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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70화 (170/298)

170화. 지름신

몇 개월 후, 파주 행궁에서는 또다시 임금이 주관한 연회가 벌어졌다.

저번 자리처럼 훈련 과정에서 세운 공을 치하하는 자리가 아닌, 먼바다로 출진할 수군을 격려하는 자리였다. 임무를 받고 실전을 처음으로 겪게 될 수군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상감마마께서 명하신 임무, 엄중히 받들겠습니다!”

“받들겠습니다!”

그 사이 조선말 발음이 한결 유려해진 라위터르가 대열의 맨 앞에 서서 우렁차게 외치자, 수백 명의 병사들이 그의 말을 따라 복창했다. 그동안 함상훈련을 받아온 총통위 병사들과 원양수영 수군이 뒤섞여 파주행궁의 앞마당에서 필승을 다짐하는 모습이었다.

제주 성산포에 새로 건설된 항구를 기점으로, 새 원양함대는 제주 근해, 남경과 나가사키로 향하는 항로에서 왜구를 소탕할 것이다. 대만에 주둔 중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함대와의 연계 또한 이뤄질 것이고.

그렇게 격려를 마치고 자리를 뜨는 임금의 입가에는 짙은 웃음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웃음에 담긴 의미가 이 광경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참으로 가슴이 뿌듯해지는 광경이었도다. 참, 도승지. 나와 한 약속은 잊지 않았으렷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하온데 벌써부터 그 약속을 언급하시는 이유가…….”

“당연히 그동안 골몰해온 큰 일 하나가 마무리되었으니 그 결과를 점검하는 일도 필요하지 않겠더냐. 한양으로 돌아가는 즉시 시행할 생각이니 그 일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도록.”

일 년 넘게 나랏일에 골몰해온 임금에게 약속한 포상을 지급해야 할 날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뭐, 결과는 확실히 따라왔으니 상관없나.

이틀 후 비장한 얼굴을 하고 먼 바다로 떠나간 원양수영의 병사들을 뒤로 한 채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 말을 탄 임금의 얼굴에 미소가 더 짙어진 것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 양반이 이토록 기대하는 것을 보니 ‘그 점검’은 상당히 까다로운 임무가 될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하아.

***

갓에 도포차림을 한 임금과 집춘문을 나선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미리 집춘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호포대 출신 금군 열 명은 명을 받자마자 평복을 한 채로 거리로 흩어졌다. 이들은 평복을 입은 채로 임금 주위에서 잠행하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것이다.

“전하, 제게 이런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약속과 다릅니다!”

“어허, 여기는 궁이 아니다, 도승지. 목소리를 낮추지 못할까.”

“전하!”

“목소리를 낮추래도. 이번 잠행을 들키고 싶은 게냐. 그러고 보니 전하와 도승지란 단어도 궁 밖에서는 쓰면 안 되겠구나.”

예상 밖의 암초를 만났다. 혹여나 무슨 문제라도 터질까 심혈을 기울여 이번 임금의 바깥나들이를 준비했는데, 임금은 내 예상을 전부 뛰어넘은 폭탄을 궁에서 들고 나온 것이다.

“오랜만이구만, 도승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는 처음이던가.”

“중전 마마, 어째서…….”

“어째서 전하를 말리지 않았냐는 물음인가? 그야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이후로 나 역시 중궁전에서 수많은 일들을 해왔는데, 어찌 그 결과가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전하께 떼를 조금 써 보았네.”

아니, 경호해야 할 VIP가 임금 한 명인 것도 버거워 죽겠는데, 거기에 왕비까지 궁을 박차고 나와? 아무리 금슬이 좋으시다지만 이건 너무하신 처사 아닙니까?

하지만 강빈, 아니 중전의 말에 반박할 거리는 없었다. 그녀 역시 외명부의 여인들을 움직여 임금의 정책들을 뒤에서 착실히 보조해왔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세운 공 역시 무시할 것이 못 되었고.

게다가 이 쓰개치마를 꼼꼼하게 뒤집어쓰신 여사님은 자신의 나들이에 내가 반기를 드는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인지, 상당한 준비를 해온 모양이었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그대, 어째서…….”

“송구합니다. 지엄하신 국본 두 분께서 명하시는데, 소첩이 어찌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암, 남편의 일을 돕는 것이 또한 아내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나도 전하를 돕고, 우리 숙부인도 도승지를 돕는 것이 정해진 이치지.”

눈앞이 아찔해졌다.

중전이 자신을 보필하라 동행시킨 여인은 다름 아닌 하연이었으니까.

심복이던 요안이 하란타 일로 업무가 늘어나자, 중전이 하연마저 가끔 궁으로 불러올리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좌의정의 딸이자 도승지의 아내니 외명부의 여인들을 통제시킬 심복으로는 하연만한 사람이 없었을 터.

