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벽란항
봉림대군이 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조선을 떠난 지 일 년 가량이 지난 후였다.
원래 이날은 임금과 함께 도성 밖으로 나가 새로 조직한 수군의 훈련 성과를 확인하기로 예정된 날이었으나, 모든 일정이 연기되고 나는 봉림대군과 함께 편전으로 들어야 했다.
“고생이 많았다. 네가 내 아우라는 것이 자랑스럽구나.”
“형님과 여기 도승지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일러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지침을 따르기만 했을 뿐입니다.”
“말이 쉽지 한 나라의 우두머리를 상대로 협상을 행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느냐. 정말로 잘 해주었다.”
“형님…….”
“마음 같아서는 도승지를 직접 보내고 싶었을 정도로 중대한 일이었다. 네가 그것을 해 주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임금과 대군이 손을 맞잡고 뜨거운 우애를 보이는 현장에 있는 것은 조금 낯간지러운 일이긴 했다. 임금은 대군을 믿고 맡긴 일본 외교가 큰 성과를 얻어온 것에, 대군은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믿어준 임금에게 감동을 느끼고 있을 테지.
그러나 정작 대군이 일본에서 얻어온 성과를 마주하자, 나 역시도 대군의 손을 덥석 잡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첫 외교 임무로 받아놓고는 아주 훌륭하게 일처리를 해 왔으니 임금의 마음이 이해가 될 수밖에.
“……그렇게 되어, 결국 일본국 대군은 우리가 제시한 조건을 모두 수락했습니다. 사실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 가장 주효했다고 생각합니다. 헌데, 그쪽에서는 한 가지 조건의 변경을 요구했습니다.”
“한 가지 조건이라?”
“우리의 상선을 그들의 수도인 강호(에도)로 보내는 일 말입니다. 원래 가까운 장기(나가사키)로 먼저 보내다 뱃길에 익숙해지고 항해 경험이 쌓이면 그리 하겠다 했는데, 일본국 대군이 마음이 조금 급한 모양이더군요.”
“왜, 장기를 건너뛰고 바로 강호로 조선의 상선을 보내달라고 하더냐.”
“예, 형님. 장기를 관리하는 봉행(長崎奉行, 나가사키 부교)이 다른 마음을 품을지 모른다며, 웬만하면 강호로 직접 상선을 받는 것을 선호한다고 했습니다.”
한 척이라도 좋으니 에도에 상선을 빨리 보내 달라 했다며, 대군이 물 건너에서 전해져온 쇼군의 요구를 덧붙였다.
쇼군의 직속 부하인 나가사키 부교가 과연 딴 마음을 먹을까? 아마 쇼군은 조선에서 온 상선이 에도로 들어오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는 목적일 것이다. 사쓰마 번의 처리를 일임하는 건에서 잃을 위신을 복구하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에도에 장삿배가 자주 오갈수록 우리 조선에도 이득일 테고, 무엇보다 그 조건으로 봉림대군이 수입해온 구리는 좌의정 김육이 진행 중이던 사업에 아주 큰 보탬이 된 상황이다.
“……거기에, 나가사키에 머무는 하란타인들과 우리 조선 사람들이 접촉하는 것을 막아 하란타와의 교류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전하.”
“도승지의 말이 맞다. 엘세라크가 꽤나 일을 은밀히 처리한 모양이구나. 하기야 본국에 조선으로 보낼 특사까지 요청한 상황에 일을 허술하게 하지는 않았겠지.”
“특사라……. 그러고 보니 하란타 본국에서 보낸다던 특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님? 분명 상관장의 말에 의하면 얼마 안 있어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맡은 외교관 일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군은 네덜란드와의 외교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본격적으로 봉림대군을 외교관으로 써 봐? 대군에게 나랏일을 맡기는 것을 반대하던 신하들도 아예 나라 밖을 돌게 하면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대군 네가 일본에 다녀오는 사이, 이곳에도 하란타의 특사가 다녀갔다. 전임 하란타 공의 서자라 하더군. 줄리스테인 남작이라 했던가? 여기 도승지보다 젊은이였다. 이름과 성이 꽤 길었는데…….”
“프레데릭 판 나사우─줄리스테인(Frederik van Nassau─Zuylestein)입니다, 전하.”
“하란타인들의 이름은 여전히 길고 낯설군요, 형님.”
