……하여 조선의 국왕 전하께서는 일본국 대군께서 이 국서에 적힌 뜻을 심사숙고하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한 뜻이 왜곡 없이 전달되었길 바랍니다.”

하지만 쇼군이 품었던 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조선의 사신을 보며, 이에미쓰는 등짝에서 땀방울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 사십대가 훌쩍 넘은 나이 탓도, 최근 악화된 건강 탓도 아닐 것이다.

‘조선에서 흔쾌히 통신사를 보내겠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가 쇼군의 자리에 앉은 이래로, 조선에서 온 통신사 여럿이 그의 앞에 앉았지만 이번처럼 규격 외의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쓰시마의 번주로부터 사행단의 명단을 받았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이었다.

이 잘생기고 풍채 좋은 사내는 조선 국왕의 동생이라 했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통신사로 이렇게 귀한 신분을 보냈다는 것 역시 들어본 적 없었다.

허나 조선은 이런 귀한 사신을 단순히 일본과의 관계 개선만을 위해 보낸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어지간한 사신의 손에 보내기에는 지참시킨 물건이 너무나 중대했다.

“단기간에 답할 수 없는 제안이다. 우리 쪽에서도 이 일에 대해 논의할 시간을 주겠나?”

“물론입니다. 저희 전하께서도 대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라 미리 언질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전 국왕의 적자를 사신으로 보낸 이유가 있었다. 이 사신이 말 그대로 폭탄과도 같은 제안이 담긴 국서 두 장을 들고 에도까지 들어온 것이다.

조선 측에서 국서를 위조했을까 의심도 해봤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애초에 조선은 감히 상국의 국서를 위조할 만한 나라가 아니니까.

‘사쓰마 번이 점령중인 류큐를 해방시키라?’

평소 같았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제안이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조선 국왕이 보낸 국서 위에는, 명국의 황제가 보낸 국서가 묵직한 무게를 더하고 있었으니까.

“그…… 조선국 왕제(王弟)라고 부르면 되나?”

“예, 그러시지요. 편하게 부르셔도 좋습니다.”

“그래, 왕제. 혹시 그쪽 국왕께서 은밀하게 전하라 내린 전언이라도 없었나?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조금이라도 정보가 더 있었으면 하는데.”

봉림대군이 소리 없이 웃음을 띠었다. 마치 예상하기라도 한 질문 같았다.

“딱히 제게 추가로 전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내리신 뜻은 국서에도 충분히 적혀있다 사료됩니다만.”

“조금이라도 좋다. 내가 지금까지 왕제에게 내려준 극진한 대접을 잘 생각해보라. 이게 다 일본과 조선의 친선을 위해서가 아니겠나.”

“음…… 틀린 말씀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일본국 대군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도록 돕는 것이 제 임무이기도 할 테니까요.”

“그래, 그래! 우리 입장도 생각을 해 보라. 조선 조정에도 갑자기 명국 황제 폐하의 국서가 날아든다면 그쪽도 혼란스럽지 않겠나?”

그 말을 들은 조선 사신은 조용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에미쓰는 통역의 말을 전해 듣고 나서야, ‘우리 조선에는 그 정도 일은 웃으며 처리할 이가 조정에 들어앉아 있는데…….’라고 봉림대군이 중얼거렸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조선 조정에는 어떤 자가 있기에 이 정도 일을 그렇게 가벼이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밑에도 유능한 부하는 수없이 많았지만, 갑자기 날아온 상국의 국서를 웃으며 처리할 인물은 그중에서 단 한 명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생각 탓인지 방금까지 아무 것도 없던 봉림대군의 등 뒤에 어떤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고민에 잠겨 있던 봉림대군의 입이 열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이에미쓰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억겁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유학을 공부한 몸, 일본국 대군께서 그리 환대를 해주셨는데, 그것을 무시한다면 공맹의 도리를 익혔다고 할 수 없겠지요.”

“고맙다, 왕제! 내 오늘 일은 반드시 잊지 않겠다!”

“그렇다면 일단 조선에서 파악하고 있는 일본의 상황을 일본국 대군께서 확인해주시겠습니까? 우리 조정에서 내린 판단은 모두 그 정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쇼군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봉림대군의 입에서 흘러나온 정보들은 귀를 의심케 할 정도로 정확했으니까.

왜 이런 정보를 알고 있다 드러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측의 정보는 틀린 점이 한 치도 없었다. 그 정보가 너무 정확한 나머지, 이에미쓰가 자신도 모르게 정보의 진위를 일부러 부정할 정도로 말이다.

“……전부 틀렸다. 조선쪽에서 잘못된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군.”