하지만 중전이 자신의 바깥나들이를 위해서 내가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사람을 써먹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 강 여사님, 심양 시절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간악한 술수를 쓰실 줄이야.

“도승지는 어디 여인이 바깥나들이를 함부로 하냐며 눈을 흘기는 부류는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나나 숙부인이나 낭군이 옆에 있으니 문제될 것도 없고 말일세.”

“…….”

“그리고 그동안 나랏일로 나나 전하나 바쁘기 이를 데 없었으니,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자네도 숙부인과 제대로 시간을 보냈던 것이 꽤 오래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크흠……. 중전 마마, 그래도 이번 잠행은 그리 가벼이 볼 일이 아닙니다. 혹여나 두 분의 옥체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제가 어찌 낯을 들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하면서도 씨도 안 먹힐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심양 시절부터 가마대신 말을 타길 주저하지 않고, 심양관의 바깥살림까지 맡아 하시던 분이다.

“딱히 걱정은 되지 않네. 호포대 출신 금군들의 무용은 나 역시 심양시절부터 역력히 아는 바고, 무엇보다 전하의 치세 이후로 태평성대가 지속되고 있는데 한양 한가운데서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물론 요즘 들어 포도청의 업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를 받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마마…….”

“그래, 자네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보지. 김 별장, 자네 의견은 어떤가?”

이 자리에서 평복이 제일 익숙한 덩치가 중전의 질문을 받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는 금군 자리가 꽤나 잘 어울리게 된 김 갑사였다.

“한양의 치안이 안정된 지는 꽤 된 지라 별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요. 더구나 오늘 전하의 잠행을 위해 선발한 금군은 최정예에, 여기 도승지도 무예라면 뒤지지 않는 사람이니 만약의 사태에도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요.”

“전하를 늘 모시는 사람의 말이 이럴진대, 더는 할 말이 있는가, 도승지?”

“…….”

내가 쓸 데 없이 겁을 먹은 건가. 이 자리에서 긴장한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이미 데이트 분위기를 내고 있는 임금과 중전은 그렇다 치고, 김 갑사는 뭐 저리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하연 또한 미안해하는 표정 사이로 기대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도승지 자리에 오른 이후로 바쁘단 핑계로 동반외출도 자주 하지 못했던 터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도승지, 이번 잠행에 더는 문제가 없으렷다.”

“……중전 마마의 의향이 저리 확고하신데, 제가 드릴 말씀이 더 있겠습니까, 전하.”

“좋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한 나절의 나들이다. 어서 발걸음을 재촉하자꾸나.”

나를 지나쳐 앞서 나가는 임금의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다.

그 옆을 따르는 중전을 보면서,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사실 소첩도 꽤나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그런 불길함은 살며시 내 소매를 잡은 하연이 속삭이는 소리에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하긴, 열 명이나 호위하고 있는데 백주대낮에 한양 한가운데서 무슨 문제가 있겠어.

허리춤에 숨긴 권총에 괜히 손을 대 보며, 나는 괜한 긴장을 풀어내려 애를 썼다.

***

염려와 반대로 무기를 쓸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임금의 잠행을 반기듯 따사로운 날씨 덕분에 오히려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내 옆을 걷고 있는 아내 덕분이었지만.

“저번 벽란항에 행차할 때도 느낀 것이었지만, 도성 안의 길이 꽤나 잘 다져져 있구나. 얼마 전에 비가 내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도 걷기에 나쁘지 않을 정도니.”

“예, 전하. 전번에 내탕금으로 실시한 한양의 대로 정비가 즉효했습니다. 길을 흙을 쌓아 높이고 표면에 쇄석(碎石)을 깔아 포장한 결과입니다.”

“내탕금이라……. 그러고 보니 네가 만든 배들이 엄청난 물량을 싣고 남경을 빠르게 오가게 된 덕분에, 내탕금의 규모가 호조의 재정쯤은 우스운 지경이 되었구나.”

“전하께서 내탕금도 나라를 위해 쓰시고 계시니 호조의 재정이 내탕금보다 적어졌다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물론 조정의 논의 없이 쓸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긴 합니다만.”

걸음을 옮기는 임금 역시 꽤나 기분이 상쾌해 보였다. 그 옆을 걷는 중전은 시전으로 향하는 가지각색의 짐수레들을 보면서, 수레의 규격을 통일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것 보거라. 사람들과 수레가 밟고 지나가면서 작은 자갈들이 다져져 노면이 더 단단해진 것 같구나. 비가 적게 내린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아무래도 장마가 오기 전에는 보수가 필요 없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화물이 오갈 일이 많아진 덕에 상인들이 스스로 길을 관리하기 시작한 덕도 보는 중입니다.”