“봉림, 앞으로는 그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조선에서 만날 하란타인들은 한두 명이 아닐 테니까. 안 그래도 이번 특사와 함께 온 하란타인 일부가 추가로 조선에 남았다.”
임금이 기억 못 할 정도로 긴 이름을 가진 특사였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아비가 오라녜 공 작위를 가지고 총독의 위치에서 아직 네덜란드를 통치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조금 있었다.
네덜란드 역사를 자세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쯤에 오라녜 가문의 지배가 잠시 멈추고 네덜란드가 일시적으로 공화제로 전환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왜 그것을 알고 있냐면, 네덜란드가 공화제로 바뀌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커다란 전쟁이 발발하기 때문이다.
영란전쟁.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일어날 전쟁은 앞으로 해양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결정될 전쟁이기도 했다. 네덜란드와 손을 잡을 조선에게도 중요한 분기점이 될 사건이다.
“박 종사관의 말로는 우리로 치면 군(君)쯤 되는 사람이고, 서자가 아비의 작위 중 하나를 물려받을 때 아비와 성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더구나. 이국의 신기한 풍습이었다.”
“그렇군요. 저는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하란타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그들과의 통교는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까?”
“아, 물론이다. 엘세라크가 그동안 거짓을 고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많은 진전이 있었지. 일단 양국이 친선 관계를 맺고 협력한다는 입장을 확인한 것이 가장 컸다.”
임금의 얼굴에서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저번 방문에서 네덜란드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냈으니 그럴 만했다. 게다가 조선에 흡수되기 시작한 일부는 이미 성과가 보이는 상태였으니 더욱이.
“어떤 진전이 있었습니까, 형님? 일단 제가 부산포에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탄 배의 모양이 이상하긴 했습니다만 혹시…….”
“그래, 세 나라의 조선공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새로운 배다. 직접 탄 소감이 어떠하더냐?”
“길게 배를 탄 경험은 이번이 처음인 제가 배에 대해서 아는 게 있겠습니까. 다만 그동안 봤던 조운선보다 훨씬 큰 배가, 조운선보다 훨씬 빠르게 달리는 모습이 기이할 정도긴 했습니다.”
“네가 지금 한양에 와 있는 것도 그 배 덕분이다. 육로로 이동했다면 파발마를 갈아타며 올라오지 않는 한 그보다 배는 걸렸겠지.”
“노정이 길어지면 여행길에서 받는 피로는 배 이상이었겠지요. 형님 덕분에 편안하게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따로 보고받은 바로는 봉림대군이 부산에서 배를 갈아타고 벽란도에 새로 정비한 항구까지 일주일이 걸렸다고 했다. 새로운 배의 성능과 네덜란드로부터 전수받은 측량기술이 합쳐진 무시무시한 결과였다.
“사실 원래 오늘은 벽란도로 나가 새 수군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네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정을 잠시 미루었지.”
“새 수군이라 하시면……. 설마 그 배, 수군에서도 쓰이게 된 것입니까?”
“그래, 네가 없는 사이 남경까지도 몇 차례나 다녀온 배다. 이제 우리 조선이 교역하는 범위가 바다 건너까지 넓혀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항로에 해적들도 따라붙게 되겠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헌데, 그것이 이렇게 빨리 가능한 일입니까, 형님? 우리 조선 수군의 장수들은 판옥선같이 그동안 다뤘던 배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을 텐데요.”
봉림대군의 의문은 합리적이었다. 건조해본 경험이 없는 배를 이렇게 단기간에 찍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벌써 그것을 운용할 선원과 병사까지 육성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임금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기왕 의문이 생겼으니, 직접 눈으로 그 의문을 해소해 보겠느냐?”
“예?”
“내가 벽란도로 행차할 때, 너도 동행하도록 해라. 네 눈으로 새로운 상황을 보면 납득이 갈지도 모르지.”
***
며칠 후, 나는 임금과 함께 벽란도로 향했다. 행차의 맨 앞에서 말을 탄 채 벽란도로 향하는 임금의 옆에는 봉림대군이 동행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와보니 이제야 실감이 나는군요, 형님. 배에서 내렸을 때까지만 해도 이곳이 제가 아는 벽란도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한양으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지요.”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벽란도는 경치를 감상하러 가는 조그만 나루에 불과했지. 대군 네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도대체 제가 없던 사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런 모양의 항구는 본 적도 없습니다. 튼튼하고 번듯하기가 기존의 나루와 비길 것이 없지 않습니까.”