“그렇습니까? 참근교대(參勤交代)가 시행되고 있는 것은 이미 강호로 오는 길에 확인했습니다만.”

“아무튼 그 정보들은 모두 틀렸다. 선선대 쇼군께서 천하를 쥐신 이후로, 우리 일본은 하나가 되어 굳게 단결한 상태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몰라도, 그것은 음해에 불과하다.”

음해가 아니다, 모두 사실이다.

이에미쓰는 황급히 오리발을 내밀면서도 뒷목이 딱딱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선의 사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이 쇼군 자리에 오른 이후로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위해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들을 억누르고 견제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이묘의 처자를 수도로 올려 인질로 삼는 참근교대제를 입에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 뒤에 다이묘 가문끼리 결혼을 금하는 것도 언급했으니, 사실상 막부가 다이묘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조선에서 모두 알고 있다고 봐야 하겠지.

하지만 그 후 봉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럼 앞으로 이루어지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역선을 대마도나 박다(하카타)가 아닌 장기(나가사키)로 보내시겠다는 전하의 복안도 근본부터 흔들리겠군요. 이것 또한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 내린 판단이실 테니까요.”

“나가사키로? 갑자기?”

“그곳을 일본국 대군께서 직접 다스리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 조선은 현재 나라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역을 조정에서 주로 운영하고 있으니 교역선이 들어갈 항구를 바꾸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그럼 혹시 나가사키로 교역선을 보내겠다는 이유가…….”

“예, 일본국 대군께서 번주(다이묘)들을 견제하려는 뜻을 계속 비치고 계시니, 후쿠오카 번의 배를 불려주는 것보다 대군께 직접 이득이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상 전하의 뜻이었습니다만, 아쉽게 되었군요. 게다가…….”

천연덕스럽게 손으로 턱을 쓰다듬는 봉림대군의 표정에서 난감함이 뚝뚝 묻어났다. 청에서 들여온 물건을 나가사키로 바로 보내기 위해, 조선의 왕은 제주 성산포라는 곳에 중간 기항지로 쓸 항구까지 확장하고 있다고 했다.

아차, 어깃장을 괜히 놓았구나!

이에미쓰는 낭패를 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쿠오카 번 다이묘의 몫을 빼앗아 자신의 배에 채울 수 있었던 건을 자신이 망쳐놓은 것이 아닌가.

다이묘란 놈들은 음흉해 스스로 무역에 몰두해 부를 쌓고, 외국의 신무기를 들여오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것을 막기 위해 쇼군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나라의 문을 닫아걸고 외국과의 교역은 가급적 막부가 전담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손도 쓰지 않고 코를 풀 절호의 기회가 날아가려 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오는 교역품을 쇼군이 쉽게 독점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잠깐, 조선의 왕제, 우리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 보지. 그리고 ‘게다가’라니?”

이에미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봉림대군을 향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봉림은 그런 쇼군의 태도를 보고도 한 치 흔들림조차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이 국서를 보십시오. 남경까지 먼 길을 가서 받아온 대명의 국서인데, 그 수고가 모두 허사가 되었다 생각하니 마음이 허해지기도 합니다. 그 후로는 이제 남경에서 여기 강호까지 칙사가 먼 길을 찾아오게 될 텐데, 그 일도 걱정이 되고요.”

“남경의 칙사가 여기로 직접 찾아온다고?”

“원래 황제께서 분노하셔서 유구국 건은 직접 진위를 알아내고 다스리겠다 하신 일입니다. 일본국에서 통신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기억한 우리 사신이 겨우 황제 폐하의 화를 가라앉히고 조선에서 처리하겠노라고 겨우 수습한 결과가 이것일진대.”

“뭐? 그것이 정말이냐?”

“예. 그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명에서 직접 사신을 파견하게 된다면, 일본국 대군께서도 꽤 난감한 상황에 처하시지 않겠습니까?”

당연하다. 안 그래도 언제든지 꼬리를 자를 수 있도록, 막부에서는 류큐를 형식적으로는 외국으로 처리하고 있던 상황이다. 사절이 에도에 올라오면 외국 사절에 준해 대우했고, 외교문서에도 속국이 아닌 조선과 같은 통신국(通信國)으로 규정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명국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나 통할 미봉책이다. 정말로 황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황제의 칙사는 류큐에 들러 모든 것을 조사하고 나서야 에도로 향할 것이다.

“난감한 상황이라…….”

“과거에 대명과 일본 사이에 행해지던 감합 무역이 끊긴 이유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아, 그때 사고를 친 번주도 살마주(사쓰마) 출신이군요.”