창경궁 담장을 끼고 종묘까지 내려오는 길은 궁궐에 속한 길이니 정비가 잘 되어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지금 임금이 걷고 있는 곳은 그곳에서 벗어난 운종가(雲從街)의 입구다.

지금으로 치면 동대문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뻗쳐 있는 도로, 도성에서 몇 안 되는 대로였음에도 노면에 움푹 파인 곳 하나가 없었고, 길 양측에 있는 도랑 역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 말은 보통 화물을 하역하는 삼개나루에서 여기까지 뻗은 길들은 이만큼은 관리가 된단 말이렷다. 은을 그만큼이나 쓴 보람이 있구나.”

“앞으로 물길이 닿지 않는 곳은 대신 이 도로를 깔아 나라 구석구석까지 물류가 흐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전하. 그러기 위해서는 한 시도 낭비할 시간이 없겠지요”

“허어, 말에 묘하게 가시가 돋쳐 있구나. 그리고 한수야, 그 전하라는 말을 계속 사용할 셈이냐? 지나가는 사람의 귀에라도 들리면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슬슬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하자 임금은 걸음을 잠시 멈췄다.

사실 누군가 알아보고 이 양반을 궁으로 돌려보내게 된다면 참 좋을 것 같아 임금의 명을 못 들은 체 하고 있었다. 하지만 버티는 것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내 분명 오늘 잠행 도중에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나를 형님이라 불러야 한다 일렀거늘, 벌써 잊어버린 게냐?”

“전하, 하오나…….”

“게다가 지금이 아니고서야 언제 너와 군신의 관계를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잠시의 유희라 생각하고 명에 따르도록 해라.”

방금까지 뿔이 나있던 내가 졸렬해 보일 정도로 임금이 내게 보내는 미소는 상쾌했다. 이렇게 되기를 꽤 오랫동안 벼르고 있었다며 말을 잇는 임금을 보니 더는 반항심을 품을 수 없었다.

하, 오늘만입니다, 전하.

하연도 자신을 장난스레 동서라 부르는 중전을 보고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가 그런 눈망울로 나를 바라봐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섣불리 끼어들어 봐야 강 여사님의 놀림만 더 심해질 뿐.

그렇게 임금의 농담 아닌 농담을 받으며 일행들의 발걸음은 운종가의 한 점포로 향하고 있었다. 보통 백성들은 점심을 먹지 않으니 사람이 제일 적을 만한 시간을 골라 방문한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붐비는 가게였다.

“어이! 주인장! 여기 신보 한 부 주시오!”

“나는 여기 재생지로 한 장 주시오!”

나도 몇 번 와본 기억이 있었다.

이곳은 장사가 너무 잘 된 탓에 옆 점포까지 자리를 확장한 청풍 김씨 가문의 세책점이었다.

허나 이제는 책 대여 장사가 주수입이 아닌 듯했다. 세책점에 들어왔다 나가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손에 종이 한 장씩을 쥐고 있었다.

“아이고, 작은 아씨! 이게 얼마 만입니까요! 요사이 궁에 드나드신다더니 발걸음이 뚝 끊어지셔서 섭섭했습니다요! 오늘도 신간을 찾으시러 오신 겁니까요? 아니, 도승지 영감께서도 같이?”

“오랜만일세, 윤 서방. 아니, 오늘은 귀한 손님께서 우리 세책점을 둘러보고 싶으시다 하셔서 동행한 길일세. 안내해줄 수 있겠는가?”

‘아무렴요’를 연발하며 윤 서방이라고 불린 점원이 나와 임금에게 따라붙었다. 자연스럽게 하연이 중전을 이끌고 책이 잔뜩 꽂힌 서가로 향하는 것을 보니, 아내의 속셈이 짐작이 갔다.

솔직히 나는 중전을 대하기가 조금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아내가 그런 내 마음을 말도 없이 헤아려준 것이 고마웠다.

“여기, 이것이 오늘자 신보입니다요, 귀빈 나리.”

“흐음, 언문으로만 적힌 글은 오랜만에 읽는구나. 내수사전에서 백성들 상대로 판매하는 물품 목록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아이고, 손님. 귀하게 생기신 분이 한양은 처음이신가봅니다요? 나라님 직속 내수사에서 물 건너 가져온 물건만큼 잘 팔리고 또 품질이 보증되는 물건은 없지 말입죠.”

호들갑을 떨며 접대하는 윤 서방을 보며 임금이 웃음 지었다. 과연 자신이 접대하는 손님의 정체를 알면 윤 서방은 무슨 표정을 지으려나.

“한양이 처음이라…… 핫핫, 처음이긴 하지. 어쨌건 여기에 내수사의 공고가 올라오면 다들 교역품을 사러 내수사에서 낸 상점으로 가는 모양이구나. 이번엔 사탕(砂糖, 설탕)이 들어온 모양이고.”