말을 탄 임금의 등 너머로 새로 정비된 벽란도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나루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네덜란드의 건축기술로 건설된 부두와 항만이 위치하고 있으니 나루 도(渡)자 보다는 항구 항(港)자를 써서 벽란항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란타 사람들의 솜씨다. 아직 공사하는데 들어간 석회의 품질이 그들 고향의 것에 미치지 못해 보수를 자주 해야 한다는 모양이지만.”
“제 눈에는 천 년이 가도 멀쩡할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의 눈에는 또 아닌 모양이군요.”
“그래, 조선에 질 좋은 석회와 모래는 풍부한데, 비법 재료로 쓰는 화산재가 모자란다고 하더구나. 도승지의 말로는 그들 나름대로 연구를 지속하고 있으니 곧 개선될 것이라 했다.”
“예, 전하. 화산재를 대신할 흙이나 가루를 이것저것 실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새는 기와를 부순 가루를 첨가해 양회(洋灰)를 만들어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가까운 교하에 이미 석회가마가 여럿 들어서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교하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조선이 세워졌을 시절부터 쓰던 시설이라 했다. 그동안 회반죽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건축에, 심지어는 사대부의 묘에도 석회를 사용했으니까.
덕분에 네덜란드인들이 벽란도에 항구를 조성하는 일에는 차질이 없었다. 안 그래도 본국에서 운하, 부두, 수문을 수없이 만들어보고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뭐, 그들 입장에서도 나쁜 거래는 아니었지. 덕분에 하란타 상선이 제물포가 아니라 벽란도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니까. 명국이나 일본의 상선에도 내주기 어려운 파격적인 대우다.”
“제물포가 아니라 강화도를 지나 벽란도까지 그들의 배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당분간은 우리와 접촉한다는 사실 자체를 숨겨야 하는 이들이다. 우리 입장에서도 벽란도로 그들의 배를 들여 외부의 시선에서 숨길 필요는 있는 것이야.”
“아아, 그렇겠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차피 네덜란드가 조선을 적대할 이유도 없고,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한강만 거슬러오지 못하게 한다면 문제가 생길 여지는 없었다. 네덜란드 배에게 벽란도 입항을 허가한 것은 그러한 계산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임금과 대군이 벽란도와 네덜란드 세력에 대해 진지함 반, 호기심 반이 섞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다 보니 어느새 행차는 항구 바로 앞까지 이르러 있었다.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는 인파 앞에 사람 셋이 나와 있는 것이 시선에 잡혔다.
“전하, 먼 길까지 행차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사옵니다. 신 박연, 오랜만에 전하를 뵈옵니다.”
“고생이 많았다, 박 판관(判官). 여기 신임 수사(水使)를 보좌하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니옵니다, 전하. 신이 신의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리 칭찬하실 일이 아니나이다.”
그들 중 먼저 앞으로 나선 금발벽안의 무관이 있었다. 그 사이 종오품 판관으로 진급한 박연이었다.
그는 벽란도를 관할하는 우도수참전운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직에 임명받고, 그동안 새로 신설된 수군을 지휘하는 수군절도사를 보좌했다. 새 선박을 처음 건조할 때 네덜란드 조선공들의 의사소통을 담당한 것도 그였다.
말이 쉽지 맨바닥부터 모든 것을 일궈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박연이 치른 고생을 보여주듯 그의 얼굴은 더 짙게 타 있었다.
“이렇게 단기간 내에 새 선박을 개발한 데에만 그치지 않고 군선을 다섯 척이나 건조해냈으니, 어찌 네 공이 크지 않단 말이냐. 고생 많았다. 박 판관.”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여러 모로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박연만큼 이번 일에 적임자가 없긴 했으나, 시킨 일이 한두 가지였어야지. 나도 겸직을 하며 조정에서 숱하게 갈리고 있었으나 박연이 맡은 일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원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이었던 박연이니, 네덜란드의 선박 기술을 도입하는데 중하게 쓰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배를 만드는 내내 박연은 조선소로 출장 나가 네덜란드 조선공들의 옆에 붙어 통역을 담당해야 했다.
배가 완성되어갈 즈음에는 신임 수군절도사와 동향이고 뱃일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박연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요안이 말로는 그렇게 벽란도에서 병영 생활을 하느라 박연은 근 일 년 동안 한양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고 들었다.