그 건에 대해선 이에미쓰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규슈의 다이묘 놈들, 특히 사쓰마와 마쓰우라의 촌놈들은 걸핏하면 해적으로 변해 해안가를 노략질하기 일쑤였다. 놈들이 류큐에서 벌인 일도 그것의 연장선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헌데 그 노략질을 눈감아준 이유는, 어쨌건 사쓰마가 류큐를 점령해 얻은 이득이 막부에게까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막부는 명에 거의 조공을 보낼 수 없었는데, 류큐를 이용해 우회하면 이 년에 한 번 보낼 수 있다. 거기서 나는 이득이 꽤 짭짤했다.

하지만 그 과실을 이제는 거두지 못할 지도 모른다. 감히 황제국의 번국을 무단으로 합병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되면 당장 얼마 후 류큐의 것으로 위장해 출발시킬 조공 역시 명에서 거부당할지도 모른다.

“헌데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공식적으로 행해지는 조공무역 말고도, 황제 폐하의 직속이나 다름없는 상단이 일본과 사적인 무역을 추가로 통하고 있지요? 분노하신 황제께서 그 무역길마저 차단하신다면…….”

쇼군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명국이 강남에 멀쩡히 살아있고, 그들의 경제력 역시 그대로인 상황에 무역이 차단된다? 이제 막 하나로 묶여 발달하기 시작한 일본의 상업 발달에 심대한 타격이 갈 것이 분명했다.

명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청과 전쟁중인 명에 원병을 파병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던 이에미쓰였다. 헌데 그런 일로 무역이 끊긴다면?

“그것만은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안 되겠나? 조선 국왕께서도 나와 협력하고 싶어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조금만 더 상황이 좋아지면, 장기가 아니라 강호(에도)로도 상선을 직접 보내고 싶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그 의도는 일본국 대군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이에미쓰는 류큐 문제로 난감한 와중에도 머리 한 구석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임진년의 전면전 이후로 문을 닫아걸고 있던 조선이 슬슬 문을 열고 있다는 신호였다.

거기에 방금 봉림대군의 제안은, 청국에서 들여온 교역품과 자신들의 교역품을 쇼군인 이에미쓰가 독점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구미가 당길 수밖에.

“사실 우리 조선 입장에서는 대명과 일본 사이의 무역이 끊긴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저희도 남경과 이미 바다를 통해 교역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일본에 팔 수 있는 물건이 늘어나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하긴, 어차피 저희가 얻은 일본국 정보가 모두 틀린 것이라 하셨으니, 이제 이런 말씀을 드려도 의미가 없겠군요. 쓸 데 없는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맛 하나는 끝내줄 것이 분명한 포상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조선에서 이에미쓰의 목구멍으로 넣어주겠다고 한 교역품이 신기루가 되어 사라진다면 며칠은 배가 아파 잠도 이루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고작 대양에 떠 있는 작은 섬 몇 개 때문에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그것도 거기서 들어오는 이득을 사쓰마 번 놈들과 갈라 먹어야 하는 마당에?

쇼군의 눈이 뒤집혔다.

“조선의 왕제! 내가 무엇을 하면 좋겠나! 조선 국왕께서 나와 협력하고 싶으시다던 말에는 거짓이 없겠지?”

“방금 대군께서 일본은 하나로 굳게 단결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씀은 번주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 대군께서 이익을 독점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만.”

“아니! 방금 왕제가 말한 정보는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나도 조선처럼 다이묘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이 막부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고 싶단 말이다!”

“그 말씀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봉림대군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쪽이 조선의 본심이었군.’

안도감에 휩싸이는 와중에도 이에미쓰는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조선이 류큐를 해방시켜주면 명국으로부터 무언가 받기로 약조라도 한 것인가?

하지만 어쨌건, 사쓰마 번의 속령 하나를 해방시킨다고 해서 쇼군인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전혀 없었다. 혹여나 깎일 수도 있는 위신은 명국에서 날아온 국서가 명분이 되어 해결해 줄 것이고.

‘사쓰마 번의 촌놈들은 내 입장에서도 골칫거리였지.’

남만 세력과의 접촉을 엄히 금했음에도 어떻게든 빈틈을 찾으려는 사쓰마 번 놈들이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이 기회에 놈들을 눌러 놓는 것도 손해가 되지는 않을 터.

“……혹시 번주들의 반발이 염려되신다면, 과거에 대마도에서 벌어졌던 일을 상기하라고 하시면 될 것입니다”

“쓰시마의? 아, 한때 조선 국왕의 신하이자 막부의 다이묘였던 소 씨 가문 이야기군.”

“그때도 해적들로 생긴 문제를 군사력을 동원해 해결했으나, 막부 측의 손해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때와는 달리 우리 조선은 살마주를 신하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혹여나 조선 측이 군사를 써서 개입할 수도 있다?”