“예, 그렇습니다요. 손님께서도 단 음식을 좋아하십니까요?”

“나보다는 저기 책을 고르는 안사람이 즐기는 편이다. 호조에서 낸 동전 유통 공고도 있고…… 아차, 신보 가격을 지불해야지, 여기서도 동전을 받느냐?”

“물론입죠. 이쪽은 한 부에 한 푼, 여기 두 놈은 두 부에 한 푼입니다요. 이쪽 비싼 신보는 다 읽고 가져오시면 재활용한 한지에 찍은 신보로 교환해드리고요.”

재빨리 윤 서방이 임금의 앞에 세 종류의 신문을 들이밀었다. 얼핏 보니 인쇄된 종이의 종류가 다른 듯했다.

“이쪽은 새 한지에 찍은 것이고, 이쪽은 세척해 재활용한 종이에 찍은 것이더냐? 그럼 이것은?”

“이건 하란타에서 들여온 삼, 내수사에서는 아마(亞麻)라고 하던데, 아무튼 그 줄기에서 뽑아낸 섬유로 뜬 종이에 찍은 것입니다요. 닥나무를 쓴 녀석보다 싸게 만들 수 있다 들었습죠.”

“예전에 비해 값이 헐해졌다고는 하나, 싼 것도 한 장에 한 끼 분량의 쌀 가격과 같으니 아직 갈 길이 멀었구나. 그래, 일단 여기 새 한지에 인쇄한 것으로 두 부를 사겠다.”

“감사합니다요! 나리!”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임금과 윤 서방 사이에 끼어들어 작은 동전 두 푼을 지불했다. 우리 전하께서 무언가를 내고 물건을 사 본 경험이 있으셨어야지.

“일 순(열흘)에 한 번 발행이라……. 마음 같아서는 간격을 더 줄이고 싶다만, 열흘마다 목판을 새로 새겨 찍어내는 일도 꽤나 고역이겠구나. 값이 비싼 이유가 이것 때문이더냐?”

“아닙니다. 신보 가격의 대부분은 종이 값입니다. 식량 수급이 나아져 아마를 경작하는 밭이 늘어나면 값을 낮출 수 있을 겁니다, 형님.”

“뭣이? 목판 없이 어찌 인쇄를 할 수 있단 말이냐. 언문 활자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언문이라 한문보다 활자를 제작하기 수월했습니다. ‘직결식’이라는 방법으로 언문의 자음과 모음 스물여덟 자만 활자로 여러 벌 만들어놓으면 무한한 조합이 가능합니다.”

신보를 뒤집어 요안의 신간 소설을 읽던 임금의 눈동자가 정지했다. 임금은 잠시 말을 잊은 채 인쇄된 글자들을 분석하며 내가 한 말을 검증했다.

“호오, 그래서 초성과 종성에 오는 자음의 모양이 같고, 받침이 없는 글자는 그 자리가 비어있었던 모양이로구나. 이것 또한 네 발상이냐.”

“예, 형님. 지금은 수요가 적어 활자판을 짠 그대로 인쇄하고 있지만, 수요가 늘어나면 또 달라질 것입니다.”

“앞으로 신보 외 다른 인쇄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겠구나. 좋다. 내 그날을 기대하고 있겠노라.”

이미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서양식 인쇄기 설계도를 입수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두꺼운 종이에 활자를 찍어 틀을 만들고 그곳에 녹인 납을 부어 자판을 제작하는 방법도 내 머릿속에 있다.

이렇게 찍어낸 인쇄물들은 최신 정보를 조선 곳곳으로 나를 것이다. 그리고 책의 가격이 낮아지면 예전의 요운처럼 배울 기회를 잡지 못했던 인재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인쇄술에 투자할 가치는 충분했다.

이미 좌명이 고안한 신보가 내수사 상점의 매출도 올려줌과 동시에 그 자체로도 수익을 내고 있었으니, 임금이 내 말에 넘어오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으로 조선은 책과 정보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렇게 임금과 내가 미래를 향한 기대감에 부풀어 오를 때였다.

“윤 서방……. 이것 좀!”

“아이고, 작은 아씨! 이게 다 무엇입니까요?”

윤 서방이 냉큼 달려가 두 여인의 손에서 책들을 받아들었다. 얼핏 보아도 수십 권은 넘어 보였다. 임금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그…… 마님? 이걸 다 빌리시려는 것입니까요?”

“빌리다니? 이걸 기한 안에 어떻게 다 읽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많이 가져오신 이유가…….”

“전부 사겠네. 일시불로.”

당당하게 쿨매를 선언한 중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예전에 비해 종이값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싸졌다지만, 내가 가지고 나온 은자로 다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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