“그 좋은 배보다 더한 것들이 다섯 척씩이나…….”
내 옆에 서 있던 대군이 탄성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네덜란드의 최신 선박 기술과 기존 동아시아의 지혜가 결합된 새 배가 눈앞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배의 틀은 하란타의 대선(大船)에 기초했습니다. 다만 배의 밑창은 강남에서 들여온 복선의 모양을 따라 원양과 근해 모두를 다닐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임금에게 새 선박을 브리핑하는 박연을 따라다니며 귀를 쫑긋 세웠다.
네덜란드가 호총을 받아 가는 대신 넘겨준 최신 선박, 스쿠너(Schooner) 조선술을 기반으로, 선체 하부는 복건성식 정크선을 따라 앞부분은 파도를 가를 수 있게 뾰족한 바닥을, 뒷부분은 배가 좌초되어도 넘어지지 않게 둥근 바닥을 택했다는 설명이었다.
수밀 격벽, 활수창, 어려운 용어가 오고 갔지만 어쨌건 장점만을 따와 만든 배라는 것은 배경지식이 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개발 단계에서 저런 것들을 전부 배에 적용하지는 못한 모양이었지만.
교역선으로 중형선을 건조해 실험해본 결과, 돛은 네덜란드식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났다고 했다. 먼 바다에서 강한 바람이 불 때 강남식 돛은 내구도가 떨어진다는 설명이었다.
배의 본체가 될 나무를 짜 맞추는 방식과 배를 조종하는 법은 판옥선과 같은 한선(韓船)을 기반으로 했다는 설명을 끝으로 박연은 말을 마쳤다. 도르래 같은 기계장치를 도입했으니 운용 인원도 줄어들 것이라는 추신과 함께였다.
“결론은 이 배를 크기만 다르게 건조해 전선(戰船), 상선(商船) 두 목적으로 모두 쓸 수 있다는 말이로구나. 그것이 무엇보다 반갑도다.”
“하란타에는 더 덩치가 크고 화포를 많이 실을 수 있는 배도 존재하나, 이 근방에서는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사옵니다. 때문에 최대한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배를 만들려 노력했나이다.”
“좋다. 네 설명대로라면 근해에서의 전투는 판옥선보다 조금 떨어질 테지만, 나머지 모든 부분은 판옥선보다 나은 배라는 이야기가 아니더냐.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가 분명하다. 앞으로 부족한 부분은 차차 개선하리라 믿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앞으로도 계속해서 힘써주길 바란다, 박 판관. 이번에 배에 실을 홍이포를 제조한 일 역시 고생이 많았도다.”
어느새 박연에게 가까이 다가간 임금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머지 손으로 박연의 손을 덥썩 잡았다. 주위에서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소리가 새어나왔으나 임금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본인을 계속해서 갈아버리겠다며 임금이 선언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박연은 그저 감동에 빠져 연신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하긴, 이방인으로 차별 속에서 살아온 그가 이토록 조선에서 인정받는 상황이다. 훈련도감의 말단으로 처박은 임금이 아닌,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난 것이 박연에게는 무엇보다도 값진 일이리라.
“그리고, 이 대단한 배를 다룰 수 있게 만들어준 우리 신임 수군절도사에도 마땅히 치하를 전해야겠지. 박 판관, 이제 통역에 전념하게.”
“예, 전하.”
그러나 박연이 임금의 말을 네덜란드어로 옮기기도 전에, 박연의 뒤에 한 발 물러서 있던 신임 수사가 임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한 그의 몸에는 수군절도사답게 구군복이 걸쳐져 있었으나, 무언가 어색함이 감춰지지 않았다. 전립 아래 그늘진 그의 외모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조선인들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원양수군절도사 미힐 더 라위터르, 전하를 뵙습니다.”
※ 작가의 말
조선에 온 네덜란드 특사는 당시 네덜란드의 스타트허우더(Stadtholder)인 빌럼 2세의 이복동생입니다. 스타트허우더는 사실상의 국가원수지만 총독이나 통감으로 번역될 수 있는 ‘국왕의 대리인’에서 유래된 단어이기 때문에, 작중에서는 네덜란드 총독으로 번역하기로 했습니다.
작중 언급한 조선시대 석회 관련 서술은 ‘조선시대 석회 공법 연구’라는 논문에 근거해 서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