입가가 굳어진 채, 봉림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이에미쓰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불꽃을 튀겼다.

어차피 류큐를 먼저 침공한 것은 사쓰마 번 쪽이다. 명국 황제의 명을 받들어 그곳을 정벌한다는 조선의 명분은 완벽할뿐더러, 지금 이 사태를 눈감아준다면 사쓰마 번이라는 꼬리를 잘라내고 명국과의 관계를 크게 진전시킬 수도 있다.

거기에 추가되는 조선과의 관계도 큰 이득이다. 아무리 자신의 다이묘를 외국의 세력이 치게 방치해야 하는 상황이라지만, 조선의 사신이 들고 온 선물은 약간의 체면을 다치는 대가 치고는 너무나 컸다.

“좋아. 내게 전할 말은 그것이 전부더냐?”

“예.”

“바로 결정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일이다. 가신들과 의견을 나눈 후 결론을 내릴 테니, 봉림대군은 에도에 머물며 여독을 풀고 있도록.”

“좋은 방향으로 결정이 나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예를 올리고 물러나는 봉림대군을 뒤로 하고, 이에미쓰는 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생각은, 가신 하나가 들어와 무례하게도 쇼군의 집중을 깨고 나서야 멈추었다.

***

그날의 대화 이후로도 조선통신사는 꽤나 오래 에도에 머물러야 했다.

통신사의 접대비용이 막부 재정에 비해 어마어마했음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선통신사의 정사와 쇼군의 회담 역시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때마다 정사의 역관으로 동행한 변 씨 성을 가진 상인과 쇼군의 가신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쇼군의 시녀들이 목격하곤 했다.

처음에는 감히 조닌(町人, 상인) 주제에 부시(武士, 무사) 계급과 말을 섞으려 드냐며 핏대를 올리던 쇼군의 가신들이었지만, 그 역관이 낮지만 벼슬을 받았으며, 조선 조정 실권자의 하수인이자 동래의 대행수라는 이야기를 듣고 화를 거뒀다.

“뭐? 그게 정말이야?”

“미쓰이(三井) 가문과 코노이케(鴻池) 가문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눈이 뒤집어졌다던데?”

“에도에서 다들 한 가락 하는 조닌 가문 아닌가. 광산업을 하는 스미토모(住友) 가문만 쇼군께 불려간 것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

그렇게 조선통신사가 에도에 머무는 동안 에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제한적이지만 교역을 곧 개시하리라는 소문이었다. 수입되는 물품의 목록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된, 꽤나 그럴듯한 소문이었다.

몇 달이 지나 조선통신사는 에도를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조선의 사신이 떠나자마자 쇼군은 에도의 호상(豪商)들을 치요다성으로 전부 불러들였다. 에도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일본은 지금도 지역색이 꽤나 강한 나라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중앙 정권이 지방 영주들에게 큰 힘을 쓰지 못하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고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의 패자가 결정난 시점부터, 조금씩 중앙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현재 작중 시점에서도 에도 막부가 슬슬 지방의 다이묘들을 탄압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려 움직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을 것입니다.

막부 입장에서는 지방의 ‘번’들이 따로 힘을 키우는 것이 좋게 보일 수 없었겠죠. 무역으로 부를 쌓고 신무기를 손에 넣은 각지의 다이묘들이 막부에 대항할 지도 모르니까요.

현재 쇼군은 도쿠가와 막부의 세 번째 쇼군 이에미쓰지만, 위와 같은 움직임들은 그의 아비인 히데타다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작중에 언급한, 다이묘들의 혈육을 인질로 잡는 참근교대제도 다이묘 탄압의 일종입니다. 그렇게 이에미쓰의 치세에 막번제가 정립이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본격적인 쇄국도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에스파냐, 포르투갈, 영국 등 차례차례 관계가 끊어지고 종국에는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와 국교가 끊어지게 됩니다.

쇄국의 예외 케이스는 조선 통신사를 비롯해 중국 상인들과 네덜란드에 열어놓은 나가사키, 속국화한 류큐 왕국과 연결된 사쓰마 번, 아이누용 창구인 홋카이도 남부의 마쓰마에 번, 이렇게 네 곳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모든 해외 교역은 중단했죠.

여담이지만 이러한 막부의 예측은 적중했습니다. 쇼군의 직할령이었던 나가사키를 제외하고 해외에 열어놓았던 번들이 개화기에 막부의 가장 큰 적이 되었거든요.

사쓰마 번은 아예 조슈 번과 동맹을 맺고 막부를 뒤집어엎는 중심이 되었고, 마쓰마에 번 역시 신정부군에 가담해 구막부군과 총칼을 맞대고 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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